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360화 (360/530)

< 흐르는 피 >

마차의 창문에 부딪혀 폭발한 보드카 폭탄은 비록 마차를 산산이 부수지는 못하였으나, 그 천장을 날려버리는 데에는 넘치도록 충분하였다. 그리고 그 마차 안을 확인한 순간, 알렉산드르는 분기를 참지 못하고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빌어먹을!"

그 안은 텅텅 비어있었다. 단지 마부가 올라타 있을 뿐, 그 안에는 사람은커녕 둘둘 말아놓은 카펫 같은 것이 있었을 뿐이었다. 사람도 아닌 카펫이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는 꼴은 퍽 우스꽝스러워 보였으나, 알렉산드르는 차마 웃을 수 없었다.

그 어쭙잖은 카펫이 마차 바깥에서는 사람인 것처럼 보여 그를 속였던 까닭이었다.

"어어, 어···!"

히히힝-!

그 두려운 파괴력에 마차는 갸우뚱거렸고, 마부는 겁에 질려 고삐를 있는 힘껏 당겼다. 당장에라도 마차에서 굴러떨어질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알렉산드르에게는 행운이 되었다.

폭발에 의한 충격과 그 굉음에 잔뜩 흥분한 말들이 마부가 고삐를 잡아당기자 군중을 향하여 내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부가 자신에게 어서 도망치자고 재촉하는 줄 착각한 것이었다.

"피, 피해! 이쪽으로 온다! 히이익!"

"맙소사, 주여!"

그 결말은 끔찍했다. 인파를 향하여 내달리기 시작한 말들은 충격에 기우뚱한 차체가 옆으로 기울어지면서 그 관성에 끌려가 넘어져 버렸고, 매끄러운 눈길은 바닥을 나뒹구는 말들과 거대한 마차를 미끄러지게 하였다.

혼비백산한 군중이 서둘러 이를 피해 도망치려 했으나, 절망적일 정도로 시간이 촉박했다. 빙판길에 미끄러진 말과 마차는 족히 십수 명의 군중을 짓이겨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만든 다음에야 멈추었고, 곧 현장은 마차에 깔린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외치는 비명으로 가득 찼다.

"으아아! 내 다리! 내 다리!"

"하느님 맙소사! 나타샤!"

"사람 살려요! 제발 누가 좀···!"

이러한 현장의 어수선함은 당사자인 알렉산드르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테러와 갑작스러운 참상에 병사들은 물론 장교들까지 얼이 빠져 미처 폭탄을 집어 던진 알렉산드르에게 갔어야 할 시선이 붕 떠 버린 것이다.

그리고 알렉산드르는 이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를 놓칠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만세! 러시아 만세! 만만세!"

알렉산드르는 품 안에서 깃발을 꺼내 들었다. 로마노프 황가의 깃발인 흑, 황, 백, 가로 삼색기였다. 이걸 꺼내 든 이유는 자명했다. 그가 처음 폭탄을 집어 던졌을 때 알렉산드르 3세의 이름을 외쳤던 것에 더하여, 자신이 로마노프 황가의 충신이라는 걸 밝혀 테러를 당한 세르게이 대공 일파에게 알렉산드르 3세가 테러의 배후에 있음을 확신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확실했다. 폭탄을 집어 던진 알렉산드르가 연이어서 로마노프 황가의 깃발을 꺼내 들자, 공황상태에 빠져있던 병사들과 장교들의 적의가 일제히 그에게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저, 저런 불경한 놈!"

"죽여라! 대공을 해하려 한 역도다!"

"이 빌어먹을 자식! 살아서는 여기서 나갈 수 없을 거다!"

병사들은 잔뜩 격앙하여 알렉산드르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알렉산드르가 로마노프 황가의 깃발을 꺼내 들었다는 사실에 분노를 참지 못했다. 곧 새로운 차르가 될 세르게이 대공에게 누런 송곳니를 들이댄 반역자가 마치 제가 황가의 충신인 양 행세하고 있던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알렉산드르가 바라던 것이었다. 암살에 실패한 이상, 그는 최대한 세르게이 대공 일파의 분노를 유발하여 어수선하고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내전이 촉발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지만 두 폭군이 힘을 빼는 와중에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자신은 신상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죽어야만 했다.

"절대로 죽여서는 안 된다! 저놈에게 산채로 지옥을 보여야 한다!"

