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흉기 >
경복궁의 재건은 단순히 경복궁의 재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경복궁의 재건은 한양 지하철 사업과 더불어 그간 미뤄져 있었던 주요 정부관저들의 중건과 확보를 위한 대대적인 토목사업이기도 했다. 한양역사가 창덕궁에 세 들어 사는 정부 부처들보다 화려하다는 소리까지 나오던 판국이었으니 그야말로 미룬 숙제를 몰아서 하는 격이었다.
따라서 경복궁 재건이 마침내 승인되었을 때 가장 환호하였던 것은 정부 부처의 공무원들이었다.
그동안은 덕수궁과 창덕궁을 위시하여 조선왕조 적부터 쓰이고 있던 궁궐부지 일부를 빌려 신관을 세우거나 기존에 왕자나 공주 등이 쓰던 건물들까지 개장하면서 버티고 있던 판국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리고 이 중 재무부 장관 관저는 다른 관저들에 비해서도 빠르게 완성된 관저였다. 가장 뒤로 미뤄진 문화부는 1896년을 전후로 하여 완공될 예정이었으니 1892년 추석에 맞추어 처음 개장한 재무부 장관 관저는 특별취급을 받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딱히 재무부 장관 어윤중이 특별히 사업에 개입하여 압력을 넣었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재무부가 다른 부처들보다 먼저 장관 관저를 받게 된 것은, 병술 보고서의 마지막 검토를 앞두고서 눈치를 보지 않고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끝났다."
그리고 그 길고 길었던 병술 보고서도 이제 끝을 보이고 있었다. 어윤중은 푹신한 가죽 의자에 지친 몸을 던지듯 뉘었다. 마지막 검토작업마저 끝이 난 것이다. 이다음에 황제에게 넘기면 황제가 또 의회에 넘기기 전에 한 번 더 검토하겠지만, 황제가 그리 세세히 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어윤중이 날을 지새우며 마지막으로 검산한 지금이 실질적인 최종검토다. 애초에 숙련된 경제관료들도 주판과 계산기를 병행해 쓰면서도 번번이 계산을 틀리는 마당에 제아무리 황제라지만 주판이 있어도 과연 검산할 엄두를 낼 수 있기는 할까. 결국, 이런 작업은 전문가들의 손에 맡길 수밖에는 없는 일이었다.
"진짜로 끝났어."
어윤중은 자꾸만 감겨 오는 눈두덩을 부드럽게 마사지하면서 마지막으로 보고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했다. 끝도 없는 숫자들의 나열이었다. 처음 쉰 장은 이 보고서의 의의를 풀어 설명하기 위해 글로 풀어져 있었지만, 그것도 처음뿐이고 그 뒤로 장장 400여 장의 수식과 그래프들과 표들로 양껏 채워져 있었다.
지난 8년간 매일같이 해온 숫자놀음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수식과 그래프들이 구석구석에서 발견되고는 했다. 그럼 주판을 두드리건 계산기를 굴리건 검산에 나서야 했다.
그러나 오늘, 마침내 어윤중은 더는 검산해야 할 수식과 그래프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제야 어윤중은 모든 긴장을 풀고서 몸을 늘어트렸다.
'이게 내 청춘의 마지막 불꽃이구나.'
입을 움직일 기력도 없었다. 어윤중은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다만 그렇게 생각했다.
이 검산 하나를 위해 장장 석 달간을 바깥세상에서는 무슨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고서 이 관저에 갇혀 산 것이다. 회한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뿌듯함, 성취감보다도 탈력감이 앞섰다.
처음 황명을 받아 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아직 청춘이었을 텐데, 어느새 마흔을 넘기고 말았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만들어낸 것일까?'
전하께서 찾고 계신다면 연경당으로 가면 되는 건가?"
"아닙니다. 그것이, 말씀드리기 대단히 송구하오나. 실은-."
"대단히 인상 깊은 배려이지만, 사실은 이미 놀러 왔소."
주저하던 비서관이 사실을 고하기에 앞서,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를 내며 이원철이 방안에 들어섰다. 남방에 다녀왔다고 하더니, 이를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태자는 검게 탄 모습이었다.
어윤중은 이원철을 보고서도 순간 자신이 너무 피곤한 나머지 꿈을 꾸는 것인가 하고 눈을 껌벅거렸다. 물론 그것도 잠시였다.
"저, 전하! 이 누추한 곳에 어찌···!"
어윤중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머리를 혹사해서일까. 뒷말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윤중이 또다시 머리를 혹사해서 말을 쥐어짜 내기에 앞서 이원철이 어윤중에게 다가와 그를 일으켰다.
"그만. 그런 말을 듣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하, 하오면 도대체···?"
"그보다, 우선 자리에 앉는 것이 어떻겠는가. 여보게. 여기 가베 좀 가져다줄 수 있겠나?"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전하!"
비서관은 그대로 도망치듯이 자리를 떠났다. 황태자와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는 부담스러웠을 터였다. 그리고 이 점은 어윤중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황제라면 모를까, 황태자와 만날 일이 어디 있었겠는가.
"겉으로 보기에는 삭막한 석회 건물이라는 인상이었으나, 안에서 보니 제법 그럴싸하더군그래."
이원철은 손수 의자를 끌어와 어윤중을 마주하고 앉았다. 어윤중이 보기에 무언가 속내가 있는 말 같지는 않았다. 무슨 속셈으로 그를 찾아온 지는 몰라도, 이건 공기를 부드럽게 할 겸하여 가볍게 꺼낸 이야기일 터였다.
