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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고종대왕 일대기-400화 (400/530)

< 의심암귀 >

그리고 김병국이 지금쯤 무슨 생각을 품었을지 모를 이완용도 아니었다.

"엿 됐어."

이완용은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품격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저속한 언행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언행을 신경 쓸 때도 아니었다.

이완용은 자신의 이용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김병국에게 이완용이란 결국 장기말일 뿐이다. 그것도 언제건 죽어도 무관한 장기말 말이다. 그도 그럴 게, 그와 안동 김씨는 사정이 꼬여서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는 것 말고는 이렇다 할 접점이 없다.

한마디로 지금 이완용의 명줄은 김병국이 이완용에게 이용가치를 느껴야지만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강상죄의 증인이라는 점 말고는 김병국에게 이용가치를 내보일 여지가 없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배신이었던 까닭이다.

이완용은 새삼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은 황제를 마음속 깊이 원망했다.

"서방님, 그런 말씀 마시어요. 어르신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시겠다 약속하신 지 아직 보름도 되지 않았는데, 김 대감처럼 고매하신 분께서 한 입으로 두말을 하시겠어요?"

"고매한 자니까 두말을 할 거요, 부인. 저런 자들은 인간이 아니요. 요괴지."

"아니, 어찌 그런 험한 말씀을···."

부인은 이완용의 말에 매우 놀라 입을 손으로 가렸지만, 이완용은 부인을 위로해줄 수 없었다. 당장 자신이 위로받기도 바쁜데 누굴 위로한다는 말인가.

'우선 당장은 여유가 있을 것이다.'

이완용은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아무리 김병국이 이완용을 죽일 마음을 품었기로 서니, 당장에 죽일 리는 없었다. 이완용의 처가 직접 안동 김씨 본가를 찾아와 제발 남편을 도와달라 엎드려 빌었다고 털어놓는 게 남아있으니 말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한양의 주류 언론은 이완용의 처를 어떻게든 열녀로 탈바꿈시키고자 안달복달을 할 것이다. 여론을 뒤집으려면 알기 쉬운 피해자 겸 우상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김병국은 이 천하에 둘도 없을 열녀의 청탁을 들어주고자 이완용을 감쌌다가 괜한 누명을 뒤집어썼다-라고 변명하는 게 저들의 계획일터다.

그렇지만 잘은 안 될 것이다. 그래 봐야 자식이 제 부모를 고발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누군가는 남편을 구하고자 몸을 던진 처를 동정하겠지만, 누군가는 제 부모를 등진 자식의 행보에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난 그 산재물이겠지.'

이완용은 이를 어득하고 갈았다. 문제는 바로 이 점이다. 당장은 일단 이완용의 처에게 모든 시선을 집중시키려고 공작을 걸면서 이완용에게도 여분의 시간을 주겠지만, 이미 이완용은 김병국에게 망명을 도와달라 청탁한 바 있으며 김병국 또한 이를 긍정했다.

이 경우 이야기는 간단해진다. 이완용을 그 처에게도 알리지 않고서 어느 날 으슥한 포구로 끌고 온 다음, 그대로 살해한다. 그렇게 이완용은 처마저 버리고서 혼자 도망치려다가 살해당한 천하의 둘도 없을 악한이 되고, 그런 남편의 죽음마저 비통하게 슬퍼하는 약관도 안된 어린 처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면서 못난 남편을 위해 한 몸 던진 조강지처가 탄생한다.

그럼 그다음은 쉽다. 김병국은 이를 위문하고 앞으로 처가 남은 평생 정절을 지킬 수 있도록 집과 자산을 선물하면서 한순간에 의인으로 탈바꿈하고, 그런 딸의 남편을 겁간한 민자영과 저런 부인을 두고서 바람을 피우고 끝내는 혼자 도망치려다 죽은 이완용은 천하의 둘도 없을 악한이 된다.

그쯤 가면 민자영도 강상죄로 끌려가 형을 받거나 정절을 더럽혔으니 책임을 지고서 자결한다는 유서를 반강제로 쓰고서 은장도로 자결당하거나 할 것이다. 결국, 두 명의 남녀가 모든 죄와 경멸을 뒤집어쓴 채 죽고, 그 대가로 안동 김씨와 한양의 명가는 살아남는다.

'지금 당장 한양을 떠나야 하나?'

