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내 >
"아니 그게 도대체 무슨···."
이형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그야 뭐, 국혼이 순조로울 거라는 기대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영국도, 한국도. 모두 지도층 선에서는 화합할 필요를 인정하였다고 하지만 시민, 하다못해 일선 관료들 선으로만 내려가도 이해할 수 없다며 반대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당사자인 공주는 어떨까. 그야말로 내다 팔리는 기분일 터였다. 그것도 제 가족들이 억지로 떠밀어서 내다 팔리는 꼴이다. 당연히 무언가 크고 작은 소동이 있을 거라 예상했고, 그중에는 공주가 도중에 도망을 친다든가 비슷하게 생긴 다른 누군가로 뒤바뀌는 사태도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 도대체 저 작자들은 무엇을 한 건가?"
그러나 피골이 맞닿았다는 소리는 거식증에 걸려서 왔거나 아니면 오는 도중에 병에 걸려서 왔다는 소리가 아닌가. 선원들이 포섭되었을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 공주의 도주나 바꿔치기와는 달리, 이건 그냥 관리 소홀이었다.
물론 공주가 투정을 부릴 수야 있지만, 그 정도는 알아서 처리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억지로 밥을 먹이건, 아니면 무언가 기분을 풀어주건 간에 말이다.
"거 참."
이형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투덜거렸다. 불쾌하기보다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쩔 줄 모르던 태자 이원철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아바마마. 소자가 모자라서, 미처-."
"왜 네가 고개를 숙이고 있더냐. 일을 저지른 건 저 영길리 놈들이다. 뭐 공주를 바꿔치기한다든가 하는 건 생각해 봤어도 아흐레 뒤면 백성 앞에 세워야 할 신부 하나 똑바로 관리하지 못하다니, 쯧."
배에 온통 사내들뿐이다 보니 객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던 걸까. 쓸데없이 건전한 놈들이라고 이형은 혀를 찼다. 차라리 온통 공주의 일거수일투족에만 매달리며 귀찮게 만들었다면 도중에 눈치챘을 일을, 괜히 배에 기강을 세우겠다고 설치는 바람에 객실 안과 밖이 괴리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이원철은 이형의 눈치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그렇다. 이미 엎어진 물이다. 이제 와서 병에 담을 수도 없다. 이제 문제는 이후의 대처다. 이형은 신음을 흘렸다.
어찌 되었건 현 상황은 저들의 관리 미흡이다. 딱히 화가 난 건 아니더라도, 일부러 화가 난체하면서 불쾌함을 보여줄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형이 역정을 낸다고 해도 충분히 용납될 수 있다. 기껏 날짜까지 서로 맞춰둔 중요한 행사를 관리 미흡으로 미루거나 취소할 판국이니까.
그러나 이 경우 영국은 망신을 당하게 된다. 그것도 그들의 잠재적 적국 프랑스가 보는 앞에서 말이다. 안 그래도 엉망이었던 양국의 국민감정이 완전히 파탄 날게 눈에 훤하다. 다시 말해, 영국과 손을 잡는다는 선택지 자체가 사라지는 격이다.
"끄으응···."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거나 일부러 감싸줄 의리도 이형은 느끼지 못했다. 아무튼, 저쪽에서 의도한 건 아닐지 몰라도 이번 일은 한국을 우습게 보았다고도 생각될 여지가 있다. 식까지 아흐레 밖에는 남지 않았는데 신부가 저 모양이라면, 무언가 사전에 알리던가 애초에 이런 일이 없도록 잘 관리했어야 한 거 아닌가.
그래서 이형은 신음을 흘렸다. 난감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뭐 도망쳤거나 하다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우릴 뭐로 봤길래 그걸 그냥 놔준 거냐고 야단법석을 피웠을 테지만, 이원철의 설명만 듣자면 공주는 도망친 게 아니라 마음의 병에 걸린 것이었다.
제가 원해서 한국으로 온 것도 아닐 텐데, 마음의 병을 얻은 걸 두고서 욕지거리를 내뱉는 건 그리 내키지 않았다.
"···우선 너는 다시 배로 돌아가서 정확히 병세가 어떠한지 확인하거라. 마음의 병이라면 안타까운 일이나, 일부러 제 몸을 망친 것이라면 더는 볼 것도 없다."
