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부일심동체 >
그리고 이완용이 열심히 데굴데굴 눈알을 굴리며 고민할수록, 이형의 기쁨 또한 커졌음은 물론이다.
'운 좋게 살아남기는 무슨.'
이형은 히죽 웃었다. 사실대로 이야기하자면, 이완용은 거의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었다. 일단 이완용부터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겠으나 만일 입을 다문다면 당연히 여흥 민씨의 손에 개처럼 맞아 죽을 것이고, 이형이 말한 대로 민겸호의 역모죄 증좌를 가지고서 민겸호를 겁박하려 한다면 '실족사'하거나 '자결'당할 것이다.
너 죽고 나 죽자고 터뜨려버리면? 그럼 여흥 민씨도 풍비박산이 나겠지만, 그전에 이완용도 죽을 것이다. 애초에 이형이 제시한 세 가지 선택지 중의 하나를 고르면 이완용은 어느 길을 선택하던 죽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서 제 살길을 제가 알아서 찾아낸다면 살아남을 수도 있겠지.'
한마디로, 상식적인 범주에서 벗어난 무언가 비범한 발상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것도 이형의 도움은 조금도 받지 않고서, 이완용 자신의 지략을 최대한 쥐어 짜내야 가능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렇게 지략을 쥐어 짜낸다고 해봐야 정말로 살 수 있을지는 또 천운의 영역이다. 민겸호에게 역모죄 혐의가 있다는 걸 입 밖으로 내건 아니면 숨기건 간에, 민겸호는 그걸 아는 순간 이완용을 살인멸구 하려 들 테니 말이다. 이제 연좌제는 사라져 역모죄 한 번에 여흥 민씨가 통째로 날아가지는 않을 테지만, 민겸호 한 사람이 끝장나기에는 더없이 충분했다.
민겸호처럼 욕심 많고 의심도 많은 인물이 역모죄 혐의를 입증하고자 증좌를 모아온 이완용을 과연 용서할까? 그럴 리가 없다. 남산에 끌려가서 역모죄 증좌를 받아왔다고 해봐야 미친 사람 소리 밖에는 듣지 않을 것이다. 민겸호는 이완용이 그간 자신을 속이고서 자신을 파멸시키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증좌를 모아온 것이라고 믿을 것이 분명하다.
즉, 이완용이 살아남고자 한다면 크게 세 가지가 필요했다.
첫째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구석에서 살길을 찾아낼 비상한 두뇌요, 둘째는 그 두뇌가 짜낸 지략을 현실에 구현하는 데 필요한 실행력이고, 마지막으로 민겸호의 무수한 암살시도로부터 살아남을 천운이었다.
이완용을 일부러 살리고자 이형이 그를 도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음은 물론이었다.
'이러고도 살아남으면 뭐, 삐뚤어지기는 했어도 그래도 난 놈이기는 한 모양이고. 하늘도 죽음을 바라지 않는 모양이니 그만 놔주마.'
이렇게 해서 살아남는다고 해봐야 제 장모를 겁간한 패륜아 딱지가 붙었으니 조선팔도에 발붙이고 살 수는 없을 테지만 말이다. 그거야 자업자득이었으니 이형이 따로 동정해줄 이유도 없었다.
이형은 가만히 팔짱을 끼고서 데굴데굴 눈알을 굴려대는 이완용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디, 네 천운을 보여다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이완용은 이를 바득 갈았다. 이형이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게 차도살인지계지 그게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이 역모죄 증좌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여흥 민씨의 손에 맞아 죽을 것이고, 이 역모죄 증좌를 사용한다면 사용하는 대로 여흥 민씨의 손에 죽는다.
그나마 차이점이 있다면 일단 사용한다면 살아남을 확률이 1푼이라도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거기까지 가려면 그야말로 천지신명이 그를 보우해주는 수준의 천운이 따라야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완용은 행운처럼 불명확하고 비이성적인 괴력난신을 믿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침은 언제 나와 같았다. 믿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비상한 머리와 재주뿐이다. 단지, 그 비상한 머리와 재주가 있어도 오래 살기는 어려울 거라는 사실뿐이다.
'우선, 이렇게 된 이상 이제 모든 건 순번에 달려있다.'
이완용은 눈을 희번덕 빛냈다. 그가 생각하기에 당장 생존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 점이었다. 언론에 강상죄가 먼저 보도되는가, 역모죄가 먼저 보도되는가, 그도 아니면 동시에 인가. 이중 가장 위험한 건 동시에 보도되었을 경우였다.
