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운아 >
준비를 위하여 얼굴을 붉힐 일들이 무수하게 있었음에도, 식은 이렇다 할 특이 사항 없이 평탄하게 진행되었다.
이유는 이것저것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영국 측 사절단도 한국 조정도 어느 쪽도 구태여 이면합의를 내보이는 일 없이 식을 평화롭게 끝내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결혼식에 이목을 집중시켜 한국과 영국이 협력하고 있음을 세상에 보여야 할 때였던 것이다. 영국은 한국과 적대하고 싶지 않기에 그러했고, 한국은 바다로 나가기 위한 토대를 다지기 위하여 그러했다.
“아주 그냥 기합이 팍 들어갔구나. 그래, 그리도 마음에 들었더냐?”
“···시끄럽소.”
물론 황실의 의지도 적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은근히 영국의 준비에 미흡한 점이 있다며 언급할 작정이었던 이형부터가 이야기를 듣고서 이강의 체면을 봐서라도 한번 봐주겠다며 흔쾌히 없던 일로 넘긴 점만 봐도 그러했다.
양장을 차려입고서 식장에 들어서는 내내, 이강은 그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며 놀려대는 이원철을 어떻게든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썼다. 물론 잘은 안 되었지만 말이다. 애초에 사람을 대하는 데에 미숙한 그가 철이 들 무렵부터 외교가에서 구르고 구른 이원철의 추궁을 피할 방도는 없었다.
이원철은 껄껄거리며 이강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자, 그럼 어디 잘 해보아라. 이번만큼은 너의 독무대이니라. 이런 순간이 어디 흔하게 찾아오겠느냐? 괜히 후회 남기지 말고 온 힘을 다하거라.”
“···.”
이강은 답하지 않고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 멀리에서 주례를 맡은 베르뇌 추기경이 보이고 있었다. 좌우로 보이는 하객들과 아귀 같은 눈을 빛내는 기자단은 어떻게든 시야에 넣지 않기 위하여 애썼다. 안 그래도 머리가 어지러운데 이토록 많은 이들의 앞에 섰다는 걸 새삼스럽게 인식하면 속이 메슥거려서 구역질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가능한 앞만 보고 가려다 보니, 절로 노쇠한 추기경과 눈이 마주쳤다. 그런 이강의 시선에 베르뇌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태어날 적부터 병약했던 이강에 세례를 내린 인연으로 그를 대부처럼 보살펴 주었고 대해온 늙은 추기경이었다. 무언가 속에서 울컥하고 올라오는 듯했다.
“에베소서에 이르기를 아내를 사랑하기를 자신과 같이하라고 하였습니다. 다 늙어 쓸모를 다해가는 이 미천한 눈으로도 전하께서 비를 흠모하심을 익히 알겠으니, 비로소 전하께서 스스로와 화해하신 모양이로군요. 주께서도 오늘의 이 식을 축복하고 계심을 잘 알겠습니다.”
“아닙니다. 그저 아바마마께서 시키기에 따르는 것뿐입니다. 예하께서는 어찌 제가 이제 막 얼굴을 본 상대에게 그리 가볍게 마음을 주리라 생각하십니까?”
“다들 그렇게들 말들 하시고는 하지요. 어찌 중매로 맺어진 사이에 처음부터 사랑이 따르기를 기대합니까. 다만 함께 지내는 나날이 날로 부부간의 사랑을 더해가는 것이지요. 하오나, 오늘 전하께서 낯이 밝으시기에 부부로서 함께할 날 또한 밝으리라, 이 늙은이가 제멋대로 유추해 보았을 뿐입니다.”
늙은 추기경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마치 투정부리는 손자를 대하는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태도였다. 이강은 차마 뭐라 답하지 못하고서 입이 막혔다. 그의 아버지와는 또 다른 카리스마였다. 이형이 그의 부족한 점을 꾸짖었다면, 베르뇌는 그를 말로서 부드럽게 달래주었다.
이강이 말을 못하고서 입을 다물고 있자니, 베르뇌가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자책하지 마소서. 전하께서 그리 생각하시지 않더라도, 폐하께서는 인자하신 분이십니다. 고작 한 번의 실책으로 전하를 멀리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다만 부모 된 도리로서 꾸짖으셨을 뿐이시지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오?”
