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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고종대왕 일대기-354화 (354/530)

< 기사(棋師) >

"이, 이이···!"

프레더릭은 이번만큼은 동요를 감출 수가 없었다.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손은 덜덜 떨렸으며, 절로 턱에 힘이 들어가 이에서는 부득부득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떻게 봐도 외교 석상에서 보여줄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하물며 일국의 황제가 보는 앞에서 보여줄 모습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 또한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끓어오르는 분기를 잠재울 도리가 없었다.

언젠가 떠나? 유럽의 열강들이 말인가? 그건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한국이 더 이상 유럽에서 주도하는 식민질서를 존중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폭언을 입에 담고서도 황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보였다.

"기왕이면 피를 보기 전에 평화로이 떠날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쁜 일이 또 어디 있겠소. 짐은 귀국의 의회민주주의를 참으로 흠모하고 있소. 그야 당연히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보다야 여럿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낫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이제 와 제국에 금칠이라도 해보실 생각이십니까?"

"설마. 그렇다면 마땅히 그대들이 신봉하는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아주의 열국에게도 독립을 원하는지 계속하여 구주의 수렴청정을 받을지를 정할 기회를 주어야 옳다고 생각하여서 하는 말이오."

이형은 이죽거리며 웃었다. 프레더릭은 시야가 조금 붉게 물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기어이 안구의 실핏줄들이 하나둘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만큼 그의 분노와 동요는 대단한 것이었다. 당장에 이 자리에서 뒷목을 잡고서 쓰러져 화병으로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다수결의 원칙. 의회민주주의. 말이야 좋다. 실제로 대영제국은 그와 같은 가치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영제국의 신민들을 위한 것이었지, 식민지인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했다. 저들이 계속하여 제국의 시장이자 자원창고로 남게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폐하, 폐하께서는 남방의 미개한 원주민들을 과대평가하고 계십니다. 저들은 게으르고, 멍청하며, 겁쟁이에, 그들의 미풍양속은 혐오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아직도 저들의 문화는 암흑기와도 같은 중세 봉건사회는커녕 원시적인 형태의 씨족국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어리석고 유약한 노예 족속들을 이 잔혹하고 위험한 세상에 풀어놓는 것이 어찌 신실 깊은 기독교인의 자세라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프레더릭은 폭발해서 고함을 질렀다. 씩씩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삿대질을 하는 그의 모습에서 특사로서의 예의범절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도 없었다. 이미 그의 인내는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그는 마음 같아서는 이 건방지고 오만하며 무모하기 그지없는 노랑이 원숭이 두목에게 결투라도 신청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에게 남은 마지막 이성의 끈과 책임감만이 그것을 막아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도 이미 한계인 듯 보였다. 프레더릭은 열변을 토해냈다.

"폐하께서 이리도 후안무치하신 분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폐하께서는 그간 우리 유럽인들이 귀국에 얼마나 많은 특혜를 베풀었는지, 가르침을 베풀었는지를 잊으셨습니까? 오늘날 귀국의 지위가 본국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가능하리라 생각하십니까!"

"그야 물론 그대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

이형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건 싫건,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아시아가 정체해 있는 동안 유럽은 지난 수백 년간 월등한 진보를 이룩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결국 세계의 패권을 손에 넣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오늘날 이형이 이룩한 치세는 적지않게 유럽인들이 이룩한 무수한 발명과 진보에 근거하고 있는 부분이 많았다.

프랑스가 없었다면 우선 만주 진출도 쉽지 않았을 테고, 영국이 없었다면 강군을 일으킬 수 없었을 것이며, 미국이 없었다면 부국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러시아가 없었다면 범아주 조약기구를 만들어도 아주의 열국이 그 필요성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고, 프로이센이 없었다면 인구 대국은 몰라도 공업 대국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형은 순순히 수긍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나, 하고 이형은 덧붙였다.