이 경우는 글자 그대로 난전이 일어날 터였다. 최익현을 위시한 수구 유림은 이완용과 여흥 민씨를 찢어 죽이려 달려들 것이고, 여흥 민씨는 배반자 이완용을 찢어 죽이려 달려들 것이며, 한양의 시민은 새로운 안줏감이 생겼다며 이 난장판을 즐겁게 관전할 것이다.
한마디로 이완용은 양측 모두에게 노려질 거라는 이야기다. 수구 유림과 여흥 민씨는 각각 그들의 표적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니 이완용이 뭐라고 지껄이건 들은 체도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럼 이완용이 믿을 건 추격자가 그를 붙들기 전에 국경 바깥까지 도망칠 수 있을 만큼 그저 제 두 다리가 아주 빠르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두 다리는 조금 전 시멘트 바닥에 넙죽 엎드리면서 한차례 타격을 입었다. 살이 부풀어 오르는 걸 보면 뼈가 부러졌거나, 부러지지 않았더라도 한동안 절뚝거리는 걸 피할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해, 동시에 보도되는 순간 이완용은 갑자기 날개가 돋아나지 않는 이상 죽는다.
'그렇다고 강상죄가 먼저 보도되어서도 곤란하다.'
이 경우 역모죄가 공개될 때 이완용은 이미 여흥 민씨에게 토사구팽 된 다음일 것이다. 여흥 민씨는 이완용이 민겸호에게 원한을 품고서 그 보복을 위해 일을 터뜨렸다고 믿을 게 분명하다. 그럼 이다음은 차라리 장모를 겁간했다는 누명을 쓰고서 맞아 죽는 걸 부러워할 만큼 참혹하게 죽을 게 분명했다.
만일 최익현이 조금 더 정치적인 인물이라면 이 경우 이완용을 두둔해줄지도 모르겠으나, 최익현은 수구꼴통이라는 말이 꼭 어울리는 대쪽 같은 선비였다. 그런 인물이 여흥 민씨를 공격하는데 유용할 거라는 이유로 이완용을 지켜줄 리가 없다.
오히려 제 장모댁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잡아넣으려 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어떻게 해서건 역모죄를 먼저 터뜨리려야 내가 단 하루라도 더 살 수 있다. 이 길밖에는 없어!'
이완용은 아랫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비릿하게 감도는 피 냄새가 잠시 멍해졌던 정신을 일깨웠다.
역모죄가 먼저 터지고 나서 강상죄가 보도된다면, 이제 사람들은 민겸호가 자신의 치부를 들춘 이완용에게 분노하여 강상죄로 역모죄를 밝힌 고발자인 이완용을 깎아내리려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라도 최익현은 이완용을 함부로 공격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민겸호의 성정이 어떤 인물인지야 온 천하가 다 알고 있다. 최익현은 이완용의 강상죄가 과연 진실한 것인지, 아니면 민겸호가 만들어낸 거짓 죄인지 고심할 터이고 이러면 우선 확실한 역모죄부터 공격하려 들 터였다. 적어도 둘 중 하나에는 공격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면 이완용이 먼저 민겸호를 공격한 꼴이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배신자다. 외부의 적보다 배신자가 더욱 미움받는 거야 어느 시대, 여느 장소에서나 마찬가지다. 과장이 아니라, 여흥 민씨는 가세가 기우는 한이 있어도 이완용 한 사람을 죽이려 들 가능성이 크다.
'위험하지만, 어차피 이대로는 어떻게 해도 죽기는 매한가지다. 우선은 하루빨리 이 남산을 빠져나와서 민겸호 그 개나리가 날 내다 버리기 전에 먼저 그 뒤통수에···!'
"이만 가보아도 좋다. 이 증좌는 서류 가방에 넣어주마. 여봐라, 이놈을 종로까지 조심스레 데려다주고 오너라."
그런 이완용의 기분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황제는 대뜸 그런 말을 꺼냈다. 이완용은 순간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가, 이내 속으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내가 진즉 민겸호 그놈의 뒤통수를 찌를 궁리만 하고 있을 거라고 알아차렸다. 이건가. 어쩌다 이런 놈의 눈에 들어서는 내가 이런 꼴을···.'
"대한제국 만세! 황제 폐하 만만세!"