병사들의 흥분에 당황한 장교들이 그들을 제지하려 했지만, 어려웠다. 하필이면 군중을 통제하던 헌병들이 마차가 날뛰는 바람에 흩어져버린 것이 문제였다. 알렉산드르를 제압하기 위하여 몽둥이가 아니라 개머리판이 먼저 나가게 된 것이다.

병사는 개머리판을 휘둘렀고, 알렉산드르는 고의로 그쪽을 향해 제 정수리를 들이밀었다. 그 모서리에 정수리가 들이박히니, 당연히 빠각-하고 두개골이 깨지며 피가 튀었다. 먼저 후려쳤던 병사는 알렉산드르가 제 머리를 가져다 바치자 놀라서 뒤로 물러났으나, 그를 뒤따라온 병사들은 달랐다.

피를 보고 흥분한 병사들은 연달아 개머리판을 휘두르며 알렉산드르를 곤죽으로 만들어놨다.

"그만! 그만! 그만하라고 했다! 저놈을 살려놔야 어떻게든 배후를-."

"이, 이미 죽은 것 같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그건 대공 일파의 장교들에게 있어서 가장 끔찍한 결과였다. 배후를 캐낼 시간도 없이 알렉산드르의 숨이 끊어진 것이었다. 사인은 뇌 손상이었다. 병사들의 구타는 이미 죽어가던 것에 쐐기를 박은 것이었을 뿐, 직접적인 사인은 알렉산드르의 자해였던 셈이다.

이는 알렉산드르에게야 그의 목숨을 사용하여 기대할 수 있었던 최선의 결과였으되, 대공 일파에게는 두말할 것 없이 최악의 결과였다. 테러를 사전에 막아내지도 못했을뿐더러, 암살미수범을 잡아서 심문하는 것 또한 실패하고 만 것이다.

그럼 이제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선제공격을 당했으니, 이제 보복해야 할 시간이었다.

"형님 폐하께서 기어이 나를 죽이려 하셨다는 말인가?"

"예. 모두가 똑똑히 들었습니다. 주께서 보우하시어 다행히 텅 비어있던 2번째 마차만이 피해를 입었으나, 그 역도의 언행에 미루어보건대 가짜 차르가 테러를 꼬드겼음이 분명합니다!"

"이제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습니다!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이번에도 거사를 미뤘다가는 저 폭군 알렉산드르가 한발 빠르게 움직일지도 모릅니다!"

"경들의 충심에는 내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뿐이긴 하나···. 형님 폐하께서 진정 날 죽이려 하셨다면 무엇 하러 그자가 형님 폐하의 존함을 거론하였겠는가? 형님 폐하께 죄를 덮어씌우고자 한 역도의 간교한 계략이 아니겠는가?"

외출은 취소되었고, 궁으로 돌아온 세르게이 대공은 반격을 권하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신중론을 펼쳤다. 느닷없이 폭탄이 터지는 순간에는 자칫하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식은땀에 흠뻑 젖었던 그였으나, 막상 시간이 지나 마음을 추스를 수 있게 되자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장 이상했던 것은 암살자가 스스로 암살 배후를 밝혔다는 사실과 최초의 선제공격 이후에도 차르는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건 전혀 일치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만일 암살 배후를 밝히면서 이것이 차르의 뜻임을 보였다면 테러의 성패와는 무관계하게 지금쯤이면 이미 공격에 나서야 했고, 가만히 있으면서 자신이 암살과는 무관계함을 보이려면 애초에 암살 배후를 밝혀서는 안 되었다.

세르게이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알기로, 그의 형은 이럴 때 자신은 관계없는 체할 우유부단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되려 정면에서 선전포고하면서 당당하게 쳐들어올 인물이었다. 그런 차르가, 기습이라는 형태로 먼저 선전포고를 한 다음에도 조용한 건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병사들과 장교들 모두가 이번 공격이 가짜 차르의 짓이라 보고 들었습니다. 자칫하면, 역도로 몰릴까 두려워 저들의 마음이 전하를 떠날지도 모릅니다."

"페트로그라드에는 폭군의 폭정을 흠모하는 폭력적이고 야만스러운 역도들이 드물게나마 있다고 들었습니다. 만일 가짜 차르의 짓이 아니라면, 그 역도들이 전하를 해하고자 한 것이겠지요."

"가짜 차르가 병사들을 모아서 쳐들어온 다음에야 결단을 내려주시겠습니까? 이제는 폭군이 내쫓기는가, 저희가 죽는가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부디 결단을 내려주시옵소서!"

