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오지심 >
그리고 그 덕분에 김병국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말세? 말세라···?'
김병국은 생각했다. 과연 이 생각이 그 혼자만의 감상일지 아니면 보편적인 감상일지, 그리고 만일 보편적인 감상이라면 어디까지 통용되는 감상일지를 말이다. 유서 깊은 양반가라면 누구나 이 소식을 알게 되는 순간 혀를 찰 것이다. 도성의 백성은? 다르지 않다. 도성 바깥의 어리숙한 백성이라고 한들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조선이 건국된 지도 어언 반 천년이 지났다. 그 반 천년 간을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고, 백성에게 성리학적 가치관을 심어주고자 노력해왔다. 이제는 서역의 가치관들이 들어오면서 예전만 못할지도 모르겠으나, 여전히 조선인의 도덕관은 성리학에 근간을 두고 있음에는 명확하다.
다시 말하여, 이 사실이 퍼져 나가는 순간 혀를 차며 진저리를 치는 건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공유할 감상이다.
'이건 위험하다!'
그걸 깨달은 순간, 김병국은 냉정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단순히 여흥 민씨가 몰락하고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역모도 역모지만, 이 치정극의 경위는 조선인이 수용하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이다.
그야 물론 이와 같은 사례가 과거에는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세자빈이 궁녀를 탐했다가 내쫓기거나 정비가 용안에 흠집을 냈다든가 하는 기록도 버젓이 남아 있지 않던가.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그때는 이와 같은 일들이 알려져 봐야 도성의 백성이나 양반가에서나 알 수 있었다. 교통이 불편했을뿐더러, 그 시절의 관보는 오늘날의 신문과 다르게 백성을 선동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은 어떠한가. 당장에 영국의 배가 해적질을 하다 침몰하였다는 사실 하나로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온 게 불과 한 달여도 되지 않았다. 백성은 입을 모아 영국과의 전쟁을 외쳤고, 이러한 여론은 영국의 전권대사가 인천부두에서 유가족들에게 고개를 숙인 다음에야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
어째서 그렇게 다른가. 첫째는 당연히 예전보다 교통이 편리해지며 소문이 쉽게 퍼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여기까지 일이 커지던가? 아니다.
결국, 모든 원흉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언론인들 때문이었다.
'틀림없다. 이런 터무니 없는 사건을 그 글쟁이 놈들이 대서특필하지 않을 턱이 없다! 이미 사실로 밝혀진 것들을 날 것 그대로 담는 것도 끔찍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저 천한 놈이 양반가를 안줏거리로 삼기 시작한다면···?'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순간부로 양반은 양반이 아니다. 이미 법적으로 양반이라는 계급이야 사라진 지 오래라지만, 이번에야말로 조선 사회에서 양반이라는 계급 자체가 소멸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미 천한 백성 중 양반들을 진심으로 공경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건 딱히 개화 탓이 아니라, 과거 세도가 시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백성의 조건 없는 공경을 받기에 양반들이 그간 쌓아온 전과가 너무나 화려했다. 그렇다 해도 백성들이 공경하는 시늉이라도 했던 건, 그간 조선이라는 나라가 성리학에 근거한 유교적 계급 질서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양반들의 민낯이 대서특필 되기 시작하면, 이제 그 계급 질서도 끝장난다. 개화기는 계급 질서의 토대가 된 성리학의 우월성에 흠집을 내놓았고, 황색언론의 대두는 무너져가는 계급 질서를 유지하던 고매한 양반을 제 장모와 씹질 하기 바쁜 일개 짐승으로 전락시킬 것이다.
'그렇다고 그 천한 글쟁이 놈들을 모조리 절필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김병국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사실, 언론인들을 모조리 절필시키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다. 황제가 그렇게 명한다면 당장에 모든 언론인이 실업하여 새 일자리를 찾아보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황제가 과연 그렇게 할까? 김병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일 그럴 작정이었다면 영국 군함이 나포되었다는 기밀 정보를 사사로이 민간에 흘렸던 시점에서 칼을 휘둘렀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그렇게 하는 대신에 영국 전권대사가 직접 나서서 사과하게 만들면서 또 한 번의 커다란 기삿거리를 제공하여 언론인들이 자발적으로 주제를 틀도록 유도했다.
