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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고종대왕 일대기-350화 (350/530)

< 재회 >

태자 이원철과 해군부 장관 이규석이 지구 반대편에서 온 손님을 마중하고 있을 무렵.

"휴우···."

이강은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기어이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그리도 바라지 않던 날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분명 혼례는 인생에 한 번뿐이라는 경사일 터인데, 도통 기쁘지를 않았다. 막상 누구보다 영국과의 국혼을 꺼리던 도성의 백성이나 오래간만에 찾아온 축제 분위기를 즐기고 있을 따름이다.

자글자글하게 진 제 손금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이강은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생명선은 어지럽지만, 결혼선은 곧고 잘 생겼다.'

대한의 황자답지 않게, 누구보다 괴력난신에 관심과 조예가 깊던 이강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몸이 약했던지라, 그만큼 종교와 같은 괴력난신에 의지해 왔는지도 몰랐다. 누가 따로 가르친 것도 아님에도, 이강은 책을 찾아서라도 그러한 지식을 모으는 걸 즐겼다.

그렇게 제 손금을 보고 난 다음에야, 이강은 마음이 다잡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즐거운 기분은 조금도 들지 않았으나, 적어도 각오는 굳어졌다. 조금은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난생처음으로 자신이 무언가 이 나라를 위하여 크게 이바지한다는 실감이 일었다.

"이 어미는 쳐다도 보지 않고서 또 묘한 일에 빠져있구나."

그런 이강을 상념에서 깨운 건 그의 모후였다. 모후는 측은한 시선으로 이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번에 만났을 적에 폭언을 퍼부어 앓아눕게 하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그녀는 이강을 가엾게 여기고 있던 것이다.

"···조금 마음이 어지러워서 그러했나이다."

이강은 애써 시선을 피하면서 변명을 늘어놓았다. 괜히 껄끄러웠다. 아무리 망나니에, 하지 말라는 일만 골라서 하는 그였지만 역시 맨정신으로 그를 걱정하는 어미를 막대할 수는 없었다. 일전에 폭언을 퍼부었던 것도, 전날 채찍으로 몸을 두들기는 바람에 머리에 열이 올라 어지러워서 그러했던 것에 가까웠다.

모후는 부드러우나, 날카롭게 말하였다.

"그렇다면 더욱 내게 의지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이리 오너라. 오늘은 네 생에 한 번뿐일 날이 아니더냐. 내 귓등은 잘 닦았나, 눈곱이 남지는 않았는가 살펴주마."

"말씀을 드리기 대단히 송구하오나. 어마마마께서 수고를 드리시지 않아도 궁인들이-."

"그만하면 되었다. 내 듣지 않겠노라. 탓하거든, 이 내게 신용을 주지 못하였던 네 어리석었던 나날을 탓하거라."

퉁명스러운 대답이었다. 모후는 손을 까딱였고,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이강은 차마 뭐라 더 저항할 생각은 못 하고서 방석을 끌어 그녀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녀는 그제야 미소 지었다. 연륜이 느껴지는 인자한 미소였다.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이강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네 귀 모양이 꼭 네 외조부를 닮았구나."

"외조부, 라 하시면···."

이강은 말끝을 흐렸다. 머릿속에 있는 인물이었다. 청의 섭정왕, 혁흔. 이제는 노쇠하여 실권에서 물러났다고 하지만, 여전히 청의 번왕으로서 남아있는 충실한 대한의 신하다. 그리고 이강에게 있어서는 딱 그 정도의 인상밖에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어느 정도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는 초나 대한의 위세를 빌려 중원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제, 아예 한족이라는 민족분류에서 반쯤 떨어져 나가 독자적인 국민국가를 수립한 진과는 달리 청은 여전히 그 한족과 만주족 간의 민족갈등 탓에 대한의 꼭두각시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범아주 조약기구를 통하여 각국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오늘날에 와서도 청은 독자적인 독립국이라기보다는 한국의 자치령 내지는 괴뢰국, 조금 더 악질적으로 말한다면 유사국가였다. 그 수장인 혁흔이 인상에 남을 수가 없던 것이다. 그저 부르면 오고, 하라면 하는 꼭두각시 즈음이었으니까.

"기억이 나지를 않는 것이로구나."

"···송구하옵니다."

