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다쟁이 >
그랑디에 제독의 얼굴이 붉어진 것은 그와 동시에서였다.
"지금 누굴 놀―."
차마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서 입을 다문 것은 그의 마지막 인내심의 발현이었으리라. 그러나 이미 늦은 다음이었다. 물론 이원철이 항복이라는 군인에게는 둘도 없을 수치를 논한 것도 있겠지만, 좌우지간 상대는 한국의 황태자다.
화를 낸다고 해도 보다 적절한 방법이 있을 테고, 항의한다고 하면 이보다 더욱 정갈하고 신사적이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면서 삿대질하기 직전에 손을 멈칫하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서 적절한 예법이 못 된다.
이원철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이었나? 그렇다면 사죄하겠소. 아무래도 과인이 너무 과했던 모양이오."
"아, 닙니다. 다, 제가 부족한 탓이지요. 아직도 제 노기 하나 누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례에··· 사죄드립니다."
그랑디에 제독은 이를 악물고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귀는 시뻘겋게 물들고서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이 전혀 제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죄하는 방식도 그리 좋다고 평가할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서, 무례에 사죄한다-라는 짧은 한마디. 만일 그랑디에 제독이 더욱 유리한 위치라면 이걸로도 상관없겠지만 지금 상호 간의 우열은 누가 봐도 이원철의 우위다.
일국의 황태자 겸 특사라는 지위를 봐도 그랬고, 먼저 원하는 것과 제시할 수 있는 패를 동시에 내밀면서 절박함을 보인 점에서도 그랬다. 만일 지금 이원철이 마주하고 있을 상대가 총독 겸 제독이 아니라 공사였다면, 능숙하게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을 터였다.
'결국, 극동- 그것도 본국의 관심에서 멀어진 변방 식민지의 총독이라는 것이겠지.'
이원철은 회심의 미소를 떠올렸다. 사실 그가 젊다 못해 외교가에서는 어린 나이로도 두각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큰 이점 중 하나는 객관적으로 극동에 파견된 인사들의 질적 수준이 현저히 낮다는 점도 있었다.
아직 젊다 못해 어린 이원철이 상대하기 어려운 진짜배기들은 어차피 이형의 상대였지 이원철의 상대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실무에서 뛰어나더라도 아직 지위가 낮으면 황태자라는 격에 맞지를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격에 맞추기 위해서 총독처럼 객관적으로 높은 지위와 막강한 권세를 누리고 있는 이가 마중 나오면, 이들은 대부분 평생을 행정관료 혹은 군인으로 살아온 인물들이었다. 외교관에게 있어서는 세 치 혀로 농락하기에는 너무나 손쉬운 상대들이었던 셈이다.
차라리 지위는 조금 낮더라도 공사나 현지의 사업가가 마중 나왔다면 승산이라도 있었겠지만, 일국의 황태자 겸 특사를 상대로 그런 이들을 내미는 건 한국에 시비를 거는 거나 다름없다. 결국, 격에 맞추어도, 격에 맞추지 않아도 이원철의 상대들은 손해를 봐야 하는 셈이다.
물론 이는 반대로 말하자면, 만일 정말로 서구 열강이 본국에서 파견된 진짜배기 특사를 보내어 이원철을 맞상대하려 들면 열에 아홉은 이원철이 손해를 보는 거래로 끝날 것이라는 이야기도 되었다.
"아니, 되려 과인이야말로 사죄하고 싶은 심정이라오. 아무래도 과인이 군에는 까막눈이 다 보니 경과 같은 긍지 높은 무인들이 과인의 참견을 모욕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였소. 내 정중히 사죄드리리다."
"그건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어찌 제가 황공하옵게도 전하께 사죄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허허허, 거 사람 무안하게 하기는. 내 알겠소. 그럼 이 일은 없었던 일로 해둡시다. 음, 조금 어지럽구려. 아무래도 술기운 탓에 실수했던 모양이오."
하지만 그것이 이원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건 아니었다.
이원철은 멋쩍게 웃으며 조금 전 자신의 발언을 술자리에서 일어난 말실수로 묻어버렸다. 그리고 이는 그랑디에 제독을 머쓱하게 만들어, 반강제적으로 화제를 돌려야 할 필요를 만들었다.
은근슬쩍 한국이 이번 세계대전에서 프랑스의 손을 들어주었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꺼내려 밑밥을 깔고 있던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하오나-."
