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365화 (365/530)

< 새로운 전장 >

전쟁은 변하였다. 이는 이미 지난 대전에서 누구나 실감한 사실이었다. 전쟁은 더 이상 신사들의 유희나 낭만이 아니었고, 전쟁에서 패한 것도 아니고 단지 전쟁을 수행하는 것만으로 한 나라가 무너질 가능성마저 내포하였음을 보였다. 전쟁은 그것을 시작하는 것만으로 국가를 파탄 낼 수 있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괴물이 되었다고 하여 두려워하며 끝낼 수도, 끝내서도 안 되는 법이 아니겠는가. 각국의 군인들은 이 새로운 전쟁에 관하여 가지각색의 대답을 내놓았다. 러시아는 더욱 공격적이며 인명을 가볍게 소모하는 저돌적인 돌파전략을 제시했고, 프랑스는 참호의 저지력을 믿고서 반격에 집중된 교리를, 영국은 대포의 화력으로 참호를 짓뭉갠다는 화력우세교리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모든 혁신에는 한 가지 공통적인 점이 있었다. 인류가 전쟁이라는 것을 처음 발견한 이래로 줄곧 전장을 지배해온 전열은 마침내 버려졌다. 더는 병사들은 줄을 맞추어 걷지 않았다. 그런 무식하고 우직한 돌격이야말로 패전을 앞당길 뿐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병사들은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산개한 채로 적의 참호를 향하여 돌격하여야 했다. 그래야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병사가 적의 참호까지 다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각오하고서 돌격한 병사의 용맹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장교들은 한 사람이라도 많은 병사를 살려서 적의 참호에 다다르게 할 방법을 고안해내야만 했다.

기관총 지대 돌파를 위하여 방탄모와 방탄조끼를 몰아받은 흉갑보병대는, 그들이 고안해낸 해결책 중 하나였다.

휘이익!

"돌격! 돌격! 돌격-!"

벌써 몇 번째 호루라기 소리일까. 다섯까지 세본 것을 마지막으로, 프리츠는 이 이상 세기를 포기하고 있었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을 무렵에는 이미 입에서는 괴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고, 침을 질질 흘려대면서도 몸은 거칠 것 없이 참호에서 뛰쳐나와 적진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이때가 프리츠가 가장 싫어하는 순간이었다.

온몸을 철모와 철제 방탄조끼로 둘둘 말고 있다 보니, 참호에서 나오려고 할 때마다 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서 휘청거리던 것이다. 지금이야 이렇게 한걸음에 달려 나올 수 있었지만, 이전에는 몇 번이고 미처 참호에서 나오지도 못하고서 뒤로 나자빠지는 바람에 뒤에서 순번을 기다리고 있던 전우를 깔아뭉개기도 했다.

"만세···컥!"

그의 곁에서 함께 뛰쳐나오려고 했던 운 나쁜 전우-아마 막스라고 했던가-가 참호를 기어오르다 말고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나자빠졌다. 미처 방탄조끼가 지켜주지 못하는 목을 정확히 관통당한 것이다. 적진의 저격수가 참호를 겨누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꺽 꺽 하고, 거위가 우는 듯한 우스꽝스러운 소리가 귀를 더럽혔다. 그 우스꽝스러운 단말마가 푸젠에서 온 청년의 유언이었다. 진흙탕에 얼굴을 처박고서 그 위를 허우적거리던 육신은 어느샌가 실이 끊어진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멈추어,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만세! 만세! 만세-!"

프리츠는 더욱 세차게 고함을 질렀다. 조금이라도 불안을 덜기 위함이었다. 혹은, 전장의 광기에 몸을 맡기고서 더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잡념이 많을수록, 운이 나쁠수록 빠르게 목숨을 잃어가는 잔혹한 전장이었다.

프리츠는 다만 있는 힘껏 몸을 앞으로 숙여 파탄면적을 줄이고, 손에 쥔 소총을 더욱 거세게 움켜쥔 채로 달리고 또 달렸다.

"프리츠! 이 멍청한 자식! 그쪽은 교회 쪽이다! 또 라우라 아가씨랑 밀회나 즐기러 가는 건 아니겠지!"

그런 그를 멈춰 세운 것은 뒤에서 들려온 소대장 루덴도르프 소위의 날카로운 고함이었다. 그제야 프리츠는 움찔하고서 고개를 들어 전방을 바라보았다. 소위의 말대로, 그의 행로로 똑바로 따라가면 있는 기차선로 너머에는 붉은 적십자를 내건 낡은 교회가 있었다.

