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회담 >
그것으로 실무상의 이야기는 거의 끝난 상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두 사람이 실무상의 이야기만 주고받았음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셔먼과 이형은 이후로도 잠깐의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고 보면 머지않아 만국박람회를 개최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무언가 원하시는 선물이라도 있으십니까?"
"선물이라···. 그렇군. 귀국의 자유의 여신상이 그토록 아름답고 웅장하다는 소리를 들었소. 내 마음 같아서는 직접 눈으로 보고 싶지만, 알다시피 나라에 발이 묶인 몸이라서 말이오. 내 그게 꼭 보고 싶어서 그런데, 그 복제품이라도 선물해주시겠소?"
"하하하! 물론 그러지요. 하지만 그럼 너무 값싸지 않겠습니까. 이왕 선물해 드리는 김에 통 크게 새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이름은··· 어이쿠. 이건 폐하께서 직접 지으셔야겠지요. 혹시 생각해두신 이름이라도 있습니까?"
"음, 그렇다면 계몽의 여신상이라고 하리다. 찬란한 계몽의 횃불이 이 아주를 기나긴 잠에서 깨워줄 테지."
"계몽이라··· 그거 멋지군요. 알겠습니다. 꼭 긍정적으로 검토될 수 있도록 건의해 보겠습니다."
"뭘, 그렇게 딱딱하게 생각할 거 없소. 짐은 깜짝 선물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요. 뭐든지 생각한 대로 돌아가면 재미없잖소? 기왕에 말이 나온 김에, 어디 짐을 깜짝 놀라게 할만한 선물을 준비해보시오."
"어이쿠, 깜짝 선물이라니. 이거 무서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벌써 부담이 되는걸요? 좋습니다. 기대해 주시길. 폐하를 깜짝 놀라게 해 드릴 만한 선물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껄껄껄! 그래, 어디 잘 해보시오. 참, 대신 기대에 못 미치거든 두 번 다시 발도 디디지 못할 거라는 것만 알아두시오!"
두 사람은 후원을 거닐며 농담하는 것처럼 가볍게 말을 주고받았다. 물론 겉으로만 그랬을 뿐이었다.
셔먼은 이형이 일부러 계몽 두 글자를 강조했음을 놓치지 않았다.
'계몽이라-. 아시아의 야만인들을 계몽시키겠다는 거라면 그동안 보여온 행보의 연장선이겠지. 노리는 건 역시 남아시아 해방을 명분으로 한 확장일 테고. 그렇지만 만일 이게 아시아를 대상으로 한 것만이 아니라 러시아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라면···.'
이 경우 세계에서 봉건주의를 뿌리 뽑겠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해석 가능했다. 이러면 대다수의 유럽 국가들도 자유롭지 않다. 대표적으로 신성로마제국. 이 봉건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나라는 한국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셔먼에게는 남의 집 이야기일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과 가장 거리가 먼 단어가 바로 봉건주의였으니 말이다. 셔먼이 주목한 것은 한국의 칼날이 향할 방향이 아니라, 한국이 계몽이라는 무시무시한 칼날을 휘두르려고 한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흐음. 재미있군. 프랑스에서 그토록 극동의 나폴레옹이라고 노래를 부르더니 진짜로 극동의 나폴레옹이 될 작정인가?'
사실 이미 결과만 보면 극동의 나폴레옹이라는 표현이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 불과 반백 년 전만 해도 봉건주의에 허덕이던 아시아 방방곡곡에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위시한 계몽주의적 사상들을 뿌리내린 장본인이 아니던가. 문제는 이 극동의 나폴레옹이 아시아를 제패한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은 아마 죽는 날까지 미리견 구경도 못 하고 갈 테니 말이오. 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것이고, 그런 것 아니겠소?"
'난제로군. 난제야. 우리 합중국의 충실한 거래 상대가 언젠가 돈 자루가 아니라 총을 들고서 찾아올지도 모른다니. 후유, 정말이지 정치라는 건 귀찮아. 경제만으로도 충분히 머리 아픈데 말이지. 그렇다고 저 쪽에게 그만 성장해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거고. 이거야 원, 일단 우리도 양껏 덩치를 불리는 수밖에 없나.'
