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뻐꾸기 >
한성 종로구 이화동, 장순규 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라는 말이더냐!"
콰앙!
민겸호는 있는 힘껏 탁상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고함을 질렀다. 반절은 위협이었으되, 나머지 반절은 진실한 분노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총애하던 조카사위 이완용이 대도 한복판에서 경관들에게 붙잡혀 갔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느꼈던 감정은 분노보다는 어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야 물론 신임 경관들이 때아닌 정의감과 사명의식에 벅차올라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상대를 건드리는 일이야 왕왕 있는 일이었지만, 여흥 민씨는 이제 그런 급이 아니지 않은가? 안동 김씨마저 쇠락한 이래, 여흥 민씨는 한성 제일의 명가로 우뚝 선지 오래였다.
그런데 여흥 민씨의 가인(家印)이 분명히 아로새겨진 마차를 멈추어서는 끌고 갔다고 하지 않는가. 한양 사람이면서 여흥 민씨의 가인을 모르는 이도 없을 테니, 이건 여흥 민씨를 건드리는 꼴이라는 걸 뻔히 알고서도 저지른 일이라는 이야기였다. 민겸호로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고 자시고. 대감, 소인은 이미 재야로 물러난 야인이외다. 이미 관의 일은 소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닐진대, 대관절 무슨 연유로 이리도 성을 내시고 그러오?"
그러거나 말거나, 장순규는 시종일관 느긋했다. 모두가 외면하는 와중 끝까지 이하응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준 덕택에 이하응이 미국에서 크게 성공한 이래로 태평양 무역에 종사하며 그 덕을 톡톡히 본 장순규였다. 안 그래도 한때 보부상들을 부리었던 연으로 보부상들과 안면을 트고 있던 장순규에게 이하응의 재기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준 기회였던 것이다.
종로 한복판에 마당까지 합하여 500평에 달하는 대리석 저택을 세우고 벽 한쪽에는 호랑이 가죽을 걸고 바닥에는 페르시아에서 들여온 양탄자를 깐 채 물담배를 피는 그의 모습은 그가 태평양 무역의 거물이자 대한제국 무역계의 큰손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한때 국정원 부장이었던 시절보다도, 관직에서 내려와 이하응의 사람이 된 지금이 장순규에게 있어서는 인생의 전성기였던 셈이다.
물론, 그래 봐야 민겸호의 눈에는 저잣거리 주먹패 출신 졸부의 오만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내 너희 똘마니들이 한 일이라는 걸 모를 것 같아서 이러느냐?"
"어허, 똘마니들이라니. 대감, 체통을 지키소서. 하여간 그래. 똘마니라니, 우리 상인들이 대감께 무슨 잘못을 하기라도 했습니까?"
"남산에서 나온 줄 모를 줄 아느냔 말이다, 이 무엄한 것아!"
담뱃대를 냅다 집어던지며, 민겸호는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물론 그 담뱃대에 순순히 맞아줄 장순규도 아니었다. 장순규는 슬쩍 고개를 틀어 담뱃대를 피했다. 덕분에 담뱃대를 얻어맞았던 것은 장순규가 아니라 그의 뒤에서 뒷짐을 지고 있던 양장차림의 주먹패들이 되었다.
따악-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뼈가 부러지지야 않았겠지만, 그래도 적잖은 충격이 있었는지 검계는 제자리에서 휘청거렸다. 그런데도 신음은 흘러나오지 않았던 것만이, 이들이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거 대감께서 물건을 떨어뜨리셨는데 뭘 그리 멀뚱멀뚱 보고만 있는 게냐? 어서 주워 드려라."
"예, 작은 어르신."
장순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툭 한마디 던지니, 그제야 바위처럼 제자리에서 멀뚱거리고 있던 검계가 급히 허리를 숙여 담뱃대를 주웠다.
"여기 있습니다."
"음."
장순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뒤에서 건넨 담뱃대를 받았다. 받고서, 담뱃대를 슬쩍 살피고서는 동그랗게 눈을 떴다.
"오호, 이건 경주 최 부자 댁에서 귀빈들에게만 특별히 주문 제작을 받았다는 귀한 물건이 아니오? 아무리 대감이셔도 이런 귀한 물건을 함부로 다루시다니요. 최씨 어르신께서 아시면 섭섭해하실 거요."
"흥! 시끄럽다. 종로의 도둑놈이 주제에 물건 보는 재주만 길렀구나. 그 귀물이 손때를 타기 전에 어서 내놓지 못할까!"
"아무렴 여부가 있겠소."
