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391화 (391/530)

< 기도 >

영국과 미국의 단교와 이에 따른 주미대사 추방.

이는 직접적으로는 미국과 영국의 외교 파탄을 의미하였고, 간접적으로는 미국의 균형추가 프랑스에 기울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기실, 이 무렵 외교가에서는 이를 무겁게 받아들이기는 했어도 양국이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이를 결단한 미국 대통령 클로버 클리블랜드의 임기가 1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여, 클리블랜드가 임기를 마치고 내려오는 순간 새로이 구성될 공화당 정권은 다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다름 아닌 이번 대선에서 공화당의 손을 들어준 J.P.모건이 미국에서도 이름난 친영파였던 것이다. 실제로 소식을 들었던 영국 정계 또한 단교 소식에 충격을 받기는 했으나, 그저 우려를 표했을 뿐 이렇다 할 대응을 취하지는 않았다. 1달 후면 다시금 양국의 외교가 정상화될 수 있을 거라는 데에 희망을 건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영국의 희망 사항이었을 뿐이었고, 이 소식을 통해 전혀 다른 희망을 얻은 이들도 분명히 있었다.

"마침내 전능하신 주께서 우리 프랑스를 돕기로 하셨구나!"

나폴레옹 4세는 옥좌를 박차고 일어나 쾌재를 불렀다. 안 그래도 네덜란드 전역이 날로 지지부진해지고 해군의 비협조적인 태도 탓에 영국 상륙작전이 흐지부지될 위기에 처한 와중에 미국이 영국과 국교단절을 선언한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여전히 이탈리아와 비교해도 크게 나을 것 없을 이류 열강 즈음으로 얕잡아 보이고 있던 미국이라고 하나,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세계 3위의 해군은 달랐다. 국교단절과 대사추방은 어느 시대에도 전쟁이 임박하였음을 암시하는 중대한 사태였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왕립해군은 미국이 자랑하는 백색함대와 일전을 각오해야만 했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서 피가 흐를 것인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이유야 어쨌건 간에 왕립함대는 이제 더는 도버해협에 전력을 집중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한쪽 팔 정도는 서쪽에서 치고 들어올지도 모를 미국 백색함대를 견제하기 위하여 배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놓칠 만큼 나폴레옹 4세는 멍청하지 않았다.

"더는 기다려 줄 수가 없네. 이건 놓쳐서도 안 되고, 놓칠 수도 없는 천재일우의 기회야. 4주의 시간을 주겠네. 늦어도 내년 1월 초엽에는 침공을 개시해야 하네!"

"하오나 폐하, 저 저주받을 영국인들의 해적 행위 탓에 함대 집결이 날로 지연되어가고 있습니다. 과연 4주 안에 준비가 끝날 수 있을는지···."

"상관없소. 경도 이미 듣지 않았소? 미국인들이 우리 프랑스와 뜻을 함께해주기로 하였소. 비록 미국의 해군은 우리 프랑스에 비하면 미약하기 그지없으나, 그들이 나선 이상 영국인들도 저들에게 맞설 전함을 준비해야 할 것이오."

"과연 탁월하신 식견입니다, 폐하. 하오나, 1달여 뒤면 저들도 대통령이 바뀔 것입니다. 정녕 저들이 영국을 적대할지는 우선 대통령이 바뀐 다음을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을는지요?"

나폴레옹 4세는 그 길로 곧장 해군성을 닦달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해군성은 영국 본토 침공에 비협조적이었다. 물론 미국과 영국의 관계가 파탄하면서 승률은 비약적으로 올라갔다. 문제는, 애초에 프랑스 해군성에서 최대한 낙관적으로 관측한 승률이 2할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고, 최대한 비관적으로 관측한 승률은 1할 이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런 승률이 이제 5할에 근접하도록 올랐으니 나쁘지 않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으나, 문제는 이 5할의 승률은 미국 백색함대가 영국 왕립해군의 시선을 끌어주는 가운데 프랑스 대서양 함대가 죽음을 각오한 결사적인 돌격으로 상륙함대의 길을 열어줄 경우의 확률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프랑스 해군이 영국 해군을 격멸할 확률이 5할이라는 게 아니라 프랑스 육군이 런던에 상륙할 확률이 5할이었다.