그는 서슬 퍼런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본국은 구주의 지원을 받았을지언정 구주의 식민지가 된 바가 없소. 그러나 오늘날 본국은 이렇게 그대들을 겁박하고 있지. 내 한 가지만 묻겠소. 사회진화론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이는 구주의 사회적 진화가 정체되어 쇠락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오? 아니면 우리 대한이 그러한 '간단한 촉매'만으로 이와 같은 진화를 이룩할 만큼 우수한 소체였음을 뜻하는 것이오?"

"···그건!"

프레더릭은 즉각 답하지 못하고서 말문이 막혔다. 어느 쪽이고 답하기 어려웠다. 유럽의 진화가 정체되었다는 이야기는 사회진화론에 근거하여 이제 유럽 또한 멸망하거나 스스로 진화할 수 없을 만큼 내재적 에너지가 고갈돼 타국에 지배를 당해야 할 처지가 되었음을 의미했으며, 한국이 처음부터 우수한 소체였음을 인정하면 백인의 의무란 결국 한국의 세계통치를 돕기 위함임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더욱 진화된, 더욱 우수한 이들이 보다 진화가 덜 되고 열등한 이들을 지배한다. 그것이 사회진화론의 근간이 아니던가. 유럽이 진화가 덜 되고 열등하게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한국이 유럽보다 진화되고 우수한 이들이라는 것도 쉬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결국, 프레더릭은 제3의 선택지를 골라 내빼는 수밖에 없었다.

"이는 궤변입니다! 어찌 대등한 열강과 열강 간의 외교정책에 사회진화론을 대입시킬 수 있겠습니까! 열강과 열강 간의 외교란 어디까지나 대등한 양국 간의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그럼 더더욱 신의를 논할 이유도 없겠구려. 만인에 의한 만인에 통치에서 은혜니 후안무치니 따위를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귀국에서 언제건 목숨을 노려질 각오조차 없이 이 무대 위에 섰다는 이야기잖소?"

이형은 시큰둥하게 답했고, 그제야 프레더릭은 입을 다물었다. 머리가 어질거렸다. 뭐라 답할 논리가 많지 않았다. 지난 19세기 내내 세계를 지배해왔던 외교 논리는 힘의 논리였다. 강한 자는 선하며, 약한 자는 악하다.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세계의 석학들은 지혜를 모아왔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물론,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아직 한국은 영국이나 유럽의 열강들을 압도하는 강자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아시아 대륙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한국은 감히 도전할 세력이 없는 유일무이의 강자였다. 그리고 그유일무이의 강자는 지금 자신들의 몫을 주장하고 있다.

유럽의 열국들이 식민지를 늘려나가면서 펼쳤던 논리를 그대로 되돌려 주면서 말이다.

약자는, 주제를 알고서 꼬리를 말고 강자의 발밑을 기며 개새끼 흉내라도 내라는 것이었다.

"그건-."

"우리 구태의연하게 기독교 도덕까지는 끌고 오지는 맙시다. 솔직히 추하잖소? 귀국이 애이란인들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는 그대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테고. 아니면 천축국의 동방교회 신자들도 좋은 반례가 되겠구려. 그대들이 신교도고 그들은 구교도라서 그랬다고 변명하지는 마시오. 내 둘째 놈이 어느 종파인지도 모르고서 이 나라에 공주를 데려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형은 뚜둑하고 손가락 관절 마디마디를 펴면서 속삭였다. 프레더릭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마지막 도주로마저 차마 입에서 꺼내기도 전에 가로막히고 만 것이다.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은 프레더릭은 목덜미를 타고서 식은땀이 줄줄흐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위험했다. 도저히 뭐라 받아쳐야 할지 길이 보이지를 않았다. 차라리 힘으로 짓뭉갤 수 있다면 제아무리 바른말을 해봐야 힘없는 정의는 공허할 뿐이라 비웃어줄 수라도 있었겠지만, 눈앞의 황제에게는 그의 논리를 실현할 힘이 있었다.

이 세상에 그보다 끔찍한 일은 또 없을 것만 같았다.

