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386화 (386/530)

< 기자의 책무 >

심문내용은 곧장 비밀회신을 통하여 한국에 전해졌고, 그 내용을 확인한 이형은 그 즉시 서신을 자신에게 가져온 궁인에게 되물었다.

"이 내용, 몇이나 알고 있나?"

"김옥균 장관, 유인태 서기관, 조영 과장, 그리고 황상뿐이십니다."

"흐음, 남태평양 과장 이름이 조영이었던가? 아무튼, 잘 됐군. 원철이 놈에게도 알리게. 단, 그 외에 새어나가는 일은 결코 없도록 하게. 당분간 백성은 물론이고 관료들에게도 비밀로 하지. 구태여 커져 봐야 좋을 것 하나 없는 일이야."

"하명하신 대로 따르겠나이다, 폐하."

이형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불란서 제36 해상 전투단 절멸】에 머물러있었다. 낭패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시지를 않았다. 분명 영국의 군함이 태평양에 멋대로 침범한 것은 짜증 나는 일이었으나 그걸 발견한 건 기쁜 일이고, 포로로 잡힌 장교가 아는 대로 모두 털어놓은 건 기특한 일이었다.

그것뿐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만일 영국군이 격침 시킨 것이 스페인이나 다른 나라들의 군함이었다면 이형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딱 한 가지, 바로 하필이면 태평양에서 침몰당한 것이 프랑스의 군함이라는 사실이다.

'안 그래도 이 나라의 식자층이라는 놈들이 프랑스에 진 은혜를 갚고 오랑캐 영길리를 토멸하자고 설치는 판국에, 우리 안마당이나 다름없는 태평양에서 사전에 항행을 양해받은 프랑스 함대가 영길리 함대의 기습공격에 절멸, 이라···.'

어떤 반응이 터져 나올지야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뻔하디뻔하다. 안 그래도 작지 않았던 참전여론이 금방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형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이야기였다. 분명 이형 또한 언젠가는 세계대전에 참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 탓에 참전여론을 어느 정도 방임하고 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은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다. 이형이 원하는 최상의 전개는 영국과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의 열강들이 충분히 힘을 뺀 다음 그때를 노려서 아주 해방을 명분으로 들이치는 것이었지 양측이 아직 건재한 상황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전개가 아니었다.

거기에 한국은 현재 모스크바 정권을 지지하면서 러시아 내전에 깊이 발을 들이고 있다. 아직 시베리아 횡단철도 공사는 반의반도 완성되지 못했고, 모스크바 정권은 한국으로부터의 미미한 지원과 병사들의 피 값,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을 방패로 힘겨운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와중에 프랑스의 손을 들어 참전한다? 일단 러시아와 남아시아에 제각각 전선이 형성되면서 양면 전쟁이 시작될 테고, 모스크바 정권이 받는 지원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그렇게 모스크바 정권이 몰락하면 이 기회에 러시아를 손에 넣겠다고 다짐한 이형의 야망도 물거품이 된다.

그뿐일까. 만에 하나라도 한국의 참전이 나비효과가 되어 프랑스가 기어이 런던에 상륙하여 완승한다면, 그 순간부터 프랑스는 유럽의 패자이자 단순한 열강 1위를 넘어선 초강대국에 등극한다. 유럽의 곡창 프랑스와 산업혁명의 근원지 브리튼 열도, 상업 대국 네덜란드를 동시에 손에 넣은 시점에서 설령 합스부르크라고 해도 프랑스를 제어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유럽 대륙을 평정한 초강대국의 등장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패권도전국인 한국에 있어서는 상정할 수 있는 최악의 전개다.

'···어떻게든 옥균이 녀석과 원철이 놈에게 수습할 시간을 벌어줘야겠어.'

이형은 이를 갈았다. 물론 황권은 아직 건재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여론이 뭐라고 하든 간에 다 무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최후의 선택지다. 기껏 권력을 분산시켜 이형의 사후, 절대 황권이 붕 떠버리는 전개를 피하려고 했는데 이번 일로 그렇게 권력을 분산해봐야 이형의 한마디에 모든 게 뒤집힐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말짱 도루묵이다.

지금은 힘으로 입을 다물게 할 때가 아니라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려야 할 때였다. 조금만 입을 조심하면 참전도 피하고 겸사겸사 영국에서 양보받을 것만 양보받을 수 있다. 그 후 영국을 몇 번 비난한 다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입을 싹 씻는 최상의 전개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영국도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번 일의 경중을 모를 리는 없다. 도버 해협이 위태로운 마당에 적을 늘리는 건 자살행위라는 걸 말이다. 영국은 한미의 참전을 막아내기 위해서라도 겉으로는 모든 책임을 포로로 잡혔다는 토마스 제독에게 떠넘길 테고, 뒤로는 한국과 미국에 협상을 제안할 터였다. 그 협상이 영국의 처절하기까지 한 양보의 연속일 거라는 건 눈 감고도 훤히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이형이 바라는 것은 토마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길 영국의 거짓말에 어울려주는 대가로 가능한 많은 양보를 챙기는 것이었다. 무엇을 받아낼지도 생각해뒀다. 해협식민지와 태국과 이순신급 전함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기술협력, 조금 더 바란다면 인도와의 직접 교역권까지. 거기까지가 이형이 머릿속으로 그린 최상의 협상안이었다.

