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강도 >
한참을 그렇게 얼굴을 붉히고서 침묵하던 완복소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을··· 귀한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재차, 귀빈과 마주할 수 있었음에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어딘가 물기 어린 대답이었다. 분하고, 또 분해서, 당장에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만 같기도 했다.
그러나 소년왕은 그 모든 충동을 끝까지 억누르고서,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설령 겉치레일 뿐이더라도, 감사 인사까지 전하면서 말이다.
'호오.'
이원철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그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동시에 이원철은 필사적으로 이 소년왕이 무엇 탓에 이런 치욕을 감수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려 애썼다.
아무리 상대가 지금의 월남보다 압도적으로 강대한 한국에서 온 특사라지만, 이 소년왕은 좌우지간 한때 제국을 자칭했던 월남의 왕이다. 부족함을 지적당했다면 기분이 상하는 게 당연하고, 외교적 모욕으로 간주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소년왕은 참고서 고개를 숙이는 길을 택했다. 이원철은 다시 크게 뜬 눈을 가늘게 좁혔다.
'조금 더 캐내 볼 보람이 있겠어.'
"과찬이십니다. 아직 갈 길이 먼 부족한 작자의 주제넘은 지적이었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혹, 아바마마께서 이번 일을 알게 되신다면 크게 노하실 텐데, 그것만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습니다."
이원철은 일부러 허점을 드러내 보았다. 만일 소년왕의 동기가 자신의 명예나 평판을 위해서였다면, 조금이라도 기뻐하거나 비웃는 기색을 보여줄 터였다. 너무나 위대한 부황과 부황의 그림자 아래에서 신음하는 태자라는 건,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구도도 아니었으니까.
이를 대놓고 비꼬거나 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으스대는 모습 정도는 보여줄 터였다.
"단언컨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귀공께서 저를 놀리고자 제 부족함을 지적하신 것도 아닐 텐데 어찌 이를 불쾌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소년왕은 넘어가지 않았다. 그건 단순히 평판이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물론 조심스러워 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앞서 보여준 허점투성이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렇다면···.'
"그럼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기로 할까요. 우선 이것만은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대한국은 아직 불란서와의 관계를 재고할 의사가 조금도 없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아닌 말로, 황제 이형의 마음은 프랑스를 떠난 지 오래다. 대외적으로 조선을 극동의 프랑스로 만들고자 나라를 개항하고 반평생을 바쳐온 극동의 대표적인 친불 인사라는 평판과는 정반대로, 이원철이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이형은 딱히 프랑스에 어떠한 동경도 품고 있지 않았다.
이형에게 프랑스는 그저 이용할 필요가 있는 타국일 뿐이다. 그리고 그 프랑스는 코친차이나 양도 건으로 말을 뒤집으면서 이형의 신뢰를 잃었다.
당장 적대하지는 않더라도, 그동안의 동맹 관계가 유지될 가능성은 아무래도 희박하다.
"···그렇겠지요. 구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해서는 저도 익히 들었습니다. 전황은··· 불란서의 압도적 우세라지요."
완복소의 안색은 단번에 어두워졌다. 제아무리 꼭두각시일 뿐이라지만, 꼭두각시라고 바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꼭두각시이기에 어떻게든 왕으로서 존중받기 위해서라도 더욱 많은 것을 익히고 배울 필요가 있다.
그래야지만 언제건 대체될 수 있는 물건 따위가 아니라, 이용할 가치가 있는 손 패가 될 수 있다. 소년왕은,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구주의 이야기 정도는 알고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대단히 인상적이더군요. 【도버로의 행군】이라고 했던가요? 과연 구주 최강의 병사들다웠습니다. 어떻게 전장에서, 수차례의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평시와 다를 바 없는 행군속도로 요새지대를 돌파할 수 있었는지. 참으로 놀랍더군요."
"그렇···지요. 대단히 인상적, 이었습니다."