"짐은 과연 진정으로 그대들이 한때의 조선과 같은 비문명국에 문명을 전하기 위하여 주권을 박탈할 이유까지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구려."

싸늘한 속삭임이었다. 이형은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프레더릭이 기어이 겁에 질렸음을 눈치챈 것이다. 이형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그대들이 추악한 악인이라서 그렇다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소.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있었지 않소? 사실, 짐이라고 한들 갑작스럽게 그만한 힘이 쥐어졌다면 세상을 정복하고자 하는 야망이 들었을 것이외다."

"···."

"짐은 인간의 선함을 믿소. 그리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믿소. 죄는 뉘우치면 되는 것이고, 잘못은 참회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소. 하여, 짐은 구주의 열국에 의무를 다 마치었거든 이만 아주에서 떠나라 요구하리다. 그리한다면, 비로소 아주와 구주는 진정한 상생의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오."

허언이었다. 인간의 선함 따위를 믿을 턱이 없었고, 죄도 미워하고 사람도 미워하는 게 이형이었다. 그냥 좋게 말할 때 알아들으라는 의미에서 에둘러 말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프레더릭은 침묵했다. 마지막 저항이었다. 차마 대영제국의 특사로서 대영제국의 국익에 반하는 이와 같은 늑약에 따를 수는 없다는 애국심의 발로였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이형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물론, 힘으로 억지로 취하는 것이 좋다면야 기꺼이 그렇게 해드리리다. 흔히들 약육강식이라고 하지 않소? 비록 늙은 사자고기는 조금 질기긴 하겠으나, 충분히 인내심을 발휘하여 차분하게 질겅질겅 씹어 삼켜 드리겠소."

"···큭!"

프레더릭은 마침내 고개를 숙였다. 이번 일이 그의 손을 떠났음을 직감한 것이다. 그는 끝내 한국군이 유사시 말라카에 진주하는 것을 허용해야만 하였고, 아시아 식민지 독립안건을 런던의 정가로 짊어지고서 돌아가게 되었다.

그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소리쳤다.

"이 일을 후회하실 겁니다!"

"좀 오래 걸리겠구려."

과연 후회하게 할 여력이 있긴 있느냐는 비꼼이 섞인 말이었다. 도발한 보람도 없이, 프레더릭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채로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수행원들을 이끌고서 돌아갔다. 울화통이 터진다는 듯이 발을 쿵쾅거리는 모습이 퍽 우습기도 하였다.

그리고 특사가 떠나간 다음, 이원철은 말했다.

"속이 다 시원합니다."

"저놈이 단단히 화가 난 듯하던데, 걱정이 되지는 않더냐?"

"작금의 정세에서 저자가 노해봐야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되려 저자가 화를 피할 걱정을 해야 하지 않을는지요."

이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그간 그를 대신해 국외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쌓은 태자였으니 작금의 정세가 어찌 흘러가는지 모르지 않을 터였다. 영국은 하나라도 더 많은 동맹국이 필요하였고, 이번 국혼으로 한국은 영국의 주요 동맹국 후보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적어도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이번 일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할 수 없을 것이며, 전쟁이 끝나고 나면 재건을 위하여 손을 벌려야 할 테니 또다시 침묵해야만 했다. 적어도, 가까운 시일 내에 이번 대담이 밖으로 새어나가거나 문제시될 일은 없다고 생각해도 좋았다.

"하오나, 괜찮으실는지요. 과연 저들에 독립을 돌려준다고 한들 저들이 대한을 순순히 따르겠습니까?"

이원철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국가 간의 호의나 은혜라는 게 얼마나 덧없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당장 그가 철이 들고서 본 주요한 배신만 해도 페르시아에서 프랑스가 영국을 배신한 일, 지중해에서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배신한 일, 미국-한국-프랑스의 삼자 동맹이 고작 10년 만에 끝나려 하는 지금까지 합하여 3차례였다.

크고 작은 식민지 분쟁 도중의 배반까지 꺼내 들면 끝도 없다. 외교란 배신의 연속이었고, 약속은 깨트리기 위하여 존재했다. 적어도, 그가 봐온 세상은 그러했다.

