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나던 과거 >
그리고 이러한 폭주에 이형이 짜증···을 내기에 앞서서.
격분, 아니 칠공분혈을 하게 된 인물이 있었다.
콰앙-.
"이런 도움도 안 되는 라이미 자식들이!"
뉴욕, 월스트리트.
모건은 오늘도 탁상을 마구 내리치며 분노하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분노의 벡터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그는 영국에 분노하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원흉은 워스파이트 호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건 영국의 해적 행위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정말로 솔직하게 말하자면, 모건으로서는 해적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영국이 어떻게든 승리를 거머쥐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하고 있다며 칭찬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의 분전이야말로 그의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분노하던 원인은 해적 행위가 아니라, 멍청하게도 한미 양국에 들켜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언제부터 천하의 대영제국이 이렇게 어설펐지?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그걸 들킬 수 있는 거냐! 아니, 차라리 지중해나 대서양에서 들키던가 왜 하필이면 태평양이냐는 말이다! 혹시 일부러 날 먹이려고 이러는 건가? 진짜 일부러 이런 게 아니고서야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 망망대해서 들킬 수가 있지?"
모건은 마구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으득으득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던 것도 잠시, 금세 엄지손톱을 모두 까먹어서 살 씹는 소리만 울려 퍼지는데도 모건은 입술을 온통 피로 물들이며 계속해서 엄지손가락을 깨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 천에 하나라도 이번 일로 영국과 전쟁이 난다면 미 대륙을 통틀어서 가장 큰 손해를 볼 사람은 다름 아닌 모건이다. 이는 다름 아닌 모건이 금융인이기 때문이다. 지난 대공황 이후로 쇠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세계 제일의 금융중심지는 런던이었고, 모건과 월 스트리트는 런던에 막대한 금융자산을 지니고 있었다.
도중에 좌절되기는 했지만, 그의 야심은 영국과의 해운동맹을 통해 세계를 아우르는 자신만의 금융제국을 세우는 것이었고 그건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모건의 구상은 록펠러와 손잡고 윌리엄 매킨리를 내세워 영국의 우군으로서 이번 전쟁에 참전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세계대전에 참전한다는 부분이 아니라, '영국의 우군으로서'였다.
그래야지만 영국이 미국에 막대한 채무를 지면서 대공황을 맞아가면서까지 지켜낸 해운을 빼앗아 올 수 있었고, 또 그래야지만 모건의 야망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개 같군. 아주 개 같아. 상황이 아주 개 같아졌어! 매킨리, 그 미친놈을 무슨 수로 진정시키지? 도대체 돈을 얼마나 풀어야 그 광신도 놈의 입에서 국민 여러분 진정하십시오-하는 소리가 나오게 할 수 있지?"
모건은 엄지를 있는 힘껏 깨물었다. 그랬다. 모건에게 있어서 최상의 시나리오란 영국이 패망을 앞둔 절체절명의 순간에 날강도나 다름없는 조건으로 대영제국이 스스로 제 기둥뿌리를 가져다 바치게 하면서 프랑스까지 패망시켜 영불을 동시에 손에 거머쥐는 것이었다.
애초에 이 방법 외에는 그가 대서양을 거머쥐는 방법이 없었다. 황제의 철권독재로 나라가 굴러가고 있는 프랑스는 금융업자에게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곳이었고, 영국이 맨정신이라면 모건에게 제 기둥뿌리를 가져다 바칠 리가 없다. 그러니까 영국을 최대한 궁지에 몰고, 또 프랑스는 최소한 정권 교체를 강요하거나 자발적인 혁명이 일어나게 해야 했다.
그런데 워스파이트 호 사건으로 모든 게 꼬였다. 영국과 미국의 전쟁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가시권으로 들어온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영국이 미국의 아군이 아니라 적이 된다면, 당장에 적성자산으로서 런던에 두고 있던 막대한 금융자산이 압류당할 수밖에 없었다.
"록펠러··· 아니야. 그놈이 움직여줄 리가 없어. 카네기 놈도 마찬가지겠지. 그놈들은 좌우지간 전쟁만 나면 그만일 테니까! 결국, 피 같은 내 돈만 나가게 생겼군··· 으으으!"