“물론입니다. 제가 막 조선에 왔을 적, 이 나라는 주의 가르침을 멀리하고 있었으며 저와 저를 따르는 사제들은 초가집에 숨어 몰래 주의 가르침을 구하는 신도들과 마주하여야 했습니다. 하나 폐하께서 보위에 오르시어 고통 받는 주의 어린양들을 사랑으로 품에 안으시옵고, 오늘날 저와 저희 신자들은 이곳 아주에서 제일 웅장하고 화려한 성당에서 분수에 겨운 영광을 누리고 있지요.
제가 그분께 은혜를 입은 까닭에 눈이 흐려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나, 저는 폐하께서 자비로우신 분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분의 자비를 믿으십시오. 전하께서 몇 차례고 폐하께 실망을 끼친다고 한들, 폐하께서는 몇 번이고 전하께 기회를 내리실 겁니다.”
이강은 베르뇌의 장광설에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이형을 향한 끝 모를 호의와 선망 탓에 되려 믿음이 조금 가시는 기분이었다. 뚜렷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맹목적으로 이러할 것이라고 추앙하는 것처럼 들린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위로를 받으니 한결 마음이 나아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강은 꼿꼿이 허리를 세우며 답하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에 베르뇌는 말없이 빙긋이 웃어 보였다. 저 멀리에서 신부가 입장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애써 베르뇌가 보는 앞에서 아닌 척했던 보람도 없이, 이강은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고개를 획 돌리며 신부의 모습을 찾았다. 그의 뒤에서 늙은 추기경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조차 미처 보지 못하고서 말이다.
부축을 받으며 사뿐사뿐 걸음걸이를 옮기는 공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선은 차갑게 빛나며 하객들과 기자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녀가 흘겨보는 것은 그녀의 조국 영국에서 찾아온 손님들이었다. 한성을 구경하면서 조금이나마 풀렸던 기분도, 그들을 보고 있자니 다시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래, 나를 팔아치우고서 너희는 잡담이나 하면서 웃고 즐기고 있다 이거지?’
공주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공주의 그런 모습은 하객들에게 들키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얼굴을 하는 것보다도, 애써 화장을 짙게 하여 가려도 드러날 수밖에 없는 가는 몸이 충격적으로 다가온 까닭이었다.
뼈와 가죽만 남은 듯했던 것이다. 누가 봐도 공주는 무언가 지독한 병이라도 걸린 것 같았다. 가녀린 팔이나 다리야 어떻게든 좋게 평해줄 수 있어도, 광대뼈가 툭 튀어나올 만큼 가라앉은 볼살은 짙은 화장으로도 숨길 길이 없었다.
단번에 하객들이 어수선해졌다. 그간 공주가 어떻게든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 이유가 드디어 만천하에 공개된 것이다.
“흥!”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는 사실 하나 눈치 채지 못할 공주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혼란스러운 시선을 향해오는 하객들과 기자들을 무시하고서, 성큼성큼 그녀의 반쪽이 기다리는 곳을 향했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이강을 본 빅토리아는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떠야만 했다.
“당신은 분명···.”
의아한 어조였다. 일전에 보았을 때 나름 정갈하게 차려입고 있기는 했어도, 그가 이번 결혼식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공주였다. 나름 호감은 갔지만 척 봐도 혈색 하나 없이 안색이 창백하다 보니, 이런 식장이 아니라 어디 병원이라도 추천해주고 싶다는 게 본심이었다.
그러나 공주의 되물음에 이강은 답하지 못했다. 영어를 할 줄 몰랐던 탓이다. 신앙생활 덕에 라틴어나 프랑스어 청해 정도는 가능했어도, 영어와는 인연이 멀던 이강이었다.
“아···.”
그리고 사실, 청해가 가능했더라도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일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었다. 누가 봐도, 이강은 넋이 나간 상태였다. 멍하니 빅토리아를 바라보면서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가족들이나 궁녀들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여자 경험 하나 없던 것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격이었다.
“어라···.”
공주는 히죽 웃었다. 그녀는 재차 이강이 자신에게 빠졌음을 확신했다. 하객들을 돌아보며 가라앉기만 하던 기분이 한순간에 나았다. 나쁜 생각이나 원망은 가시고, 그 틈을 묘한 뿌듯함이 가득 채웠다. 그는 새삼스럽게 이강을 빤히 훑어보았다.
키는 공주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몸에 근육은 없어 보였으나 그렇다고 살집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날렵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목구비는 뚜렷하고 턱선은 가늘어, 이 무렵 유행하던 마초와는 거리가 멀었으나 곱상한 것이 전형적인 미남자였다.
