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355화 (355/530)

< 순백의 도시 >

아흐레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시간은 공주가 제 모습을 되찾기에는 단연 부족한 시간이었으나, 어느 정도 기력을 되찾게 하는 데에는 더없이 충분한 시간이었다. 설령 그것이, 마음의 병은 조금도 낫지 않았으나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지에 몰아넣는 꼴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마마, 이만 기침하시지요. 저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객선의 특실에 마련되어 있던 공주의 처소에 찾아온 프레더릭을 빅토리아 공주는 공허한 눈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프레더릭의 모습도, 은근히 ‘저들’이라고 지칭하며 한국을 향한 적의를 표하는 프레더릭도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공주는 입을 다물고서 그저 한참을 가만히 프레더릭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한참을 고개를 숙이던 프레더릭은 결국 어느 순간 더는 견디지 못하고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채비를 해드려라.”

짧은 지시였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했다. 프레더릭은 특실의 하녀들이 덜덜 떨며 고개를 조아리는 걸 확인함과 동시에 방을 나서 버렸다. 달리 대신한 이들도 없을뿐더러 한국의 궁인들을 빌려 오기에는 꺼림칙했기에 그대로 두고 있었다. 본국까지 돌아갈 것도 없이, 하다못해 해협식민지에만 당도해도 모조리 그 책임을 물어 처분할 작정이었다.

비록 죽지는 않겠으나, 차라리 죽음을 갈망하게 되리라. 프레더릭은 그녀들을 마지막으로 슬쩍 흘겨보고서 나지막이 혀를 찼다.

‘저 모자란 년들 탓에 괜한 명분을···. 아니, 이러한 요구를 즉석에서 생각해냈을 리가 없어. 결국 공주 운운은 순전히 명분이고, 처음부터 이쪽이 본제였던 거다.’

절로 치가 떨렸다. 그때의 치욕만 생각하면 지금도 절로 턱에 힘이 들어가는 듯했다. 한국의 야망이야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모를 수가 없다. 그 어떤 나라의 외교가보다도 타국의 욕망을 읽어내는 데에 탁월한 재주를 발휘하던 대영제국의 외교가다. 한국이 꾸준히 자신들이야말로 아시아의 맹주임을 강조하던 게 무슨 목적이었을지야 처음부터 뻔했다.

문제는 하필이면 야망을 지금 같은 시기에, 그것도 다름 아닌 영국에 가장 먼저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게 과연 한국이 영국에 호의를 품어서일까. 그럴 턱이 없었다. 영국과 그 동맹국들이야말로 한국의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을 나라들이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이미 10년도 전에 아시아에 이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고 언급했다. 뒤늦게 후회가 되는지 코친차이나의 통치권을 두고서 질질 끌고 있기는 하나, 한국의 요구에 다소 모욕감을 느낄지언정 전쟁과 타협의 양자택일이라면 한국과 순순히 타협하기를 택할 것이다. 프랑스에 아시아 식민지는 더는 전쟁을 각오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영토가 아니다.

‘말라카, 다른 곳도 아니고서 말라카와 해협식민지를!’

그러나 영국은 다르다. 다를 수밖에 없다. 당장 말라카 해협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 벌어들이고 있는 항행 세가 얼마이고, 때문에 해운 영향력은 얼마나 거대하던가. 말라카 해협을 잃게 된다면, 당장에 영국에서 본국 영토의 연장으로 간주하던 오스트레일리아 일대가 한국의 사정권에 들어온다.

직접 런던을 겨눠지는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뿐 아니라 한국의 배들이 자유로이 말라카 해협을 넘게 되면 그때에는 인도 제국도 한국의 영향권 안에 들어간다. 인도의 하자들이 런던의 마하라자디라자 만이 아니라 한국의 카간을 염두에 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건 악몽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는 것이 프레더릭의 판단이었다.

‘그렇지만··· 한국과 손을 잡을 수 없다면 이제 어느 나라와 타협해야 하지?’

