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후구상 >
이튿날, 창덕궁.
"겨우 이게 내 손에 들어왔군."
이형은 두꺼운 서류뭉치를 펄럭이며 껄껄 웃었다. 감히 펼치기도 꺼려지는, 어지간한 사전이나 전공서에 버금가는 두께의 서류뭉치였다.
나이를 먹긴 했어도 상당한 단련을 해온 이형조차 한 손으로 들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팔이 저릴 지경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두텁군. 이거 마음먹고 휘두르면 사람 한둘은 가볍게 죽일 수 있는 거 아닌가?"
이형은 보고서를 다시 탁상 위에 내려놓았다. 가볍게 내려놓을 생각이었는데도 텅-하고 묵직한 소리가 났다.
어윤중은 쓴웃음을 지었다.
"전하께서도 꼭 같이 말씀하시더군요."
"음, 그렇겠지. 부전자전이라고, 그야 닮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나. 그런데-."
이형은 잠시 말을 끊고서 가만히 어윤중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눈 크고 잘 보게. 이게 고작 사람 하나 잡을 닭 잡는 칼로 보이나, 아니면 뭔가 다르게 보이나?"
"···나라라도 잡을 천하의 명검으로 보입니다."
"정답이네. 그래, 그 정도는 되어줘야 거사를 맡겨볼 만하지."
이형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어윤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송구하오나, 소신이 스스로 알아챈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알아챈 것이 아니다?"
이형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스스로 알아챈 것이 아니라는 건 곧 다른 이가 정답을 가르쳐주었다는 것인데 혹 어윤중에게 누군가가 괜한 바람을 불어넣은 건 아닌가 싶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형은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아이였나 보군. 누굴 닮아서 그런지 눈치 하나는 좋은 아이야."
"아직 이립도 되지 않으셨음에도 이리도 국사에 능하시니, 장차 꼭 성군이 되실 것입니다."
"그럴 거야. 틀림없이 그러겠지. 그 아이라면 그럴 거야."
이형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것만큼은 꾸밈없는 이형의 진심이었다. 이원철이 보는 앞에서야 쑥스러워서라도 못할 말들이었지만 말이다. 이형으로서는 마음 같아서는 조금이라도 더 화제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국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자식 자랑에나 열을 올리는 건 주책없다는 생각 탓에 그만두었다.
이형은 검지로 가볍게 보고서를 두드렸다.
어윤중은 눈을 깜빡거렸다.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형은 히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고서는, 그의 어깨너머로 펼쳐져 있던 세계지도를 손으로 탕-하고 두드렸다.
"자, 이게 작금의 천하지. 경이 말한 대로 다른 무엇보다도 전쟁이 우선시 되는 끔찍한 난세야. 이런 와중에 우리 대한에서는 전쟁이 우선 끝나기만 하면 이러이러한 보고서를 기반으로 사회보험을 도입하겠다고 말할걸세. 어떻게 될 것 같나?"
"그야 물론··· 다들 대한을 흉내 내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국내외로 적잖은 압력이 있을 테지요."
"이 전쟁통 와중에 청년들 수백만 명이 죽어 나간 다음에 말인가?"
그제야 어윤중은 아,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형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눈치챈 것이다.
이형은 차례대로 도버 해협, 네덜란드, 중부 유럽, 지중해, 러시아를 지목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청년 수백만 명! 말로 하면 그야 간단하지. 그러나 경제관료로서 말해보게. 한창 일해야 할 때의 청년 인구가 수백만 명이 갑자기 증발했다고 생각하면 어떤가? 눈앞이 절로 컴컴해지지 않나?"
"···물론입니다. 당장 대한이 그와 같은 손해를 입는다면 경제공황이 찾아온다고 한들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 그렇지. 끔찍한 이야기야. 당장 공장을 돌리고 밭을 갈아야 할 청년이 수백만 명씩 증발해버린다니. 그것뿐인가? 여기 도버 해협에서는 지금 세계 1, 2위 해군이 함대 결전을 벌이고 있지. 화란에서는 이미 양측 합하여 100만 명 넘는 청년들이 쓰러졌고, 덕국은 동족상잔으로 불바다가 되었어.
지중해는 지중해대로 엉망이고, 러시아가 어떤 꼴이 났는지야 우리 대한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참으로 참혹한 이야기가 아닌가. 설령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수백만 명의 경제인구가 증발한 것도 모자라서 초토화가 된 국토와 해저에 처박힌 해군력까지 복구해야 한다니.
자, 그런데."
이형은 히죽 웃으며 뒤돌아섰다. 웃으면서, 어윤중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서 물었다.
"우리가 병술 보고서를 말미암아 사회보험을 약속해보세나. 이 전쟁이라는 게 나라에도 큰일이지만 백성에게는 더욱 큰일이 아닌가. 당장 정든 고향을 떠나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끌려가 나라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서 싸워야 한다니 말이네.