"아니, 되었다. 그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너는 어렸을 적부터 병약하여 그 존안을 뵈기는커녕 목소리 한 번 듣지 못하였는데, 어찌 네 외조부를 기억하겠느냐?"

모후는 빙긋이 웃었다. 그건 이강에게는 형인 이원철이라면 기억하고 있으리라는 뜻으로 들렸다. 요즈음 내정으로 바빴던 아비를 대신하여 회맹에서 자주 얼굴을 비추었으니, 그야 아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 탓에 이강은 심기가 조금 뒤틀렸다. 그는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어마마마께서는 형님만 아끼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모두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다. 물어서 아프지 않을 손가락이 어디 있겠느냐? 그리고 오늘 나는 네게 고맙다며 절이라도 하고 싶은 참이었다."

"오늘 이때까지 무사히 자라나서 말입니까?"

"그토록 잔병치레가 많던 네가 무사히 혼사를 치를 날을 맞이하였으니, 참으로 대자대비한 석가여래께서 보우하셨음이 아니겠느냐? 하지만 오늘은 네 덕분에 비로소 내 족속이 하나가 될 테니 그렇다."

이강은 그 즉시 모후가 말한 족속이라는 게 만주족을 뜻한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게 이번에 서태후를 돌려받게 된 것을 뜻한다는 것도 말이다.

하여, 이강은 입을 다물었다. 애신각라의 공주를 처로 맞이하고, 이따금 만주를 방문하던 그의 형이라면 몰라도 매일 같이 궁에만 있던 이강에게 제게 만주족의 피가 섞였다는 자각은 없었다. 그는 한성에서 나고 자랐고, 당연히 살면서 만주어를 써볼 일도 극히 드물었다. 만주족이 하나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기쁠 리가 없었다.

황후는 웃으며 덧붙였다.

"비로소 둘이던 태양이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 비록 쓸모를 잃은 지 오래이며 늙고 병든 태양이라고 하나- 그 또한 찬란히 빛을 내는 태양이 아니겠느냐?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던 낡고 병든 태양이 지게 될 테니, 이제 황상께서 마침내 유일무이한 태양이 되어 만천하를 비추리라."

"그게 제 덕분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참으로 장하다. 비록 네가 원하여 이룩한 일은 아니었으나, 어디 대사라는 게 모두 원해서만 이루어지더냐? 네 형 또한, 비록 원하여 비와 혼례를 치른 것은 아니었으되 그 덕에 나의 족속이 비로소 어디를 가도 당당히 나는 대한 사람이오-하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네 형의 공적이듯이, 이 일은 온전히 네 공적이니라."

그리 말하며 모후는 이강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관을 쓰고 있었으면 거치적거렸겠으나, 혼례를 치를 이강이 천주교도에 상대는 영국의 공주였던 만큼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던지라 방해가 될 일도 없었다. 그 낯익으면서도 낯부끄러운 감촉에, 이강은 고뇌했다. 저항해야 할지, 아니면 잠자코 있어야 할지 말이다.

모후는 손짓을 멈추지 않고서 덧붙였다.

"미안하구나. 내 조금만 더 일직 네가 마음 졸이고 있었음을 알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을."

"···아닙니다. 어찌 그것이 어마마마의 탓이겠습니까. 모두 저의 그릇이 비좁았던 탓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여주니 참으로 마음이 놓이는구나. 그러나 나의 탓이다. 자식의 그릇이 비좁다면 그것이 곧 부모의 죄인 까닭이다. 아직 어린 네가 무슨 죄가 있겠더냐. 다, 내가 여래께 매달리느라 너를 돌아보지 못하였던 탓이다."

"하오나···."

거기까지 말하고서야 모후는 비로소 손을 멈추었다. 더는 말하지 말라는 듯이 말이다. 이강은 아쉬움과 안도가 뒤섞인 오묘한 감정을 체험했다. 모후는 그의 오른손을 그녀의 양손을 포개어 꼭 잡아주며, 작게 속삭였다.

"천주께 기도는 드렸더냐."

"···예."

"그렇구나. 내 이제 와 네게 천주당을 다니지 말라 하지는 않겠다. 하나, 천주께 기도하느라 네 부인될 아이를 소홀히 하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라."

담담한 조언이었다. 그러나 이강에게는 그보다 강렬한 꾸짖음이 없었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새삼스럽게도, 그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몸이 좋지 않다고, 오래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괴력난신과 질투에만 정신이 팔려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도리를 외면하고 있던 것이다.

