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국의 방침 >
그런가 하면, 반대편.
"본국의 방침이 바뀌었다고요?"
"그렇습니다."
미국 전권대사 존 셔먼은 급작스러운 소식에 머리가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배를 타고 오는 도중에 본국의 방침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한국에 도착하여 주한 공사를 통해서 겨우 듣게 된 것이다.
셔먼은 미간에 손을 가져다 댔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셔먼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며 되물었다.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분명 본국의 방침은 이번 워스파이트 호 사건에서 공통된 애도 성명을 발표하여 한국과 목소리를 함께하고, 추후 태평양에서의 이상 사태에 대비하여 군사적 협력을 확대한다-까지였지요. 그리고 사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았습니까. 무엇이 또 바뀔 여지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시다시피, 매킨리 당선인께서 아일랜드계···의 피를 받으셨잖습니까."
주한 공사는 머뭇거리며 슬쩍 말해주었다. 그 한마디에 셔먼은 뒤통수가 띵해지면서 모든 걸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윌리엄 매킨리는 엄밀하게는 순수혈통 아일랜드계가 아니다. 아일랜드에 정착한 스코틀랜드계와 잉글랜드계의 혼혈이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가 아일랜드계라고 주장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는 게 문제다. 비슷하게 아일랜드계가 충만한 뉴욕주를 기반으로 삼은 클리블랜드도 이점에서는 마찬가지.
아일랜드의 해방을 대외명분으로 내세우려고 마음 먹는다면 현 대통령이건 대통령 당선인이건 얼마든지 성사 시킬 수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군바리 놈들."
셔먼은 뒷골을 잡았다. 안 그래도 이전부터 미 군부에서는 영국과의 전쟁에 적극적이었다. 남북전쟁과 뒤이은 헤이스 시절의 군비증강으로 안정적인 직장과 삶의 터전을 원한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 대거 유입된 까닭이다. 그 결과 이제는 일반 사병이나 부사관 중 적지 않은 수가 아일랜드계 미국인과 유색인종이 되어있었다.
그런데도 그간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군부가 제아무리 영국과의 전쟁을 외쳐봐야 문민정부에서 어깃장을 놓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제 새로운 대통령은 아무래도 군부의 목소리를 따를 모양이었다. 명분은 영국의 야만스러운 식민통치에 신음하는 북미와 아일랜드의 해방 즈음 될까.
셔먼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간신히 호흡을 정리한 다음 다시 물었다.
"그래요, 어디까지 진행되었습니까?"
"적색 전쟁계획이 늦어도 3월 중에는 하원을 통과해야 할 거라는 엄포가 나왔습니다."
"그것뿐입니까?"
"그리고··· 이건 단순히 추측입니다만. 이번에 런던 전투 중 발생하였던 일련의 폭동 배후에 본국이 관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뇨, 우리 말은 똑바로 합시다. 배후에 있는 거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셔먼의 추궁에 주한 공사는 답하지 못했다. 국무부와는 무관하게 행정부 차원의 개입이 있었음이 확실하다는 이야기였다. 셔먼은 그저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 시작되며 아일랜드에서는 영국에 맞선 무장봉기가 연일 일어나던 차였다. 그러니까 프랑스의 런던 상륙에 호응하여 런던 시내에서 아일랜드계를 주축으로 한 육체노동자들의 무장파업이 일어나 안팎으로 궁지에 몰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럴만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충분히 사전에 예측할 수 있었던 사건을 어째서 막지 못했던 것일까 의아해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배후에 조국이 있었을 줄이야. 셔먼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본국은 이미 브리튼 자유국을 공인하기로 한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상륙의 성과가 아무래도 기대에 못 미쳤던 모양인지라. 아직 그에 대해서는 따로 지침이 내려온 바가 없습니다."
"그야 그렇겠지요. 아니, 제발 말 돌리지 좀 맙시다. 그래서 뭡니까? 본국에서는 도대체 뭘 원하는 겁니까? 이제 한국에 영국과의 전쟁에 함께 참전하자고 해야 하는 겁니까? 전 당장 내일 본국에서 멋대로 바꿔버린 새로운 방침에 따라 저들과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짧고, 될 수 있으면 간단하게! 자, 말해보십시오. 그래서 본국에서 제게 도대체 원하는 게 뭡니까?"
