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안 >
"이, 이···!"
그랑디에는 차마 뭐라 답하지도 못하고서 이를 악물었다. 비꼬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웃어넘기지도 못했다. 이것만으로 그랑디에는 이원철의 상대가 아니라는 걸 입증한 격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후회하실 겁니다."
"후회하다니. 대관절 작금의 정세에서 어떻게 하면 대한이 후회하게 된다는 것인지 과인의 미천한 식견으로는 도통 모르겠구려."
"모른척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온 세상에 대서특필된 특종이었으니 보지 못하셨더라도 지금쯤 분명 들으셨겠지요. 아시겠습니까? 플랑드르는 유린되었고, 적들의 수도 런던까지는 고작 해봐야 40km만이 남아있을 따름입니다. 본국의 승리가 코앞이란 말입니다! 어찌 그걸 모르십니까!"
"글쎄. 설령 귀국 불란서가 런던을 짓밟는다고 한들 영길리의 인도양 함대가 순순히 무장을 해제할 거라 생각하시오? 영길리 왕실도 마찬가지요. 그들이 과연 항복하겠소? 차라리 저기 미주 즈음으로 도망쳐서 항전하는 게 현실적이지. 애초에, 지중해가 틀어막혔다고 하나 여전히 대서양은 영길리의 수중에 있을 텐데 미주로 도망치는 걸 막을 수 있기는 한 거요?"
이원철은 진심으로 어처구니가 없어 하며 대답했다. 만일 그가 서역의 사정에 눈이 어두웠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는 일전에 네덜란드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참여하면서 유럽의 정세를 대강이나마 눈에 익히고 왔다. 더불어 그의 아버지는 유럽의 정세를 알고자 한다면 둘도 없을 최고의 가정교사였다.
분명 프랑스가 승리를 앞두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거기에 의심할 여지는 없다. 그러나 저지대가 프랑스군의 군홧발 아래에 짓뭉개진 게 이번이 처음이던가? 이원철이 배우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장에 나폴레옹 대제 또한 저지대를 짓밟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그다음, 런던을 짓밟는 것에 실패하였을 뿐이다.
그랑디에의 가장 큰 실수는 상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 채로 섣부르게 접근하기 쉬운 정보만을 가지고서 이원철을 겁박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애당초 그건 본국의 사정이지, 귀하의 사정이 아니잖소. 그야 물론 영길리도 야만족은 아니니 항복하건 포로로 잡히건 귀하의 신변만은 보장해줄 테지만, 귀하의 함대와 병사들까지 무사히 불란서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구려. 저 영길리의 태평양, 인도양 함대와 맞서 싸울 수는 있소?"
"어렵지 않습니다! 충분히 가능하고 말고요! 우리 프랑스 대해군은 저따위 해적들에게 굴복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소? 그렇다면 이상하구려. 귀하부터가 저들의 공포에 굴복하고 있잖소? 그렇지 않다고 부정할 생각은 마시오. 정녕 귀하가 저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매일 같이 과인에게 그런 꼴을 당하면서도 장장 일주일간을 찾아오려 했겠소? 마음이 급했으니까 그랬던 거 아니오?"
이원철의 어조는 싸늘했다. 우선, 그랑디에를 칭하는 호칭부터가 경에서 귀하로 격하되었다. 누가 봐도 그랑디에를 면박을 주고 있음이 분명했지만, 그랑디에는 차마 반박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의 지적이 옳았던 까닭이다.
이원철이 뜬금없는 헛소리로 시간을 질질 끌면서 망신을 주기 시작했다면, 그랑디에의 올바른 대처는 이원철이 지칠 때까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원철이 자신을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물론 그랑디에 또한 급한 것은 마찬가지라지만, 이원철 또한 급한 건 마찬가지다. 월남에서 머무를 수 있는 시간부터가 한정되어있을뿐더러, 이번 기회에 코친차이나를 받아오지 못하면 그다음은 정말로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
그건 대한제국에 있어서도 절대 달갑지 않은 이야기다. 이제 와서 프랑스와의 인연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잘라내기에는 현 대한제국의 관료진 상당수가 프랑스에 유학을 다녀왔거나 프랑스에 유학을 다녀온 이들에게서 교육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당연히, 그들 대다수가 프랑스에 긍정적인 인상을 품고 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무의식중에서 프랑스를 중심으로 두고서 서구를 바라보고 있다.
