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401화 (401/530)

< 어전회의 >

"그놈, 결국 죽었군."

그날 오후, 소식을 전해 들은 이형은 다만 그렇게 말했다. 어딘가 시원섭섭한 어투였다. 이완용이 죽었다는 소식에 섭섭해했다기보다는, 생각보다 활약을 못 하고서 죽은 게 아쉬웠던 것이었다. 어디까지 판을 키우는가 느긋하게 구경해보려 했더니, 생각보다 너무 급작스럽고 어이없게 죽어버렸던 것이다.

'거기에 김창암이라···.'

이형은 쓴웃음을 지었다. 불과 반나절 만에 한양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름 석 자였다. 아직 고등학생밖에 안 되는 청년이 화제의 주인공 이완용을 선로에서 밀어 죽여버렸으니 그야 그럴 만도 했다. 거기에 선로에 밀어 죽여버린 다음에는 순순히 경찰에 자백했다고 했다.

혹자는 젊은 청년이 기백이 대단하다며 감탄했고, 혹자는 도성 한복판에서 양반이 개죽음을 당했다며 질겁을 했다. 또 누군가는 새벽부터 험한 구경을 해야 했을 기관사와 역무원들을 동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한양의 여론은 하나로 통일되었다.

「좌우지간, 잘 죽였다」라고 말이다.

"반드시 엄중히 벌해야 합니다."

말을 처음 꺼낸 것은 김홍집이었다. 전에 없이 창백한 낯빛이었다. 그만큼 이번 사건을 위협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것이다.

"혹여나 이번 일을 계기로 이제 막 자라나는 청년들이 삿된 마음을 품게 된다면 큰일입니다. 한창 배워야 할 청년들이 삼강오륜을 바로 세운다는 어설픈 정의감에 사람을 죽이고 다닐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뜻이 올바르다고 하여도, 이대로는 한양에 피바람이 불지도 모릅니다."

"실로 그러하옵니다. 죄인을 추포하여 심문하는 것은 엄연히 관아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직 죄인을 심문하여보지도 못하였는데 이미 죽고 말았으니, 그 죄목을 낱낱이 밝힐 길이 사라지고 말았나이다. 이를 어이하면 좋으리까."

김홍집의 말을 받은 건 법부 장관 윤용구였다. 조선 시대에는 역모죄만큼이나 중히 벌해지던 것이 강상죄였다. 경국대전을 기반으로 근대적 형법을 완성한 대한제국에서도 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탓일까. 윤용구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정식으로 재판장에 세워 목을 매달아 죽였어야 했을 걸 재판장에 세워보지도 못하고서 엉뚱한 청년의 손에 죽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이미 증거가 또렷하지 않았습니까. 그대로 살려두었다고 해봐야 과연 들어줄 만한 이야기가 또 새로 나왔을는지요. 당사자가 자수한 것을 고려하여서라도 다소는 감형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번 일을 계기로 청년들이 괜한 사람을 죽이고 다니게 되는 건 물론 피해야 하겠으나, 의기 넘치는 청년의 의거를 엄히 벌한다면 누구도 불의에 맞서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 약관의 나이도 되지 않은 미성년자인 것도 있으니, 가벼운 매질이면 충분하지 않을는지요?"

그에 맞선 건 김옥균과 김가진이었다. 김가진은 김창암 같은 의기 있는 청년이 죽게 두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그러했고, 김옥균은 이와 같은 사적제재가 흔히 이뤄지던 미국에서 오래도록 생활한 탓에 이번 사건 자체를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김옥균으로서는 그나마 총이 나오지 않은 게 어디냐고 되묻고 싶던 심정이었던 것이다. 물론 구태이 될 판국에 황제까지 의거를 지지한다는 인식이 퍼진다면 또 무슨 일이 날지 몰랐다. 정말로 김홍집의 말마따나 청년들이 정의를 바로 세운다며 고위층을 죽이고 다니며 사회적 문제가 될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순순히 자수한 미성년자를 사형해버리는 건 그것대로 사법질서를 해치는 격이었다. 애초에 이형에게 그럴 마음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니 원칙대로 처리한다. 그것이 이형의 결론이었다.

'아무튼, 이걸로 참전여론은 적당히 정리되었을 테고-.'

이형은 흘긋 김옥균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미리견에서는 뭐라고 하던가. 기어이 영길리와 한판 붙어보겠다던가?"

"그 반대였습니다. 합중국 국무부에서는 대통령의 독단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더군요. 아무래도 국교단절은 저들에게도 상당히 뜻밖의 조치였던 모양이었습니다."

"흐음."

'마침 잘 됐군. 모건 그놈이 슬슬 목포를 지났다고 했던가?'

이형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어느 정도 예상한 대답이기는 했으나, 김옥균이 미국은 아직 편을 정하지 못했다고 확답을 준 것이다.