이완용은 갈등했다. 이렇게 된 이상 아예 처를 내다 버리고서 지금 당장 맨몸으로라도 한양을 떠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일단, 이 경우 안동 김씨는 딱히 이완용을 죽이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천하에 둘도 없는 악한 이완용이니, 제 발로 처를 버리고서 내빼며 천하에 둘도 없는 악한이라고 자백해준다면 구태여 잡아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

문제는 안동 김씨의 비호가 사라지는 순간 이제 여흥 민씨의 자객들이 그를 죽이려 달려들 거라는 점이다. 뼈에 금이 간 두 다리로 과연 안동 김씨의 비호 없이 한양을 떠날 수 있을까 생각하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떠나야 하는 건 맞다. 이대로 계속 남아있어 봐야 감시만 늘어날 거고, 그럴수록 운신의 폭도 비좁아질 거다. 살고 싶으면 어차피 내빼야 해. 그렇지만··· 아직은 너무 이르다. 무사히 빠져나가려면 아직은 조금 더 몸을 추슬러야 해.'

이완용은 제 처를 흘긋 쳐다봤다. 그 물기 어린 눈동자에는 오로지 이완용을 근심하는 기색뿐이었다. 물론 이완용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믿지 않았다.

그 민자영의 딸이다. 그 여우 같은 여자의 피를 이어받은 여식이 그저 멍청한 양반 규수일 뿐이라니, 그걸 누가 믿는단 말인가?

"조만간 이 나라를 떠야 할지도 모르겠소."

"서방님께 가시는 곳이라면 염라의 곁이라도 따라가겠습니다."

귀로 듣기에는 둘도 없이 헌신적인 아내의 언행이었다. 그러나 이완용은 처의 눈동자에 한순간 의심이 서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이완용은 그것이 자신을 혼자 두고서 떠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암묵적인 협박이라는 걸 눈치챘다.

'누구의 딸 아니랄까 봐 정말 눈치 하나는 비상하게 좋군.'

"고맙소, 부인. 부인이 그리 말해주니 정말이지 든든하오. 항상 고생만 시키는 것 같아서 언제나 미안한 마음뿐이오."

"아니어요. 이런 게 바로 부부 된 도리가 아니겠어요?"

이완용은 내색하지 않고서 인자한 미소를 띄웠다. 부인 또한 그에 맞추어 따뜻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그러나 부인의 말을 들은 순간 이완용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부부 된 도리? 설마 이 여편네가 지금 제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눈치챈 건가?'

삿된 의심이었다. 제아무리 귀한 피를 받고, 들어도 되는 것 들으면 안 되는 것 다 들으며 자라났다지만 이제 고작 열일곱 먹은 소녀가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 의심은 불륜을 저지른 남편을 향한 응당 당연한 원망과 질투라는 걸 눈치챌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완용은 눈치채지 못했다. 만일 이완용이 지금 처의 입장이라면, 당장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고서 그 재산을 모조리 상속받아 열녀행세를 할 궁리만 할 테니까.

이러한 관점의 차이가 이완용에게 끔찍한 패착을 저지르게 하였다.

'도망친다!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해! 지금 당장 맨몸으로라도 도망치지 않으면 이 여우 같은 년에게 살해당할 거야!'

그렇게 이완용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그날 새벽, 처가 잠든 걸 확인한 그 즉시 이완용은 손에 잡히는 짐만 서둘러 바리바리 싸 들고서 도망쳤다.

* * *

"허억, 허억···!"

새벽을 틈타, 이완용은 절룩거리는 다리를 이끌고서 달리고 달렸다. 어둑어둑한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이 오늘따라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저 가로등 불빛을 피해 가자니 금이 간 다리가 걸리적거렸고, 그렇다고 가로등 아래로 지나가자니 눈에 띄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서 한양을 떠나고자 했던 이완용에게 이보다 더한 장애물은 없었다. 결국, 이완용은 그 누구도 도중에 마주치지 않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할 뿐이었다.

'이 나라가 적이다. 이 나라가 날 죽이려 들고 있는 거야!'

그런 와중에도 이완용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처음에는 막연한 의심이었지만, 이제는 확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온 나라가 적이었다. 이 나라에 남아있는 이상 그가 안식을 취할 유일한 방법은 죽음뿐임이 분명했다.

그 모든 원흉이 황제일 거라 생각하면 이완용으로서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이완용이 뭘 그리도 잘못했다고- 아니 실제로 잔뜩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황제나 황실에 딱히 잘못한 기억은 적어도 이완용에게는 없었다. 그런데 뭘 이리도 온 나라를 동원해서 이완용 한 사람을 죽이려고 들고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언제부터 노려지고 있었던 거지?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 미친놈이 날 노리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황제는 미친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깟 괴력난신 때문에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었다.