"하명하신 대로 따르겠나이다. 하오나, 이미 불란서의 사절들이―."
"그거야 내 일이지, 네 소관이 아니다. 일단은 돌아가거라. 날이 저물거든 궁에서 정확한 용태를 듣겠다."
이형의 선택은 유보적이었다. 우선 정확히 이게 어떤 일인지 파악하기 전까지는 대응을 미뤄두겠다는 것이었다. 태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형의 시선 너머에서는 허겁지겁 공주를 제외한 사절단이 내리고 있는 것이 눈에 잡혔다.
하나같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들이었다. 나름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애쓴 것 같기는 했으나, 이미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것부터가 마음속 동요를 똑똑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형은 조용히 이를 갈았다.
'하여간 우라질 녀석들···.'
아직 스물도 안 된 공주야 한창 여릴 때니 마음의 병을 얻을 수도 있다고 쳐도, 저들은 아니지 않은가. 한국까지 호위하라 했더니, 글자 그대로 어디 해적들이 달려들지는 않는가만 신경 쓴 꼴이었다.
그들은 곧장 이형에게로 달리듯 걸어와 고개를 숙인 후 손을 내밀었다.
"만나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폐하. 저는-."
"공주가 보이지 않는구려."
도중에 말을 끊고서, 이형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말끔한 정장 차림에 외눈 안경을 한 전형적인 영국 신사의 차림을 한 특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서 얼굴을 붉혔다. 구태여 통역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태자가 서둘러 배에서 내리는 걸 보았으니, 이미 배 안에서의 소란이 바깥까지 퍼져 나갔을 거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특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의 곁에 선 역관을 눈짓으로 재촉했다.
역관은 이형의 말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대단히 곤혹스러워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는 망설이면서도 성실히 그의 의무를 다하였고, 그 탓에 특사의 얼굴은 더욱 푸르죽죽하게 죽어갔다. 최후의 희망마저 부정당하고 만 것이다.
"···말씀드리기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폐하. 공주 전하께서는 오랜 항해로 지치시어 미처 이 자리에 나오실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원양항해는 가녀린 여성의 몸으로 견디기 어렵지 않습니까? 부디 청컨대, 너무 괘념치 마시옵소서."
그런데도 말문이 막히지 않고서 어떻게든 변명을 이어나간 건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기지였을 것이다. 일이 터졌고, 그 내막을 가장 알아서는 안 될 인물이 누구보다 빨리 그 사실을 접하게 되었음을 알게 된 와중에도 어떻게든 좋게 포장을 하고자 애쓰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형은 호오, 하고 나지막이 웃었다. 이형은 눈은 그대로 둔 채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로구려. 내 공주가 쾌차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약이라도 지어 대접해주어야겠소. 그래야 아흐레 뒤에는 망나니 놈과 함께 저 명동 대성당에서 부케라도 던지지 않겠소? 하하하!"
"하, 하하···."
이형의 웃음소리에, 특사는 어색하게 웃었다. 시도 때도 없이 손수건으로 쓱쓱 이마를 닦고 있는 게, 그의 심경을 무엇보다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특사는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살이라는 게 그리 금방금방 찌는 것도 아니고, 지금부터 보약을 지어 먹인다고 한들 백성 앞에서 용모를 뽐내기에 아흐레는 너무나 짧았으니 말이다.
이형은 웃음소리를 어느새 뚝 그치고서, 역관의 귀에 대고서 작게 속삭였다.
"내 오늘 너희가 나의 둘째 아들에게 어떤 수모를 주었는지 절대 잊지 않겠노라고 전하거라."
"흡···!"
역관은 숨을 삼켰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 산사람 같지가 않았다. 특사는 어리둥절해 하며, 어서 역관에게 그 내용을 마저 전달하라고 눈짓을 주었다. 역관은 한참을 이형과 특사를 번갈아 보며 눈치를 보다가, 이내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눈을 질끈 감고서 특사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그 직후, 특사 또한 덩달아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건 덤이었다.
"뭘 그리 놀라고 있는 거요? 자, 어서 갑시다. 오늘 잔치는 우리 대한의 것이기도 하지만, 신부를 데려온 그대들 영길리의 것이기도 하잖소? 그렇게 얼어 있지 말고, 어서들 같이 웃어나 봅시다! 하하하!"