전쟁통에는 당장 살아남기도 바쁘니까 조용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또 다르단 말이야. 생각해보게. 경이야 다를지도 모르겠으나, 보통은 내가 나라를 위해 여기까지 힘 써줬는데 나라에서 무언가 합당한 대가를 돌려줘야 하지 않겠나-하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겠지요."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렇게 국가에 정당한 보상을 요구할 이들이 아직 총을 들고 있으며, 충분히 실전경험을 거쳤고, 필요하다면 사람 하나쯤은 기꺼이 죽이고도 남을 전투 병기들이라는 거야. 그런 마당에 우리가 사회보험이라는 알기 쉽고 누구나 구미가 당길 만한 당근을 내놓는 거네.
그럼 이제 둘 중 하나뿐이지. 성난 참전용사들의 손에 나라가 뒤집히거나, 아니면 사회보험을 내주거나. 그런데 지난 8년간 자네가 직접 해보면서 겪지 않았던가? 이게 어디 그냥 이제부터 사회보험을 도입하겠다-라고 해서 도깨비 요술 망치처럼 뚝딱하고 나오는 물건이던가?"
어윤중은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답할 이유도 없었다. 이형은 이미 그 대답을 알고 있었으니까. 병술 보고서와 비교될만한 베버리지 보고서가 완성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였고, 그때는 기초적인 컴퓨터마저 나온 다음이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 말씀이십니까···?"
어윤중은 질렸다는 기색이었다. 그야 8년간을 저 500장짜리 서류뭉치를 완성하기 위하여 앞만 보고 달려오다가 이제 막 끝을 낸 참에 또 새로운 일을 시작하라고 하는데 제아무리 사명의식이 넘쳐도 싫은 기색을 안낼 수는 없으리라.
"그래, 일일세."
그러나 이형은 이를 가볍게 무시했다. 그렇다고 어윤중을 보내지 않고서 원세개만 믿고 있기에는 본래의 역사에서 보여준 행적이 행적이었다. 원세개가 괜히 사고를 쳐서 러시아 혁명(?)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곁에서 조율해줄 행정관료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뭐얼, 벌써 걱정할 필요는 없네. 아무렴 짐이 그렇게 일만 시키는 삭막한 사람인 줄 아나? 당장 내일부터는 모건, 그 썩을 놈이 미리견 특사단과 함께 한양에 당도할 걸세. 오늘은 우선 맘 편히 쉬게. 그래야 내일부터 또 그 우라질 놈이랑 한바탕하지 않겠나?"
"네? 모건이라면 그 존 피어몬트 모건 말씀이십니까? 도대체 그 작자가 무슨 일로 한국에 온다는 말씀이신지요?"
"음? ···아아, 그랬군. 그러고 보니 장장 3개월간을 이 종이 쪼가리에 매달려 있었을 테니 세상 돌아가는 일에 눈이 어두울 만도 하지."
이형은 눈살을 찌푸렸다. 눈을 껌뻑거리면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는 어윤중의 모습을 보니 정말로 전혀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건 그리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상공부와 함께 모건과 한바탕해줘야 할 재무부에서 모건을 맞이할 준비가 조금도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말이다.
이형은 잠시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간략하게만 알려주자면, 영길리 놈들이 태평양에서 해적질하다가 붙들렸네."
"그 작자들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요."
"그래서 대응을 고심하고 있었는데, 관아에서 정식으로 발표하기도 전에 한양일보에서 먼저 얼토당토않은 낭설들까지 섞어서 터뜨리는 바람에 민심이 엉망이 되어버렸어. 그 탓에 우리 대한에 주전론이 번져서 모건 놈은 우리 대한이 영길리와 전쟁하는 꼴을 막아보겠다고 만사를 제쳐두고 오고 있는 거야."
"그 작자들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요."
"그런데 그놈이 막으러 오는 건 오는 거고, 안 그래도 밉던 놈들이 매를 벌었으니 후려갈겨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이번 사건의 원흉인 민겸호 놈 조카사위랑 그놈 장모가 몸을 섞어서 애까지 낳았다고 세간에 알려서 여흥 민씨 놈들을 후려치고 있던 참이네."
"정말로 잘된 일입니다, 황상. 그럼 그 김에 이제부터 그간 밀린 세수를 한꺼번에 거두어들이면 되겠습니까?"
"···그놈들 탈세까지 저질렀나?"
이형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되물었다. 그러자 어윤중은 단호히 답했다.
"왜 아니겠습니까?"
"허, 이 우라질 놈들이 진짜···."
이형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 탓일까.
조금 전까지 일하기 싫은 티를 팍팍 내던 어윤중이 갑작스럽게 일하고 싶은 의욕에 불타오르고 있는 듯 보였다.
< 전후구상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