어윤중은 당황하지 않고서 답해주었다.
"검산에 앞서서 주판 기사들이 마음 놓고서 쓸 수 있는 공간부터 마련하기 위해 급히 지어져서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아직 아무 옷도 걸치지 않은 셈이지요. 석회와 철 기둥으로 튼튼하게 뼈대를 만들었으니, 이제 차차 살점을 덧대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것 치고서는 내부는 제법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지. 특히나 저 그림들. 조선 팔도에서 저만한 그림들을 모으려면 하루 이틀로는 어렵지 않은가?"
"궁에서 세 들어 살던 적에 수집한 그림들입니다. 대부분은 단원이 그린 그림들이지요. 이번에 이사하면서 문화부에서 달라고 하던 걸 뿌리치고서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호오, 김홍도 화백의 그림들이라. 경이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는지는 미처 몰랐소."
"송구하오나, 사실 그림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재무부가 관리하는 건 이 나라의 돈이지요. 비록 상인은 아니라도, 돈을 다루려면 겉으로나마 화려하게 장식해야 하는 법입니다. 나라에서 제일 부유한 부처여야 할 재무부가 누추하다면, 멋 모르는 이들은 이 나라에 돈이 없다고 함부로 얕보지 않겠습니까?"
"그건 조금 이상하구려. 관의 미덕 중 으뜸은 검소함이 아니겠소?"
"송구하오나, 더는 검소함은 미덕이 못 됩니다. 개인이 검소하면 옹졸하다고 흘겨보고, 기관이 검소하면 나라가 궁핍한 것이 틀림없다고 무시당하는 시대가 아닙니까? 서역의 미덕은 끝없이 부를 과시하는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서역이 천하를 웅비한 오늘날에는 검소함이야말로
"그릇되게 쓰이면 나라를 망칠 흉물이 따로 없으니 흉기라면 흉기지요."
"그거야 정치에 쓰이는 물건치고서 그렇지 않은 게 어디 있겠소? 그보다도."
이원철은 잠시 가볍게 숨을 골랐다. 도대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어 어윤중이 불안하게 바라보니, 이원철이 대뜸 말했다.
"중요한 건 어떻게 쓰일까지. 저게 이제 어떻게 쓰일 거라 생각하시오?"
"그야 당연히 민생에 보탬이 되는 데 쓰이겠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물론 민생에 보탬이 되는 데 쓰이게 되겠지. 그러나 당장은 쓰기 어려울 것이오. 온 천지가 전쟁통인데 민생을 위해 수천 수억씩 재화를 퍼붓는 건 아무리 우리 대한이라도 못 할 짓이 아니겠소?"
어윤중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러했다. 하다못해 전쟁이 끝난 다음이라면 모를까, 러시아 내전에 개입하고 있는 지금 사회보험을 도입하겠다고 나서면 제아무리 한국이라도 허리가 부러질 거다.
이원철은 보고서를 쥐고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이건 한마디로 줄이자면 증좌라네."
"증좌라니··· 누굴 법정에 세우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당연히 서역이지. 경이 말했잖소? 서역의 미덕은 부를 과시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렇게 과시할 부가 아무렴 밭 갈고 논 갈아 나왔겠소? 쌀농사로 그렇게 부유해질 수 있었다면야 조선은 진죽부터 천하에 손꼽히는 부유한 나라가 되었겠지. 다 돈을 굴려 번 돈이잖소.
그럼 이제 쌀보다도 쌀을 살 돈이 더 중하게 된 것인데, 그렇다면 가장 먼저 관아에서 알아야 하는게 뭐겠소? 당연히 사람 하나가 살려면 얼마나 되는 돈이 필요한지를 알아보는 것이지. 관아가 진정으로 민생을 위한다면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겠소? 사람 하나가 살기 위해 몇 마지기의 논이 필요한지 알고자 하듯이 말이오. 그리고 우리 대한은 지금 막 그 최소치를 알게 되었소. 세상에서 최초로 말이지.
그런데."
이원철은 탁상에 보고서를 다시 내려놓았다. 탕-하고 큰 소리가 났다.
이원철은 가만히 어윤중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관절 왜 우리가 최초라는 말이오? 우리 대한이 개화를 시작한 지 이제 고작 30년이 되었소. 고작 30년이라는 말이오.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반백 년은 더 늦었지. 그런데도 우리가 최초요. 가장 늦게 개화를 시작하여 가장 늦게 열강반열에 오른 나라가 가장 먼저 이걸 알게 되었단 말이오."
"···아."
그제야 어윤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제의 저의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오히려 이제야 깨닫게 된것이 너무 늦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이원철은 차갑게 말했다.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말이야 쉽지. 그런데 지금껏 우리 대한이 처음으로 이 과업을 끝내기 전에 이걸 알아보고자 시도라도 한 나라가 과연 있긴 했소?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지 않소. 국민의 종이라는 나라가 국민의 삶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다니. 결국, 처음부터 국민을 위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는 거 아니오?
묻건대, 진정으로 저들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소?"
어윤중은 나지막이 아, 하고 감탄했다.
황제는, 처음부터 이 두꺼운 보고서를 참고할 목적으로가 아니라 다른 나라들을 후려칠 목적으로 준비하라 시켰던 것이다.
< 흉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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