"마, 만세! 만세! 만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형은 껄껄 웃으며 뒤돌아섰다. 그러나 호응은 두 박자는 늦었다. 그가 마주하고 있던 영국 사절단은 물론이고, 그 뒤에서 가만히 대화를 엿듣고 있던 프랑스나 한국의 사절단도 이형의 웃음에 곧장 대응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박수 소리는 그들이 어색하게 웃고 또 반 박자가 지난 다음에야 터져 나왔다.
누가 봐도 무언가 일이 벌어졌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정확히는 몰라도, 그것이 대단히 곤란한 일이라는 것도 말이다. 한국 사절단은 불안한 기색이 격렬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고, 프랑스 사절단은 기대로 가득 찬 얼굴로 애써 터져 나오려는 경박한 웃음을 감추고서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 루이는 저벅저벅 돌아오고 있는 이형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에게만큼은 무슨 일인지 실마리 정도는 주리라 여긴 것이다.
이형은 특사와 몇 마디를 주고받고서는 다시 배 안으로 돌아가는 이원철을 흘끗 돌아보고서, 답했다.
"아무래도 오래 머물게 될 것 같은데, 시간 나거든 내 처소에 와서 술이나 몇 잔 주고받읍시다."
루이는 다만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그날의 일정은 대부분 취소되었다. 다만 백성을 즐겁게 할 연회나 잔치, 공연들 따위나 그대로 유지되었을 따름이다. 이형은 곧장 궁으로 돌아갔고, 내각이 소집되었다. 그들을 배제하고서 논하기에는, 앞으로 국정에 끼칠 영향이 너무나 거대했다.
"이건 우리 대한을 우습게 본 처사입니다!"
가장 분개한 것은 교육부 장관 김홍집이었다. 반은 본의였으되, 반은 타의였다. 젊은 시절 영국에서 유학을 다녀온 친영파의 거두 김홍집으로서는 괜한 공격을 피하려면 우선 강한 감정표현으로 자신이 이번 사태에 분노하고 있음을 보여야 했다.
"결코, 가벼이 넘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또다시 반복된다면 천하의 열국이 우리 대한을 우습게 보고 말 것입니다!"
"폐하, 어찌 우리 대한을 우습게 보는 오랑캐 따위와 상종할 수 있겠나이까. 이는 작게는 의친왕 전하를 모독함이요, 크게는 대한을 능멸함이 아니겠습니까. 이제라도 늦지 않았나이다. 청컨대, 혼사를 물려야 하옵니다!"
그러자 이어서 치고 들어온 것은 내무부 장관 김가진이었다. 그는 영국을 규탄한 김홍집을 넘어 아예 이번 국혼을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김홍집이 바란 결과가 아니었다. 김홍집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고, 반대로 김가진의 얼굴은 새빨갰다.
이 무렵 스스로 국수주의자라고 자랑스럽게 자칭할 만큼 다소 과격할 정도로 민족주의에 흠뻑 젖어있던 그에게 이번 사태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던 것이다.
"마, 말씀이 지나치시오! 아직 황상께서는 아무런 교지도-."
"제아무리 영길리가 세계 제일의 강국이라고 한들 이 땅은 아주이고 태평양입니다. 어찌 아주에서 우리 대한을 능멸하고서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마치 제가 모욕되기라도 한 양 얼굴을 붉히고서 목에 핏발을 세웠다. 그건 조국에 대한 그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언사이기도 했다. 아주 바깥이라면 몰라도, 아주에서라면 그 어떤 나라라도 감히 한국에 비길 수가 없다는 자부심 말이다.
그리고 그 자부심은 단지 공상이 아니라 그가 젊은 날 그의 시력을 불태워가며 완성한 경제개발계획 위에 이룩한 한국의 산업경제가 지탱해주고 있었다. 아시아 1위, 세계 5위. 질적 수준에서라면 몰라도, 규모에서는 이미 한국은 열강 말석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도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한편 재무부 장관 어윤중은 비교적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친불파로서 누구보다 이번 일에 기뻐해야 할 사람이 그였음에도 말이다. 어윤중은 잘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차라리 공주를 바꿔치기했다면 그 또한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길길이 날뛰었겠으나, 이번 일은 대관절 아무리 생각해도 의도를 알기가 어려웠다.