'기껏 찾아온 기회다. 전쟁이 어떤 건지도 모르고서 무턱대고 프랑스에 은혜를 입었고 영국에 해를 당했으니 전쟁하자는 우라질 멍청이들 때문에 놓칠 수는 없지.'

"요즘 강이 그 망나니 놈은 조금 어떻던가? 그놈이 사내구실 정도는 해주고 있어야 이 몸 어르신도 며늘아기를 볼 낯이 있지 않겠나."

이형은 슬쩍 이강의 결혼생활을 떠보았다. 여론을 돌리고자 한다면 가장 쉬운 것이 가십거리를 제공하는 것이었고, 혹여나 황손이 생겼다면 그보다 강렬하게 인상을 남길 가십거리도 또 없었다.

더불어 황실에도 더할 나위 없이 경사스러운 일이고 말이다.

그러나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그···."

"아니, 되었다. 우물쭈물하고 있는 걸 보니 알 것 같군. 또 그 우라질 놈이 손만 잡고서 잠든 모양이지. 힘든 거야 안다가 만, 하다못해 시도도 안 하고 있으니 원··· 쯧."

"주, 죽여주시옵소서!"

궁인은 바짝 엎드렸다. 공포에 질려 반사적으로 나온 말리었다. 이형은 시큰둥하게 손을 휘저었다.

"됐다. 그놈이 겉으로 허세 떨어봐야 중요한 고비마다 궁상떠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어야지. 제 마누라 따라서 서울 구경이나 다니고 있으니, 저게 부부인지 소꿉친구인지 모르겠구나."

이형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기쁜 마음이 절반이고 아니꼬운 게 또 절반이었다. 그나마 빅토리아가 열심히 서울 구경을 다니고 있는 까닭에 빅토리아의 손에 이끌린 이강도 덩달아 바깥 공기를 쐬게 된 것은 다행이었으나, 기껏 혼사를 올렸더니 손주 소식은커녕 손주를 가지려는 노력조차 보여주지 않고 있으니 아니꼬웠던 것이다.

태자가 아직 소식이 없는 건 바깥을 빙빙 돌아서지 한국에 있을 때는 몇 번이고 끈덕지게 노력해왔던 걸 떠올리면, 아무리 몸이 병약하다지만 시도조차 안 하는 이강이 아니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늦둥이 녀석들 혼삿길을 미리 정해둬야 하나? 아니, 그건 아니지. 아직 철도 안 든 그 어린 녀석들은 이용해서야 어디 부모라고 할 수 있나. 하지만 조만간 무언가 가십거리를 크게 만들어주기는 해야 할 텐데, 으음···.'

이형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땅히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월남 독립을 약속받은 걸 큼직큼직하게 보도하게 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그 경우 안 그래도 현저히 높은 친불 여론이 하늘을 찔러 나중에 영국과 뒷거래가 끝난 다음 적당히 포장된 진실이 보도된 것만으로 여론이 폭주할 우려가 있었다.

무엇보다 가십거리는 가능한 한 프랑스와 관련이 없는 일이어야 했다. 만일 프랑스와 연관된 가십거리일 경우 하나는 비극, 하나는 희극으로서 시너지 효과를 내 프랑스에게 더욱 관심이 쏠리는 결과를 낳을 터였다.

'뭐, 아직 시간은 있다. 조금 더 느긋하게 생각해도 되겠지. 쯧, 이런 건 원래 가진이 녀석이 전문인데 하필이면 이럴 때 사고를 쳐서는···.'

"이만 들어가 보시게. 혹 오늘 밤에라도 강이 그놈이 사내구실을 하거든 곧장 내게 알리고."

"예, 옛! 명심하겠습니다!"

후다닥 자리에서 도망치듯 멀어지는 궁인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서, 이형은 몇 번이고 전문을 반복해서 읽었다. 무언가 빼놓은 것은 없을까 해서였다. 앞으로 처신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최악과 최상이 갈릴 테니, 평소 이상으로 조심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이형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가만, 하와이. 하와이라···."