사고가 여기까지 이어지니 어깨에 힘이 쑥 빠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한국과 싸우겠다면, 그럼 이제 누구와 타협한다는 말인가. 프랑스, 오스트리아, 한국 3개 열강을 상대로 동시에 싸울 작정이 아니라면 적어도 하나는 줄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두 열강 중 영국의 뜻에 공감해줄 나라는 없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에서야 기를 쓰고 버티겠으나 아시아에서는 양보할 확률이 높고, 오스트리아는 애당초 강 건너 불구경이다. 영국이 한국과 싸우건, 프랑스가 한국과 싸우건, 혹은 그 두 나라 모두와 싸우건 그저 누가 이기는지 멀리서 구경하면서 제 몫이나 챙기면 그만인 것이다.

거기에 가까스로 타협한다고 해도 문제다. 프랑스와 타협함은 곧 프랑스가 혈맹 네덜란드를 무릎 꿇리고서 언제건 영국의 심장부를 노릴 수 있도록 한다는 뜻이고, 오스트리아와 타협함은 지중해를 건네주며 인도 제국의 생명선을 오스트리아에 넘기겠다는 뜻이다. 어느 쪽도 한국과 타협하는 것보다 해악이 크면 컸지 절대 작지는 않았다.

‘이건 결국 다리를 자를지, 팔을 자를지, 심장을 찔릴지를 고르는 꼴이야. 빌어먹을. 이제 나는 모르는 일이다. 글래드스턴, 그놈이 어련히 결단을 내리겠지. 책임도 그놈이 질 테고.’

프레더릭은 눈을 질끈 감았다. 물론 온전히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또한 한국의 황제를 말리지 못하고서 사실상 통보받은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결과로 본국에 돌아오는 순간 유람이라도 하려고 한국까지 갔다 온 거냐는 힐난을 들어야만 할 터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터. 그를 향하던 모든 비판은 끝에는 결단을 내릴 글래드스턴에게 몰리게 될 것이다. 글래드스턴이라고 좋아서 그런 결단을 내리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프레더릭은 새삼스럽게 자신이 영국의 정점이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속 깊이 감사했다.

한동안, 영국의 정가에 관여해서는 안 될 거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 * *

그렇게 프레더릭이 떠나고 난 다음, 공주가 밖으로 나설 몸단장을 끝마쳤을 무렵 또 한 사람 그녀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송구하옵니다. 모두 제가 미흡했던 까닭입니다. 그간 헤아려 드리지 못하여 죄송스럽습니다.”

피셔 제독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번 사태에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공주를 호위할 것을 명받은 처지였다. 비록 늘 같은 배에 있으면서도 미처 눈치채지 못한 함장에 비할 바는 아닐지 몰라도, 제독으로서 그에게 또한 책임이 분명 있었다.

때문에 그는 정모를 탈모하여 왼손에 쥐고서 바닥에 엎드릴 듯이 고개를 있는 힘껏 숙였다. 용서를 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책임자로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

하지만 여전히 공주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피셔를 가만히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피셔는 절로 침이 마르는 듯했다. 한눈에 보아도 공주의 용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종일 이래서야 곤란했다. 얼굴이 반쪽이 된 신부가 종일 입을 다물고 있는데 어느 누가 품위가 있다고 좋아하겠는가. 저러다가 쓰러지는 거 아니냐는 소리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지.

하물며 충격에 벙어리라도 된 것이라면? 파혼을 당하든 소박을 맞든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피셔는 식은땀이 절로 흘렸다.

“···어떻던가요?”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요.”

그렇게 한참을 침묵하던 공주는 돌연 물었다. 피셔는 내심 쾌재를 부르면서도 뻔뻔스럽게 되물었다. 그의 부군이 될 황자를 말하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한국이라는 나라를 말하는 것인지. 어느 쪽인지를 알아야만 공주의 의문에 답해줄 수 있던 것이다.

“전부 다요.”

공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그간 기력이 달려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을 뿐, 오는 내내 특실에 틀어박혀 바락바락 고함을 지르던 성질머리가 어디 간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피셔는 쓴웃음을 삼켰다. 안 그래도 반쪽이 된 모습으로 눈빛을 흉흉하게 빛내고 있으니 어딜 봐도 오늘 혼례를 치를 신부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피셔는 구태여 이를 일부러 입 밖에 내 화를 자처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입에 담았다.

“의친왕 전하는 아직 만나 뵙지 못하였으나, 한성은···.”

“쓸모없기는.”