"하지만 오늘 과인의 조언을 진지하게 귀 기울여 주었으면 좋겠소. 과인이 알기로 영길리는 아직도 강대하오. 비록 육상에서는 귀국 불란서와 우리 대한의 반도 안 되지만, 해상에서는 그 어느 나라도 비교 선상에 놓을 수 없지 않소.
한데, 이 월남은 귀국 프랑스의 해군이 담당하고 있잖소. 물론 수치스러울 수는 있으나, 이길 가망조차 없는 무의미한 항전에 부하들과 월남 백성을 희생시키는 일이잖소. 명예는 언제라도 회복할 수 있으나, 사람의 생명은 하나뿐이오. 과인은 무엇보다 생명을 중시하라 부탁하고 싶소."
그런데도 화제를 돌리지 않고서 이원철에게 거듭 한국의 참전을 청하려고 나서자, 이원철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또 한 번 '조언'을 건넸다. 물론 말이 좋아서 조언이지, 입 다물라고 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면서도 이원철은 놀리는 기색은 하나도 없이 어디까지나 진중하고 사려 깊은 모습을 유지했다. 상대를 놀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이것이 자신의 신념이라고 명확히 보임으로서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지더라도 함부로 반박할 수 없도록 밑밥을 깔아둔 것이다.
이것이 단지 연기라면 모르겠지만, 이 신념만큼은 이원철이 가슴 속에 담아두고 있던 진실한 것이었다. 10의 거짓보다는 1의 진실과 9의 거짓이 더욱 잘 먹히는 법이었고, 이번에도 그러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바는 알겠습니다. 그러나-."
"자자! 그럼 어두운 이야기는 이쯤 하고서 즐거운 이야기를 해봅시다. 오늘은 월남에서의 기념할만한 첫날이잖소? 오늘만큼은 그런 복잡한 이야기들은 모두 내팽개쳐두고서 마음 편히 쉬고 싶구려! 이게 종단철도도 아직 가다듬을 부분이 너무 많소. 내 특제열차에 그것도 특실에서 몸을 눕혔는데도 너무나 피곤하더구려.
이게 과연 예산과 시간만 있으면 기술자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인지 아니면 시간과 기술의 발전이 해결해줄 부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오. 제독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예, 예?"
"어이쿠, 이것 참. 실례했소. 생각해보니 피차 너무 낯선 주제였구려. 그럼 주제를 조금 바꿔보리다. 혹시 샌프란시스코에 가본 적 있소? 과인도 이번에 처음으로 가봤는데 듣던 대로 굉장히 번영한 도시였소. 그와 같은 도시가 불과 반백 년 만에 뚝딱 만들어졌다니 참으로 놀라운 시대가 아니오? 아, 그러고 보니 샌프란시스코에 관하여 이야기하자면 그에 앞서 미리견에 어쩌다 가게 되었는지도 이야기해야 하겠구려.
만국박람회는 잘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하오. 이게 전쟁이 한창이라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알다시피 내후년이면 우리 대한에서 만국박람회를 열기로 하였잖소? 그래서 내 친조부 되시는 분이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새크라멘토에 머물고 계셔서 말이오.
조부께 문안을 드리는 겸사겸사 미리견에서는 어찌 행사를 진행하였는지 눈동냥을···."
그래도 그랑디에가 우물쭈물하자, 이제 이원철은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 번도 쉬지 않고서, 단 한 번도 혀를 깨물지도 않고서, 기관총 같은 속도로 말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줄곧 하면서 상대의 입을 틀어막아 버린 것이다. 여기까지 오니 그랑디에는 입을 떡 벌리고서 그저 멍하니 이원철을 바라보았다.
뒤늦게나마 자신이 완전히 말려들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이원철은 조금도 상대하지 않고서 계속 장광설만 한참을 늘어놓았다.
15분, 30분, 1시간, 2시간··· 그렇게 2시간 30여 분을 끝도 없이 떠들고 나서야 이원철은 말을 멈추었다.
"그럼 오늘은 즐거웠소, 제독. 분명 하잘것없고 지루한 이야기였을 텐데, 끝까지 귀 기울여 주다니 고맙소. 이거 폐를 끼친 것 같아 미안하구려. 이렇게 사려 깊은 줄은 미처 몰랐소."
"아닙, 니다. 별말씀을요···."
