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409화 (409/530)

< 논쟁의 시대 >

겉으로 드러난 한미회담에서 크게 정해진 것은 3가지였다.

하나는 워스파이트 호 사건에 관련하여 영국 정부에 공동 유감 성명을 낸 것, 둘은 자유 무역의 재확인과 태평양 무역의 공동번영을 위한 직접적이고 계속된 노력을 약속한 것, 셋은 경제사범에 대한 공동대응 약속과 수사 공조 및 범죄인 인도조약.

그러나 마지막 날 회담장에서 비밀스럽게 의논된 마지막 밀약이야말로 이 1893년 한미회담의 진정한 백미라 할 수 있었다.

"이 하와이, 호놀룰루 본섬을 기준으로 선을 긋도록 합시다."

"그렇다면 서경 157도 선 부근···이군요. 알래스카 또한 포함되는 것입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현재 양국에서 실효 지배하고 있는 영토를 배제한, 온전히 태평양 공해를 기준으로 한 분할입니다."

찍, 하고 김옥균은 지도 위에 펜으로 선을 그었다. 그동안 막연하게 양국에서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던 태평양 위에 선을 그은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제 더는 태평양은 공해가 아니라 양국의 영해임을 공표하겠다는 뜻이었다.

셔먼은 이에 눈살을 찌푸리며 되받아쳤다.

"물론 하와이 왕국을 기준으로 하겠다는 귀국 정부의 의사에는 공감하는 바이지만, 이건 다소 지나치게 동쪽으로 치우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귀국에서는 서경 몇 도 선을 기준으로 선을 긋고자 하십니까?"

"여기, 경도 180도 기준선입니다. 이곳을 기준으로 하되, 하와이 왕국의 영역권인 북위 22도 선에서 18도 선 사이를 돌출시켜 이 부분만 서경 157도 선 부근으로 옮겨 잡도록 합시다."

이어서 셔먼이 찍, 하고 선을 그었다. 김옥균은 자에 대고서 그대로 내려그었지만, 셔먼의 보좌관들은 가운데가 볼록하게 튀어나온 선을 긋기 위하여 다섯 차례에 걸쳐서 선을 나눠 그려야 했다.

이에 김옥균도 눈살을 찌푸렸다.

"날짜 변경선이라니 욕심이 지나치시군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귀국에는 대서양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아주에서 접하고 있는 대양은 태평양 하나뿐입니다. 꼭 이렇게 좋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까지 얼굴을 붉혀야 하겠습니까?"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장차 태평양 무역이 번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해적들로부터 민간 상선들의 안전을 수호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합중국의 백색함대는 장차 태평양 무역의 번창을 위하여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이러한 헌신이 양국의 공동번영을 위해서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돌려 말했지만 한마디로 해군력에서 밀리는 아시아에서 광활한 태평양에서 더욱 커다란 지분을 가져가 봐야 제대로 간수나 할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

당연히 김옥균이야 기분 좋을 리가 없었지만, 그는 꾹 눌러 참았다.

'참자. 이건 신시대의 토르데시야스 조약이나 다름없어. 중요한 건 우리가 태평양에서 얼마나 커다지금 당장 유럽 어딘가에 떨어져서 한국말을 백 마디 한다고 해봐야 무의미할 것이다. 결국, 말이라는 건 의미가 통하지 않으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화폐 또한 그 가치가 통용되지 않는 곳 에서는 무의미하다.

'언어의 힘이 얼마나 널리 통용되는가이듯, 화폐의 힘 또한 얼마나 너른 영역에서 그것이 통용되는가 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밀약이 가진 효력은 절대 가볍지 않다. 설령 이를 공해상만이 아니라 육지까지 적용되는 영토 분계선으로 확대하여 해석하지 않더라도, 이번 밀약으로 한국은 원화가 통용될 영역을 공인받은 격이니까.

'언젠가는 우리 아시아가 아메리카를 넘어설 날이 기필코 올 것이다.'

김옥균은 눈을 차갑게 빛냈다. 셔먼은 피하지 않고서 가만히 맞받아쳤다. 물론 그것도 잠시였다. 두 사람은 환히 미소 지었다.

"하하하!"

"허허허!"

펑-하고 두 번째 플래시가 터졌다. 사진에 나온 양측의 외교실무진은 밝게 웃고 있었다. 어떠한 사심도 없이 순수하게 오늘의 만남을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옥균-셔먼 밀약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 * *

한편, 모건과 회동한 이형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건 짐이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구려. 아무래도 의회와 의논해봐야겠소."