모건은 진저리를 쳤다. 만에 하나라도 영국이 자국 내 적성자산을 압류하는 상황이 오면 모건은 이제 맨해튼에서 우화등선하는 수밖에 없다. 대공황 때야 영국 경제만 회복된다면 어떻게든 돌려받을 방법이나마 있었지만, 적성자산으로 압류되어 버리면 돌려받을 방법도 없다.
당장에 런던에 가장 먼저 입성할 나라가 미국이겠는가, 프랑스겠는가. 결국, 영국이 적성자산 압류라는 강수를 두는 순간 설령 프랑스군이 런던을 짓밟고 승전을 선포하더라도 모건이 돌려받을 수 있는 건 쥐꼬리만큼도 안 되는 먹고 남은 부스러기뿐인 것이다.
모건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국이 영국의 손을 들어주게 하여야만 했다. 이는 록펠러와 카네기라는 나머지 두 거물과는 차별화되는 점이었다. 록펠러야 전쟁만 나면 그만이고, 카네기는 한미가 서로 대판 싸우지만 않는다면 아무래도 좋았지만, 모건은 무조건 영국과 미국을 묶어놔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모건은 미국 국내만 어떻게 달래면 끝이 아니었다.
"···한국은 어쩌지?"
모건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어떻게든 까맣게 잊고만 싶었던 사실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한국이 프랑스의 손을 들어주는 순간, 미국에는 영국의 손을 들어준다는 선택지 그 자체가 사라진다.
이미 양대 해군대국인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으로 대서양 무역이 휘청이고 있는 마당에 한국과도 사이가 틀어져서 태평양 무역까지 휘청이면 그 순간 미국을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경제공황이다. 이런 현실이니, 매킨리가 아무리 패권주의 광신도라지만 지지자들에게 맞아 죽고 싶지 않은 이상 한국의 손을 들어주지 그 반대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최악은 그대로 참전이고, 최선도 영국을 표적으로 한 금수 조치다.
그러니 이제부터 모건이 해야 할 일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우뚝 선 매킨리의 입을 돈으로 틀어막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미 반쯤 눈이 돌아간 한국이 영국에 선전포고하지 않도록 막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중 전자는 돈으로 어떻게든 해결될 수 있었지만, 후자는 한국 재계에 아무리 돈을 퍼부어 봐야 황제인 이형이 개전을 결정해버리는 순간 헛물만 켜는 격이었다.
"카, 카네기. 그놈에게 어떻게든 해달라고 사정하면···!"
가장 먼저 모건이 머릿속으로 떠올린 건 카네기였다. 하지만 이내 그는 머릿속으로 그 선택지를 부정했다. 카네기는 지금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는지 알래스카에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구리광산을 찾겠다고 나선 상태였다. 아무리 봐도 광인의 소행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건 둘째치고서, 문제는 카네기가 몸소 알래스카에 처박혔다는 것이다.
이미 11월 말엽에 접어들어 혹독한 북방의 겨울이 찾아오고 있다는 걸 고려하면 지금 뉴욕에서 알래스카 최북단까지 갈 고생보다 차라리 태평양을 건너는 게 손쉬웠다. 물론, 그것도 겨울 바다를 건너야 한다는 조건이 붙기는 하지만 유빙에 겨울잠이 깬 곰에 별의별 장애물들이 쏟아져 나올 알래스카에 비하면 말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모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헨리! 헨리, 당장 이리로 오게!"
"예,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아무래도 한국에 다녀와야겠어! 당장 가장 빠른 쾌속선을 알아봐 주게! 지금 당장!"
"한국, 말씀이십니까···?"
헨리라 불린 비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결정 탓이었다. 물론 그 또한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잇는지야 눈동냥으로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국에 갈 필요까지 있을까-하는 생각이 앞섰던 것이다.
그러나 모건의 결의는 굳건했다.
"그래, 지금 당장! 군소리 말고 하라면 어서 하기나 하게!"