"역으로, 우선 역으로 가자.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첫차를 타고서 북쪽으로 간다. 일단 만주까지 가면 여흥 민씨 놈들은 피할 수 있을 것이고, 만주에서 몸을 추스른 다음 뤼순으로 가서 프랑스 배를 타고 도망치면 돼···!"

그런 와중에도 이완용의 머리는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공포와 의심 탓에 무턱대고 저택을 빠져나온 이상,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바다로 도망칠 수는 없었다. 안동 김씨가 당초에 약속해준 망명길이 바다를 통하는 것이었으니 포구에서 정체를 눈치채여 붙잡힐지도 모른다. 그럼 열차뿐이었다. 이 또한 누구나 쉽게 예상하는 길이었으나, 어차피 다리에 금이 간 이상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도중에 여흥 민씨의 자객을 만나지 않았던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어쩌면 여흥 민씨도 강상죄에 역모죄까지 연달아 터지면서 당장은 이완용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력도 없는지도 몰랐다. 결국, 이완용은 상처받고 지친 몸을 이끌고서 중앙역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아무도 없나? 아니, 그렇겠지. 이런 시간에 역이 열었을 리가 없지. 하, 하하! 그래, 이제 살았다. 여기까지 왔으면 살아남은 거야!"

이완용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텅 빈 역사를 둘러보면서 이렇게 마음이 놓일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그 흔한 거지들조차 오늘따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이불 삼아 쓰는 신문들조차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역무원들이 모조리 내쫓은 모양이었다.

그 사실이 이완용은 둘도 없이 기뻤다. 만일 부랑자들을 만났다면 여흥 민씨가 보낸 자객이 아닐까 의심했을 테고, 순찰하는 역무원들을 보았다면 혹 제 정체가 들킬까 봐 도망쳐야 했을 이완용이었다. 지금 그에게는 아예 사람이 없는 장소가 제일 안심이 가는 장소였던 것이다.

너무나 마음이 놓였던 탓이었을까.

"행색을 보아하니 부랑자는 아닌 모양인데···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요? 이런 곳에서 자다가 입 돌아가도 난 모르오."

"허, 허억!"

그대로 정신을 잃었던 이완용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을 무렵이었다. 심신의 긴장이 풀리면서 그대로 기둥에 몸을 기댄 채로 잠이 들었던 것이다. 서둘러 주변을 살피니 이완용이 베개 삼았던 돌기둥에는 선명하게 침이 타고 흐른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완용은 주먹으로 제 머리를 두들기며 자책했다.

'멍청한 놈, 이런 멍청한 놈! 그 잠깐 사이에 마음을 놓아서는 잠들어 버리다니, 아주 그냥 죽으려고 환장을 했지···!'

그러나 지금은 자책할 시간이 아니었다. 이완용은 서둘러 자신을 깨운 역무원을 돌아보며 물었다.

"지, 지금이 몇 시요? 시간을 좀 알려주실 수 있겠소?"

"인시요. 아직 동도 트지 않았잖소?"

"그러니까 자축인묘진사오미 말고! 몇 시! 몇 분인지 말해달란 말이오!"

"아니, 시계도 없는데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알겠소? 대충 때려 맞추면서 사는 거지. 하여간에, 아무튼 다섯 시는 지났을 거요."

"그, 그럼 북쪽으로 가려면 첫 열차 시간이 언제인지 알려줄 수 있겠소?"

"흐음···?"

역무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이완용을 빤히 바라봤다. 그제야 이완용은 자신의 실수를 눈치챘다. 열차를 타러 온 사람이 열차 시간도 모르고 있다는 게 말이 되던가. 그것도 시골에서 막 상경한 것도 아니고, 양장을 차려입고 가르마까지 타고 있는 모던 보이가 말이다.

누가 봐도 첫차를 타고서 낙후되고 외진 북방으로 도망치려는 도망자로 생각될 터였다. 역무원이 과연 이완용을 알아볼 것인가와는 별개로, 역무원이 대뜸 수상한 인물을 발견했다며 이완용을 붙잡아두려고 할 개연성도 충분해진 것이다.

'마, 망했다. 이놈이 혹시라도 날 알아본다면···!'

"보아하니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있다거나, 뭐 그런 거요?"