요원들이 이완용의 수갑을 풀어주는 즉시, 이완용은 제자리에 넙죽 엎드려서 절을 올렸다. 머릿속으로는 한 나라의 황제를 놈이라고 부르고 있던 주제에, 팔다리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목청껏 만세삼창 하는 그의 모습은 천하의 충신이 따로 없었다.
그런 이완용을 내려다보던 황제는 풋, 하고 작게 코웃음을 치고서는 떠나갔다. 또각또각하는 발걸음 소리가 울릴 때마다 이완용은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이완용은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럼 이제 누구에게 가지?'
"자, 어서어서 걸으시오. 그래도 갈 때는 인력거를 타고서 갈 테니, 여기 오는 길보다는 편할 거요. 뭐, 다리가 그 꼴이 났으니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겠지만 말이오."
요원의 실없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이완용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우선 한양일보는 사용할 수 없다. 이완용은 일개 편집장이지, 사장이 아니다. 민겸호가 뒤를 봐주는 한양일보에 민겸호의 역모죄를 실으려고 하는 순간 흠씬 두들겨 맞고서 지하실에 갇힐 것이다. 그 뒤에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증좌들을 얻었느냐고 고문당한 다음 호랑이에 물려갈 건 물론이다.
그렇다면 아예 최익현을 쓰는 방법도 있겠으나, 문제는 최익현이 그를 과연 믿어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최익현에게 이완용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인간 중 하나다. 거짓말을 숨 쉬듯이 내뱉고, 악업에 거리낌이 없으며, 선비로서 마음을 갈고 닦기는커녕 삿된 자들과 어울려 다니기를 좋아한다. 그런 이완용을 하루아침에 최익현이 믿어줄 리가 없다.
아예 최익현에게 그가 가진 증좌들을 넘긴다면 최익현의 신뢰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최익현의 신뢰를 얻어봐야 최익현이 여흥 민씨로부터 이완용을 지켜줄 수는 없다는 점이다. 축재에 열을 올리는 인물도 아니고, 따르는 세는 있되 그걸로 권세를 누리려는 인물도 아니니 명성으로 제 한 몸을 지킬 수는 있겠으나 그 명성으로 이완용을 지켜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아예 판을 키워서 있는 대로 참가자를 끌어들인다.'
그것이 이완용의 결론이었다. 지금처럼 수구 유림과 여흥 민씨 양대 세력이 대립하는 구도에서 이완용은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다. 아예 판을 키워서 물고 물리는 형국이 되어야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서로 싸우느라 바빠 미처 이완용을 신경 쓸 여력도 없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판을 키워서 대판 싸우게 둔 다음 국외로 도망친다. 아무튼, 여흥 민씨를 건드리고 강상죄까지 뒤집어쓴 시점에서 조선팔도에서는 살 수 없다. 얼굴을 조금이라도 알아볼 위험이 있는 이웃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아예 미국 동부나 유럽처럼 머나먼 곳까지 도망쳐야 할 것이다.
비자금은 충분히 있다. 원래는 의원 선거에 출마하려고 준비한 돈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시간이 없다. 전부 다 금으로 바꾼 다음 도망치면 된다.
"종로까지 다 왔소. 어디 기대하고 있을 테니, 한 번 대단하게 저질러주시오. 우리 모두 기대하고 있소."
그때였다. 인력거가 멈추었다. 인력거꾼은 낄낄 웃으며 이완용에게 짐을 건네주었다. 누런 이가 훤히 드러나고,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이완용은 불쾌했으나 내색하지 않고서 짐을 건네받았다.
남산에서 종로까지 그를 데려다준 인물이었다. 거기에, 한 번 대단하게 저질러보라고 부추기기까지 했다. 모르긴 몰라도,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는 대단한 인물일 가능성이 컸다.
"앞으로 싸움 구경은 물리도록 하게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기대하셔도 좋소. 내 장담하리다."
이완용은 그렇게 말하며 종로에 두 발을 디디고 섰다. 낯익은 벽돌 냄새가 코끝을 간질거렸다. 밤하늘은 어두웠고, 지상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머지않아 이 종로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도는 듯하였다.
* * *
한양, 종로구 가희동.
"「대감! 대감! 한 번만 들여주십시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쾅쾅쾅!
"···이게 다 무슨 소란이더냐?"
김병국은 눈살을 찌푸렸다. 심야, 아니 새벽이라고 표현해야 할 늦은 시간에 웬 처녀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잠이 깨고 말았으니 그야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얼떨떨한 얼굴을 하는 건 시종들도 매한가지였다. 적어도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런 늦은 시간에 찾아오는 손님이 제대로 된 손님일 것 같지는 않았다.
