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404화 (404/530)

< 검은돈 >

애초 여흥 민씨가 한양 제일의 세도가로서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3가지였다. 하나는 안동 김씨를 위시한 세도가의 몰락이었고, 또 하나는 황제와의 혈연, 마지막 하나는 서방 자본가들과의 연줄이었다.

앞의 두 가지는 직관적이지만 마지막 세 번째는 다소 모호하므로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쉽게 말하여 이들은 모건의 금융가와 결탁했었다. 그리고 그 계기는 에디슨이 연회 중 일으킨 불미스러운 사건이었다. 악연 또한 인연이듯이, 이를 무마하기 위해 '적절한' 금전적 보상을 제공하였던 것을 계기로 비자금을 대주는 대신 한국에서 사업을 벌이는 데에 뒷배가 되어주기로 한 것이다.

이완용이 다른 언론사들보다도 한발 빨리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내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흥 민씨는 힘의 공백을 틈타 황제와의 혈연을 내세워 모건이 제공해준 비자금으로 한양 제일의 명가라 자부하며 위세를 떨치고 있던 것이다.

그러므로, 상륙을 앞두고서 여흥 민씨의 몰락을 알게 된 모건이 하게 되었을 생각이야 뻔한 것이었다.

"끝났다···."

초호화 여객선 SS 워싱턴 호 VIP룸.

모건은 머리를 감싸 쥐며 나지막이 탄식했다. 아직 황제와의 오찬이 남아있었고, 그런 만큼 황제와 직접 만나 그 진의를 알게 된 것은 아니었으나 이 일련의 흐름은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가 이미 전쟁을 결의했다고 해석할 수밖에는 없었다.

우선 가장 먼저 과장된 오보 때문인 주전론 득세부터가 그랬다. 아무렴 대한제국을 철권으로 다스리는 황제가 여기에 조금도 개입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 인제 한국과 영국의 전쟁을 막아보려고 모건이 제 발로 달려왔더니, 그의 가장 믿음직한 연줄 중 하나였던 여흥 민씨가 역모죄, 강상죄, 탈세죄로 추궁을 받고 있다고 한다.

무선통신이 있는 시대도 아니었고, 배에 타고 있는 동안에는 육지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알 길이 많지 않던 시대의 한계였다. 상륙한 그 즉시 수집한 정보들만을 두고서 판단하자면, 황제는 모건과 만나줄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였다.

"빌어먹을, 인제 어쩌지?"

모건은 손톱을 물어뜯었다. 영국과의 전쟁을 외치는 여론을 만들고, 영국과의 전쟁을 막으러 온 모건의 인맥들을 숙청하고. 일련의 행동만 보고 판단하자면 이미 각오를 굳힌 듯 보였다.

그나마 영국에서 곧장 대국민 사과에 나서면서 여론을 무마시켜준 덕분에 배를 타고 오는 동안 영국에 선전포고문이 전달되는 불상사는 피한 모양이었지만, 그것도 시간을 벌었을 뿐이다. 황제가 마음을 이미 굳힌 상태라면 계속 도망쳐봐야 언젠가는 한계가 다가오기 마련이다.

즉, 모건은 황제의 마음을 돌리고자 한다면 무언가 결정적인 손 패가 필요했다. 문제는, 그 손 패가 되어줄 만한 것이 마땅치 않았다는 점이다.

"차라리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족속이면 낫지, 나라를 제 몸처럼 생각하는 전제군주를 무슨 수로 구워삶으라는 말이야!"

모건은 울화통을 터뜨렸다. 사실상 그것이 가장 큰 난점이었다. 계속 낡아빠진 궁궐을 보수하면서 지내다가 보위에 오른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 와서야 겨우 새 궁전을 세운 황제였다. 이쯤 되면 누구라도 황제의 가장 큰 욕심이 재물욕이 아니라는 걸 알아챌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짐이 곧 국가다-라고 말하였던 태양왕과 같은 부류다. 이런 부류의 군주를 돈으로 구워얗게 표백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이내 모건은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울긋불긋하게 핏줄이 서 있는 모습이 꼭 사찰의 인왕상을 보는 것만 같았다.

결국 모건은 더는 참지 못하고서 고함을 질렀다.

"이, 이 망할 자식들! 차라리 날 팔아라! 날 팔아서 제 뒷주머니라도 채워보란 말이야! 그냥 몰라서, 아니면 어쩌다 보니 하는 이유로 이 몸을 이곳까지 오게 하다니! 이 얼빠진 놈들아-!"

와장창-.

모건은 참지 못하고서 탁상 위에 놓여있던 온갖 잡동사니를 마구 집어던지면서 열불을 토해냈다.

그러나 아무리 화를 토해내도 화가 가라앉지를 않았다.

유능한 적보다 무서운 것이 얼빠진 아군이라더니, 꼭 그 말대로였다.

* * *

같은 시각, 창덕궁.