공주는 피셔의 설명을 다 듣기도 전에 그리 쏘아붙이며 뒤돌아섰다. 피셔는 순간 번졌지만, 새삼스럽게 하녀들이 입을 다물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마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셨던 거겠지.’

머리가 지끈거려오는 이야기였다. 결국, 공주가 자신의 병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하녀들에게 엄포를 놓았기에 사태가 여기까지 커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한창때의 나이에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내다 팔렸으니 그 마음고생이야 감히 어디에 비하겠느냐마는, 이를 통해 얻은 마음의 병이 모든 화를 자처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피셔나 영국 사절단에 한정된 태도라면 그저 성질 더러운 어린 왕족의 어리광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으나, 혹여나 부군 될 황자나 타국의 사절단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경우였다. 피셔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일이었다.

‘주여, 살펴주소서. 부디 모든 일이 순리대로 이루어져 아무 탈 없이 식이 마무리될 수 있도록 안배하소서.’

피셔는 간절히 기도했다. 이번 행사 내내 그가 곁에서 수행할 수도 없으니 그저 기도하는 것 말고는 달리 수가 없었다. 그게 얼마나 효용이 있을지는 미지수였음에도 말이다.

황자가 되었든 주변경관이 되었든 황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치유해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 * *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뿐이야.’

배에서 내려 마차에 오른 빅토리아 공주는 창밖을 내다보며 그리 생각했다. 공주의 모습에 백성이 동요할 수 있으니 창을 커튼으로 가려두라는 잔소리 따위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무엇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를 여기까지 보낸 삼촌도, 그걸 방조한 아버지나 형제자매들도, 그리고 그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를 뿐이던 시종들도 말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원망해본 적 없던 천당에 있다는 신마저 요즈음에 와서는 영 아니꼽기만 했다. 대관절 그녀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런 운명을 내려준다는 말인가. 그녀의 눈에는 그저 모든 것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럼에도 하늘은 너무나 맑았다. 그 사실이, 그녀에게는 더더욱 불편했다.

“다들 내가 우리에 갇힌 원숭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걸까.”

공주는 입술을 내밀었다. 환영인파는 공주를 보호하기 위하여 충분한 거리를 두어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그를 보기 위하여 족히 수천, 수만의 인파가 구름같이 모여든 것만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꼴이 영락없이 재미난 구경거리를 발견하고서 모여든 것이라 공주는 내심 불쾌해했으나, 그들에게 공주가 좋은 구경거리였듯이 공주에게도 그들은 좋은 구경거리였다.

무엇보다 그들의 모습은 런던의 그것과 확연히 달랐다.

“하나같이 새하얀 옷을 입고 있네.”

공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리가 온통 새하얬다. 그녀를 보여 몰려든 이들이 온통 새하얀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생 처음 보는 기묘한 전통 복을 입고 있는 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눈에 익은 정장이나 드레스를 차려입은 이들조차 순백색 아니면 연한 노란색, 연한 하늘색, 회색 등 한없이 흰색에 가까운 색상을 고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혹시 너무나 가난한 탓에 염색할 수도 없어 새하얀 옷 밖에 입을 수 없는 걸까 생각했으나, 빅토리아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순백의 드레스가 얼마나 관리하기 까다로운지는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실수로 밟기만 해도 금세 때를 타지 않던가. 염색이야 둘째 문제로 넘겨도, 세탁이나 관리만 생각해도 그건 가난한 이들이 고를 수 있는 색상이 절대 아니었다.

요컨대, 한국인들은 정말로 좋아서 순백을 골랐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이 빅토리아에게는 기이하게만 느껴졌다.

“나 같은 백인이 되고 싶은 걸까?”

터무니 없는 오해였지만, 적어도 빅토리아에게는 제법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낙심하던 그녀에게 잔소리꾼들이 귀가 따갑게 들려준 말이 저들은 백인종은 아니래도 명예 백인이라 할 수 있으니 너무 낙심할 이유는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하고서 다시 창 밖을 내다보니, 새삼스럽게 많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 첫째로, 저들의 피부색이 그녀가 생각했던 것만큼이나 거무죽죽하거나 노랗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런 경우가 없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양장을 걸친 젊은이들은 그런 경우가 드물었다. 황동에 가까울 거라 내심 생각하던 그녀에게는 의아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따로 있었다.

“키도 제법 훤칠하고···.”