라우라는 라인란트에서 왔다는 적십자사의 간호인이었다. 졸지에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있는 적십자사의 건물에 뛰어들 뻔했다는 생각에, 프리츠는 얼굴을 붉혔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왼쪽이다! 왼쪽이란 말이다! 좌향좌! 훈련소에서 그것도 안 가르쳐 줬나!"

"아, 아닙니다!"

"안이 아니라 밖이다, 이 멍청한 자식! 하여간에-."

루덴도르프 소위의 고함은 이내 아득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포성 소리에 막혔다. 족히 수 킬로미터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걸 알아도, 프리츠는 이 대포 소리만 들으면 오금이 지리는 듯하였다. 어렸을 적에 그토록 두려워하였던 천둥소리도 이와 같지는 않았다.

그건 악마의 포효였다. 죄 없고 힘없는 청년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악독한 사신의 귀기 어린 웃음소리였다. 프리츠는 무심코 다리에 힘이 빠지고 만 것을 깨달았다. 긴장한 탓인지 시야가 너무나 좁아져서 마치 작은 창을 통해 세상을 내다보는 것만 같았다.

프리츠는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힘을 쥐어짜 내기 위함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7시 방향이면 우리 사단 포병이 있을 방향인데."

"예?"

"아무것도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우린 영광스러운 프로이센의 군인으로서 책임을 다할 뿐이다! 그렇지 않나, 프리츠 사병!"

인상을 쓰며 나지막이 뭐라 중얼거리고서는, 이내 소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언제나처럼 프리츠의 등을 발로 걷어찼다. 그 탓에 진흙탕 위로 엎어져 버렸지만, 고통을 내색해서는 안 되었다. 프리츠는 곧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당장 돌격하도록! 이 굼벵이 자식! 저 멀리 네 버러지 친구들 꽁무니나 쫓아가란 말이다!"

소위는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오른손에 쥔 권총을 하늘 위로 들어 올려 세 차례 방아쇠를 당겼다. 빵, 빵, 빵! 자신을 겨눈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도, 프리츠는 그 소리가 무서워서라도 다시 앞으로 달려나가야 했다. 이번에는 방향을 착각할 일도 없었다.

프리츠는 있는 힘껏 배에 힘을 불어넣고서 고함을 내질렀다.

"만세-!"

고함을 내지르며 프리츠는 머리가 새하얗게 표백되어가는 걸 느꼈다.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이 전장에 서면 머리는 언제나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이야기 밖에는 지껄이지 않았다. 이런 쓸모없는 머리는 차라리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나았다.

베를린 대학에서 심사위원으로 일하던 시절의 그라면 감히 생각지도 못할 놀라운 발상이었으나, 그는 이것이 옳다고 믿었다. 적어도 지금 그는, 참호를 꿰뚫기 위하여 준비된 한 사람 몫의 인간 탄환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저 멀리에서 앞서 달려가는 전우들의 뒷모습을 보였다. 프리츠는 그 뒤를 쫓는 것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투타타-!

그리고 그의 목표는 최악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정면에서 톱으로 쇠를 긁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옴과 함께, 앞서가던 전우들이 나란히 바닥을 나뒹굴기 시작한 것이다. 프리츠는 한눈에 무엇이 시작되었는지 깨달았다.

"제기랄! 적 기관총 진지다! 모두 죽기 싫으면 엎드려!"

멀리에서 들려온 선임의 목소리에 프리츠는 반사적으로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러고 나니 진흙으로 질척거리는 군화를 신나게 앞뒤로 흔들던 것이 그리워졌다. 기관총 사격은 그 뒤로도 한참을 이어졌고, 이따금 폭음과 함께 진흙탕을 기던 전우들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운 나쁘게도 지뢰를 건드린 것이다.

그렇게 공중으로 날아오른 전우들은 두 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기관총 사격에 노출된 전우들조차 운이 좋으면 철제 방탄조끼가 탄환을 막아줘 뼈가 부러지기는 했어도 열심히 바닥을 나뒹굴며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보여줬지만, 그 비싼 방탄조끼로도 지뢰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시발! 거 와스터라이히 쥐새끼들, 탄약 한번 오지게 챙겨왔나 보네!"