한때 선비 수천 명의 목을 잘라가며 개화를 밀어붙이던 그 황제와 정말 동일인물인가 싶을 정도로 유화적인 정책이었으나, 아무튼 황제의 뜻이 어떻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김병국으로서는 황제가 언론인들의 손을 잘라줄 것이라는 대단히 간단하고 편리한 기대를 할 수는 없었다.
'그 멍청한 민겸호 놈이 역모를 꾀한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언행을 보였다는 걸 온 천하에 알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천박한 민가 놈들이 강상의 죄를 범하였다는 것마저 세간에 알려져서는 안 될 것이다!'
"좋다. 내 너희 낭군은 이 김병국 석 자의 이름을 걸고서 반드시 살려주겠다. 그러니, 그 대신에 두 번 다시는 이 일에 대해서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된다. 이 일은 오로지 우리 집사람들과 너만이 알고 있어야 한다. 알겠느냐?"
"아아, 감사합니다. 대감! 예에! 아무도 모르게 하겠습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어요!"
"이 나라 대한이 그토록 선비들을 융숭히 대접해 왔거늘, 이 나라의 선비라는 작자가 악독하고 삿된 마음을 품어 천리를 거스르려 하였으니 어찌 이 나라의 선비로서 벌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너희 부부를 가엽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처럼 당연한 이치에 감사를 받는 것조차 낯부끄럽도다."
김병국은 있는 힘껏 거들먹거렸다.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뽐내려고 했던 것이 반이었고,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여 믿음을 주려는 목적이 또 반이었다.
그리고 완전히 믿음을 얻었다는 확신을 얻은 다음, 김병국은 은근히 물었다.
"한데··· 진정 이 일을 내게 가장 먼저 고한 것이 맞더냐?"
"예에, 물론이옵니다. 대감, 어찌 이처럼 끔찍한 일을 아무에게나 털어놓을 수 있겠어요?"
'하기야, 그것도 그렇군.'
그제야 김병국은 마음속 깊이 안심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또한 온전하지는 않았다. 민자영은 제 입으로 부모를 사람이 아니라는 금수라 칭할 정도로 미친 소리를 지껄인 여자다. 그런 미친 여자가 저도 모르는 구석에서 신세 한탄이라도 지껄인 줄 또 누가 안단 말인가.
그러나 상식적으로 한양의 양반가라면 강상죄를 이용해 여흥 민씨를 공격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고, 여흥 민씨 또한 입단속에 나설 테니 함부로 바깥으로 새어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은 한숨 돌린 셈이다.
'하지만 아직이다. 이 정도로는 안심할 수 없어. 이번 기회에 도성의 명가들을 본가에 초대하여 한데 모아 여흥 민씨를 규탄하는 김에 강상의 죄에 대해서는 입막음에 나서자고 부추기는 수밖에.'
김병국은 눈알을 희번덕거렸다. 양반의 체통이 걸린 일이었다. 양반가의 사생활이 천박한 글쟁이들의 기삿거리로 소모되는 끔찍한 미래를 회피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함께 힘을 합쳐 몸을 사릴 때였다. 한양의 명가들이 함께 힘을 합치면 뒤늦게 낌새를 눈치챈 글쟁이들이 이를 다루려고 해도 사전에 알아내 묻어버릴 수 있을 터였다.
저 변덕스러운 황제가 언론인들에게 무언가 재갈을 물릴 때까지는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안동 김씨는 이러한 한양 명가들의 단합을 주도하면서 조금씩 이전과 같은 위세를 회복하게 되리라.
가장 먼저 증거를 얻든 덕분에 이러한 가세를 다시 일으킬 기회까지 얻게 되었으니 실로 천하의 기운이 온통 안동 김씨로 쏠리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1년이다. 1년만 우리 안동 김씨의 뜻대로 한양 명가들을 이끌 수 있어도 이전처럼은 아니라도 의견을 한데 모을 수 있다. 처음에는 복잡하고 귀찮기만 한 일이겠지만, 언젠가는 그 복잡하고 귀찮은 절차들이 본가의 힘이 되어줄 터···!'