"서, 선생. 저, 그게. 이건 그런 게 아니라···."

"뭐. 됐소. 다 이해하오. 사업을 하다 보면 망할 수도 있고, 또 재기할 수도 있고 그런 거지. 힘내시오. 내 응원하리다. 봉천행 첫차는 6시 30분에 출발하오. 한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전부 여기서 잊고, 만주에 가서 어디 번듯하게 성공해 보시오."

"감사하오! 아니,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이완용은 제자리에서 넙죽 엎드려 절했다. 평소의 그라면 이런 역무원 따위에게 예의범절을 갖춘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겠지만, 지금은 이 보잘것없는 역무원이 다름 아닌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리고 이 생명의 은인이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리 먹는 순간 그는 끝장이었다. 지금은 비굴하더라도 어떻게든 호의를 사야 할 때였다.

"거 사람 무안하게 갑자기 뭔··· 됐으니까 가시오. 앞으로도 행복하시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역무원이 쑥스러워하며 어서 저리 가보라고 손을 휘저은 다음에야 이완용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완용은 자리에서 물러나면서도 역무원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몇 번이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드디어 마지막 고비마저 통과한 것이다.

'천운이 따르는구나!'

그 길로 화장실에 처박혀 몸단장을 하며, 이완용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역무원이 그를 알아보거나 의심했다면 그대로 붙들려갔겠지만, 반대로 역무원이 그를 동정해준 덕분에 무사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열차표를 사고 열차에 오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쪽도 어려워질 게 없는 일이었다. 역에 사람이 좀 많던가.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는 말대로,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행정업무에 지칠 대로 지친 저들이 신원확인에 열을 올릴 리가 없었다.

'그래, 이제 전부 다 잘 풀릴 거다.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오는 거지. 아무튼, 이 한양을 떠나기만 한다면 그 미치광이 황제도 날 찾을 수 없을 거야!'

이완용은 자신만만했다. 하늘이 자신을 돕고 있다고 생각하니 몸이 절로 가벼워진 듯했다. 그리고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서 가장 먼저 열차표를 사서 승차장으로 향하게 되자, 이완용의 이러한 믿음은 더욱 굳어졌다.

'역시 나는 이런 곳에서 죽을 놈이 아니었던 거야. 암. 아니고말고. 구질구질한 목숨 구걸도 이걸로 끝이다. 급히 나오느라 절반도 챙기지 못했다면, 그래도 이 금만 있다면···!'

쐐-액!

이완용은 승차장에 서서 히죽거리며 웃었다. 저 멀리에서 신명 나는 궤적 소리를 내며 증기 기관차가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있는 힘껏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기분 나쁜 쇳소리가 고막을 두들겼지만, 그 소음마저 지금만큼은 사랑스러웠다.

이완용은 나지막이 웅얼거렸다.

"나는 이제 자유다!"

"그래, 그럼 어디 날아 보거라."

퍽.

그때였다. 등이 화끈하더니, 갑자기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갔다.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이완용은 마지막 순간 어-하는 소리마저 내지 못했다.

그저 이완용은 정면으로 튕겨 나갔고, 그대로 역에 진입하던 기관차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꺄아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기관차는 온통 피와 고깃덩어리로 범벅되었고, 승차장에는 주인 잃은 하반신과 장액을 쏟아내는 순대 다발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바로 그 옆에서 바닥을 나뒹구는 서류 가방에 시선을 주기에는, 당장 피와 장액을 꿀렁꿀렁 토해내는 순대 다발이 너무나 징그러웠다.

그리고 그 서류 가방을 주인 잃은 오른손이 있는 힘껏 움켜쥐고 있었다. 억지로 뜯겨 나간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절단면은 현장에 있던 모든 승객과 역무원들에게 트라우마를 새겨주기에 충분했다.

"드디어 이 나라의 정의가 바로 섰다."

그러나 새까만 학생복 차림의 청년- 김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손잡이에 달라붙은 주인 잃은 오른손을 멀리 집어 던지고서 서류 가방을 열었다. 손에 피가 묻어도 기분 나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을 뿐, 그 흔한 비명 한 번 지르지도 않았다.

그렇게 조금 전 자신이 등을 냅다 걷어차 살해한 인물이 이완용임을 확인한 다음에야, 김구는 자신을 향해 달려온 역무관들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어서 체포해가라는 듯이 말이다.

역무관들은 그의 모습에서 한 점 부끄러움도,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 의심암귀 > 끝

ⓒ 리첼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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