당장에 재무부 장관인 어윤중부터가 대표적인 친불파가 아니던가. 아버지인 이형이야 그간 그래 왔듯이 여차하면 갈아치우면 그만이다고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이원철의 생각은 달랐다. 만에 하나라도 프랑스와 전쟁이 난다면 제국을 떠받치고 있는 관료진이 동요할 게 분명했다.
만일 그랑디에가 이런 이원철의 속내를 알았다면, 그는 어느 쪽의 인내심이 먼저 바닥나는가를 두고서 치킨게임을 시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이원철은 비릿한 미소를 띄웠다. 그랑디에는 이원철이 어떤 인물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서 월남에 왔는지, 어떤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서 다만 한국을 세계대전에 끌어들이기 위한 교섭 상대로 밖에는 여기지 않았다.
그것이 패착이 되었다. 그랑디에는 여전히 이원철에 대해서 수다쟁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자리에 섰지만, 이원철은 정반대로 그랑디에가 어떤 인물인가를 파악했다.
그 평가가 더없이 부정적이었음은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음이리라.
"거기에, 과인이 듣기로 영길리에게는 지금 이 극동과 태평양에 구형이라고 하나 3척의 전함이 배치되어 있다고 들었소. 물론 과장된 선전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1척 정도는 확실하게 있으니 저런 선전이 가능하지 않겠소? 그런데 지금 귀하의 수중에는 과연 몇 척의 전함이 있소?"
이원철의 지적대로 프랑스 동방함대에 전함 같은 건 없었다. 프랑스령 뤼순과 코친차이나에 주둔하고 있는 함대를 모두 동원해도 마찬가지다. 기함부터가 방호 순양함이다. 그나마 연식은 80년대로 이제 고작 10년이 넘어가고 있지만, 그래 봐야 순양함은 순양함이지 전함은 아니다.
그에 반해 영국 동방함대의 기함은 전함이다. 이 시점에서 프랑스 동방함대에 승산은 없다고 평해도 과언이 아니다. 낡은 구식함이라고 해도 전함을 보유하는가 아닌가의 차이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프랑스 동방함대는 항구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영국 동방함대의 손에 용궁으로 갈 것이고, 항구에 나오지 않고서 틀어박혀도 전함을 앞세워 해안요새를 무력화시킨 영국군의 손에 용궁으로 갈 것이다.
하지만 그랑디에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현실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 어째서 그런 사실까지! 설마···!"
"무슨 상상을 하는지는 몰라도, 틀렸소. 만일 동방에 귀국 소유의 전함이 있었다면 귀하가 가장 먼저 말했겠지. 이러이러한 전함이 있으니 영길리를 상대로 충분히 맞설 수 있다고 말이오. 그리고 설령 동방에 전함이 있었더라도 지금 즈음이면 도버 해협으로 갔을 테고 말이오. 아무튼, 지금 반응을 보아 하건대 전함이 없다는 것만은 사실인 모양이구려."
누군가를 원망하는 듯한 기색을 내는 그랑디에를 위해, 이원철은 그의 착각을 정정해주었다. 딱히 누군가가 배신한 것도, 몰래 월남에 심어둔 첩보원에게 첩보를 들은 것도 아니라 지금까지 그랑디에가 말했던 것만으로 유추해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랑디에는 그런 이원철을 귀신을 바라보듯 바라보았다.
이원철은 상관하지 않고서 말을 이어갔다.
"귀국에서 대관절 어째서 우리 대한의 참전을 원하는지야 잘 알고 있소. 그렇다면 사람이 조금 더 솔직하고 비굴한 맛이 있어야지, 아직 자존심이나 세우고 있을 거요? 자, 말해보시오. 귀하가 가진 걸 모두 까보란 말이오. 그럼 과인이 몸소 가격을 매겨주리다.
모두 가격을 매긴 다음, 우리 대한의 참전을 끌어낼 만큼 충분한 가치를 지녔는지 대답해 드리리다."
"···대관절 무엇을 더 원하신다는 말이십니까? 월남을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코친차이나도 내드린다고 하였습니다. 코친차이나의 총독으로서 제가 폐하와 의회에 부여받은 권한은 여기까지입니다. 저보고 역도라도 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랑디에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이 이상 조건을 제시하는 건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고 있으니, 월권행위를 저지를 수는 없다는 설명이었다. 이원철이 바라는 대로 조건을 추가하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반박한 것이다.
이원철은 그런 그랑디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를 이원철의 말문이 틀어막혔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랑디에는 계속하여 설명을 이어갔다.