그래, 천운이 따라 프랑스 육군이 런던에 상륙하는 데 성공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그다음 프랑스 대서양 함대는 어떻게 되는가? 본토사수에 실패한 영국 대서양 함대의 손에 모조리 수장되지는 않을까? 전쟁이 끝나고서 영국 대서양 함대를 배상함으로 받아 전력을 보충할 수 있을 거라는 관측은 너무 무책임하다.

프랑스 해군성이 생각한 런던이 함락된 다음 영국 왕립해군의 행보는 재침하거나 캐나다로 도망치는 거지, 프랑스에 배상함으로 내다 팔리는 게 아니었다. 결국, 프랑스 해군은 영국침공이라는 역사적인 위업을 위해서 적어도 30년간은 반신불수가 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듣기 싫소! 그래,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해들이리다. 4주가 지나고 이듬해 1월 초엽이 되었을 때, 그대들이 있을 곳은 딱 두 곳뿐이요. 저 음침하고 축축한 해저이거나, 영광과 승리로 가득 찬 런던항이거나! 알아들었으면 이만 가보시오!"

"폐하! 설령 프랑스 국민의 선출을 받으신 폐하라고 하시어도 우리 장병에게 회생의 여지 하나 없는 죽음을 명하실 수는 없습니다! 이건 자살행위입니다! 프랑스 제국의 영예로운 헌법은 프랑스 국민의 생존권적 기본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경은 이만 그 자리에서 내려와 주어야겠구려. 짐의 명에 따르지 않는 이만 퇴청하여 보시오."

"폐하!"

그러나 이들의 반항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나폴레옹 4세는 뜻을 이미 굳힌 상태였고, 해군성은 나폴레옹 4세가 마음먹는 대로 휘둘릴 수밖에 없는 기관이었다.

전쟁 중에 참모진을 갈아치운다는 악수였으나, 나폴레옹 4세는 그것이 필요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믿었다. 지금 함대 결전을 시도하지 않으면, 두 번 다시는 지금 같은 호기가 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던 것이다.

"루이, 그 맹한 놈이 내게 감히 송곳니를 내보이다니···! 그리고 내게 송곳니를 드러낸 그자에게 또 한차례의 영광을 내주어야 한다니, 실로 내 꼴이 우습게 되었구나."

다만 그는 루이를 끝내 숙청하지 못했음을 한탄했을 뿐이었다. 운 나쁘게도 루이의 귀국과 식민지 군단의 상륙이 겹친 까닭이었다. 함부로 루이를 숙청하였다가는 아프리카 군단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그에게 숙청을 망설이게 하였다.

그리고 그 망설임이 루이에게 영국 상륙이라는 또 한 번의 영광을 나폴레옹 4세 본인의 손으로 안겨다 주는 꼴이 되었다. 그 뒤에 파리에 돌아온 루이가 과연 나폴레옹 4세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지, 나폴레옹 4세로서는 두렵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나폴레옹 4세는 자신이 직접 영국정벌에 착수한다는 최선의 수를 떠올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나폴레옹 4세는 아버지의 최후를 반복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 * *

시암국, 방콕.

"이건 좀 일이 묘하게 돌아가는데."

이원철은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이 무렵 그는 시암과의 협상에서 예상보다 커다란 타협점을 끌어낸 참이었다. 워스파이트 호 사건으로 태평양 일대에서 영국의 영향력이 격감할 것이 누가 봐도 명확해지면서 시암에서도 이전보다 적극 한국에 기대려는 행보를 보인 덕분이었다.

시암은 국경폐쇄와 자유로운 인적교류에서는 치안을 문제 삼아 유보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그 외 경제적인 협력에는 매우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시암은 아주 조약기구와의 자유무역을 받아들였고, 산업규격 측면에서도 아주표준산업규격을 따르겠다고 약속하면서 아주 공동시장에 합류할 의지를 분명히 보였다.

그뿐일까. 시암은 당장 군사동맹에는 유보적인 행보를 보였으나 차후 아주합종군의 정기훈련을 참관하면서 아주와의 동맹을 진지하게 검토해보겠다고 답하였다. 결국, 지금 당장 가맹하지는 않겠지만 추후 어떻게 일이 진행되느냐에 따라 월남에 이어 시암까지도 아주 조약기구에 가입할 여지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이원철로서는 더더욱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단순 항의를 넘어 단교를 선언해버리면서 이제 한국도 그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미리견에서도 무언가 염두에 둔 것이 있으니 단교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거겠지만···. 너무 성급하게 행동한 게 아닌가 우려스럽군."

