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408화 (408/530)

< 한미재계회동 >

그리고 한쪽에서 모건의 목을 죄어올 덫이 준비되고 있을 무렵.

"그간 서류로만 뵙다가 설마하니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참으로 세상살이라는 게 한 치 앞을 읽기 어렵다는 게 사실인 모양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회장님."

"저야말로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협회장님."

인터내셔널 호텔에서는 한국과 미국의 재계 대표들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악수를 주고받고 있었다.

세계대전이라는 뒤숭숭한 세계정세 속에서도 변치 않는 한미 양국의 경제적 친교를 도모하기 위함이라는 명분이었다. 샤먼이 특사로서 파견되었던 무렵부터 이미 모두가 어림짐작 가능한 일이었으나, 미국특사단의 이번 방한에서 가장 큰 목적은 역시 경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리라면 언제나 한국 측 또는 미국 측 대표 중 한 사람으로 끼어 있어야 할 카네기였으나, 이번만큼은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이유야 말할 것도 없이, 알래스카-캐나다 접경지대로 떠나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 대신으로 나서게 된 한국무역협회장- 장순규는 내심 그것만은 아닐 거라고 실감하고 있었다.

'아닌 말로, 대한과 미국의 재계가 마주하는 자리에 대한 대표랍시고 색목인이 자리를 꿰차고 있었던 것부터가 묘한 짓이었지.'

그야 물론 카네기는 이제 한국의 국적을 얻어낸 한국인이라지만, 그래 봐야 미국의 국적까지 동시에 지닌 이중국적자가 아니던가. 그런 자가 한국 재계의 대표랍시고 나서는 것부터가 한국의 경제 주권이 한국인의 것이 아니라 외세의 것임을 보이는 짓이었다.

그런데도 그런 추태를 용인해야만 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 카네기의 비호가 없다면 아무리 아시아가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뤘다고 하나 서방의 금융가들이 작정하고 침범하기 시작하면 막아낼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카네기와 그의 연줄에 기댄 미국인들이 앞으로도 계속 이권을 독점하기 위해서라도 여타 금융세력의 침략을 막아주기를 기댈 수밖에 없던 것이다.

아직도 서구에 뒤처진 수 세기간의 공백을 따라잡으려면 멀고도 멀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써 끝이다.'

장순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한때 국정원에 몸담았고, 지금은 이하응을 대신하여 한국 내 보부상 세력을 이끌던 장순규였다. 무역에 종사하던 그가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모를 리가 없었다.

가로되, 대서양 금융가에서 파열음이 일고 있다. 그것도 단지 삐걱거리는 수준이 아니라, 대붕괴의 전조였다. 이를 장순규와 한국 무역계에서 눈치챈 가장 큰 신호는 로이드의 저자세였다.

그간 전쟁은커녕 해적이 얼씬거렸다는 소식만 있어도 해상보험을 갑절씩 받아가던 로이드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소폭 상승으로 끝내거나 아니면 아예 동결시키고 있던 것이다.

그것이 어째서일까. 장순규는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아무렴 본점이 불란서 놈들 손에 넘어갔는데 그놈들이 버티고 배길까.'

로이드 해상보험증권은 영국 정부에서 로이드의 경영권은 결코 양도될 수 없다는 법 조항까지 삽입해가며 유지해온 대영제국 해운의 기둥뿌리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본점은 대영제국의 수도 런던에 있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 그 런던이 불란서의 손에 넘어갔다.

로이드의 신용을 보증하고 있던 건 다름 아닌 대영제국이고, 시티 오브 런던에서 보유하고 있던 막지금 같은 시기에 구리와 금이라니! 이전에도 어마어마했지만, 앞으로는 정말로 카네기 회장이 이 태평양의 현물시장을 쥐락펴락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모건은 웃는 얼굴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는 장순규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여기까지인가, 쩝.'

장순규는 내심 입맛을 다셨다. 슬슬 긁어줄 작정이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인내심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물론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모건의 인내심이 평소보다 협소해졌다는 건 그만큼 모건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증명이 되어주었으니까 말이다.

장순규는 가만히 모건을 돌아보며 슬쩍 운을 떴다.

"듣자 하니, 이번 기회에 관에서 단단히 고삐를 당길 모양입니다. 당분간 피차 힘들겠습니다."