'그래도 내 이상형과는 거리가 있지만. 조금 타협하자면 나쁘지 않은걸.'
빅토리아는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다. 일부러 그런 일을 하는 이유야 뻔한 것이었다. 호감을 품은 남성을 골려주기 위함이었다.
“···윽!”
그런 빅토리아를 빤히 바라보던 이강은, 뒤늦게 자신이 하객들이 보는 앞에서 한심한 꼴을 보였음을 깨닫고서 허둥지둥거렸다. 빅토리아는 그 꼴이 우스워 입을 가리고서 쿡쿡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각국에서 찾아온 기자단은 낱낱이 구경할 수 있었다. 그들이 식이 끝나는 대로 어떤 기사들을 쏟아낼지야 뻔한 것이었다.
이면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모르는 그들로서는, 이 세기의 로맨스를 어떻게 다루면 한 부라도 많은 신문이 팔려나갈지에 대하여 즐거운 고민에 빠져있었다.
***
“저 얼빠진 놈이.”
이형은 짜증을 부리듯이 투덜거렸다. 훌륭한 언행 불일치였다. 입으로는 불평하고 있어도, 그의 눈매는 어쩔 수 없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간 매번 엇나가는 둘째 황자 탓에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까닭이었다.
그리 마음에 드는 며느리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살아가는 이유조차 찾지 못하고서 방황하던 이강에게 그 의미를 부여해준 것만으로 눈감아줄 만 하다는 게 이형의 생각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제 짝을 찾은 모양이니 참으로 여래께서 도우심이 아니겠어요?”
“그거야 그렇지만···.”
때문에 이형은 황후가 슬쩍 한마디 건넨 것만으로 못 이기는 척 넘어갔다. 그동안에도 식은 계속 진행되어가고 있었고, 그리 오래지 않아 마무리되었다.
그러고 나면 그의 시간이었다. 피로연이 시작된 것이다.
“축하합니다, 폐하. 대단히 다행스럽게도, 부부가 서로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궁에서는 신혼부부의 웃음소리만 들려오겠군요.”
루이는 활짝 웃으면서 선뜻 이형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이번 결혼이 그의 조국에서 그리 달갑지 않은 일임에도, 그는 진심으로 이형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이상으로 이형을 향한 호의가 컸던 것이다.
이형은 피로연에 제공된 샴페인 한잔을 홀짝이며 답했다.
“뭘. 아직 멀었소. 태자라는 놈은 식을 치룬지가 몇 년째인데 아직 손주를 보여주겠다는 소식도 없고, 저놈은 남자 구실이나 하면 다행이니 웃기만 하기에는 멀고 멀었소이다.”
“다 바깥을 돌기만 하니까 그런 것이지요. 자택에 가만히 두시고 몇 달간 느긋이 소식을 기다리시면 금세 좋은 소식이 있으실 겁니다.”
“흠, 그 말대로라면 다행이겠소만···.”
이형은 말끝을 끌었다. 그건 청자에게 그리 반갑지 않은 이야기를 하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해주기 위한 이형의 버릇이라는 걸 루이는 기억해냈다. 부부의 혼례를 축하해주던 루이도, 이렇게 되니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얼굴을 딱딱히 굳히고서 이형의 말을 기다렸다.
“이것 하나만 물읍시다. 만에 하나, 우리 대한이 남방의 아주 열국들을 보호하겠다고 나서면 귀국 불란서에서는 어떻게 할 거라 생각하시오?”
“보호, 라고 하시면···.”
“물론, 저들에게 주권을 돌려주겠다는 것이오. 당장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100년 안에는 말이오.”
이형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샴페인이 그리 입에 맞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더욱 정확히는, 도수가 낮은 것이 불만이었다고 하는 게 옳았다. 루이에게는 그게 달리 보였지만 말이다.
루이는 이형이 그의 조국 프랑스에 불만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역시 코친차이나 문제인가?’
그리고 그 원흉이야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코친차이나를 양도한다고 언급한지가 어언 10년을 넘어가고 있는데 아직도 통치권을 이양하지도, 한국의 진출을 허용하지도 않고 있으니 그야 불만이 쌓이는 게 당연했다.
루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남방의 열국이라면 어디까지를 의미하시는지요?”