이형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빼먹은 것이 있는 듯한데, 무엇을 빼먹었는지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이형은 차근차근 그가 떠올린 하와이에 관련된 정보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선 이번 일의 보복···은 당연하겠지. 제대로 된 군함을 가지고 싶었던 기분이야 충분히 이해하지만, 몰래 일을 꾸민 걸 가볍게 넘어가면 두 번째고 세 번째고 또 속이려 들 테니까 경고 차원에서라도 당연히 해야 하는 거고.

옥균이 녀석이 알아서 하겠지만, 또 뭔가 하와이 녀석들이 숨기고 있는 건 없는지 확인해보라고 해야겠군. 가령 동력부라던가, 이것저것 떼서 분해해본 다음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도 아닐 테니까. 그리고 미국···."

이형은 순간 아, 하고 입을 벌렸다. 그가 무엇을 까먹고 있었는지 기억해낸 것이다.

"가만 보자. 조지프 퓰리처의 전성기가 딱 지금 즈음이고. 그 양반의 신조가 분명―."

한 번 맥락을 잡자 결론은 빨랐다. 이형은 식은땀이 물 흐르듯이 흐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오랜만에 실감할 수 있었다.

이형은 머리를 짚으며 간신히 그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던 한마디를 내뱉었다.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다."

이형은 자리를 박차고서 일어났다.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띵해 왔다. 설령 한국에서 아무리 입단속을 철저히 해도 미국까지 조용할 수는 없다는 걸 떠올린 것이다. 한국이야 권위주의 사회이니 이형이 입을 다물면 그걸로 아무도 모르는 기밀정보가 탄생하지만, 미국은 특종을 쫓아 날뛰는 기자들 전부를 감옥에 가두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번 사건은 미국 언론역사에 길이 남을 희대의 특종이 될 터였다. 메인 함 사건이 그러했고, 루시타니아 호 사건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리고 조지프 퓰리처는, 그 특종을 사용하여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때까지 여론을 부풀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우라질."

기어이 머릿속이 새하얗게 표백되고 말았다.

이형은 강렬한 탈력감에 사로잡힌 채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 * *

대한제국 한성, 종로구.

"시답지 않구먼."

냉혹한 평이었다. 자신의 기사를 진중하게 읽어내려가는 편집장의 모습을 기대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던 젊은 기자의 얼굴은 한순간에 분노와 당혹감으로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편집장은 상관하지 않고서 계속하여 차갑게 쏘아붙였다.

"형편없는 기사야. 다시 써오게. 두 번 다시는 내 눈에 보이지 않게 하고. 한 번만 더 기사를 이따위로 쓰면 국물도 없을 줄 알게. 알겠나?"

"하, 하지만··· 이건 제가 1달여간 단독취재한 특종입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이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저희 언론인들의 책무는 잘 알려지지 않고, 사람들이 보지 않으려 하는 불편한 진실을 세상에 널리 알려 사회의 자정작용을 촉발하는 데에-."

"후,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 같으니까 말해주겠네. 우선 첫째, 기사가 시뻘게. 우리 독자분들은 이 나라가 얼마나 위대한지 이 도시가 얼마나 돈이 많은지를 알고 싶어 하지 자기 집도 없이 세 들어 사는 가난뱅이 패배자들이 게으름과 무식함에 절어 궁상떠는 이야기 같은 걸 읽고 싶어 하지 않아.

가난뱅이들이 학교도 제대로 못 보내고 있다고? 그러게 누가 부양할 돈도 없으면서 그렇게 낳으라고 강요라도 했던가? 코딱지만 한 급료로는 연탄 살 돈은커녕 땔감 구하기에도 부족해? 신문이라도 사서 태우라고 하게. 그럼 한 부라도 더 팔릴 테니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긴 하겠군.

그리고."

편집장은 젊은 기자의 미간을 검지로 쿡 하고 찌르며 덧붙였다.

"둘째. 언론인이라고 하니 조정의 언관이라도 된 기분인가 본데, 정신 차리게. 우리가 언제부터 나라의 녹을 먹고 살았나? 우린 독자들이 사준 신문으로 먹고사는 장사치들이야. 그리고 이런 식으로는 자네, 우리 신문에서 오래 못 버텨.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나?"

"···모르겠습니다."

"자극적인 맛이 부족하다는 거야. 이게 다 뭔가? 논문이라도 쓸 작정인가? 아직도 학부생인 줄 아는가 보군. 우선 소제목이 너무 형편없어. 【우리 모두가 도와야만 할 사람들】이라니, 아무리 학력만 보고서 뽑았다지만 이건 너무하는군. 신문도 한 번 안 읽어 봤나?

조금 더 짜릿짜릿하고, 사람들이 한 번 보고서 결코 잊을 수 없을 만한 글을 써오라는 말이야. 이번은 처음이라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줄 테니까, 당장 다시 써오게."