"이 불쌍한 머저리를 살려준다고 생각하시고 이번 한 번만 물려주십시오. 이대로 가면 폐하께 죽건 저 해적들의 손에 죽건 하겠지요. 제 손주 놈이 지난달에 막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전 그걸 직접 보지도 못하고 전보로 겨우 들었습니다. 갈 때 가더라도, 손주 옹알이는 들어보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많이도 바라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대한의 병사들이 피를 흘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저 해적들이 북상하지 못하도록 남중국해까지만 함대를 끌어와 주시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부디 한 번만 사정을 봐주십시오!"
'직접 참전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라. 좋아. 여기가 저놈들이 양보할 수 있는 마지막 선이군. 그럼 이 선만 넘지 않으면 된다, 그 말씀이겠지. 이건 기억해 둬야겠어.'
"으음."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도, 이원철은 겉으로는 낭패라는 듯 신음을 흘렸다. 그랑디에의 마지막 발악이야 차마 눈 뜨고 봐주지 못할 만큼 어설펐지만, 그 발악 속에 프랑스가 양보할 수 있는 선을 발견했으니 이원철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남는 장사였다.
물론 이원철이 일부러 동요하는 척을 한 건 당연히 남는 장사를 거래해준 보답 같은 게 아니었다. 이렇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인간적인 정에 끌리는 약점을 내보여, 더욱 많은 정보를 얻어내기 위함이었다.
이원철은 곤혹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게 과인이 항복하라고 하지 않았소? 듣자 하니 군인의 명예를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꽉 막힌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쉬운 길을 제시해주어도 이리도 아등바등하는 것이오?"
"전하, 저 또한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습니다. 이미 누릴 건 모두 누렸고, 이미 노쇠한 이 몸에 연금 따위가 무슨 대수겠습니까? 해적들에게 항복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몸만 무사히 그리운 가족들의 품에 돌아갈 수 있다면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함부로 해적들에게 항복하면 황제 폐하께서 제 가족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인질이라는 말이구려···."
'이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고.'
겉으로는 안타까움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제독을 동정하면서, 속으로 이원철은 냉혹하게 기억할 필요 없는 정보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외지에서 왕처럼 살아가는 권신들을 제어하기 위하여 가족들을 인질로 잡는 일 따위 흔하디흔한 이야기가 아닌가. 놀라울 것도 없는 이야기다. 오히려 이런 조치가 없었다면 그쪽이 더 놀라웠다.
"나에게도 부인이 있소. 벌써 1달여간을 만나지 못하였지. 얼마나 참담할 심정일지 충분히 이해하오."
"으흑, 으흐흑!"
하지만 이원철은 그런 속내와는 별개로 계속하여 그랑디에의 신세 한탄에 어울려주었다. 처음에는 이원철을 흔들어보고자 감성적으로 접근한 그랑디에였으나, 막상 이원철이 협조적으로 나오니 먼저 감정의 둑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원철은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동요할 일부터가 드물었고, 설령 진심으로 동요하더라도 그간 쌓아온 여유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 반면에 그랑디에는 장장 일주일간을 늦둥이 아들뻘 되는 이원철에게 농락당하는 처지였다. 둘 중 어느 쪽이 속에 쌓인 한이 많은가 하면-당연히 후자일 수밖에 없다.
결국, 그랑디에는 감정의 격류를 이기지 못하고서 마구 자신의 이야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정반대로, 이원철이 경청하고 그랑디에가 말을 쏟아내는 구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잘것없는 신세 한탄을 경청하는 와중에도, 이원철은 계속하여 머릿속으로 기억해 둬야 할 것들을 정리해두고 있었다.
'불란서는 우리 대한의 참전을 원하지도, 동맹의 갱신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우리 대한이 조금이라도 영길리의 발목을 잡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코친차이나에 배치된 식민지군은 태반이 매우 질 나쁜 이들이거나 현지에서 태어난 경우. 이들 모두 본국에 홀대를 당하는 탓에 전의는 높지 않다.
병사들은 영길리와 싸우면 그들 대부분 죽거나 포로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본국의 결정에 불만을 품고 있다. 장교들은 전투 중 선상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있다. 제독은 자신의 함대가 적과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걸알기에 영길리와 싸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와중 본국은 한 척뿐이던 장갑 순양함과 방호 순양함 2척을 징발해갔다.
인도양이 막혀서 미리견의 양해를 받아 파나마를 통할 수밖에 없는데도 구태여 징발해 간 걸 보면, 아마 도버 해협에서의 일전이 어지간히도 부담스러운 모양이지. 본국이 이런 꼴이라면 당연히 곧 지원군이 올 확률은 없고,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우리 한국에 비벼봤다는 건가. 총체적 난국이군.'