물론 헛소리였다. 모건 또한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의회는 얼어 죽을 의회!’라고 내심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한국에서 황제의 한마디면 의회의 결정조차 훌쩍 뒤집히기에 십상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의회 핑계를 대면서 거절한 시점에서 가능성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맨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모건은 매달렸지만, 이어진 대답은 한층 더 차가웠다.

"하, 하지만 폐하. 잠시만 제 말을 경청해주십시오. 제 말을 들어보시면 분명-."

"사정은 익히 들었소.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구려. 그러나 알다시피 이미 불란서와 본국의 동맹은 효력이 만료되었고 본국으로서는 이를 다시 갱신할 의향 또한 없소. 물론 그렇다고 본국은 영길리와의 국혼에 따라서 오란 친우인 불란서를 적대할 생각도 없소. 하여, 본국은 영길리와 불란서 양국과 신의를 지키기 위하여 이번 대전에서 중립을 지킬 것이오.

짐으로서는 불란서를 믿으라는 말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구려. 아무렴 그들도 예의범절을 아는 문명인일진데, 그리 사납게 날뛰거나 하겠소? 부디 안심하도록 하시오."

길게 말했지만, 결론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없으니 그냥 돌아가라'였다. 결국, 모건은 맨손으로 터덜터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여흥 민씨의 실각과 더불어 보복을 당하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것과 이번 대전 중에도 아시아 시장은 안전할 것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 둘뿐인 성과였다.

그걸로 한미회담은 종료되었다. 모건에게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이미 양측의 외교실무진은 용무를 끝냈고 황제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으니 계속 한국에 남아 있어 봐야 모건으로서는 도저히 성과를 기대할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돌아가자! 엿 같은 월스트리트로 돌아간다! 그 머저리들이 구리 광맥의 반의반이라도 사들였어야 할 텐데···!"

수 있을 성싶더냐!"

"못할 것도 없지요! 이 나라가 아직도 주자학의 나라라고 생각하십니까? 과학의 시대고, 합리의 시대이며, 이성의 시대입니다! 난폭하고 무식한 거지들이 새끼를 치면 그 거지들을 먹여 살릴 부담과 그 거지들이 저지를 온갖 범죄행위에 피해를 보게 되는 건 선량한 나머지 국민입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우린 저 거지들을 죽여 없애거나, 더는 새끼를 치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공자 왈 사람이 어질지 않다면 예를 어찌하며, 사람이 어질지 않다면 악을 어찌할까 하셨다. 넌 사람의 탈을 쓰고서도 예를 따르지 아니하며 악을 모르니, 곧 어짊이 없음이라. 인수지변이라 하였거늘, 인도(仁道)에 따라 살지 아니하는 네놈을 어찌 사람이라고 부를까! 차라리 네놈이 그토록 경멸하는 빈자들이 구제할 여지가 있음이라!"

"이 노친네가 보자 보자 하니까···. 지금 말 다 했습니까!"

"이 머리 검은 놈이 어딜 감히 어른에게 삿대질이더냐! 근묵자흑이라더니, 과연 종놈과는 상종할 게 못 됨이라!"

때마침 이완용과 민자영의 불륜을 계기로 하여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최익현을 위시한 수구파와 개화가 시작된 이래로 언제나 존재해온 급진 개화파의 충돌은 글자 그대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지난 30년간 쌓여왔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차에 병술 보고서라는 장작이 새롭게 제공되니 그야말로 온 나라를 불태울만한 업화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묘했던 것은 이번만큼은 수구파가 찬성파였고, 급진 개화파가 반대파였다는 점이다. 양측 모두 조금도 입장이 변한 게 없음에도 그러했다. 수구파는 언제나 그랬듯이 성리학을 꺼내 들었고, 급진 개화파는 언제나 그랬듯이 서구적 사상을 꺼내 들었다. 다만 이번에 맞부딪힌 것은 애민정신과 사회진화론이었다는 것만이 조금 달랐다.

그리고 한 번 타오르기 시작한 논쟁은 이내 한국 전역의 지식인들을 반강제적으로 이 싸움판에 끌어 올렸다.

주제는 딱 하나였다.

「과연 국가에는 세금조차 내지 않는- 혹은 못 하는 빈민들의 삶까지 보장해줘야 할 의무가 있는가?」

중립은 허용되지 않는, 무제한적인 인신공격과 논쟁의 시작이었다.

< 논쟁의 시대 > 끝

ⓒ 리첼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