"특히 그 참호지대를 돌파하다니요. 세상에나! 그 노서아의 강성한 기병들조차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서 쓸려나가던 참호마저 대수롭지 않게 돌파하는 그 강성함이란! 제아무리 구주에서 최초로 참호를 도입한 것 또한 불란서라지만, 놀랍지 않습니까?"
이번에 이원철은 고의로 프랑스를 띄워 줬다. 마음에도 없는 사탕발림이었다. 유럽에서 제아무리 잘나가봐야 무슨 소용인가. 유럽에서 120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다고 해봐야, 프랑스가 아시아까지 그 120만 대군을 파병할 수 있을까? 그 반의반도 안 될 병사들이, 아홉 제후국과 대한제국을 모두 합하면 장장 300만을 넘어서는 합종군과 맞설 수 있을까?
대답은 회의적이다. 이미 아주조약기구는 다른 대륙에서 함부로 침범하기에는 너무나 강성해졌다. 그렇기에 이제 더는 안에서 썩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오려 하는 게 아니던가.
하지만-아무리 마음이 없는 말이라고 해도, 그 프랑스의 실질 통치를 받는 어린 소년왕의 마음을 후벼 파기에는 너무나 충분하다.
소년왕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서, 조용히 물었다.
"···불란서에 함부로 대항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고자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빨리 볼 일이나 말하라는 뜻이 내포되어있는 말이었다. 이원철은 생각하지도 않고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오. 고작 그런 이야기일 리가 없지요. 제아무리 불란서가 우리 대한의 우방이라지만, 저들이 먼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앞질러 움직여줄 의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째서 자꾸만 저를 자극하려 하십니까?"
완복소는 물기 어린 눈동자로 이원철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에 눈동자에 담겨 있는 건 분노가 아니었다. 체념과 절망이 가득했다. 이원철은 직감적으로 이 이상 이 어린 왕을 자극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정신적 충격을 줄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여기까지인가.'
"우리 아주조약기구의 설립이념을 실현하고, 아주의 맹주로서 소명을 다하기 위함입니다."
무미건조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 대답에 완복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번에 이원철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눈치챈 것이다.
아주조약기구의 설립이념이 무엇이던가? 아주 열국이 더불어 힘을 합쳐 함께 외적에 맞서고, 함께 번영하며, 그리하여 독립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것을 실현하고, 맹주로서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서라는 대답은 너무나 많은 것을 상상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휘익!
완복소는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일국의 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비굴한, 그리고 어딘가 처절하기까지 한 움직임이었다. 그만큼, 이원철의 한마디는 간절했던 것이다.
"불안하십니까?"
"또 누굴 놀리···!"
"죄송합니다. 정중히 사죄드리지요. 전하의 절박함을 시험해 보았습니다. 사안이 사안이었던 까닭에,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었습니다."
이원철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물론, 이 또한 반만 진실이었다. 그가 일부러 완복소를 압박했던 것은, 단지 그가 얼마나 절박한지에 대하여 시험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대강 파악한 덕분이었다.
'일단 이 소년의 절박함은 진짜다. 고작 해봐야 열두 살짜리의 연기조차 간파하지 못할 거면 태자 위는 이쯤에서 사양하는 게 옳아. 그리고 이 소년은 확신하건대, 다른 누군가의 선의보다는 다른 누군가의 적의가 더욱 익숙한 부류다.'
이원철은 완복소에게 섣불리 선의를 베풀 필요도, 그래서도 안 된다고 판단했다. 괜히 선의를 베풀면서 마음을 녹이려 해봐야 소용없다. 도대체 이런 열두 살짜리 소년이 벌써 이렇게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았는지 몰라도, 섣불리 선의를 베풀어봐야 의심만 살 거라는 게 자명했다.
이런 경우에는 아예 대놓고 이용해주겠다고 나서는 게 나았다. 인간과 인간의 정이라는 무형의 신뢰가 아니라, 문서화 된 계약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심어주기 위해서 이원철은 일부러 고압적으로, 그리고 외교적 무례를 감수하고서라도 완복소를 시험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반응은 기대했던 대로였다.