"그야 그렇겠지요. 사안이 사안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예. 그거야 모두 짐작할만한 일이었지요. 그렇지만 아무래도 판이 좀 커질 모양이라서 말입니다."

"···판이 커진다면?"

모건은 눈을 가늘게 뜨며 슬쩍 장순규를 바라보았다. 장순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이번 회담에서 정식 의제로 등장할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맙소사."

모건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나지막이 탄식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순식간에 눈치챈 것이다. 그리고 그 표적이 자신일 거라는 것쯤은 당연히 알 테고 말이다.

물론 장순규로서는 고소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였다.

'거 그러게 누가 더럽게 살랬나?'

다른 건 몰라도 세무 관련만으로는 털어도 티끌 하나 나오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장순규였다. 물론 그가 도덕적이라서가 보다는, 공격받을 여지를 피하기 위해서였지만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조선 땅에서 제일 무서운 곳이 있다면 관아였다. 오죽하면 이 무렵 한국 재계에서 필승법이 있다면 그건 가격경쟁이나 적대적 인수 같은 게 아니라 경쟁사보다 먼저 경쟁사를 관아에 일러바치는 거라는 속설이 나도는 판국이었다.

비록 30년 전보다는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상행위에 종사한다고 들으면 일단 색안경부터 끼고 보는 게 한국의 관료들이었다. 기회만 오면 언제건 상인들을 잡아 족칠 궁리만 하는 관료들을 상대로 드러내놓고 위법행위를 저지르면서 사업을 벌이는 건 그냥 날 죽여줍쇼-하고 선전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 철밥통이라던 민가 놈들 선도 끊긴 마당에 어디 무서워 살겠나. 그냥 겉으로라도 땟물 하나 나오지 않게 말끔히 닦고 다녀야지.'

여흥 민씨 뒷배를 믿고서 설치던 기업가들이 관아에서 보검을 뽑아 들자마자 썰려져 나가는 꼴을 실시간으로 구경하고 온 장순규였다. 그런 시점에서 보면 장순규는 끽해야 징벌적 징수 즈음이나 걱정하고 있을 모건이 배부른 걱정을 하는 거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모건은 한국인도 아니고 처벌이 있어 봐야 미국 측에서 집행할 테니 최소한 몸은 멀쩡히 나올 거 아닌가. 수틀리면 백만장자고 나발이고 검지 손톱부터 뜯어내고 보는 경찰청 공안부나 물에 담그고 보는 국가헌병대, 황실 뒷배만 믿고서 상대가 누구 건 일단 설렁탕부터 먹인다는 국정원에 끌려장순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황제에게 품은 감정은 동경 같은 게 아니라 애증에 가까웠다. 그와 이하응에게 적잖은 도움이 되었고, 실제로 황제가 없었다면 지금 그도 이하응도 여기까지 우뚝 설 수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마냥 황제를 좋게 평가하기에는 그 과정에 우여곡절이 좀 많았던가.

당장에 이하응과 황제가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였던가. 과연 이하응이 세상을 등지기 전에 한 번쯤은 다시 만날 날이 오기는 할지도 의뭉스러웠다.

장순규로서는 그럴 날이 제발 이하응의 살아생전에 찾아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개인적인 감정도 감정이라지만, 황제와 이하응이 화해한 다음에야 비로소 장순규도 그 태풍에 휩쓸릴 걱정을 덜게 될 테니 말이다.

"···만일 그렇다면, 지금 제게 반나절 앞서서 이 소식을 들려준 저의가 도대체 뭐였습니까?"

한참을 침묵하던 모건은 손을 덜덜 떨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있는 힘껏 이를 악물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지는 꾹 눌러 참는 목소리였다.

"저의? 저의라고 하셨습니까?"

'이 양반이 아직도 눈치 못 챘나 보고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모건은 결국 미국인이지 한국인이 아니었으니까.

장순규는 히죽 웃으며 답했다.

"그야 당연히 놀려 드리고 싶어서 그랬지요. 됐습니까?"

"···이 무례한 작자가!"

결국, 참지 못하고서 모건은 장순규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이 소란 탓에 당일 예정되어 있던 황제와의 만남이 이튿날로 미루어진 건 물론이었다.

< 한미재계회동 > 끝

ⓒ 리첼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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