"으음···."

그러나 세르게이는 애초에 이 파벌을 주도하여 이끄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교회와 영주들의 추대를 받고 있을 뿐, 애당초 권력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나마 그의 아내가 헤센 공국의 공녀라는 사실 덕분에 보위에 오른 다음 쉽사리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거라 여겨졌을 뿐이다.

그리고 이 또한 일단 쿠데타에 성공하여 보위에 오른 다음의 이야기지, 독일이 이탈리아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러시아가 안정되어있기를 바라는 이상 세르게이가 자기 뜻을 펼치는 데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결국, 그의 봉신들이 전쟁을 결정한 시점에서 세르게이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던 셈이었다.

"좋소. 그럼 시작합시다. 명심하시오. 짐이 보위에 오름은 러시아를 재차 안정시키기 위함이지, 분열시키고 약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오. 흐를 피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고, 결말은 신속한 것이 좋소."

"여부가 있겠나이까, 폐하."

"""세르게이 폐하 만세! 차르여, 영원하소서!"""

세르게이는 봉신들의 요구를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서 궐기를 선택했고, 그의 궁에서는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세르게이가 자기 뜻을 고집하는 대신에 빠르게 봉신들의 뜻을 수긍한 덕분에 사고를 당하고서 거의 곧장 봉기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봉기에 가담한 세르게이파 장교들은 차르의 병사들에게 미처 사태를 파악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서 공격할 수 있을 거라 예측했으나- 현실은 조금 다르게 돌아갔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이 돼지 새끼들아!"

투콰앙-!

오늘에만 벌써 두 번째 폭발음이었다. 알렉산드르의 거사가 세르게이 파벌에 명분만 주고서 막상 암살은 실패로 끝났음을 확인한 소피아가 곧장 겨울 궁전으로 달려가 그 입구에다가 폭탄을 집어 던졌던 것이다. 그녀는 비록 지도부의 뜻에는 공감하지 않았으나 최소한 명령에는 충실히 따랐고, 그들이 그녀에게 내린 명령은 세르게이를 암살하여 내전을 일으키라는 것이었다.

하다못해 일개 테러조직인 인민의 의지조차도 세르게이 파벌의 핵심인물들은 그의 뒤에 있는 교회와 영주들이지, 그 자신은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지도부에서는 세르게이가 죽음으로서 잠시나마 세르게이 파벌이 주춤할 거라 여겼고, 그 틈에 차르가 페트로그라드를 탈출하면서 내전이 발발할 거라 여겼다.

그렇기에 암살이 실패하면서 세르게이 파벌이 선공의 기회를 잡은 것은 딱 잘라 말하여 실패였다. 내전은커녕 선제공격에 나선 세르게이 파벌이 단번에 차르를 내쫓을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세르게이에게는 불행하게도 소피아는 대단히 총명했고, 그녀는 암살이 실패했음을 파악하자마자 겨울 궁전 근처에서 폭탄을 터뜨려 차르와 그의 병사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성공했다.

"도대체 어째서 저들이 우리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진정으로 이건 형님 폐하께서 꾸미신 일이었다는 말인가?"

위풍당당하게 병사들과 함께 겨울 궁전에 입성하려던 세르게이는 아연실색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와 그의 병사들이 궁에 도착할 무렵, 겨울 궁전에서는 책상이나 식탁과 같은 가구들을 창밖으로 집어 던지며 임시로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있었다. 누가 봐도 임전의 준비였다.

이는 그 무렵까지도 알렉산드르 3세의 소행이 아닐 거라 믿고 있던 세르게이의 믿음을 크게 배신하고 있었다.

"기어이 저놈이 나를 잡으려고···! 네놈은 내 동생도 아니다! 어찌 네가 나에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이더냐!"

이는 알렉산드르 3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직접 마차를 공격당한 세르게이와는 달리, 궁전 근처에서 폭탄이 터진 정도였던 알렉산드르 3세로서는 폭도에 의한 테러라고 여겼기 때문에 미하일 대신에 궁전을 지키던 알렉세이 브루실로프라는 장교가 곧 전투가 시작될 테니 서둘러 궁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하였을 때도 그리 내켜 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브루실로프의 생각이 옳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방이 러시아군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저들이 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알렉산드르 3세는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것이다.

"짐의 병사들은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이더냐!"