"험, 험!"
처음에는 이원철을 멍하니 바라보던 완복소는 이내 과장되게 헛기침을 해댔다. 어린아이가 일부러 어른을 흉내 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고 있다 보니, 굳이 애쓰지 않아도 그가 들떠있다는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시험을 통과했다는 사실이 기쁜가 보군.'
이원철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어린아이를 속이는 것 같아 썩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시험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설령 있다고 해도, 소년왕이 어떤 반응을 보였건 간에 적당히 고난을 준 다음 시험을 모두 통과했다고 해줬을 것이다.
그가 완복소에게 주려고 했던 것은 한국이 소년왕과 진지하게 교섭에 임하고자 하고 있다는 강한 인상을 주어 한국을 신뢰하게 하는 것이었지, 정말로 이 소년왕이 어떤 인물인가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미래는 모르는 일이니만큼 앞으로 완복소가 진정한 월남의 왕이 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그가 어떤 인물인가 간략하게나마 알아보려 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알았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요. 그래서, 언제쯤 시작하실 예정입니까?"
"그것은 제 선에서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군요. 그렇지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뭐든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참, 겨우 실마리가 보였다고 생각되니 곧장 이렇게 달려드는 건가. 절박한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원철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쉬웠다. 그야,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일이니 당연하기도 했지만, 한국에서 아주 열국의 독립을 영국에 요구했다는 사실만으로 감탄하고 신뢰의 눈길을 향하는 게 보였다. 물론 완복소에게는 대단한 사실이겠지만,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그런 가십거리가 아니라 한국이 구체적으로 월남을 지원하기 위해 어떤 계획과 구상을 품고 있는지가 아니겠는가.
지금 이원철은 그저 막연하게 한국이 아주의 해방을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아직 12살짜리 소년왕에게 많은 걸 바라서도 안 되겠지만, 고작 그것만으로 언제쯤 봉기하면 되겠느냐니, 불란서인들의 처분을 맡겨 줄 수는 없겠느냐느니 하고 김칫국부터 먹고 있는 소년왕은 아무리 봐도 진지한 교섭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아직 어리고 미숙하기에, 이용하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당장에, 이원철은 지금 직접적인 약속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뿐인 약속, 기한도 제약도 없는 언약. 상황이 틀어진다면 언제든지 뒤돌아서서 모르는 체하기에 적절한 선을 긋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이용하기 쉬운 패를 불란서가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서 내줬다고?'
이원철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열강은 기본적으로 모두 강도집단이다. 한국도 포함해서 말이다. 열강이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서 이렇게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패를 내줄리가 없다. 분명히, 무언가 꾸미고 있는 것이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불란서에 가장 절실한 건···.'
병사의 피. 이 머나먼 아시아 땅에서, 프랑스의 승리를 위하여 흘려줄 타국의 피.
이원철은 문득 고개를 들어 프랑스 공사관이 위치한 방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프랑스 공사관에서 바라고 있는 대로 움직인 꼴이라는 건 자각했다. 프랑스가 짜놓은 판 위에서 놀아난 거라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도, 불쾌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불쾌해할 이유부터가 없었다.
그 프랑스가, 고작 한국이 피를 흘려주기를 기대하여 이렇게 훌륭한 패를 그냥 내주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딱 한 가지였으니까.
'절실한가 보군. 그것도 매우.'
이원철은 환히 웃었다. 그의 사랑하는 동생이 보는 앞에서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추악한 환희로 가득 찬 웃음이었다.
외교관에게 있어서, 아직 자리에 앉기도 전에 원하는 바와 그 대가로 제시할 수 있는 것 두 가지를 제시한 자들과의 거래만큼 손쉬운 일도 없었다.
* * *
그리고 이원철의 예상대로였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오, 제독. 극동까지 명성이 자자하더구려."