물론 그랑디에가 사려 깊은 인물이라서 끝까지 이원철의 장광설을 들어줬을 리가 없다. 어떻게든 치고 들어갈 틈을 살피다 보니 어느새 2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을 뿐이다. 2시간 30여 분간을 이원철은 단 한 번도 소재가 고갈되는 일 없이 끝도 없이 자기 이야기만 했던 것이다.
결국, 그날의 연회는 그렇게 끝이 났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장광설만 듣다가 터덜터덜 돌아가는 그랑디에의 뒷모습은 처량하기까지 했다.
"실로 굉장하신 언변이십니다! 저 작자가 이리도 철저하게 농락당하다니, 참으로 굉장하십니다!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제게 가르침을 주실 수는 없으실는지요?"
처소로 돌아가는 길, 이원철은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한 원복소를 마주할 수 있었다. 시종-이라는 이름의 감시자들이 진즉 퇴장시키더니, 또 몰래 빠져나와서 연회를 남몰래 구경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거 곤란한데···.'
이원철은 내심 당황했다. 앞으로도 이용할 여지가 무궁무진한 상대에게 호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기보다도, 이 순수한 어린아이의 호의를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이 이원철에게는 꺼림칙했다. 그 시선이 꼭 의지할 수 있는 형을 보는 동생의 그것과 닮았던 까닭이다.
그건 이원철에게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약점이었다.
"물론입니다. 섬라(暹羅:시암)에 가기 전까지 일주일간은 월남에 머물 예정이니 시간은 부족하게나마 있습니다. 제가 아는 대로 모두 지도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완복소는 환히 웃으면서 이원철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포개어 잡았다. 이원철은 움찔했다. 어떻게 들키지는 않았지만, 마음의 동요는 절대 적지 않았다.
'···후우. 냉정해지자. 그래, 늦어도 이번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월남도 우리 아주기구에 합류할 거다. 이 소년에게 지금 호의를 베풀면, 장차 이 소년이 자라나 진정한 월남의 왕이 되었을 때 월남은 남아주 제일의 친한 국가가 되어줄 터···.'
억지로 냉정함을 가장하여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한 이원철이었으나, 그것이 자신을 속이는 일이라는 건 다름 아닌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뒤늦게나마, 그의 부황이 어째서 그리도 제 자식들에게만은 물렀는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그 뒤에도 그랑디에의 접근은 몇 차례고 이어졌다.
"좋은 아침입니다, 전하. 오늘 제가 찾아뵌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오! 제독! 어젯밤은 잘 들어가셨소? 경과의 담소는 정말로 즐거웠소. 한 1달 만이던가? 그간 내 담소에 끝까지 어울려주는 이는 누구 하나 없었는데 말이오."
"예, 예에. 그렇습니까?."
"그렇소! 마침 잘 오셨소. 안 그래도 커피라도 한잔할 참이었는데 이렇게 귀한 손님이 찾아와주니 더할 나위가 없구려! 같이 차나 들면서 어제 못다 한 이야기나 마저 해봅시다!"
이렇게 이원철에게 허락을 받아 밝은 얼굴로 자리에 앉아도, 그랑디에는 어김없이 얼이 빠져서는 이원철의 잡담만 줄곧 듣다가 돌아가야만 했다. 어떻게 비집고 들어가려 해도, 이원철의 잡담은 끝이 나지를 않았다.
달변이라는 경지가 아니었다.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직 서른도 안 되었으면서 무슨 이야깃거리가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 아무리 의도한 일이라고 하지만 사람이 어찌 저렇게 끝도 없이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는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흠, 흠! 대단히 감명 깊은 이야기였습니다. 하오나 전하, 지금은 그보다는 조금 더 무거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무거운 이야기라. 공이 그렇게 말하니 일전에 내 누이 정명 공주가 길렀던 작은 고양이가 생각나는구려. 이름이 아마 롤랑이었나 그랬을 거요. 그렇소. 수놈이오. 누이가 또래답지 않게 과묵하고 책을 좋아하는데, 특히 그중에서 귀국 불란서의 기사문학에 푹 빠져 살지. 아마 그 누런 놈을 데려온 것이 오늘처럼 어둑어둑한 안개가 끼었을 때였는데-."
아니, 그뿐일까. 억지로라도 헛기침을 하면서 화제를 돌리려고 해도 금방 그랑디에의 말꼬리를 잡아 엉뚱한 이야기로 넘어가고는 했다. 전쟁을 빙 돌려서 【어두운 이야기】, 【무거운 이야기】라고 하면 진짜로 자신의 일생 중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를 해버리는 식으로 말이다.