하지만 이형은 대수롭지 않은 듯 답했다.

"아직 멀었구나, 이 우둔한 놈. 왜 얼굴에 똥칠하는 역을 우리가 해야 한다는 말이더냐? 제국의 번왕들은 뒀다가 국이라도 끓여 먹을 테냐."

"번왕들··· 말씀이십니까?"

"그래. 제후들에게 변경의 일을 관리하라 명하면 그만이 아니더냐. 우리는 맹주로서 공정한 시늉을 하면서 은근히 변경의 열국을 편들면, 제후들은 우리 대한이 열국의 민심을 보듬고 있기에 남방의 열국을 쥐락펴락할 수 있으며, 남방의 열국은 우리 대한을 통하여 제후들의 폭정을 세상에 고할 수 있으니 절로 아주의 천하가 대한을 중심으로 다시 짜이게 되는 것이다."

"아···."

그제야 이해한 듯 이원철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새삼스럽게 이형이 그토록 강조하였던 분열시켜서 지배하라는 것이 어떤 뜻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힘은 제후들이 쓰고 오욕도 제후들이 뒤집어쓰게 만들고는 한국은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간섭하면서 시어머니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형은 아직 그의 계획은 온전히 말한 것도 아니었다.

"내 아주의 식민지들이 독립하거든 저들의 자력갱생을 위하여 조약기구의 산하에 협력기구를 하나 더 만들어 둘 것이다. 그리하여 저들이 목소리를 한데 합칠 수 있도록 도우리라."

"하오나, 그리하면 저들이 한데 힘을 모아 우리 대한에 맞서려 하지 않을는지요?"

"대한은 멀고, 제후들은 가깝다. 저들이 목소리를 합친다면 그것이 대한에 맞서기 위함이겠느냐? 제후들과 맞서기 위함이겠느냐?"

"···제후들과 맞서기 위함일 것입니다."

이원철의 대답에 이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모든 이치를 깨우칠 만큼 머리가 좋은 건 아니었으나, 적어도 가르치면 깨달을 줄 아는 태자였다. 그리고 그만하면 충분했다. 그 이상은 바랄 생각도 없었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었다.

「장차 대한이 아주를 이끌어감에 있어 중요한 것은 더 이상 구주의 약속이 아니라 아주의 열국이 우리 대한을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가 될 것입니다. 만일 전란이 임박하여서, 내지는 전란이 시작된 다음을 노린다면 구주 열강들로부터 확답을 얻을 수 있겠으나, 아주의 열국은 우리 대한을 말보다 보신이 앞선다 여겨 멸시할 것입니다. 그리되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우리 대한이 어려울 때도 항시 아주의 열국을 위하였음을 보여야만 저들이 진정으로 대한을 따를 것입니다.」

'정말이지 잔머리 굴리는 재주 하나는 타고난 놈이야.'

이형은 문득 신료들이 보는 앞에서 이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건 이형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사실 이형은 이러한 계획을 이전부터 생각해왔으나 아무리 일러도 세계대전이 본격적으로 발발하거나 전쟁이 끝난 다음으로 미룰 생각이었다.

섣불리 나서봐야 공연히 경계 당하기만 할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강의 말을 들으니 생각이 달라졌다.

'말과 행동이 다른 시답잖은 놈의 잔소리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겠지만,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난 놈의 잔소리라면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잔소리를 들으려고 오는 법.'

명색이 아주의 맹주요, 열국의 은인이자 시시비비를 가려줄 경관이 어디 시답잖은 놈이어야 쓰겠는가.

지금은 기회를 보며 간사하게 굴 게 아니라, 속에 품은 야망을 내보이며 천하를 전율케 해야 할 때였다.

"이제 겨우 장기판 위 장기말 신세를 졸업해 그 앞에 마주 앉았다. 자, 어디 놀아보실까?"

이형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대국(大局)이 시작된 것이다.

< 기사(棋師) > 끝

ⓒ 리첼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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