이원철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머리가 지끈거려오고 있었다. 현시점에서 설령 영국, 프랑스 모두와 척을 진다고 해도 반드시 우군으로 남아야 할 나라가 있다면 그건 당연히 미국이었다. 한국의 가장 큰 교역상대국이자, 태평양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 협력국이 바로 미국이었으니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니 만일 미국이 영국과 전쟁을 각오한다면 한국도 그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이원철도 그 사실에 유감은 없었다. 문제는, 한국에는 뭐라 한마디 말도 없이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미국이 영국과 국교를 단절했다고 해서 반드시 한국에 통보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도리라는 게 있지 않은가.

이원철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불현듯 시야 한쪽에 그의 아버지가 조처했음에 분명한 영국 대사의 대국민 사과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진실한 반성인가, 아니면 당장 위기를 넘기기 위한 위선인가? 유가족들의 앞에서 허리를 숙인 프레더릭 대사!」"

"「프레더릭 대사, 『광주에 방문하고 싶다』 폭탄선언! 임칙서의 원혼을 위한 살풀이인가?」"

"「땅에 떨어진 시민의식, 이대로 괜찮은가? 화해를 청하는 대사를 향한 오물 세례!」"

흑백사진투성이의 기사들이었다. 신문사들이 기사에 실린 삽화를 악용하여 혹세무민을 꾀하였다는 이유로 이제부터 기사를 쓸 때는 흑백사진을 싣도록 의무화된 까닭이었다. 이원철로서는 어색하면서도, 내심 뿌듯한 변화였다. 펜으로 그린 삽화들 대신 사진들이 신문에 들어가니, 꼭 영미권의 선진적인 신문들처럼 세련되게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뿌듯함에 잠겨있을 때가 아니었다. 문제는, 이로써 이번 사건을 대하는 한국과 미국의 대응이 틀어져 버렸다는 점이었다.

한국은 인내하였고, 미국은 분노를 표출하였다. 어차피 양국이 반대진영에 서서 싸우게 될 가능성이야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이 경우 가능성은 두 가지뿐이었다.

한국도 영국의 태도를 트집 삼아 분노하거나, 정권이 교체된 미국이 영국과 화해하거나. 어느 쪽도 가능성은 충분했고, 본국에서는 현재 한국의 지침이 어느 쪽인지에 대하여 훈령을 따로 내려주지 않은 상태였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이원철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방콕에서는 보슬보슬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를 피해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 하나 없으니 세상은 적막했고, 비 내리는 소리만 똑똑하고 유리창을 두드렸다. 세상 한쪽에서는 서로 죽이고 죽이는 장대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평온함이었다.

이원철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저 비 내리는 소리만 들리니,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온했다. 어지러운 마음도 비 내리는 소리에 함께 씻겨내는 것만 같았다. 언제까지고 이 고요함이 이어지면 좋겠다고, 이원철은 내심 생각했다.

"전하, 주무십니까? 대단히 송구하오나, 이만 기침 해주셔야겠습니다. 본국에서 이만 귀국하시라는 훈령이 내려왔습니다."

그런 이원철의 고요함을 깬 것은 그를 찾아온 서재필 1등 서기관의 간절한 목소리였다. 이원철은 천천히 눈을 떴다. 간신히 가라앉았던 마음이 또다시 어지럽혀가고 있었다.

이원철은 뒷목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아바마마께서 그리 뜻을 정하셨다면 마땅히 자식 된 도리로서 따라야겠지. 그래, 알겠다. 시암에는 내가 직접 이야기해둘 테니, 너희는 내 짐을 꾸려다오."

"물론입니다. 지시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음?"

이원철은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또 무슨 일이 닥쳐오려고 이러나 하는 생각 탓이었다. 미국이 영국을 상대로 단교를 선언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큰일인데, 여기에 또 새로운 일이 터지는 날에는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이원철의 기분을 읽었는지, 서재필은 순간 망설였다. 물론 그것도 잠시였다. 서재필은 푹 고개를 숙이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영국 측에서 귀국길을 호위해 드리겠다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어떻게 회답하면 좋을는지요?"