모건은 버럭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는 세상에 돈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중 하나가 이번 일일 거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한국의 황제가 돈 같은 세속적인 것에 무관심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건이 제아무리 많은 돈을 퍼부어 봐야 영국과의 전쟁이 현실화할 경우 인도와 남아시아, 그리고 아시아 대륙에서의 완전한 패권이라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이익을 보게 될 황제를 끌어당길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저울의 추가 이미 저쪽으로 확 기울여 버렸는데, 추 몇 개 얹는다고 다시 평형이 맞춰질 리가 없던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하나, 태평양에는 쾌속선이 다니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사온데-."
"그럼 가장 빠른 여객선이라도 좋으니까 표나 받아오게! 아니, 설령 화물선이라도 상관없네. 얼마를 써도 상관없으니까 연방정부를 구워삶아서 명분을 만들어와. 어떻게든 황제가 나를 만날 수밖에 없게 만들라는 말이야!"
"예, 옛!"
모건은 게거품을 물며 괴성을 질렀다. 누구 말이라고 감히 토를 달까. 하물며 오른손이 피로 물들다 못해 철철 흐르고 있는데도 아파하는 기색 하나 없는데 말이다. 모건은 카네기가 알래스카에 처박힌 걸 두고서 광인이라고 평했지만, 비서의 눈에는 모건도 반쯤 정신이 나간 미치광이였던 것이다.
결국, 비서는 고개를 숙여 예를 보인 다음 부리나케 자리에서 도망쳤다. 손을 온통 피로 적신 미치광이의 분노가 자신을 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세상에 그것보다 무서운 일이 또 없었다.
"쯧, 이놈이고 저놈이고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들어먹지를 않으니 원···."
그제야 모건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를 않았다. 뒤늦게 엄지가 욱신거렸다. 모건은 눈살을 찌푸렸다가, 뒤늦게 제 엄지를 확인하고서는 놀라 비명을 질렀다.
"뭐, 뭐야? 설마 이거 내가 이런 건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러지, 뼈가 새하얗게··· 아윽!"
한발 늦은 고통에 모건은 손을 움켜쥐고서 비명을 질렀다. 다시 비서를 부르려고 생각해봤지만, 그러면 배편을 구하는 일이 늦어질까 봐 두려웠다.
결국, 모건은 쇠바늘이 엄지손가락을 마구 쑤시는 것 같은 고통을 감내하고서 제 발로 의사를 찾아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 * *
한편, 모건이 한영전쟁을 막고자 한국행을 선택했을 무렵.
"어떻게 생각하시오?"
"무, 무슨 말씀이신지요···?"
"글쎄. 그냥, 지금 이 꼴을 보고서 무언가 하나쯤은 느끼는 게 있을 것 같아서 말이오. 어떻게 생각하시오?"
한쪽 팔을 괴고, 다리를 꼬고, 낮술을 거하게 걸치고서 이형은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꼭 몸은 그대로인 채로 정신만 청년 시절로 돌아온 것 같은 안하무인의 무례함이었다.
어째서 이런 태도인가. 그 이유를 묻는다면 말할 것도 없이 짜증이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퓰리처가 일을 저지르는 순간, 당연히 그에 호응해서 국내의 신문사들도 거하게 사고를 쳐줄 거라는 건 쉽게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언론이란 바로 이런 상황에서 가장 큰 이익을 볼 수 있는 직종이니만큼, 구태여 그걸 탓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언론이 언론했다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그걸 마음속으로 용서하는 건 별개의 일이 아니겠는가. 뒤에서 뭔가 조율해볼 새도 없이 곧장 뭐라도 성과를 내서 국민을 진정시켜야 했으니 이형으로서는 짜증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불행 중 행운이었던 것은, 다행히도 협상의 주도권은 철저하게 한국에 기울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프레더릭은 고개를 푹 숙여 이형에게 사죄를 표했다. 프레더릭은 낯빛이 꺼무죽죽하게 죽어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초에 이형에게 동방 식민지들을 독립시켜달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모자라 이제는 한국과 가장 가까운 인도에 머물고 있었다는 이유로 워스파이트가 하와이에서 발견하였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국으로 찾아가 욕받이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나마 이전에는 한국에 확 기울기는 했어도 협상이었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그냥 이형이 뭐라고 말하건 꼬박꼬박 고개를 숙이어야 할 처지였다. 이를 빌미로 한국이 영국에 선전포고한다면 설령 런던이 짓밟히지 않아도 대영제국의 미래에는 파멸뿐이었다. 당장에 프레더릭이 한국으로 떠날 무렵 전시내각에서 보내온 비밀회선에 실린 내용부터가 처절했다.