셔먼은 씩씩거리며 쏘아붙였다. 안 그래도 배를 타고 오는 도중에 본국의 방침이 멋대로 바뀌었다는 소식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주한 공사는 계속 말을 모호하게 하고 있던 것이다.
그제야 주한 공사는 고개를 푹 숙이며 답해주었다.
"···그렇습니다."
"하, 그렇군요. 그래요. 주어진 시간은 이제 하루- 아니군요. 벌써 해가 저물었으니 반나절이 고작이로군요. 아무튼, 반나절 동안 이제 저는 영국 왕실과 혼인하여 피를 섞은 지 고작 5년도 되지 않은 영국의 우호국을 영국과의 전쟁에 끌어들여야 한다, 이 말이지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렴요, 그렇겠지요. 당신이 직접 이번 회담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편한 소리가 나오는 거겠지요.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까?"
존 셔먼은 비아냥거렸다. 주한 공사로서는 갑자기 방침을 바꾼 게 자기도 아닌데 왜 자기가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내심 울컥하는 심정이었지만, 상대가 상대였던 만큼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그 유명한 셔먼 반독점법을 통과시켜 뭇 미국 자본가들의 원성을 한몸에 받던 당사자가 아닌가. 비록 이 반독점법 탓에 대통령이 되는 길은 막혀버렸다지만, 악명도 명성인 법이다.
거기에 존 셔먼은 애초에 경제관료에 가깝다. 그것도 남북전쟁기 시절부터 이날 이때까지 30년 넘게 미국 재무부를 지탱해온 베테랑 경제관료 말이다. 그런 존 셔먼이 특사로 파견된 건 당초에 이 협상이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를 똑똑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참전은 결코 경제관료의 업이 아니다. 셔먼으로서는 당장 하루 안에 그동안 준비해왔던 모든 협상 지침을 엎어버리고 그에게는 낯설기 그지없는 업무를 성사시키라고 떠밀린 격이었던 셈이다.
"좋습니다. 이제 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군요."
셔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드득하고 이 가는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은 어디를 어떻게 봐도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인 거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돌연 셔먼은 방긋 웃었다. 갑작스레 웃는 셔먼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낀 주한 공사가 두 걸음 뒤로 물러나는 걸 아랑곳하지 않은 채, 셔먼은 말했다.
"참으로 수고가 많으십니다. 서류들은 여기에 두고 가시면 됩니다. 자, 날이 저물었군요. 마음 같아서는 한잔 정도 함께 해드리고 싶지만, 항해가 고되었던지라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안녕히 가시길. 아, 내일은 일찍 와주실 필요 없습니다. 시간에 딱 맞추어 주시는 편이 제게는 더 좋지요.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예? 아, 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편안한 밤 되시기를.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셔먼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축객령이었다. 주한 공사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악수를 주고받은 다음 방을 나서야만 했다.
'이거 괜찮은 건가? 뭔가 묘한 꿍꿍이가 있는 것 같던데···.'
관저로 돌아오는 내내 주한 공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 때문이다고 따로 콕 집어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왜인지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 찜찜함의 정체는 다음 날 곧장 밝혀졌다.
* * *
이튿날.
"본국에서는 귀국의 참전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첫 만남에서, 미처 인사를 주고받기도 전에 셔먼은 대뜸 그렇게 말했다. 황제에게 고개를 조아리기도 전에 말이다.
자리에 모인 모두가 경악한 건 물론이었다. 차마 무엄하다고 지적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 그만큼 갑작스러웠고, 무례했기 때문이다.
그 무례한 첫 대면에 기분을 잡쳤던 것은 이형 또한 마찬가지라, 이형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되물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
"글쎄요. 저로서는 그저 들은 대로 전 해드릴 따름입니다. 저도 이걸 어제 막 들어서 따로 생각해둔 협상 지침이라고 할만한 게 없어서 말입니다."
"어제 막 들었다고?"