그에 해군부 장관 이규석이 답했다.
"아무래도 공주를 모셔야 할 몸종들이 나날이 공주의 건강이 악화하는 와중에도 그 책임을 추궁당할까 두려워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는 듯합니다. 저들 또한 연안에 접어들어 어쩔 수 없이 공주의 용태를 확인해야 할 순간이 닥쳐온 다음에야 사정을 알게 된 모양인지라···."
"허, 참."
그 내막이 어처구니가 없어 어윤중은 혀를 찼다. 요컨대 공주가 마음의 병에 걸려 방에 틀어박히자, 공주를 위로할 궁리를 한 게 아니라 마음의 병에 걸린 걸 두고서 관리 소홀이라 책임을 추궁당할까 두려워 어련히 떨쳐내기만 기다리다가 이 꼴이 났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누구 하나 공주를 위하여 진정으로 충정을 바치지는 않고서 제 한 몸만 생각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말이었다. 이쯤 되면 몸이 쇠약해졌기는 했어도 어떻게든 한국에 무사히 도착한 것부터가 다행이었다.
"혹, 고견을 여쭐 수 있겠나이까."
각각이 의견을 내건 정보를 주고받건 무언가 하나씩은 반응을 보여주었다면, 총리대신인 김윤식은 다른 무엇보다 이형의 심사를 먼저 물었다. 사실, 애초에 이런 역할을 맡기고자 총리에 임명하였던 것이니 이런 반응이야말로 이형에게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반응이기도 했다.
이형은 답하지 않고서 잠시 턱을 쓰다듬다가, 또 다른 당사자를 향해 흘끗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래, 너는 어찌하고 싶더냐?"
"그건···."
당사자, 이강은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얼떨떨하기만 했다. 애당초, 단지 의식을 치르는 거라면 몰라도 이렇게 본격적으로 국사를 논하는 자리에 부름을 받은 것은 이강에게는 처음이었다. 그는 내각의 고관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도 부담스러웠지만, 무엇보다 이런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부터가 곤혹스러웠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께서 정하시는 대로-."
"따르겠다고는 하지 마라. 네 배필이 아니더냐. 이 정도는 너 스스로 정할 줄도 알아야지."
이형의 대답은 싸늘했다. 사실, 그로서는 이대로 영국과 관계를 끊고서 다시 프랑스에 돌아서건 아니면 영국에 무언가 받아내는 대신 계속 국혼을 진행하건 어느 쪽도 나쁘지 않았다. 프랑스와 계속 관계를 이어간다면 한국의 동남아시아 진출은 그만큼 늦어지겠으나, 한국이 티베트를 거쳐 인도 총독부를 살살 간지럽히기만 해도 쉽사리 프랑스는 영국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을 테니 악수만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형은 이강에게 의사를 물었다. 비록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으나, 또 한 번 그의 망나니 아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결정할 기회를 준 것이다.
"···소자는."
다만 이것이 이강에게는 낯설기만 했다. 선뜻 결정하기에는, 어깨의 짐이 너무나 무거웠다. 그의 결정이 앞으로의 행방을 결정지을 거라 생각하니,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차하면 왜와 혼사를 맺는 길도 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이형은 그런 이강에게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짐을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강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이미 골똘히 생각하며 그만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었다.
'영길리의 공주라고만 생각하면, 그리 달갑지 않다. 그러나···.'
그가 오랜 지병으로 고생하고 있듯이, 공주는 이번에 얻은 마음의 병으로 평생을 괴로워하게 될 터였다. 그 사실에 동정을 느낄 만큼 이강은 선한 자는 아니었으나, 제 처지와 비슷한 자를 비웃을 만큼 못난 자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모후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의 처가 될 여인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한참을 고민하던 이강은 답했다.
"···혼사를 마저 이어갔으면 합니다."
"그러더냐."
이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럼 이제 이번 인내를 빌미로 무엇을 받아낼지만 논하면 되겠구나."
맨입으로 넘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던 이형이었다.
< 인내 > 끝
ⓒ 리첼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