김병국은 전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 어렵지도 않을 일이었다.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황제가 한국에 의회 민주주의를 이식하고자 필사적이라는 건 20년 전부터 눈치채왔다. 처음에는 그저 한양의 명가들이 한데 모여 의견을 모으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 회의라도, 그와 같은 절차가 몇 번이고 반복되다 보면 언젠가는 관습이 될 것이다.
그 뒤에는 회의에 힘이 실릴 것이고, 다시 맹주에게 권위가 실릴 것이며, 최후에는 세력이 된다. 이렇게 한 번 뭉치고 나면 흩어놓기도 쉽지 않다. 지금처럼 사방이 적이면 더더욱 더 그렇다. 이렇게 한데 모인 양반 세력이 본격적으로 의회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하면, 대한제국은 앞으로도 100여 년간은 계급사회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본가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본가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김병국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건 자신감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천박한 여흥 민씨야 제힘과 위치를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서 벌써 몰락할 기미를 보여주고 있지만, 안동 김씨는 다르다. 안동 김씨라면 능히, 아니 틀림없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양반들을 몰아내고서 자신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겠다며 이를 악물고서 달려드는 상놈들이 좀 많던가? 오히려 이렇게 사방이 적인 와중에도 양반들을 한데 모은다는 간단한 발상조차 하지 못하고서 제 잇속이나 채우던 여흥 민씨의 무능함에는 한숨만이 나올 따름이었다.
'그저 그때까지 이 늙은 몸이 버텨주기를 바랄 뿐이구나.'
김병국은 간절히 빌었다. 어느 신에게 비는지도 모르고서 말이다.
우선 장모와 사위가 씹질 하게 만든 작자는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 * *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여흥 민씨의 역모죄 혐의를 세간에 터뜨렸던 김병국이, 태도를 바꾸는 데에는 나흘이 걸리지를 않았다.
"제발 다시 한 번만 생각해주게. 제발 부탁이라네. 그게 세간에 알려지게 되면 무슨 사달이 날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은가?"
종로구, 삼정동 대한일보 본사 보도국장실.
김병국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그나마 일개 인력거꾼이 대한 일보 본사 건물에 들락날락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곧장 낌새를 눈치챘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어도 전혀 엉뚱한 곳에서 회심의 일격을 당한 다음에야 사건의 경위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평범한 상대였다면 여기에서 대강 정리되었을 것이다. 한양은 민겸호의 역모죄 혐의로 한바탕 떠들썩한 마당이다. 설령 협상하다가 무언가 틀어져서 끝까지 신문에 실어버리겠다고 나서봐야 조용히 객사할 것이며,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상대는 다르다. 아직도 두루마기에 상투를 치고 갓을 쓰고 다니는 이 박제 같은 자가 김병국을 만난 다음 객사한다면, 온 천하가 민겸호와 더불어 김병국을 규탄할 것임이 분명하다.
면암 최익현이라는 이름에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만한 무게가 있다.
"사달은 무슨 사달이 난다는 말씀이신지요? 대감께서 대관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 미련한 놈은 배움이 짧아 도통 모르겠습니다."
최익현은 차분하게 답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강한 분노가 깔렸음을 눈치채지 못할 김병국이 아니었다. 삼강오상(三綱五常)의 윤리를 범하였다 하여 강상(綱常). 그 강상의 죄가 명확함에도 논하지 말라니,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김병국 또한 저가 설득한다고 최익현이 뜻을 꺾으리라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손 놓고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저보다 열 살은 어린 상대에게 이리 절절매고 있다니 수치스럽기는 하여도, 이 자리에서 그냥 물러난다면 남은 평생을 후회하게 될 터였다.
김병국은 이를 악물고서 고개를 숙였다.
"내 이렇게 부탁하겠네."
"이 미련한 놈은 노환으로 눈에 병을 얻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같은 양반이 아닌가? 서역 오랑캐들이 삿된 논리로 혹세무민을 일삼아 이 나라의 양반이 코흘리개 어린아이들에게조차 업신여겨진 지도 어언 서른 해가 다가오고 있네. 백성의 공경을 받지 못하는 양반이 어찌 양반일 수가 있으며, 선비가 공경을 받지 못하는 나라가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
최익현은 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동요의 징조라 여긴 김병국은 더욱 세차게 말을 이어갔다.