"여기까지가 여흥 민씨에서 징수를 피하고자 국내에 은닉해두고 있었던 자금입니다."

쿠웅-.

어윤중의 설명이 끝남과 함께 그를 따라온 경제관료가 한 무더기의 서류를 탁자 위로 올려두었다.

병술 보고서보다도 약 1.3배, 1.4배 가까이 높다란 서류의 산이었다.

이형은 떨떠름하게 서류를 집어 쓱 하고 훑어보았다. 하나하나가 점입가경이었다. 새로 공장을 세우겠다며 공사 허가만 받아놓고서 몇 년째 시공조차 들어가지 않고서 묵혀둔 땅문서들 정도야 기본이었고,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들이라던가 보부상들이 관리하는 도박장에서 잃었다는 핑계로 소재가 붕 뜨게 만든 자본도 있었다.

당연히 보부상들과 이하응, 여흥 민씨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고작 개화가 이루어진 지 30년 만에 어떻게 하면 이만큼 세련된 탈세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문제는, 이게 전부가 아닐 거라는 점이었다.

이형은 흘끗 어윤중을 빤히 바라보며 되물었다.

"···국내?"

"물론 국외에도 있습니다. 동녕 땅, 그러니까 서역 말로는 포르모사라고 불리는 대만국이 대표적입니다. 지금이야 주권을 회복했습니다만 불과 10년 전까지도 국가 주권이 회사에 귀속된 상태였던지라, 지금도 회사 자본을 명목으로 국가 차원에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검은돈이 상당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쿠웅-.

어윤중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또 한 사람의 경제관료가 들어와 탁상 위에 한 무더기의 서류를 내려놓았다. 국내자산을 늘어놓았던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그 반의반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종류가 줄었을 뿐이지, 막상 그 내용물을 확인하니 국내자산과 비교하면 공이 두 개에서 세 개씩은 더 붙어있었다.

이형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너털웃음을 터뜨리니, 어윤중이 설명을 이어갔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고작 지난 30년간 여흥 민씨가 제힘으로 완성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광범위하고 철저합니다. 그 어리숙한 작자들이 열대우림에 비밀리에 운영되던 열대과일 농장에 투자하여 그 배당금을 세무조사에 누락시키지를 않나, 농장에 노동자를 천 명씩 고용하고 있다고 속여 공제 혜택을 받고서는 실제로 그 천명의 인적사항은 그냥 빚쟁이들의 호적을 빌려다 대충 채워 넣은 거였다던

'그렇지만 물 위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보다야 수면 아래에서 일어나는 게 낫겠지. 어차피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없다면 기회가 날 때마다 엄벌주의로 솎아주는 게 나아. 말로 해서 들을 놈도 아니고, 이 기회에 국세청에 몽둥이라도 하나 쥐여줘야겠어.'

"좋아, 우선 이렇게 하지. 앞으로는 고액탈세자들은 상대가 누구라도 상관하지 말고서 징수해 버리게."

"송구하오나, 그러자면 무력충돌이 일어나지 않을는지요···?"

어윤중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도 산에서 드물게 나오는 곰이나 호랑이 따위의 날짐승들에 대응한답시고 민간 가정집이 총기를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세금을 징수한답시고 몽둥이 들고 쳐들어가 봤자 총 들고 대드는 탈세범에게 내쫓기거나 총 맞아 죽을지도 모르던 것이다.

"그래, 여차하면 총으로 쏘겠지. 그렇다면 총포로 무장하게. 국세청 직속 특전대라도 하나 신설해주겠네. 소액탈세 상대로는 투입하지 말고, 이번에 여흥 민씨 같은 놈들 조지는 데 쓰라는 말이야. 알겠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

뒤이어진 이형의 부연설명에 그제야 어윤중은 허리를 굽혔다. 아무렴 역모죄로 끌고 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민간 가정집이 호신을 명분으로 총포를 지니고 있어봤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반대로, 국가기관은 공권력 집행에 동원할 수 있는 무장의 한계가 없다.

그럼 탈세범들이 대들어봤자 국세청이 강제로 징수하려고 나서면 쓸려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형은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할 것이라 확신했다.

'이번 기회에 아예 검은돈만 캐내는 정보기관을 새로 만들어야겠어. 국정원이나 공안부, 국가헌병대를 여기에 돌리기에는 그 치들이 하는 일들도 너무 많아서 전문성이 떨어져. 아시아 대륙 전역을 담당하려면 아예 미국 놈들처럼 재무부 직속으로 정보기관을 하나 더 만들어 둬야지.

그 노하우나 인맥은 인제 국내는 보부상 녀석들에게, 국외는 모건 놈에게 내놓으라고 윽박질러야 할 테고.'

이형은 눈을 흉흉하게 빛냈다.

전쟁이 끝나고 당사자들이 아시아에 돌아와서 군말이 터져 나오기 전에, 끝장을 봐야만 했다.

< 검은돈 > 끝

ⓒ 리첼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