"청컨대 부디 한 번만 제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전하, 제가 이 자리에 온 것은 전쟁을 논하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날 세계를 불태우고 있는 이 거대한 전쟁에 대해서 말입니다!"
"전쟁이라. 참으로 끔찍한 것이지. 우리 인류문명이 그간 이룩해온 무수한 성취 중 꼭 한 가지 없애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전쟁일 것이오. 혹 미리견의 작가 마크 트웨인을 알고 있소? 과인이 둘째로 좋아하는 작가라오. 물론 첫째로 좋아하는 것은 우리 대한의 이해조라는 작가인데, 아직 펜을 잡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젊은 작가인지라 경은 잘 모를 거요.
듣자니 본업은 관료고 부업이 작가라던데, 마음 같아서는 어디 단칸방에 가두고서 평생 글만 쓰게 두고 싶지만, 태자라는 작자가 사사로이 나라의 녹을 받는 선비를 잡아 가둘 수도 없으니 원··· 에잉, 쯧."
"그런 이야기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전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각설하고서, 이 마크 트웨인이라는 자는 대단히 평화주의적인 인물인데. 이번에 신문에 비평하기를 「미주제국이여 영원하여라!」라고 했다 더 구려. 오늘날 미리견의 여론이 구주의 제국들과 다름없다는 것이지. 놀랍지 않소? 같은 미리견인들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 줄 뻔히 알고서도 당당히 주류 여론과 맞설 수 있는 참된 선비라니! 장차 우리 대한의 선비들에게도 본받으라 하고 싶었소."
그렇다고 아예 대놓고 【전쟁】이라고 지칭해도 마찬가지였다. 이원철은 아예 엉뚱한 이야기를 하거나, 마크 트웨인을 위시한 반제국주의 서구 지식인들의 이름을 빌려서 이야기를 빙빙 돌렸다. 물론 이원철이 그들에 대하여 깊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서책과 깊은 연이 있는 것은 그의 동생이지, 그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빈약한 지식으로도 이원철은 끝도 없이 이야기를 뽑아냈다. 결국, 먼저 지쳐서 돌아가는 건 그랑디에였고, 그렇게 그랑디에가 돌아가고 나면 이원철은 완복소와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고, 이틀이 지났다. 하릴없이 시간만 흘러 끝내는 이원철이 월남을 떠나기 하루 전이되어서야, 그랑디에는 눈을 질끈 감고서 이원철을 만나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귀국에 코친차이나를 이만 양도해 드리겠습니다!"
"흐음."
"월남에서도 이만 철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시내각으로부터의 지시였습니다. 폐하께서도 허락하였으니, 도중에 취소될 일은 없을 겁니다. 이걸로 됐습니까!"
"언제부터 철수하실 예정이오?"
"지금 당장에라도 시작하겠습니다. 대신, 이번 대전에서 본국과 함께하여 주십시오. 그것만이 조건입니다!"
그랑디에는 그렇게 한바탕 소리를 지른 다음에도 한참을 씩씩거리면서 이원철을 노려다 보았다. 이 한마디를 하려고 장장 일주일간을 하잘것없는 담소에 어울려줘야 했으니 열이 오를 대로 올랐던 것이다. 그것이 외교 석상에서 얼마나 불리한 언행인지 알아도, 이원철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럴 수밖에는 없었다.
'진즉 이럴 것이지'
이원철은 가만히 그랑디에를 바라보았다.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사실, 그라고 해서 일주일 내내 수다를 떨어야 했으니 여간 피곤한 것이 아니었다. 매일 같이 날달걀을 삼키고 한국에서 가져온 홍삼을 달여 마시지 않았더라면, 한 나흘째에 기력이 다하건 목이 쉬건 둘 중 하나는 당했으리라.
하지만 이원철은 웃지도, 그렇다고 피곤한 기색을 내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얼굴로 답했다.
"부족하오."
"···예?"
"그건 당연히 대한에서 받아야 했을 것을 그간 귀국에서 질질 끌어왔던 것이잖소. 뭘 선심을 쓰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지 도저히 모르겠구려. 못 들은 거로 할 테니 다음 조건을 말해보시오. 내 경청해 드리리다."
이원철은 추악한 미소를 만면 가득히 띄웠다.
< 수다쟁이 > 끝
ⓒ 리첼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