"부르셨습니까, 폐하."

"···허허허, 진정 이곳에 있는 이들이 전부인가? 고작 해봐야 이 1개 연대가 짐이 가진 전부인가!"

알렉산드르 3세는 절규했다. 되려 덤덤했던 것은 브루실로프였다. 그는 차르의 추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말했다.

"폐하, 우선은 옥체를 보전하는 일만 생각하소서. 미하일 원수가 조련하신 동토의 정병들이 니콜라이 전하의 지휘를 받으며 폐하께서 당도하시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나이다. 역도들의 오합지졸들 따위가 어찌 비할 바가 있겠습니까?"

"그래, 그랬어.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구나!"

그제야 알렉산드르 3세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들은 그가 믿어 의심치 않던 병력이었다. 페르시아 전쟁 무렵부터 그와 함께해온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사달이 나기 전부터 태자 니콜라이를 보내두기도 했다. 말이 좋아서 지휘지, 그냥 피신일 테지 만 말이다.

자신의 자식이긴 해도, 니콜라이에게 그만한 병력을 다룰 수 있는 재능이 있다고는 믿지 않던 알렉산드르 3세였다.

"하지만 저 역도들의 포위가 만만치 않은데, 무언가 방도가 있겠는가?"

"영국인들에게서 사들인 기관총을 몰래 분해하여 정원에 흩어두었습니다. 지금 제 병사들을 시켜 재조립하도록 하였으니, 곧 길이 열릴 것입니다."

"하하하! 굉장한 기책이로구려! 내 모스크바로 가거든, 꼭 경에게 포상하리다!"

알렉산드르 3세는 광소하였다. 그리고 그의 광소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정원에서는 고막을 찢는 폭음이 연달아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건 브루실로프가 준비해온 것이 아니었다. 궁을 포위한 반란군이 겨울 궁전을 향하여 야포를 쏘아대는 소리였다.

땅이 뒤흔들리고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비록 포격에 휩쓸리지는 않았으나, 알렉산드르 3세는 그의 병사들이 반란군의 포격에 휩쓸려 나가는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이 풍선보다 가볍게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알렉산드르 3세는 이를 갈며 외쳤다.

"지금 당장 저 빌어먹을 역도 놈들에게 그 우라질 놈의 기관총을 퍼붓도록 하시오! 알겠소? 저놈들을 깡그리 쓸어버리란 말이오!"

알렉산드르 3세는 포효했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양, 겨울 궁전을 지키는 위병들 또한 포격과 함께 궁전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한 반란군을 향해 기관총을 퍼붓기 시작했다. 톱으로 나무를 써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고, 한순간에 수십 명의 병사가 저마다 팔다리 하나씩을 잃고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렇게 먼저 달려나가던 전우들이 비명 한 번 내보지 못하고서 바닥을 나뒹구니, 절로 반란군의 태세가 위축되었다.

"총원 착검!"

그리고 그 틈을 놓칠 위병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목표는 어떻게든 길을 내어 차르를 도망치게 해주는 것이었지, 궁전을 지키는 게 아니었다. 애당초, 궁전을 끝까지 지키기에는 반란군이 너무나도 많았다.

또다시 폭음이 울려 퍼지고, 벽이 허물어지며 흙먼지가 튀었다. 반란군의 포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위병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착검하였고, 길을 내야만 했다.

드르륵, 하고 기관총이 포격을 틈타 전열을 재정비하려던 반란군을 휩쓸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위병들은 일제히 바리케이드에서 뛰쳐나와,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전군 돌격하라! 폐하께서 옥체를 피하실 길을 내야 한다! 폐하를 모신 기병들이 궁을 떠났음을 확인한 다음에는 모두 항복하여도 좋다! 주여, 차르를 보우하소서!"

"겁먹지 마라! 주께서 우리 러시아와 함께해주고 계신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도다! 이 악랄한 폐주의 앞잡이들아,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지켜주마!"

함성이 울려 퍼졌다. 바로 어제까지 제국을 위하여 어깨를 나란히 하던 병사들이, 서로를 향해 증오를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총검으로 배를 쑤시고, 개머리판으로 두개골을 까부수면서, 천상의 신과 각자의 차르를 위하여 고함을 내질렀다.

진영은 둘이었으되, 흐르는 피는 하나였다.

홀로 하늘을 우러러보는 사자(死者)의 눈동자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 흐르는 피 > 끝

ⓒ 리첼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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