장순규는 두 손으로 공손히 담뱃대를 돌려주었다. 그러나 마음 한쪽으로는 무언가 뜨거운 응어리 같은 것이 울컥해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손때를 타기는 무슨. 이게 그 귀물에 손때를 탈까 특히 신경 쓰는 사람의 사용법인가?'
장순규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담뱃대에 정성스럽게 장식된 나전칠기가 끝없이 눈에 밟혔다. 거기에 색깔부터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옻칠만으로는 나올 수 없는 이 선명한 검은색은 아프리카산 흑단을 소재로 만든 것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양 끝에는 각각 태극문양과 경주 최씨의 가인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장순규에게 가장 거슬렸던 사실은 경주 최씨의 가인이 반쯤 지워져 있었다는 점이었다. 금으로 새긴 가인이 지워질 정도로 물건을 막 다뤘다는 증거였다. 이 소재하며, 자그마한 담뱃대에 나전으로 또렷이 학과 호랑이를 새겨넣을 수고까지, 한눈에 봐도 장인의 손길이 닿았을 선물을 다루는 방식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조선 팔도에는 짐승과 개나리들뿐이라고 여기던 장순규도 유일하게 공경하던 가문이 경주 최씨였다. 어떻게 하면 직원들을 더 쥐어짤 수 있을까만 고민하다가 관청에 두들겨 맞기 일상인 조선의 졸부 중 직원들과 관아의 공경을 받고 있다는 소리가 나오는 부호는 경주 최씨 일가 딱 하나뿐이었다.
안 그래도 민겸호의 방문이 그리 달갑지도 않았지만, 장순규는 점점 민겸호를 저택에서 내쫓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민겸호가 이하응의 매부만 아니었더라도 진즉 그랬을 터였다.
"아무튼, 남산이라고 하셨소?"
"그래, 그래도 귀는 바로 뚫린 모양이로구나."
"이상하구려. 어떻게 바로 남산에 온 줄 아신 거요? 그놈들이 좀 거칠기는 해도 아무나 잡아갈 만큼 막 나가는 놈들도 아닌데. 뭔가 짚이는 구석이라도 있으신 모양이요?"
"흥, 그거야 네놈이 알 거 없는 일이다. 됐으니까 어서 네 똘마니를 들들 볶아서라도 그 아이를 자유롭게 만들어다오."
"그러니까 이제 손 털었대도."
쿠웅-.
그때였다. 민겸호가 슬쩍 눈치를 주어 불러낸 시종이 탁상 위에 사람 머리만 한 함을 올려다 놓은 것이다. 어찌나 든 것이 많은지, 단지 탁상 위에 함을 올린 것뿐인데 탁상이 한쪽으로 기운 듯했다.
이게 도대체 뭔가, 싶어 눈살을 찌푸린 장순규는 함이 열리면서 드러난 그 내용물에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뭔 아낙네의 혼삿길 예물이라도 털어오신 거요? 은 장도에, 가체에, 보석 목걸이에···. 무슨 장신구들만 이렇게 많소?"
"누이의 성의니라. 네놈도 물건 보는 재주는 있으니 그게 얼마나 상등품인지 정도는 알아볼 거라 믿고 있으마."
더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민겸호는 부채를 펼쳐 제 입을 가렸다. 장순규는 민겸호의 설명에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는 없었다. 하루 만에 이만한 예물을 준비할 수 있는 민겸호의 친척 여동생이 어디 둘씩이나 있을까.
민자영이 나선 것이다.
"···조카사위라고 하지 않으셨소?"
장순규는 모르는 척 슬쩍 물었다. 민자영이 아무 이유도 없이 자신의 귀한 예물을 다른 사람을 구하는데 쓸만한 여인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던 장순규였다. 묘한 가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마흔 줄을 넘겨 시들어가는 귀부인. 부부간의 애정도 식어가던 차에 싹싹하고, 잘생긴 사위가 나타난다. 야심만만한 사위는 더욱 높은 곳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귀부인을 유혹하고, 귀부인은 뒤늦게 찾아온 연분에 한껏 달아오른다.
그리고-.
"깊이 알려고 들지 않는 게 좋을 게다."
"여부가 있겠소."
민겸호는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거렸다. 장순규가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가 즈음은 진즉 알고 있다는 듯한 눈초리였다. 장순규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장순규는 함을 슬쩍 밀어내며 말했다.
"아무튼, 남산에서 왔다면 더더욱 할 말 없소. 남산에서 온 줄 알았으면 썩 물러나시는 게 좋으실 거요. 다, 대감을 걱정해서 이러는 거요."