“글자 그대로요. 남쪽에 있는 아주 열국 전부를 말이요.”
“···혹, 전쟁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거야 구주에서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다르겠구려. 우선, 짐이 계획하기에는 아주 열국들에게 의견을 물어 주권을 돌려받을지, 그대로 통치 아래에 있을지를 국민투표에 부치고자 하오만.”
루이는 말문이 막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보통 사안이 아니라는 걸 직감한 것이다. 이건 단순하게 프랑스가 어찌 나올지에 대하여 알고 싶어서 묻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우리는 이렇게 할 테니까 너희는 어떻게 할 작정이냐-라며 윽박지르는 것에 가까웠다.
목덜미를 타고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루이는 무심결에 침을 삼켰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한국과의 관계가 틀어질 수도, 유지될 수도 있다는 걸 직감한 까닭이다.
그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내가 만약 그 의심 많은 황제라면···.’
대답은 쉽게 나왔다. 그는 한국의 남방 진출이 영국을 타도하는 데에 도움이 될지에 대하여 가늠해 볼 것이다. 그리고 대답은 당연히 그렇더이다. 한국이 본격적으로 남하하기 시작한다면, 인도제국이 뒤흔들릴 거다. 그건 분명 프랑스에 호기다. 그러나 루이는 한국의 남방진출이 프랑스의 국익과 맞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무엇보다, 한국이 영국을 남방에서 내쫓는다면 그 세력이 지나치게 거대해진다. 기껏 프랑스가 영국을 몰락시켜도 프랑스가 열강 서열 1위가 될 수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여차하면 영국에 이어서 한국과 경쟁하게 되거나, 아니면 한국이 보위에 오르기 위한 길을 닦아주는 역할로 끝날지도 모른다.
“프랑스 제국은 대혁명의 가치를, 한 나라의 주권은 그 나라에 거주하는 국민의 손에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만일 진정으로 남방의 식민지인들이 독립을 바란다면, 마땅히 영국은 그들의 의사를 존중해야만 하겠지요.”
때문에 루이는 은근히 말을 돌렸다. 그건 그 나름대로 타협안이었다. 프랑스가 한국을 지원하지는 않겠으나, 영국의 동방 식민지들을 뒤흔드는 정도라면 얼마든지 묵인할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루이의 대답에 이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한 그대로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이형은 루이에게 이 이상의 대답을 요구하는 것도 곤란하다는 걸 알았다. 결국, 작금의 프랑스에서 모든 걸 정하는 건 황제의 역할이기에 제아무리 루이가 황제의 총신이더라도 그에 맞설 수는 없을 테니까.
대신에 이형은 은근히 물었다.
“경이 그리 말한다면 틀림없는 것이겠지. 내 잘 알겠소. 숙지해두리다. 그건 그렇고, 프랑스는 요즘 좀 어떻게 되어가고 있소?”
“···모든 것이 한국에서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지요.”
루이의 대답은 떨떠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 황제의 일인독재정권에서 점차 내각과 의회에 권력을 이양하며 다극과두체제로 넘어가고 있다면, 프랑스는 정반대로 내각과 의회에 의한 다극과두체제에서 황제의 일인독재정권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루이는 그것이 잘못된 길이라고 믿었다. 그는 열성적인 자코뱅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대혁명의 가치를 믿는 인물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권력은 시민의 손에서 나와야지, 황제의 음험함에서 나와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런 루이를 흘끗 바라보며, 이형은 툭 한마디 던졌다.
“그렇다면 유감이구려. 그래, 그래서 술라는 언제쯤 나올 예정이라던가?”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내가 취기가 돌아 괜한 소리를 했구려. 괜히 일을 키울 필요야 없을 테니 이쯤 해둡시다.”
이형은 손사래를 치고서는, 껄껄거리며 샴페인을 또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여전히 입에 맞지 않았는지 이내 인상을 찌푸렸지만 말이다. 하지만 루이에게는 그런 이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술라라니···. 설마, 행운아 술라를 말하는 건가?’
몸이 부르르 떨렸다. 황제는 말실수라고 했지만, 말실수일 리가 없었다. 하필이면 지금 같은 때에 일부러 그 이름을 언급한 걸 보면, 그 이유야 뻔했다.
황제는 그에게 공화국의 수호자가 되어보는 건 어떠냐고 은근히 권하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군사 쿠데타였다.
< 행운아 > 끝
ⓒ 리첼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