검지 손톱으로 젊은 기자의 미간을 지그시 누르며, 편집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미간에 자국이 남다 못해 살이 까져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편집장은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는 단지 서류를 내던지며 젊은 기자를 재촉했을 따름이다.

바닥에 뿔뿔이 흩어진 서류를 하나하나 줍는 건 당연하게도 기자의 몫이었다.

"쯧, 하여간에 지가 영웅이라도 되는 줄 아는 놈들만 해마다 늘어나고 있으니 원."

한양일보 편집장- 이완용은 잔뜩 기가 죽은 모습으로 자리를 뜨는 기자를 흘겨보았다.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이제라도 때려치우고서 다시 고시에 도전해볼까 싶었다. 물론 그럴 수는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높은 성적에도 번번이 등용문이 막혔던 것이다. 이완용에게는 누군가 고의로 자신이 권력을 잡는 길을 틀어막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도 이완용은 정계로 진출하고자 하는 뜻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택한 두 번째 길이 언론인이었다. 언론인으로서 명성을 차곡차곡 쌓아 장차 선거에 출마하여 의원이 되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이완용은 한양일보의 등용문을 두드렸고, 오늘날에 와서는 한양일보의 대들보가 되었다.

그의 성공비결은 간단했다. 한국의 그 어떤 기자들보다 자극적이고, 직설적이며, 외설적인 기사들을 써낸 것이다. 그중 태반은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저잣거리에 떠도는 가십거리에 적당히 그의 상상력을 더하여 창작해낸 가짜 기사들이었다. 아직 사진보다는 삽화를 주로 사용하는 한국의 언론환경은 이완용의 날조 기사들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리고 지금, 이완용에게는 그의 지위를 편집장을 넘어 한양일보의 이사진까지 끌어올려 줄 수 있는 특종이 수중에 쥐어져 있었다.

"그래, 이 녀석을 어떻게 조리해볼까···."

이완용은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그의 수중에는 영자기사가 들려져 있었다. 불과 하루 전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는, 조지프 퓰리처의 통칭 【워스파이트 호 사건】이었다. 당연하게도, 이 기사를 수중에 넣은 것은 한국에서는 이완용이 최초였다. 모두 그의 지저분한 인맥 관리 덕분이었다.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국인 사업가들에게 술과 여자 등을 바친 보람이 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완용은 이를 있는 그대로 번역한 기사를 신문에 실을 생각이 없었다. 표절이라던가 하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대로 번역해봐야 기사의 자극적인 맛이 부족해서 보다 자극적이고 강렬한 문구를 쏟아낸 후속 기사에 밀릴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것이다.

"가만. 태풍에 휩쓸렸더라··· 태풍이라고?."

한참을 영문기사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다 보던 이완용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당 기사를 써낸 기자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교전 사실을 부각했지 전투 후 영국 함대가 태풍에 휩쓸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고작 한 줄을 짤막하게 써놓았지만, 이완용의 생각은 달랐다.

"그래, 태풍. 태풍이라···. 그럼 이 시기 즈음에 태평양에서 상선 한두 척 정도는 가라앉았겠군. 아니, 가라앉은 배가 없어도 상관없지. 진짜 선명을 기재할 필요 없이 【태평양 해적의 실체! 영길리, 제 버릇 못 고치다!】 정도만 기재해도 알아서 다들 끼워 맞춰줄 테니까. 내가 할 일은 어떤 배가 사라졌고, 어떤 선주가 얼마나 손해를 봤는가가 아니라-."

이완용은 머리가 핑핑 돌아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머리가 저릿저릿해 오는 게, 살아있다는 실감을 느끼게 해주는 강렬한 충만감이 온몸 가득히 퍼져 나갔다. 이완용의 머릿속은 오직 한가지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어떻게 하면 더 자극적인 진실(?)로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결론은 간단했다.

"···태평양에서 영길리의 해적 행위에 맞서고자 출동한 불란서 함대가 우리 상선들을 지키다가 모조리 수장되었다고 써버리면 되겠군. 우선 유족들의 한마디 적당히 지어내고, 눈물 콧물 터트려줄 서정적인 삽화 하나 끼워 넣으면··· 완벽해!"

언제나 대로의 가짜 기사였다. 그리고 들킬 걱정도 없었다.

프랑스 함대는 용궁에 처박혔고, 유일한 증인이라는 영국 배는 투항했으니까. 애초에 문제시될 일도 없겠지만, 정 문제시되면 모르는 척 입을 다물어버리면 그만이다. 이완용이 입을 다물면, 사람들은 영국에 화내기 바빠 금세 이완용을 잊어버릴 테니까.

역사에 길이 남을 대성공을 직감한 이완용은, 남몰래 낄낄거리며 웃었다.

< 기자의 책무 > 끝

ⓒ 리첼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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