"쫄지 마라! 어차피 조만간 과열돼서 당분간 못 쏠 거다! 그때 대갈통을 총검으로 쑤셔주면 그만이야!"

겁에 질려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은 신병들이었고, 어떻게든 고함을 내질러 병사들을 진정시키면서 철조망 지대를 향해 등으로 기어가 철조망을 하나하나 잘라내고 있는 건 선임들이었다. 그리고 고참들이 죽음을 각오하고서 철조망을 자르는 동안, 부사관들은 슬쩍 고개를 치켜들고서는 적 참호를 향해 엎드려쏴하며 시선을 끌어주었다.

프리츠는, 그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지도 못하였고, 그렇다고 고개를 들고서 견제사격을 해주거나 직접 등으로 철조망 지대까지 기어갈 용기도 없었다. 그는 그저 조금이라도 이 지옥 같은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도했을 뿐이다. 1초가 100년과 같았다.

콰쾅-!

저 멀리에서 또 한차례 포성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웠다. 프리츠는 조금 전 루덴도르프 소위가 그쪽에 사단 포병대가 있다고 했던 걸 기억해냈다. 그렇다면 포격을 뒤집어쓴 것은 우군 포병대라는 것일까. 조금 전 돌격에 앞서 마구 포탄을 퍼부은 탓에 적 포병대에 위치가 발각되었는지도 몰랐다.

"이 이익···!"

프리츠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자꾸만 스멀스멀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으로 기어들어 오고 있었다. 조금도 기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잠시만 방심해도 끝없이 새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그의 두뇌를 원망하고 있었다.

"됐다!"

그때였다.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가 그는 그것이 에리히 선임하사의 목소리라는 걸 기억해냈다. 무엇이 됐다는 것인지야 뻔했다. 어젯밤 적 공병대가 얼기설기 복구해 놓은 철조망 지대가 철거되었다는 소리였다. 돌격의 신호였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한 프리츠는, 진흙탕에 미끄러져 다시 얼굴을 처박았다.

그리고 그것이 요행이 되었다.

투타타-!

조금 전 어느 이름 모를 하사가 말한 대로 총열이 과열되어서인지는 몰라도 침묵한 기관총 진지와는 또 다른 방향에서 기관총 사격이 시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무심코 고개를 치켜든 순발력 좋았던 병사들은 그대로 총탄에 미간을 꿰뚫려 유명을 달리했다.

그건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진지였다. 달리 말하여, 그들은 적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에리히의 외마디 비명은 그들 모두의 기분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 곧 좌우로 교차하여 총탄이 마구 퍼부어졌다. 그것은 희생양을 노리는 사신의 낫과도 같았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들면 사신의 낫은 금세 그 머리를 베어 버렸고, 운 좋게도 철모가 총탄을 막아주더라도 그 충격에 기절한 병사들은 진흙탕에 코를 처박고서 익사하고는 했다.

"우리 인간 사냥꾼 새끼들은 도대체 뭘 한 거야! 온종일 사내새끼들이 땀 뻘뻘 흘리는 거나 훔쳐보는 호모 자식들! 쓸데없는 구더기들! 도대체 온종일 관음이나 하면서 뭘 한 거야!"

죽음을 앞둔 병사의 단말마로서는 더없이 처절하고, 외설적인 외침이었다. 온종일 적 참호를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는 저격수들이 당연히 알아챘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외침이었다. 동시에 저격병이 저 기관총 사수를 침묵시켜줬으면 하는 기대를 담은 외침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총탄은 계속 퍼부어졌고, 이제는 누구도 감히 고개를 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나뿐이었던 적이라면 모를까, 두 정의 기관총이 좌우에서 이쪽을 노리는 판국에 용기 있게 몸을 일으켜 세워봐야 개죽음을 당할 뿐이었다.

콰앙-!

이번에도 또다시 포성이 울려 퍼졌다. 지금까지 중 가장 가까운 곳에서 울려 퍼지는 폭음이었다. 프리츠는 몸을 떨었다. 어쩌면, 후방에 있는 그들의 진지가 포격에 휩쓸린 것인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불안을 뒷받침하듯, 뒤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한 바람이었다. 그러나 프리츠는 그 시원함을 즐길 수 없었다. 그것은 포탄이 터지면서 이 근방에 흩뿌린 충격파임이 분명했다.

결국, 견디다 못한 에리히 선임하사가 비명을 질렀다.

"후퇴! 후퇴! 모두 기차선로 너머까지 후-."