"제가, 제가 이 나라를 위해 얼마나 심신을 다 바쳐 충성해 왔는데···! 황제 폐하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제국은 귀함대의 희생을 항시 기억할 것이오」. 불명예스럽게 항복할 바에야 저 해적 놈들과 용맹하게 싸우다가 전사하라는 뜻이 아니고서 이게 뭐란 말입니까!"
"어허.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나···! 참으로 유감스럽구려, 제독. 내 다 이해하오."
"꺼 허 헉, 꺼 허 엉···!"
끝내 울음을 터뜨리는 그랑디에의 등을 두드려주며 이원철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에는 그저 말을 맞춰주고 있었던 거지만, 듣자니 그랑디에의 사정도 딱하긴 했다.
안 그래도 전력도 부족한데 대서양에서 써야 한다고 그나마 쓸만한 전력은 징발당했지, 부하들은 엉망이지, 황제는 항복해서 국민들 사기를 떨어트릴 바에야 싸우다가 죽으라고 등 떠밀지. 설령 뼛속까지 조국을 향한 우국충정으로 가득한 인물이더라도 여기까지 궁지에 몰리면 조국을 향한 충정이 깡그리 증발하고도 남으리라.
물론 이원철이 그를 동정했다고 해서, 그가 그랑디에의 사정을 고려해 줘야 하는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원철에게는 때마침 그랑디에를 구해주면서 동시에 한국의 국익을 추구할 수 있는 명안을 떠올렸다.
'가만, 이거라면··· 충분히 가능하겠군. 어차피 꼭 참전이 아니라 견제만으로도 충분하다면, 견제에 우리 귀한 해군을 쓸 필요도 없는 거 아닌가?'
"사정이 참으로 딱하게 되었소. 어쩔 수 없구려. 항복하시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까지 제가 말하는 걸 뻔히 들으셨으면서, 도대체 뭔···!"
그랑디에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씩씩거렸다. 이원철이 그의 마음을 배신했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이원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덧붙였다.
"영길리에 항복하라는 것이 아니오. 우리 대한에 항복하라는 것이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대들 불란서 동방함대를 우리 대한에서 사들이겠소. 병사들과 장교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말이오. 어차피 이대로 두면 영길리의 손에 모조리 불타거나 가라앉을 전력이잖소? 그럴 바에야, 우리 대한에 넘기면 영길리도 우리 대한과 전쟁을 할 작정이 아니라면 섣불리 공격하지 않을 것이오.
그럼 영길리도 안달이 나겠지. 공격하자니 우리 대한과 전쟁을 하는 꼴이고, 또 무시하자니 소속은 우리 대한으로 넘어왔다지만 그대들은 엄연히 불란서 해군이니 말이오. 결국, 저들은 계속하여 함대를 주둔시켜야 할 테니, 그것만으로 귀국은 장차 다가올 도버 해협에서의 일전에서 적지 않은 이익을 얻게 될 수 있을 것이오.
과인의 제안이 어떻소?"
"오, 오오···!"
물론 한국이 제값을 주고 사들일 리는 없었다. 아닌 말로, 급한 건 프랑스지 한국이 아니니까 말이다. 대한제국으로서는 월남과 코친차이나를 얻는 김에 반의반도 안 될 헐값에 프랑스의 동방함대를 흡수하여 전력을 크게 늘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뿐일까. 동방함대가 내다 팔렸는데 프랑스령 뤼순이 무사할 리가 없다. 구태여 대한제국군까지도 필요 없이, 경찰이나 국가헌병대가 무기 하나 없이 맨몸으로 태극기만 꽂고 나와도 간단하게 점령될 게 뻔했다. 동방함대를 사들이면서 월남, 코친차이나를 확보하고 덤으로 뤼순까지 독점적 영향력 아래에 둘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이원철은 이 거래를 통해 점은 쏙 빼놓고서, 프랑스와 그랑디에 가 얻게 될 점만을 늘어놓았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으나, 진실을 모두 말한 것도 아니었던 셈이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겨우 활로가 보이는 듯하군요. 전하께서는 제 은인이십니다!"
하지만 그 효과는 더없이 확실했다.
그랑디에는 감격한 얼굴로 이원철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 속내야 아무튼, 그는 이원철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격이 되었으니 말이다.
"허허, 거 낯간지럽게 왜 이러시오?"
이원철은 볼을 긁적이며 멋쩍게 웃음 지었다.
이번만큼은 가식이 아니었다.
< 명안 > 끝
ⓒ 리첼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