"네놈이···."
민겸호는 눈을 부라렸다. 설마하니 장순규가 요구를 거절할 줄은 전혀 몰랐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민겸호는 이를 바득거리며 쏘아붙였다.
"우리 일가가 너희 천것들이 이 한양 땅에서 장사할 수 있도록 얼마나 많은 인내와 은혜를 베풀었는지 알고서 감히 누런 이를 드러내느냐?"
"누런 이를 드러내다니 천만의 말씀이시오. 소인은 어디까지나 대감의 안위를 우려하여서-."
"일 없다. 오냐, 어디 두고 보자. 내 네가 개처럼 바닥을 뒹굴면서 부디 힘이 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며 비는 꼴을 보고야 말 테다."
그 한마디만을 내뱉고서 민겸호는 뒤돌아섰다. 장순규를 향한 선전포고였다. 민겸호가 자리를 떠나고, 그 시종들이 탁상 위에 올려져 있던 함을 들고서 따라 나가는 꼴을 장순규는 한참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지켜보다가,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두고 본다면 어찌할 거요? 내가 대감처럼 이 비좁은 조선 팔도에 갇혀있는 몸인 줄 아시오?"
그건 한 파벌의 수장이기에 내보일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그는 조선에 남은 이하응계에 마지막 남은 유력인사였고, 그의 뒤로는 이제 세계를 배경으로 발로 뛰고 있는 보부상들과 검계들이 뒤따랐다. 그리고 보부상은 대한제국의 우체국과 국정원의 모태가 된 조직이었다. 정보에 귀가 어둡고 싶어도 어두울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태평양 무역으로 쌓아 올린 부가 있었고, 검계라는 무력이 있었으며, 보부상들에게서 전해 들은 정보들이 있었다. 설령 여흥 민씨가 상대라고 한들 크게 꿀릴 일도 없었던 셈이다.
민겸호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말이다. 괜히 피 흘릴 일만은 없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황상께 단단히 밉보인 놈을 끼고돌다니. 이제 민 대감도 오래가기는 어렵겠구먼."
장승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산이 나서고, 장순규가 협력을 꺼리는 시점에서 어련히 알아차려 주기를 바랐지만 아무래도 민겸호는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뒤늦게 황제가 배후에서 모습을 드러내면 민겸호가 어떤 얼굴을 할지 장승규는 잠시 즐거운 상상을 했다.
물론 어쩔 수 없었을 수도 있다. 친척 누이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하기도 어려웠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장순규로서는 조금 더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거 아직 약관도 안된 어린 신부를 두고서 장모랑 연분이라니. 그놈 취향 참···"
장순규는 몸서리를 쳤다. 남의 집 가정사라지만 정말이지 끔찍했다. 여흥 민씨의 사위로 들어가기 위해 조강지처를 후처로 내몰고 띠동갑도 넘어가는 젊다 못해 어린 부인과 혼사를 치렀던 이완용의 사생활이니, 깨끗하지 않을 것쯤이야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건 예상을 넘어섰다.
그렇게 조강지처를 후처로 내몰고서 이제 갓 열일곱 된 어린 부인과 혼인해놓고서는 이제 불혹도 넘어간 장모와 연분이라니. 사위에게 눈독을 들인 장모도 장모지만 그 장모를 꾄 사위에게는 맙소사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개항이 이뤄지고 서역의 개방적인 문화가 들어오면서 한양도 많이 개방적으로 변했다지만 이건 상상을 초월했다.
애초에 유교 경전을 읽어본 적도 없는 장순규였지만, 이때만큼은 공자님 말씀이라도 빌려서 욕지거리를 한바탕 퍼붓고 싶었다.
"설마 이번에 민씨 댁 귀부인이 낳았다는 사내놈이···."
장순규는 잠시 생각해보았다가, 이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양아들을 들이니 마니 소리가 심심치 않게 나오던 딸 부잣집에서 가문을 이을 사내자식을 낳았다고 그렇게 소란스럽게 잔치를 벌이더니, 아무래도 남의 집 아들이었던 모양이었다.
장순규는 그날 연회장에서 아들을 끌어안고서 껄껄거리며 웃던 데릴사위의 얼굴을 떠올렸다. 괜히 가슴이 먹먹해졌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의 아들을 그래도 하나뿐인 아들이랍시고 키워낼 그의 운명을 생각하면 같은 사내남자로서 동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각방 쓴지가 10년이 되어가는 마당에 아들이 나왔다고 그래서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 이런 거였나. 에이, 더러워라. 다들 뭐 하고 있느냐? 어서 나가서 소금이나 뿌리고 오너라. 괜히 우리 장씨 집안까지 부정 탈라."