빅토리아는 흘끗 마차를 호위하는 위병들을 흘겨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놀랄 만큼 키가 컸다. 그녀가 자그마해서 상대적으로 커 보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랬다. 이 무렵 황실을 경호하는 위병이 되려면 최소가 170cm 이상이어야 했고, 이들의 평균 신장은 176cm에 육박했다.

당연히 평균치가 176cm이니, 드물게는 180cm에 달하는 거구들도 섞여 있었다. 런던의 위병들을 기억하는 공주의 시선으로 봐도 제법 키가 훤칠하다고 평가받는 것도 당연했던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 훤칠한 신장은 위병들에게만이 한정된 것이 아니라 개항 이후에 태어난 한국인 모두가 겪고 있는 현상이었다.

이 무렵 한국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은 165cm에 달했고, 이는 즉위 초에 비교하여 4cm가량 증가한 수치였으며 동시기 영국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에 비교해도 크게 다르지 않은 수치였다. 안 그래도 아시아에서 키가 크기로는 제일가던 와중에, 나라가 부유해지면서 유럽마저 조금씩 따라잡고 있던 것이다.

“애썼네. 좀 가늘어서 멀대 같기는 하지만.”

그건 빅토리아가 내릴 수 있는 가장 후한 평가였다. 어느새 저 멀리에서는 한성이 보이고 있었다. 공주는 큰 기대를 품지 않고서 한성을 바라보았다. 벽돌집에 기와를 얹은 인천의 거리는 특이하기는 했으나 큰 감흥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녀의 미적 감각에는 도통 맞지 않던 것이다.

같은 시기 피셔 제독을 위시한 영국 사절단은 유럽 바깥의 항구도시가 이만한 번영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있었지만, 그거야 도시의 규모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실무진의 이야기였고 그녀에게 인천은 그저 구경거리였던 것이다.

물론, 그래 봤자 런던보다야 보잘것없다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으리라.

“아···.”

그러나 그런 감상도 한성이 눈에 들어온 순간 사라졌다. 그 위명이야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찬란한 빛의 도시, 한성. 참으로 건방진 이름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나니 그런 위명도 마냥 헛것은 아닌 듯했다.

“눈부셔.”

공주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글자 그대로 도시에서 빛이 나는 듯했다. 거울이나 유리창에 비추어 햇살이 반짝여서가 아니라, 도시가 온통 순백으로 물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가 온통 병원이나 성당인 건 아닐까 의뭉스러웠을 정도였다.

인천의 벽돌집들이 붉은 벽돌색을 띠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한양은 벽돌집들마저 새하얬다. 벽돌 위에 새하얀 시멘트를 바르던, 흰 페인트를 칠하건, 아니면 대리석 같은 걸 덮어씌우건 간에 어떻게든 흰 빛깔을 냈던 것이다. 이 무렵 한양에서 가장 주목받는 건축자재는 단연 시멘트였고, 그 이유는 흰색이었기 때문이었다.

건물뿐일까. 길마저 흰빛을 띠었다. 물론 온전히 흰색은 아니고 회색 돌길이었으나, 한눈에 보아도 어떻게든 흰빛을 내고자 끝없이 쓸고 닦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이 무렵 한국인들의 흰색 사랑은 대단한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도시를 온통 흰색으로 칠할 수 있는 거지?”

빅토리아는 곤혹스럽게 중얼거렸다. 한성에 공장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던가. 공장에서 나오는 매연이 런던에 잿빛의 도시라는 악명을 안겨주었던 것을 공주는 기억하고 있었다. 한성이라고 크게 다르지도 않을 텐데, 대관절 무슨 수로 이렇게 순백의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를 간직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 비결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한양의 명가들부터가 저들 집의 미관을 위하여 매연을 줄이라며 공장주들에게 악을 썼고, 또 흰옷을 빠느라 일손이 부족할지언정 일감이 부족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세탁 사업만큼 많은 인부를 도시 미관에 투입하고 있던 것이다.

모두 아주의 값싸고 충분한 노동력 덕분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예쁘다···.”

그러나 그 뒷사정이야 아무튼, 찬란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순백의 도시는 공주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했다.

빅토리아는, 이 순간 빛의 도시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 순백의 도시 > 끝

ⓒ 리첼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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