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버 대해전 >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국 특사단에 민간인 신분으로 참여한 모건에 대한 용무.
영국과 프랑스가 도버 해협에서 운명적인 결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 한국에 도착한 미국 특사단의 용무는 결코 탈세와 같은 소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저번에 한 번 보고를 받았던 기억이 있네만, 이게 최종보고서인가?"
"예. 저번에 발송되었던 보고서는 파리에 근무 중인 저희 프랑스 대사관에서 보내왔던 것이고, 이번에 도착한 보고서는 런던에서 근무 중인 저희 연합왕국 대사관에서 보내온 것을 취합한 것입니다. 아마, 정확성에는 이번 최종보고서가 더욱 우수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회담을 앞두고서, 이형은 김옥균과 마주하고 있었다. 외교부 장관으로서 황제에게 가장 먼저 보고 해야 할 정보가 있었던 것이다. 미국과 한국이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하여 정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김옥균은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우선, 프랑스의 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두어 런던이 프랑스군에 점령되었다는 소식은 사실인 모양입니다. 런던에 근무 중이었던 주영공사의 보고 또한 그와 일치합니다. 현재 내각은 리버풀에 임시정부를 설치하였고, 왕실의 캐나다 피난이 계획되었으나 연합왕국의 백성이 폭동을 일으켜 무산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절반의 성공이 아니지 않은가. 항복을 받아내지는 못했어도 완전 승리인 것 같은데?"
"그것이, 무사히 런던에 상륙한 프랑스군이 채 3만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현재로서는 런던을 확보하여 치안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고 합니다. 또, 그 3만 명을 상륙시키기 위하여 프랑스 해군은 프랑스의 발표로는 전함만 5척, 영국의 발표로는 6척이 격침되고 1척이 나포되어 사실상 대서 양 함대가 궤멸 상태에 빠졌다고···."
김옥균은 설명을 늘어놓으면서 보고서를 이형에게 가져다 바쳤다. 이형은 답지 않게 신중히 보고서를 건네받아 집중하여 읽기 시작했다.
보고에 따르면, 도버 해협에서 벌어진 함대 결전은 프랑스군의 전략적 승리, 영국군의 전술적 승리였다. 도버 해협에 늘어선 영국 함대는 일제히 ∩자 모양으로 늘어서 기나긴 포위망을 형성하여 프랑스 함대의 죽음을 각오한 충각돌격에 맞섰고, 실제로 이 전술은 성공하여 프랑스군이 동원하였던 상륙병력 5만 명 중 2만 명은 물귀신이 되거나 포로로 잡혔다고 했다.
문제는 함대는 섬멸했지만, 그 결과 런던이 뚫렸다는 사실이다. 충각돌격이라는 선전이 무색하게도, 막상 도버 대해전에서 충각으로 침몰한 함선은 한 손에 꼽았다. 프랑스군은 상륙함대의 호위를 순양함들에 떠넘기고서 보유한 전함 전부를 정면에 내세웠다. 그들은 모든 화력을 정면에 집중시켰고, 전함의 일제 포화는 기어이 영국의 포위망에 구멍을 내놓았다.
'전함 2~3척 손실(추정), 장갑 순양함 5~6척 손실(추정), 방호 순양함 8~9척 손실(추정), 호위함 11~13척 손실(추정), 어뢰정과 포함 30척 이상 손실(추정)··· 이거 영국 놈들도 이기긴 했지만 영 성치 않구먼.'
영국 공사 민영돈이 주재 무관의 협력을 받아 작성하였다는 보고서에서는 이를 두고서 영국 왕립해군의 오만이 최악의 형태로 돌아온 것이라고 되어있었다. 프랑스 함대가 동원한 전함이 9척, 영국 해군이 최종적으로 동원한 전함이 19척으로 전력이 두 배를 웃돌면서 상륙을 저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번 기회에 프랑스 해군을 섬멸하려고 전함들을 좌우로 늘어놓은 것이 뼈아픈 실패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번 도버 대해전의 전훈은 다름 아닌 전함을 막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전함뿐이라는 것이었다. 프랑스군이 전함을 좁다란 해역에 모으면서 전함 9척과 전함 5척이 부딪히는 형국이 되어버리자 왕립해이형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어쩌면 프랑스 대사관에서는 제대로 정보를 취득해 본국에 발송했지만, 도중에 프랑스 첩보 기관에서 보고서를 가로채 자신들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으로 바꿔 넣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럴 터였다. 아직 감청이라는 개념도 희박하던 시절이었다. 프랑스의 첩보능력도 21세기의 첩보기술에 비하면 원시적인 수준이겠지만, 그걸 방어할 대한제국의 방첩 능력은 그보다도 뒤처진 수준일 게 뻔했다.