"누가 후퇴하라고 했느냐, 이 썩은 양배추만도 못한 자식!"

그러나 그의 외침은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소대원들은 모두가 설마 하는 시선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한 손에는 권총을, 다른 한 손에는 장교용 장도를 빼 들고서 달려온 루덴도르프 소위가 위풍당당이 서 있었다. 바지가 조금 진흙에 젖어 뭐 싼 것처럼 엉거주춤 서 있는 것이 조금 볼품없었지만 말이다.

물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소대원들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소대장의 복장이 아니라, 그가 기관총이 퍼부어지는 와중에도 우둑하니 서 있다는 사실이었으니까.

루덴도르프는 칼을 마구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돌격! 모두 돌격해, 이 구더기 같은 놈들아! 내가 돌격하라고 했을 텐데! 내 명령이 들리지 않는다면, 이 장도로 그 귓구멍을 손수 후벼주겠다!"

절로 눈앞이 캄캄해지는 명령이었다. 그런데도 누구 한 사람 이의를 제기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유야 알 수 없어도, 아무튼 소대장은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는 와중에도 제자리에 서서는 단 한 발의 총알도 맞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무언가의 가호를 받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그들이 단체로 허깨비를 보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명령은 명령이었고 그들은 명령이 내려진 이상 따라야만 했다. 아직 호루라기 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아직 사령부는 공세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한숨조차 내뱉지 못하고서, 소대원들이 하나둘씩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콰앙-!

폭음이 울려 퍼졌다. 아니, 태풍이 불었다는 표현이 정확할지도 몰랐다. 그들의 머리 위로 무언가 묵직한 것이 지나가더니, 다음 순간 터무니없는 굉음과 함께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울렸다. 가까스로 일어선 소대원들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서 바닥에 널브러졌고, 널브러지지 않은 이들은 뒤이어 날아온 거센 바람에 따귀를 맞고서 나자빠졌다.

마지막까지 제자리에 우둑하니 서 있던 것은 루덴도르프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무언가 굉장히 감동적인 광경이라도 본 것처럼 촉촉한 눈매로 정면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제야 프리츠는 정면을 보았다.

거대한 버섯 모양의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도대체 뭐야, 저게?"

프리츠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는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적진에서 폭발이 일어났으니 일단 우군에서 발사한 무기라는 것은 확실했으나, 저만한 위력의 포탄이 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한눈에 보아도, 적 참호는 반쯤 기능을 상실한 듯했다. 그토록 세차게 퍼부어지던 기관총 세례는 언제부터인가 사라졌고, 시야 너머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본래 형상을 알아볼 수 없게 망가진 참호와 불타고 있는 적 병사들뿐이었다.

"뭘 넋 놓고 있는 거냐, 프리츠! 이 얼빠진 자식! 아직도 내 명령을 듣지 못했고 말할 작정인 건 아니겠지!"

그의 의식을 깨운 것은 또다시 뒤에서 들려온 소대장의 잔소리였다. 그제야 프리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전우들은 이미 저 멀리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소총을 손에 쥔 채로, 총검을 겨누고서 말이다.

"돌격해, 이 멍청아! 돌격하란 말이다! 저 와스터라이히 쥐새끼들의 대갈빡에 총검을 쑤셔 넣으라고!"

"와, 와아아···!"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몸은 움직이고 있었다. 프리츠는 고함을 지르면서 정면을 향하여 내달렸다. 단숨에 적 참호에 뛰어들자니, 얼빠진 적병들이 보였다. 그들의 시선은 저 멀리, 적십자사의 교회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 조금 달랐다. 그들의 시선은 그보다 조금 아래에 열차선로에 고정되어 있었다.

프리츠는 흘끗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거대한 열차가 있었다. 온통 새까맣게 도색한, 터무니없이 거대한 대포를 실은 열차가 말이다. 그제야, 프리츠는 그간 들려온 포성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조금씩 가까워져 오던 포성은, 저 열차에 실린 대포가 내는 소리였던 것이다.

와스터라이히의 병사는 코앞까지 다가온 프리츠를 멍하니 올려다보며 말했다.

"하, 항보-."

빠각!

그러나 불운하게도, 프리츠는 미처 듣지 못하고서 개머리판을 휘둘러 얼빠진 청년의 두개골을 깨부쉈다.

아니, 듣지 못한 것으로 치기로 했다.

< 새로운 전장 > 끝

ⓒ 리첼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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