「당장에 인도를 내주라는 요구만 아니라면 뭐든지 받아들일 것.」
설령 인도를 독립시키라는 요구를 당하더라도 그게 지금 지금이 아니라면 수용하라는 이야기였다. 인도 독립은 결코 수용할 수 없다는 것에서, 이제는 지금이 아니라면 인도 독립도 고려해보겠다로 태도가 바뀐 것이다. 이런 훈령을 받고서 교섭에 나서야 했으니 프레더릭으로서는 기운이 날 리가 없었다.
장기인 화술을 살릴 수도 없이 욕이나 한 사발 질리도록 들으면서 날강도나 다름없는 조약에 제 명의로 서명하고 오라는 걸 훈령이랍시고 받은 처지였으니 이 또한 당연했다.
귀족의 책임이라도 없었더라면, 당장에 미국처럼 말도 통하고 적당히 부유하기도 한 나라로 도피성 이민을 결정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드릴 말씀이 없다, 라. 그러게 왜 드릴 말씀이 없는 짓을 하셨소. 아니, 했으면 들키지나 말 것이지. 덕분에 짐이 지금 얼마나 골치가 아픈지 알기나 하시오?"
"죄송합니다. 여왕 폐하와 의회를 대표하여 사죄드리겠습니다.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들키지 않겠다고 말하고 싶은 거요?"
이형은 피식 웃었다. 그것을 위협하는 거라 여겼는지 프레더릭이 움찔거렸지만, 사실 이는 딱히 위협했다기보다는 그냥 어처구니가 없어서라는 것에 가까웠다.
어디 영국이 해적질하는 게 하루 이틀이던가. 사실 토마스라는 제독이 자백하지 않았을 뿐 실제로 민간상선 몇 척 정도 남태평양에서 해 먹었어도 이형은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무선통신이나 위성항법이 있는 시대도 아니니, 설령 진짜로 영국이 그렇게 했다고 해도 알아차릴 방법도 없다.
문제는 그런데도 들켜 버렸다는 거다. 곱씹어 볼수록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영국도 일이 꼬였지만, 이형도 일이 꼬였다. 덕분에, 느긋하게 관조할 여유를 잃고서 조금 더 급하고 과감하게 움직이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형은 팔짱을 풀며 툭 한마디 내뱉었다.
"죄송하다는 말이야 누군들 못하겠소? 공허한 말이야 목이 쉬도록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할 수 있지. 중요한 건 성의를 보이는 것이지, 그렇지 않소?"
"그렇···지요."
프레더릭은 간신히 답했다. 이것이 본제라는 걸 직감한 것이다. 이미 인도 독립도 조건에 따라 수용할 수 있다는 훈령을 받은 시점에서 그에게는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 외에 달리 선택지가 없었지만 말이다.
이형은 입꼬리를 뒤틀며 말했다.
"호오, 보아하니 각오를 단단하게 온 모양이구려. 그럼 묻겠소. 어떻게 짐을 만족하게 할 생각이오?"
"아시아··· 식민지들의 독립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무리겠지만, 될 수 있는 대로 근시일 내에···."
힘없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당사자에게는 창자를 끊어내는 것 같은 고통을 감내하면서 간신히 내뱉은 처절한 약속이었다. 당장 생존을 위해 미래를 팔아 치우는 꼴이라는 걸 버젓이 알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래를 팔아치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래를 팔지 않으면 현재조차 살 수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조차 부족하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쁘지 않지만, 부족하구려."
"···그렇다면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대들이 아주에서 해왔던 모든 악업에 대하여 사죄해주셔야겠소. 우선은 인천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거로 시작합시다. 지금부터 아편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려면 갈 길이 멀지. 어서 시작해야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모두 사죄할 수 있겠구려."
프레더릭은 낯을 구겼다.
황제는 미래로도 모자라 현재를 위하여 빛나던 과거까지 팔아치우라 종용하고 있었다.
< 빛나던 과거 > 끝
ⓒ 리첼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