'결국, 언젠가는 건너가야 할 난관이지. 하늘에 태양이 둘씩이나 필요하지는 않으니까. 그렇지만 뭐··· 나 때는 몰라도 핵폭탄 나오기 전에는 결판이 났으면 좋겠군. 나 때문에 핵전쟁 났다는 소리는 듣기 싫으니까.'
셔먼과 이형은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주고받았다. 서로 속으로는 시꺼먼 속내를 숨기고서 말이다.
그걸로 그날의 일정은 종료되었고, 회담은 예정되었던 대로 이튿날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다행히도 치료에 차도가 있었던 듯하군요. 정말로 다행입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아주 좋습니다. 어제는 참으로 실례가 많았습니다. 신속한 조치에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사람으로서 응당 당연히 해야 했을 일이지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그동안의 회담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간 특사와 황제가 직접 서로의 요구사항을 주고받았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외교부 장관 김옥균을 위시한 외교부 인사들이 전면에 나섰다는 점이었다.
그간은 이형이 직접 나서야 할 만큼 대한제국이 바깥 세계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었지만, 이제는 충분히 미국물을 먹을 만큼 먹고 온 김옥균이 있었으므로 그럴 필요가 사라졌던 것이다.
물론 그건 표면상의 이유로, 실제로는 국정 정상화의 일환이었다. 지난 30년간이야 당장 개화만으로도 바빴으니 황제가 절대권력을 쥐고서 모든 행정업무를 총괄했으나, 그게 어디 평범한 상황이던가. 사실상 계엄령이라고 표현했어도 틀릴 게 없다.
요컨대, 말하자면 이는 국외에서 온 특사단 앞에서 황제가 내각을 신임하기 시작했음을 과시하는 절차와 같았다. 기나긴 30년간의 개발독재를 마무리 짓고서, 한국이 마침내 정상적인 행정절차를 밟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눈치채지 못할 셔먼도 아니었다.
'흐음, 황제가 물러났나. 내부적으로 권력 이동···이 일어났을 만한 사태는 없었던 것 같고. 그럼 황제가 양보했다는 건데, 이러면 계몽주의도 단순한 선전용은 아닌가?'
물론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이 또한 당장 이야기를 꺼낼만한 주제라기보다는 본국에 돌아가는 대로 보고해야 할 주제였다. 다만 동기야 어쨌건 간에 앞으로는 황제의 폭주로 한국이 생각지도 못한 행보를 보일 여지가 사라졌으니 나쁜 소식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회담 중 가장 중점적으로 다뤄진 주제는 크게 3가지였다.
"우리 미합중국은 이번 워스파이트 호 사건 중 영국에서 보여준 무책임하고 무질서한 태도를 단호히 규탄합니다. 태평양은 한미 양국의 핵심이권 지대이며, 태평양에서의 해적 행위는 합중국 영해 내에서의 해적 행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동의합니다. 우리 대한제국은 이번 사건으로 희생된 모든 희생자에게 조의를 표하는 바이며, 연합왕국의 해적 행위에 대단히 유감스럽다는 처지를 재확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워스파이트 호 사건의 후처리. 여기에서는 미국과 한국의 입장이 갈렸다. 미국 측에서는 단호히 규탄한다는 매우 과격한 외교적 수사를 사용한 데에 반해, 한국 측에서는 유감스럽다는 평범한 외교적 수사를 사용한 것이다.
이는 당장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미국이 영국과 단교 상태에 놓여있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한국으로서는 아직 영국과 대화를 통해 해결을 볼 여그러자면 이제 남은 건 마지막 3번째 주제뿐이었다.
"경제사범··· 말씀이십니까?"
"예. 더욱 정확하게는 수사 공조와 범죄인 인도를 약속받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태평양은 이미 어느 한 나라의 형법만으로 처벌하기에는 너무나 다양한 나라들의 이권이 얽히고설켜 다극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을 악용하여 법의 심판을 피하고자 하는 경제사범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는 오늘날, 이를 통제하기 위해서라도 태평양에서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한미 양국의 사법적 공조가 전에 없이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바는 알겠습니다···만."
'나쁠 건 없군. 적어도 경제관료인 나로서는 말이야. 그러나···.'
셔먼은 대답을 끌었다.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셔먼은 흘긋하고 벽 너머를 빤히 바라보았다.
셔먼으로서는 한발 늦게 이 제안을 전해 듣게 될 모건이 과연 어떤 얼굴을 하게 될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 한미회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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