"만일 오늘날과 같은 정세에 그와 같은 끔찍하고 감히 입에 담기도 두려운 일들을 천하가 알게 된다고 생각해보게. 상놈들에게 우리 양반이 얼마나 우스워 보이겠는가? 양반의 체통이 땅에 떨어진 지금, 상놈들이 양반을 공경의 대상이 아니라 희롱의 대상으로 보게 된다면-."
"자 왈,"
최익현은 김병국의 말을 단호히 끊었다.
끊고서, 눈을 부라리며 쏘아붙였다.
"견의불위 무용야(見義不爲無勇也)라."
"아니, 이 사람이···."
"대감. 무례를 무릎 쓰고서 감히 여쭙겠나이다. 이 조선팔도 어디에 선비가 남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최익현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 기색이 사람을 죽이기라도 할 듯 흉흉하여, 김병국은 몸을 움츠렸다.
"그게 무슨 무엄한 소리인가! 아무리 면암 자네라도 그와 같은 망발을 하고서-."
"위로는 임금을 바르게 섬기지 못하였고, 아래로는 백성을 바르게 이끌지 못하였으며, 작게는 바깥의 오랑캐들을 멸하지 못하였고, 크게는 이 나라가 오랑캐 소굴이 되는 꼴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이 나라의 비겁한 졸자들이 선비라 불릴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당장 말조심하지 못하겠나!"
이번만큼은 김병국도 고함을 질렀다. 고함을 지르고서 곧장 아차 하기는 했으나, 고함을 지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 나라의 양반가 모두를 졸렬하고 옹졸하다고 비난한 것이다. 양반가를 대표하여 한마디 쏘아붙이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다.
그러나 최익현은 멈추지 않고서 말을 이어갔다.
"선비란 인에 살고 인에 죽는 사람이오, 의를 실천하는 사람이며, 예를 혼백에 새기고 죽는 날까지 학업에 힘쓰며 지를 갈고 닦는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이보게, 면암! 내가 그런 구태의연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이 자리에 온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 않은가!"
"온고지신이라 하였습니다. 옛이야기가 어째서 구태의연합니까. 그것이 당연한 이야기기에 삿된 자들이 이를 두고 구태의연하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 오늘날 이 나라의 졸자들은 구태의연한 옛 가르침 하나 온전히 지키지 못하였는데, 당최 무엇이 구태의연하단 말씀이십니까?
단지 옛 가르침을 알기만 하였을 뿐 배우지 못하였으니 이는 지를 저버림이오, 삼강오상의 윤리를 범하였으니 혼백에 예를 새기지 아니하였고, 윤리를 범하였음을 알고서도 침묵하였으니 의를 더럽힘이며, 죄를 범하고 의마저 더럽혔음을 알고서도 죽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곧 인이 아닙니다."
최익현은 그렇게 쏘아붙이고서 입을 다물었다. 그것이 최익현의 대답이었던 것이다. 김병국은 뭐라 답할 생각도 못 하고서 입만 벙긋거리다가, 이내 이를 부득부득 갈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래, 어디 잘해보시게! 결국, 온 천하에 졸자들뿐인데 면암 자네 혼자 선비이니 혼자서 신선놀음이라도 해보겠다, 이 말이 아닌가! 거 사람 혼자 잘났으니 아주 기분 좋겠구먼그래!"
"저 또한 무엇하나 이루지 못하였을진대, 어찌 저 혼자 선비이겠습니까. 온 천하에 졸자들뿐이지요."
"아니, 그럼 선비도 아니라면서 뭘 그리도 혼자 고매한 척은 다 하고 있다는 말인가!"
김병국은 이번에야말로 버럭 하고 소리를 질렀다. 더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입바른 말만 지껄이면서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고서 자기는 또 선비가 아니라니, 그건 또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최익현은 그런 김병국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사단(四端)을 언제부터 선비이기에 지니고 있었단 말입니까. 측은, 수오, 사양, 시비는 선비이기에 지닌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응당 지닌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민가 족속들이 색이라는 짐승의 자연된 순리를 따랐듯이, 이 미련한 놈은 수오라는 사람의 자연된 순리를 따르고자 합니다."
"그래, 어디 잘해보게!"
김병국은 더는 참지 못하고서 버럭 소리를 지르고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이튿날, 대한 일보는 예정대로 이완용과 민자영의 강상죄 혐의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 수오지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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