"하하하, 그런 말씀 마십시오. 모두 허명일 뿐입니다. 저야말로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호오, 어떤 이야기였소?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번쯤 들어보고 싶구려."
"어이쿠, 실례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요. 듣자 하니 사자의 심장과 천사의 상냥함을 지니신 분이라더군요. 그리고 이렇게 직접 만나 뵙게 되니,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걸 잘 알겠습니다. 장차 극동의 정당한 주인이 되실 분을 만나 뵙게 되어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하하하! 모두 허명일 뿐이라더니, 제독이야말로 과인을 부끄럽게 하는구려. 과찬이오. 아직 아바마마에게 비하면 한참을 멀었소."
그날 오후, 이원철은 그랑디에 제독을 만났다. 형식상으로는 완복소의 초대로 후에 황성에서 열린 연회였지만, 이원철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당장에 그 주인공은 처음 연회가 시작할 때 잠깐 얼굴을 보였을 뿐, 피로하다는 이유로 금세 연회장을 빠져 나간지 오래였다.
이원철은 연회장을 떠나기 전 그에게 도움을 청하던 소년왕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었던 건, 월남의 왕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도움을 바라는 어린 소년이었다. 그러나 이내 이원철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곳은 값싼 동정으로 움직여도 좋은 자리가 아니었다.
대신 그는 현 월남의 실질 통치자, 그랑디에 코친차이나 총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초조해하는 기색은 없군.'
물론 겉으로 보이지 않도록 애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초조하지 않다면, 완복소가 그리 간단하게 만나게 해줄 리가 없다.
이원철은 잠시 입을 다물고서 그랑디에가 먼저 말을 걸 때까지 기다렸다.
"베트남은 어떠십니까? 아름다운 나라지요?"
'역시나.'
그러자 곧장 그랑디에가 말을 이었다. 마치, 대화가 잠시라도 끊어지는 걸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이원철은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야 물론이오. 듣던 대로 아름다운 나라였소. 왜 진즉 오지 않았는지 후회될 지경이더구려."
"하하, 그 정도입니까?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이거야 원 낯간지럽군요. 꼭 제 손으로 제 낯에 금칠하는 꼴 같아서 말입니다."
"하하, 그러소?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것들 진귀한 구경거리투성이다 보니, 조금 마음이 들떴는지도 모르겠소."
이원철은 웃었다. 가식적인 웃음이었다. 그랑디에 제독은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이원철은 그의 표정 변화를 눈에 담아두며, 샴페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입안에 퍼지는 알싸한 맛이 그에게 상처에 비수를 꽂아 비틀어줄 기회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머지않아 세계대전의 전화가 이 인도차이나까지 미칠 거라 생각하니,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그랑디에 제독은 가만히 이원철의 눈치를 살폈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확연히 보이는 모습이었다. 한국에서 도움을 줬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이원철의 반응을 살핀 것이다.
이원철은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그건 너무 지나친 걱정이구려. 도대체 어째서 세계대전의 전화가 월남까지 미친다는 말이오? 월남에서 이번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는 소식은 아직 듣지 못하였소만."
"물론 그렇습니다만, 시간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저 간사한 영국인들이 인도차이나의 항구지대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요. 이 아름다운 도시도 저 영국인들의 포악한 군홧발 아래에 짓밟힐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그런 문제라면 과인이 도울 수 있을 것 같구려."
이원철의 대답에 그랑디에는 환히 웃었다.
그러나 뒤이어진 대화는 그가 기대한 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항복하시오."
"···예?"
"손뼉도 맞부딪혀야 소리가 나는 법이 아니겠소. 항복한다면, 싸울 일도 피가 흐를 일도 없지. 아니면, 무기를 버리고서 도망치는 것도 한 방법이겠구려. 어떻소? 이 나라의 안위만을 생각한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이 아니오?"
이원철은 백치처럼 순박한 미소를 만면 가득히 띄우며 말했다.
< 날강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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