이강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가능한 한 강한 어조로 있는 힘껏 목에 힘을 주어 답하였다.

"소자, 결코 오늘 어마마마께서 하신 말씀을 잊지 않겠나이다."

모후는 얼굴을 활짝 피며 잔잔하게 웃어 보였다.

이제는 옅은 화장으로는 주름을 숨길 수 없었으나, 이강은 그가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이보다 아름다운 꽃을 차마 보지 못하였노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 * *

그런가 하면, 이 무렵 철도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온 이형은 세계 각지에서 그를 찾아온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한창 정신이 없던 차였다.

"루이! 이렇게 그대를 다시 만나게 되다니! 그래, 어디 프랑스에서는 잘 지냈소?"

"물론입니다, 폐하. 모두 폐하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입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각별하면서도 가장 빛나던 인물을 꼽으라 한다면, 단연 루이와의 재회였다. 애송이 소년왕은 이제 아주의 황제가 되었고, 출세를 꿈꾸던 젊은 영관은 어느새 원수를 넘어 알제의 총독이 되었다.

그만한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루이가 처음 그를 싣고 온 여객선에서 내리던 순간부터 평생의 지우를 맞이하듯이 서로를 마주 안았다. 루이는 오랜 세월 쓰지 않아 더욱 어눌해지기는 했으나, 그가 과거 익혔던 한국말로 이형에게 겸손을 떨었다.

비록 이미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아직 모든 것이 미흡하던 시절 함께 보내었던 나날의 기억은 그만큼 강렬했던 것이다.

"그런데, 제가 있는 이 땅이 정말로 조선이 맞습니까? 혹시, 폐하께서 제게 무언가 속임수를 쓰고 계시는 건 아닙니까?"

"하하하! 예끼 이 사람아. 나도 이제 불혹이 다되어가고 있는 와중에 그런 같잖은 장난 따위를 치게 생겼나!"

장난스레 받아친 이형이었으나, 루이의 의문은 사실 반쯤은 농담이었지만 또 반쯤은 진심이기도 했다. 그가 조선을 떠나던 무렵 마지막으로 기억한 인천항과 지금 그가 배에서 내려 마주한 인천항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가 조선을 떠나던 무렵, 인천항은 고작 해봐야 조선의 목재 세운선들이 드나들 뿐인 자그마한 항구였다. 그나마 영국에서 여차하면 그들이 쓸 작정으로 한 번 개수해두었다고 하나 임시방편이었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온통 자그마한 목재 세운선들 투성이였지 기선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작금의 인천은 달랐다. 인구만 10만에 달했고, 인천항은 한 번에 12만 톤 상당의 화물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100만 톤 상당의 물동량을 자랑했다. 루이는 배에서 내리기 전 인천항에 입항하고자 대기하고 있는 상선들이 못해도 3, 40척 이상이 존재함을 두 눈으로 톡톡히 보았고, 그들 모두가 기선이라는 사실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참으로 폐하께서는 매번 만날 때마다 저를 놀라게 하십니다."

루이로서는 그 말 외에는 달리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눈이 부셨다. 과연 아시아의 런던을 자처할만한 자격이 있었다. 비록 그 물류의 상당수는 쌀과 같은 식량이나 면직물 같은 1차 가공품이라고 하나, 그 유통 규모만은 유럽의 여느 항과 비교하여도 뒤처지지 않았다. 아니, 되려 인천과 맞먹거나 능가할 유럽의 항구가 더 드물었다.

지금만 해도 아시아 제일의 자리는 떼놓은 당상이었고, 머지않아 태평양 제일을 넘어 세계 제일의 거항으로 자라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형은 히죽 웃으며 답했다.

"벌써 놀라면 곤란하오. 남포 또한 이 인천만큼이나 거대한 거항이고, 부산으로 넘어가거든 이 인천보다도 거대하니까. 루이, 그대는 아직 이 나라 대한의 해운을 3할도 경험하지 못하였소."

"···조금 전 놀라우신 분이라고 하기 전에 말씀해주셨으면 했습니다. 아니 이보다 놀랄 일이 더 있다고 하시면 전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수식어를 더 붙여야 합니까?"

"하하하! 괜찮으니까 넣어두시오. 뭐, 놀랍다. 그거 한 번에 밀려둔 수식어 전부 해결한 셈 칩시다!"