"""옛!"""
장순규는 진저리를 쳤다. 장순규의 명에 따라 열심히 대문 앞에서 소금을 뿌려대는 검계 똘마니들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도저히 기분이 풀리지를 않았다.
결국, 그날 장순규는 이하응이 선물로 주었던 양주 한 병을 통째로 비우고서 미국에서 변호사 생활 중일 장남에게 편지를 쓰며 기분을 달랜 다음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뻐꾹. 뻐꾹.
장씨네 저택에서는 오밤중에 때아닌 뻐꾸기 소리만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 * *
남산, 국정원 본관.
"거 무슨 연유로 내가 여기 왔는지 정도는 알려주지 그러···십니까."
이완용은 잔뜩 기가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그렇게 물으면서도 그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려대며 어떻게든 빠져나올 구명줄을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양장차림의 요원들은 여전히 멀찍이 물러선 채 가만히 그를 지켜보고 있을 뿐, 그 흔한 고문은 물론 아직 심문도 시작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현 상황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여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여흥 민씨마저 무시하고서 이완용을 이곳에 불러낼 정도면 결코 잔챙이일 리는 없었다. 누가 나선 지는 몰라도, 적어도 여흥 민씨와 싸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거나 때에 따라서는 웃돌 수 있는 거물이라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그가 이완용을 조정에 출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던 장본인 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던 셈이다.
"저기 어르신들, 제 부모 되시는 분들의 명예에 맹세코 절대 도망치지 않을 테니 적어도 이 수갑만은 조금 헐겁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팔이 너무 꽉 죄어서 피가 잘 안 통해서 그렇습니다."
이완용은 슬쩍 승부수를 던졌다. 진짜로 저들이 그의 수갑을 풀어줄 거라고 기대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요원들이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요원들이 지금 이완용을 어떻게 조리할까 고민 중인지, 아니면 다른 누굴 기다리고 있는 건지, 아니면 뭔가 다른 속셈이 있는 건지 알아보려 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요원들은 멀리 뒤에 물러서서는 이완용에게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도, 그렇다고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뿐이다.
그건 꼭 감옥에 갇힌 죄수를 대하는 간수의 그것과 똑 닮아 있었다.
'꿈적도 하지 않는군.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하고 있는 것뿐인가?'
이완용은 요원들이 자신에게 일부러 손을 대지 않고 있는 거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럼 결론은 나왔다. 요원들은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그 누군가가 누구일지만 고민하면 되었다. 무슨 이유로 잡혀 왔을지야 그가 생각해도 짚이는 구석이 너무 많았으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문제는 그 누군가가 누구일지가 감도 잡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내무부 장관 김가진이었으나, 만일 김가진이 나선 것이었다면 남산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경찰청 공안부에서 움직였을 터였다. 국정원과 경찰청 공안부는 경쟁 관계에 놓여있으므로, 이 점은 틀림없었다.
애초에 국정원은 황실 직속 기관이 아니던가. 설마하니 황제가 그를 가둬두라고 지시했을 리도 없을 테니, 정말로 짚이는 이가-.
"상판이 훤하군. 낯짝에 대패질이라도 좀 해두지 그랬나? 그편이 보기에 좋았을 텐데."
그때였다. 으슥한 곳에서 인기척이 나고, 그때까지 이완용만 빤히 바라보던 요원들이 일제히 돌아서며 경례를 올렸다. 이완용을 심문할, 이곳까지 호출한 거물이 나타났다는 뜻이었다.
이완용은 잠시 고민했다. 강하고 거친 어휘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상대는 불같은 성정의 인물일 가능성이 컸다. 과연 저 인물에게는 사내다운 화통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호감을 살지, 아니면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듯이 굽실거려야 호감을 살지 고민한 것이다.
하지만 결론은 금방 나왔다. 이유야 몰라도 상대방은 그간 이완용을 오래도록 지켜봐 온 인물일 터였다. 그래야 이완용에게 적의를 품고서 조정에 출사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결국, 이완용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특기를 고르기로 했다.
"아이고, 대감.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 소인이 미련해서- 허억!"
그러나 우는 흉내를 내며 손을 싹싹 비비면서 간사한 소리를 내는 것도 잠시, 이완용은 벌러덩 하고 자리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그간 사진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이 나라의 황제가, 그에게 두 눈을 부라리고 있던 것이다.
< 뻐꾸기 > 끝
ⓒ 리첼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