"···허."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복잡해질 일이 하나 더 추가된 것이다. 그야 물론 시암에 오기 위하여 배편을 통해 말라카 해협을 통과할 때 잠깐 영국 동방함대 측에서 그를 호위해준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거야 말라카 해협이 영국의 영해였기 때문이었지 다른 의미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때는 워스파이트 호 사건 이전이었으니 문제시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우선 영국 해군이 어디까지 호위해주려고 그러는지도 문제였을뿐더러, 이미 사고를 한 번 친 상태에서 또 사고를 쳐서 한국과 척을 지려고 들지는 않을 테니 저들도 될 수 있는 대로 이원철을 공손하게 대하겠지만 애초에 영국 함대의 호위를 받는 것부터가 문제다.

이제 그 수명이 1달여도 남지 않은 시한부 정권이라고 해도, 미국에서 영국에 단교를 선언한 마당에 한국의 황태자가 영국 함대와 함께 한국에 귀국한다면 그야 좋은 이야기가 나올 리가 없었다.

"마땅히 거절해야겠지. 아직 조정에서 훈령이 내려오지 아니하였는데 공연히 영길리를 가까이 두어 국사에 누가 될 수는 없는 법이 아니겠느냐? 권하여 준 것은 감사하지만, 과인은 육로를 통하여 귀국할 예정이라 괜찮다고 답하거라."

"알겠습니다. 저들에게는 교시하신 대로 전하겠나이다."

이원철의 대답에 서재필은 한결 밝은 얼굴로 자리를 나섰다. 그러나 이원철은 서재필이 자리를 나선 이후에도 미간에 주름을 펼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은 그의 객실 한구석에 장식되어있는 세계지도에 고정되어 있었다.

"난세로구나."

새삼스러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새삼스럽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는 없었다. 참으로 어지러운 세상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으니, 꼭 미궁 속에서 헤매는 것만 같았다.

이원철은 머지않아 전화가 아시아를 뒤덮으리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징조는 이미 주어졌다. 비록 영국 대사가 유가족들에게 오물을 맞을 뻔하면서까지 대국민 사과에 나서며 당장은 국론이 진정되었으나, 그것도 잠시일 터였다. 한국에는 애초에 영국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무관하게 전쟁 그 자체를 바라기에 전쟁을 외치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불만을 없애주기 위하여 가장 좋은 방법은 참전이고, 그다음은 이미 한 발을 걸치고 있는 러시아 내전에 더욱 깊이 개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원철은 이형의 선택은 후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봤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러시아를 확보하고야 말겠다는 부황의 의지를 그 눈으로 직접 똑똑히 봤으니 틀림없었다.

전쟁에 나가 한몫 잡겠다고 설치는 이들을 전장에 내몰아 적당히 국내의 김도 빼둘 겸, 러시아 내전의 주도권을 가져갈 겸 해서 말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죽고 다칠 백성이 그 누구보다 전쟁을 원하고 있다니, 어찌 세상이 이리되고 말았을꼬."

이원철은 나지막이 한탄했다. 언젠가 대한제국을 떠맡아야만 할 태자로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원철은 배운 것 없고 헐벗은 이들이 전쟁을 바라는 것은 피에 미친 살인귀라서도, 전쟁을 즐기는 미치광이라서도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았다.

그들은 단지 그 외에 달리 출세할 길을 알지 못할 뿐이다. 이것도 이형의 업이라면 업이었다. 연이은 승전이 전쟁을 무서운 것이 아니라 출세의 기회로 보게 하였다. 결국, 주전론의 근본적인 원인은 하층민들의 상승 욕구인 셈이다.

그것이 어찌 잘못된 일이라 할 수 있을까. 오히려 현실에 찌들어 두 번 다시는 하늘을 쳐다볼 수도 없게 된 것보다는 훨씬 희망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대한제국이 정녕 국민의 지지 위에 세워진 국민의 나라라면, 지긋지긋한 밑바닥 신세를 벗어나고 싶다며 손을 내뻗는 국민의 손을 잡아 끌어올려 주는 건 위정자로서의 당연한 책무였다.

"이제 출세를 위해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부디 조금만 더 기다려다오."

이원철은 눈을 감고서, 두 손을 포개어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병술보고서의 완성이 코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 기도 > 끝

ⓒ 리첼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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