내일 찾아올 손님이 너무 이른 시간에 찾아왔다고 생각하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처절하다. 마치 제 정조를 노리는 괴한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양 다급한 절규다. 그냥 못 들은 척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으나, 그래서야 언제까지 대문 앞에서 진을 치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됐다. 들여보내 주거라. 거 어디 사는 누군지는 몰라도, 저렇게 애타게 도움을 찾는 아낙네를 내쳤다고 하면 본가의 체면이 상하지 않겠느냐?"
결국, 김병국은 시종들을 시켜 아낙네를 집안에 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제 발로 나가지는 않을 모양이니, 어디 무슨 연유로 안동 김씨 본가에 얼씬거리는지 들어나 볼 생각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대문을 두드린 것이라면 그때 성을 내도 늦지 않을 터였다.
무엇보다 김병국에게는 묘한 예감이 있었다.
'그제 민가 놈 조카사위가 남산에 끌려갔다고 들었다. 이런 흉흉한 시국에 본가에 청탁하려고 왔다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닐 터.'
물론 특별한 일이 아닐 수도, 그냥 미친 여자의 고성방가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김병국은 자신의 직감을 믿었고, 그 직감이 사실이기를 빌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의 직감은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네 남편 되는 놈이 장모에게 겁간을 당하고, 민겸호 놈이 역모를 꾀했다는 증좌를 모으다가 이제는 반병신이 되어 집에 들어왔다- 이거냐?"
"아이고, 대감! 제발 우리 서방님 좀 살려주시어요. 뭐든 할 테니 제발 살려만 주시어요!"
"허, 참. 어찌 세상에 이런 일이···."
김병국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절반은 기뻐서 나오는 웃음을 숨기려 한 결과였지만, 반절은 진짜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민자영이 사위를 겁간했다. 전후 관계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이거야 놀랄 것도 없는 일이다. 상식적으로 각방을 써진 지 10년이 되어가는 마당에 사내자식을 낳았다는 게 말이 되던가. 그렇다고 사내종을 의심하기에는 가까이하는 사내종이 없고, 그나마 애지중지하던 게 사위였으니 사위가 품게 한 자식일지도 모른다고 하는 의심이야 진즉부터 있었다. 그러니까 놀랄 이유가 없다.
민겸호가 역모죄를 꾀했다는 증좌를 모으다가 남산에 끌려가서 반병신이 되어 나왔다는 건 좀 이상하지만, 아무튼 실제로 오늘을 기해서 그 증좌가 김병국의 손에 들어왔다. 무언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그거야 지금부터 따로 조사해보면 알게 될 일이다. 증좌 자체는 평소 민겸호의 행실을 생각해보면 진실한 물건일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그런데도 김병국은 차마 눈앞의 여성에게 정말로 잘해주었다는 칭찬이나 너희 남편은 무사할 것이다-라는 한마디조차 해줄 수가 없었다.
"···네가 지금 만일 거짓을 고하는 것이라면 죽어서도 그 죄를 다 갚지 못할 것이다. 정녕 제정신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 게냐? 네 어미가 네 남편을 범하였다는 걸 한낱 부외자에게··· 아니,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들 어찌 자식 된 도리로서 부모의 치부를···."
"부부는 일심동체라 하였나이다, 대감. 서방의 몸이 곧 제 것이오, 제 몸이 곧 서방의 것이니 오늘 자영이 제 서방을 범함은 부모가 자식을 범함과 같사옵니다. 패륜을 범한 자영이 어찌 부모이겠으며, 제 욕정만 앞서는 게 어찌 사람이겠습니까. 부모가 부모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짐승이거늘, 어찌 짐승에게 자식 된 도리를 다할 수 있겠사옵니까?"
"허허허···."
김병국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기쁜 일이었다. 이 모든 증좌가 건너왔으니, 그간 하늘 높은 줄 모르고서 설치고 다니던 여흥 민씨를 무너뜨리고서 다시금 안동 김씨의 천하가 열릴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렇게 기쁜 일임에도 김병국은 차마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뜨릴 수 없었다. 사람 된 도리로서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참으로 말세로구나.'
그 한마디만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서 김병국의 가슴 속에 응어리졌다.
< 부부일심동체 > 끝
ⓒ 리첼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