"예. 어제입니다. 덧붙여서 이미 본국에서 전쟁에 개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은 것도 어제가 처음이로군요. 그래서, 참전해주시겠습니까?"
그리 말하며 셔먼은 빙긋 웃어 보였다. 좌중에서는 일제히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일국의 특권 대사라는 사람이 보여줄 만한 언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례함은 둘째치고서, 자국이 협상에서 불리한 점을 대놓고 내보이고 있지 않은가. 저게 도대체 앞으로의 협상에 어떤 이점이 되길래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아무래도 대사께서 무언가 착란이 오신 듯하군요. 오늘 회담은 취소하겠습니다. 우선 의원을 부를 테니 내일 대사께서 정신이 온전히 돌아오시거든 그때 재개하도록 하지요."
당장에 김옥균부터가 회담을 취소하려고 나서고 있었다. 우선 셔먼의 태도부터가 이해하기 어려웠을뿐더러, 갑작스러운 정보의 연쇄에 이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회의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좌중 또한 김옥균의 태도에 공감하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국 측 특사단이라고 한들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해도 셔먼의 태도는 너무나 비정상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협상이 취소되려는 찰나.
"거기 잠깐."
이형은 가만히 손을 들어서 이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셔먼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담담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잠시 이야기 좀 하지. 후원으로 안내하게."
"하오나 폐하···."
"그냥 둘이서 이야기나 하려고 그러네. 정식 회담은 장관이 말한 대로 내일 진행하지. 오늘은 사적으로 이야기만 조금 주고받고서 끝낼걸세."
다름 아닌 황제가 그리 말하는데 어깃장을 놓겠는가. 어깃장을 놓으려 했던 김옥균도 정식 회담이 아니라 사적인 이야기라고 하니 순순히 물러났다. 남은 것은 이형과 셔먼, 그리고 양측의 역관들뿐이었다.
그렇게 후원으로 자리를 옮긴 다음, 이형은 슬쩍 물었다.
"어지간히도 협상을 파투내고 싶었던 모양이군."
"글쎄요, 제가 마침 간질이 온지라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발작이 왔는데 두 발로 디디고 걸어 다니는 간질환자도 있던가? 솔직하게 말하게. 경은 전쟁이 싫은 건가?"
"싫지 않습니다. 이건 이길 수밖에 없는 전쟁이니까요. 영국은 먹음직스러운 뒤통수를 보여주고 있고, 우리 합중국은 그 뒤통수를 세게 때리기만 하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영국과 국혼을 맺었던 한국을 영국과의 전쟁에 끌어들인다는 것 자체가 가능할는지 저로서는 도통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협상의 실패를 혼자서 짊어지게 되는 건 싫다 이건가?"
이형은 조용히 눈을 부라렸다. 그건 공직자로서 최악의 마음가짐이었다. 아무리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을 맡았다지만, 그건 결국 자포자기하여 외교적 무례를 연발해 조국에 끔찍한 외교적 해악을 끼치겠다는 이야기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셔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어차피 거절당할 게 뻔한 무리한 요구로 양국관계에 흠집이 나느니 차라리 제가 바보 시늉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호오."
이형은 히죽 웃었다. 그건 또 이야기가 달랐다. 만일 여기서 미국이 정식으로 한국에 참전을 요구하고, 한국이 이를 거절한다면 전후 미국이 승리하건 패배하건 가장 도움이 절실하던 때에 외면했다는 이유로 양국관계는 냉각될 것이다.
그러나 특권 대사가 협상 과정에서 온갖 무능과 하자를 드러내며 협상이 실패한다면 추궁의 화살은 한국이 아니라 특권 대사에게 향한다. 그런데도 양국관계가 예전 같지는 못하겠으나, 그래도 최소한 책임을 미룰 곳이 생기니 복구는 쉬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경우 특권 대사- 셔먼은 확실하게 몰락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형 또한 그 점을 지적했다.
"괜찮은 건가? 그런 식으로 협상에 실패한다면 경에게는 적잖은 정치적 타격이 있을 텐데?"