이형은 팡팡하고 루이의 등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휘청할 만도 했지만, 루이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원수로서 항시 단련해왔던 덕분이었다.

이형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루이, 그대도 나만큼이나 열심히 살아온 모양이구려."

"하하,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맹인이라도 된 것처럼 충실히 따라왔을 뿐이지요."

"···으음?"

묘한 대답이었다. 그에 이형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턱대고 추궁하기에는 루이의 안색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는 어딘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여, 추궁을 포기한 대신 이형은 농담을 건넸다.

"하하하! 뭘 그리 죽상을 하는 거요? 꼭 혼자서 세상에 힘든 일은 다 짊어진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파리의 방어자답지 않구려!"

"그저 폐하께 배운 그대로 실현하였을 뿐입니다. 만일 폐하께서 그곳에 계셨다면 저보다는···."

"에헤이, 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너무 그러지 마시오. 이 나랏일이라는 게 항상 깨끗한 일만 할 수도 없는 거고, 또 그리 즐겁게 웃을 수만도 없는 일들투성이잖소. 오늘은 그런 어두운 이야기들은 하지 않기로 합시다."

이형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친우를 위한 그 나름대로 위로였다. 어차피 그리 오래 머물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 길어야 반년 후에는 프랑스로 돌아가야 하는데 한국에서까지 프랑스에서의 일로 골머리를 썩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랬지요. 심려를 끼쳐 송구합니다."

그런 이형의 마음을 읽었기에, 루이는 애써 웃었다. 마냥 억지웃음은 아니었다. 점차 권력에 중독되어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며 측근인 루이마저 은근히 멀리하던 나폴레옹 4세와 그를 진심으로 환영해주며 웃어주는 이형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실로 오랜만에 루이는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형은 그에 더욱 세차게 루이의 등을 두드렸다. 껄껄거리고 웃으면서 말이다.

"자, 기분 풀었으면 슬슬 다음 귀빈들을 만나러 가봅시다. 곧 영국에서 온 손님들이 입항할 거라는 모양이오. 곧 이번 혼례의 마지막 주인공을 볼 수 있겠구려."

"여부가 있겠습니까."

루이는 성큼성큼 앞서가는 이형의 뒤를 쫓았다. 그건 곧 루이와 함께 따라온 프랑스 환영인파도 그 뒤를 쫓았다는 뜻이었다. 마음 편히 미소 짓고 있는 이형과는 달리, 그들은 우방인 한국이 잠재적 적국인 영국과 협력한다는 사실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하나같이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천항에 내리면서 한국이 열강의 말석 그 이상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고민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흠. 늦어지는구려."

이형은 눈을 찌푸렸다. 그를 뒤따르던 수행 인원들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이미 공주를 실었다는 여객선은 정박했는데, 막상 영국에서 온 손님들이 내리지를 않았다. 아니, 그뿐일까. 그들을 마중하러 간 이원철과 이규석 등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배는 인천항에 들어와 예포도 쏘았고, 환영 나팔도 목이 터지라 불고 있는데 막상 그 주인공들이 나타나지를 않던 것이다. 처음에는 다소 준비가 늦어지는가보다-하고 가볍게 생각하고 있던 이들도, 이쯤 돼서는 무언가 일이 터졌다는 걸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모두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던 순간,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태자 이원철이었다. 그는 달려왔던 듯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더냐?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기별도 없이 이리도 길어지고 있는 것이야?"

"그, 그것이···!"

단숨에 이형이 있는 곳까지 달려온 이원철을 추궁한 이형이었으나, 태자는 즉각 답하지 않고서 망설일 뿐이었다. 뒤늦게 그것이 듣는 귀가 너무 많음을 우려한 까닭이라는 걸 눈치챈 이형은, 잠시 손을 들어 수행 인원들을 뒤로 물렸다. 루이마저 포함해서 말이다.

그 뒤에야 이원철은 이형에게 다가와, 그 귓가에 속삭였다.

"큰 변고가 생겼나이다."

"공주가 뭐 죽거나 바꿔치기라도 당했더냐?"

"아닙니다. 그것이··· 피골이 상접하여, 차마 거동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나이다."

"뭐라?"

이형은 어처구니가 없어 되물었다.

당연히, 그런 상태의 공주를 국혼과 같은 공개석상에 세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재회 > 끝

ⓒ 리첼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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