하물며 대한제국의 영향 아래에 있는 아시아라면 모를까, 프랑스의 심장부라는 파리라면야.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프랑스에서는 한국 대사의 양말 색깔까지 알아맞히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번에 재무부 직속으로 새로 정보기관을 만드는 김에 다른 놈들도 한 번에 궁둥짝을 걷어차 줘야겠어. 아시아를 관리하는 수준이라면 지금 수준으로도 상관없겠지만, 그렇다고 아무리 남의 집 안방이라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해서야 곤란하지.'
이형은 작게 혀를 찼다. 변명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세계 최초로 근대적인 비밀경찰을 만들어 대중감시에 사용했다는 그 나폴레옹 3세의 아들이 이끄는 프랑스 제국이었다. 이제는 한 세대가 지나면서 경험이 축적되기까지 했으니, 현시점에서 세계 최고의 첩보능력을 자랑할 곳은 프랑스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세계 패권에 도전하겠다는 패권도전자가 상대가 세계 1위라는 이유로 단념하면 어쩌라는 말이던가. 부족한 점을 새삼스레 자각하게 되었다면, 이제라도 채워나가야 했다.
이형은 슬쩍 김옥균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일단 이 보고서가 옳다고 생각하고 이야기해보지. 3만이 고작이라고 하지만, 아무튼 상륙에 성공한 건 성공한 거지. 영길리 놈들도 골치 아프겠군. 말려 죽이려고 해도 여차하면 런던을 통째로 불태워 버릴지도 모르니 함부로 물자를 틀어막을 수도 없고. 그래, 런던 탈환은 가능해 보이던가?"
"우선 귀족들이 각각 사비를 털어서 런던 수복을 위한 의병을 모으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대단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리버풀 임시정부의 선전으로는 10만, 프랑스 측의 발표로는 5만 명이 집결 중이라는 정보입니다."
"그건 믿을 수 있는 정보인가?"
"예. 이번에 합중국 공사관에서 보내온 정보입니다. 대서양 회선이 아직 살아있는 덕택에 현재 합중국에서는 리버풀 측의 사정에 상당히 능통한 모양입니다. 주미공사는 10만은 전시 근로 역까지 모두 합한 숫자일 것이고, 실제로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전력은 3~4만 명이 고작일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중에서 런던이 함락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정예병은?"
"5개 연대입니다. 2개는 기병, 3개는 보병이라고 합니다."
"···그거 왕실 근위대 아닌가? 그 녀석들이 끝이라고? 잠깐, 분명 해군육전대가 본토방위를 위해 주둔 중이라고 들었는데?"
이형은 어처구니가 없어 무심코 되물었다. 틀림없었다. 라이프 가드, 블루스 앤 로열스, 그레네이더 가드, 콜트스트림 가드, 스코트 가드. 모두 합하여 5개 연대. 즉, 군위사단 1개가 현재 리버풀 임시정부 휘하의 정규병력 전부라는 것이다.
나머지는 일단 예비군이라고 불러야겠지만, 귀족들이 모아온 사병들이 주축이 되었을 텐데 그게 과연 예비군일까 민병대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도움이 될만한 전력이 아니다.
런던에 상륙한 3만 명의 프랑스군이 런던 민심만 우선 진정시키고 나면 모조리 쓸어버리겠다고 나서도 이상할 게 없는 보잘것없는 전력이다.
"리버풀 측의 발표로는 런던에서 항전하던 중 힘에 부쳐 우선 케임브리지로 북상해 그곳에서 런던 탈환을 노리고 있다고 합니다. 파리 측의 발표로는 런던 시가전 당시 수뇌를 잃고서 뿔뿔이 흩어져 사이 정통정부로 인정할 것이다.
또, 브리튼 자유국은 프랑스의 괴뢰국이라고 하지만 공화국이다. 안 그래도 워스파이트 호 사건으로 영국과 국교를 단절한 이래 아직 국교를 수복하지 않은 미국으로서는 브리튼 자유국에 보다 동질 감을 느낄 개연성이야 충분하다.
무엇보다도, 도버 대해전으로 양측 함대가 대거 소모되었으니 미국도 이제 자신감이 붙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왕립해군의 대서양 봉쇄를 뚫고서 영국 열도에 상륙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말이다.
그리고 이 제국주의 시대의 열강이라면 누구라도 영국이 먹음직스러운 뒤통수를 보여주고 있는데 뒤통수를 후려치지 않을 리가 없다.
"···이런 우라질."
이형은 눈살을 찌푸렸다.
회담은, 아무래도 녹록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 도버 대해전 > 끝
ⓒ 리첼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