"정치적 타격이라! 그런 걸 걱정하기에는 너무 늦었지요. 그놈의 독점금지법 때문에 절 못 죽여서 안달인 놈들이 미국 땅에 한둘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셔먼은 말을 끌며 이형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듣자 하니, 폐하께서는 격식을 차리는 딱딱한 자리보다는 이런 돌발적인 자리를 더욱 선호하신다고 하더군요. 원래는 조금 더 부드러운 방법을 찾고 싶었지만, 고작 하루로는 이런 극단적인 방법들 밖에는 달리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허, 그놈 참."
이형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한마디로, 이렇게 막 나가면 이형이 흥미를 느껴줄 것이라는 기대에 걸고서 제 정치적 생명을 걸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였다.
더 큰 문제는, 그게 실제로 통했다는 점이었지만 말이다.
이형은 천천히 팔짱을 끼며 기둥에 기대고 섰다.
"그래, 그럼 우리 한국이 함께 해달라고 부탁할 생각은 없다 이거군. 그럼 무엇을 원하나?"
"이전과 같은 살가운 관계입니다. 태평양은 너무나 넓고, 험난합니다. 양국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틀어지는 순간 태평양 무역에는 끔찍한 타격이 있을 수밖에 없지요. 한때 연방 정부의 재정을 담당하고 있던 입장으로서 그런 사태만큼은 피하고 싶습니다. 대서양 무역도 성치 않은데 태평양 무역까지 붕괴한다면 그때야말로 진정한 경제공황이 시작될 테니까요."
"말이 좀 통하는군. 그러나 유감스럽군그래. 잠시나마 참전을 미뤄달라고 본국을 설득할 수는 없겠나? 이대로 프랑스가 영국은 이기면 프랑스는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초강대국이 될 테지. 미국에도 그건 바람직한 사태가 아니지 않은가?"
"합중국의 정치인으로서 감히 말씀드리자면, 합중국의 정치인들이라면 누구나 보다 신속한 참전으로 합중국이 프랑스보다 많은 것을 차지해서 합중국이 프랑스보다 강해지면 된다고 생각할 겁니다."
"거 끝내주게 막 나가는 놈들이구먼."
이형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합중국의 정치인들만 그런 건 아니었다. 이 제국주의 시대의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리라.
그러자 셔먼이 슬쩍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서, 제안이 있습니다."
"제안?"
"한국이 러시아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합중국 또한 러시아의 아직 개발되지 못한 광활한 동토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한국이 무사히 러시아를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 테니, 한국 또한 이번 영국과의 전쟁에서 직접 참전하지는 않더라도 은근히 우리 합중국을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한마디로 타협점이었다. 또는, 선을 그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직접 참전을 회피하되, 양국이 각자 노리는 걸 차지할 수 있도록 돕자고 제안한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이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프랑스가 영국의 견제를 받지 않게 된다면 틀림없이 이 세상을 제 손으로 쥐락펴락하려고 들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그러나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만, 이미 개입을 시작한 현 행정부로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영국과의 전쟁계획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로서도 이를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막아달라고 할 생각은 없네. 아니, 마음 같아서는 막고 싶었지만 여기까지 오면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다만-."
이형은 가만히 셔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프랑스보다 많은 것을 차지하면 그만이라고 했던가? 그 말대로 되기를 바라오. 합중국에서 브리튼 열도를 통째로 사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브리튼 열도에 프랑스의 꼭두각시가 들어서는 것만은 막아주시오. 짐은 져 프랑스인들이 세상을 혼자서 쥐락펴락하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셔먼은 꾸벅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때 이형은 이미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 다음이었다.
'만일 미국이 정말로 참전하고, 캐나다까지 함락된다면 본토를 잃게 되는 순간 영국 왕실은 이제 인도로 오거나 호주로 옮겨와야 한다.'
그 말인즉슨, 영국 임시정부가 한국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미국이 참전을 준비하고 지브롤터가 함락된 지금, 하늘길이 열리지 않는 한 영국 왕실이 인도양까지 올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 며늘아기가 영국- 아니, 호주 여왕이 될 수도 있다는 거지.'
이형은 조용히 입꼬리를 뒤틀었다.
< 본국의 방침 > 끝
ⓒ 리첼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