그건 한국의 방침이 미국의 앞으로 방향 결정에 영향을 줄 여지가 남아있다는 뜻과 같았다. 마침 모거늘 위시한 미국 특사단과 회담을 하기로 한 차에 이보다 좋은 소식은 없었다.

"그리고 하와이 왕국군을 공식적으로 해산하기로 하였습니다. 앞으로 하와이 왕국의 국방은 한미 양국이 공동으로 분담하며, 하와이 의회에도 앞으로 백인과 황인이 각각 고정의석을 배분받기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김옥균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한마디로, 하와이 왕국은 독립국의 지위를 반쯤 상실했다는 뜻이었다. 군대를 가지지도 못하고, 내각과 의회를 자기 뜻대로 구성하지도 못하는 나라가 어찌 자주국일 수 있을까.

간판만 남겨두었다뿐이지, 이번 한미회담으로 자주국으로서의 하와이 왕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셈이다.

"그래, 그래야겠지."

하지만 이형은 다만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을 뿐이다. 워스파이트 호를 숨기면서 먼저 호의를 배신한 건 하와이 왕국이었다. 열강의 호의를 섣불리 배신했다면 마땅히 그 대가를 받아야 할 터였다. 그래야지만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을 테니 말이다.

"이번 기회에 서태평양 함대 사령부를 신설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물론 그 전에 미리견과 미리 조율은 필요하겠지만 말이네. 초안을 짜두게."

"하오나··· 그러면 합중국에서 우리 대한의 저의를 의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일전에 우리 대한이 태평양에 진출하지 않겠다고 약조하였던 것을 어겼다 여기지 않겠습니까?"

"불란서 함대가 태평양을 통과해 파나마로 가는 줄 미리견은 알고 있었어. 그런데 우리는 영길리 전함이 우연히 하와이에서 발견되기 전까지 전혀 몰랐지. 미리견에서 알리지 않았으니까 말이네. 물론 이완용 그놈이 거짓부렁을 늘어놓으면서 함부로 일을 키워놓은 것도 사실이지만, 백성이 괜히 불안해하는 게 아니야.

지금도 태평양을 건너고 있는 우리 상선들이 못해도 수백 척은 될 텐데, 그들 전부가 미리견의 보호에만 의존하고 있지 않은가. 다른 건 몰라도, 우리 상선들 정도는 우리 해군이 지켜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이형은 싸늘하게 답했다. 뭐라 반박하려던 김옥균은 더는 뭐라 답하지 못하고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뭐라 말해도 황제가 뜻을 꺾지 않으리라는 걸 눈치챈 것이다. 그럼 이제 순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될지는 또 모를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이형은 마지막으로 김가진을 바라보았다.

"그래, 유전은 찾았는가?"

"기름이 새어 나오는 토양은 찾았습니다, 만···. 송구하옵니다. 아직 한창 파내고 있는 와중인지라 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아직은 더 기다려줄 수 있으니까, 어디 느긋하게 해보게. 뭐라도 성과가 나오면 곧장 알리도록 하고. 괜히 서두르다가 사고 치는 거보다 여유 잡고서 확실하게 처리하는 게 낫지 않겠나."

"여부가 있겠나이까, 황상."

김가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다만 이형은 이번만큼은 김가진의 대답을 믿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간의 행적으로 미루어보아도 김가진이 여유롭게 일을 진행할 턱이 없었다.

김가진 또한 이형이 발을 묶어둘 요량으로 유전탐사를 명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테니 하루라도 빨리 유전탐사를 끝마치고서 다른 일을 시작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할 터였다.

'하여간에 성질머리만 급해서는.'

이형은 나지막이 혀를 찼다. 그 또한 남발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이형은 적어도 김가진 보다 자신이 끈덕지다고 확실히 자부할 수 있었다.

'보자, 병술년에 처음 통계를 내보라고 시켰었으니까··· 8년. 거진 10년짜리 대사업이었군.'

이형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었다가 펴보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그야말로 역사에 남을 대사업이었다. 애초에, 전 국민의 생활 수준을 조사한다는 것 자체가 그전까지 시도된 적도 실현된 적도 없는 일이었으니 역사에 남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주판만으로는 부족해서 기계식 계산기를 들여왔고, 워낙에 기계식 계산기들을 뜯어볼 기회가 늘어나다 보니 나중에 가서는 국산화가 진행되어 국내 공장들이 공급을 전담하게 되기도 했다. 주판이야 이전부터 써왔지만, 물류 규격화와 사회보험이라는 양대 사업이 없었다면 한국에 기계식 계산기들과 계산자가 도입될 일은 없었을 거라고 해도 절대 과장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었다. 마침내 병술 보고서가 어윤중에게까지 올라온 것이다. 이제 어윤중이 마지막 확인을 끝마치고서 이형에게까지 올라오면, 남은 건 공표하는 것뿐이었다.

'이걸로 빨갱이들이 내 나라에서 설치고 다닐 일은 없겠지.'

이형은 입꼬리를 뒤틀었다.

< 어전회의 > 끝

ⓒ 리첼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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