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래주의 >
그리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재무부 장관 어윤중이 황제를 뵙고자 달려갔음은 물론이었다.
누가 봐도 이미 병술 보고서가 무난히 통과될 상황에서 다름 아닌 그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한 황제가 제동을 걸은 건 혹여나 황제가 마음을 달리 먹은 건 아닌가 우려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물론 기우였다.
"이 서류 더미를 만들기 위해서 죽거나 일선에서 물러난 관료들만 기백 명이 넘어가네. 짐이 그들의 희생을 모르는 것도 아닐진대 어찌 이제 와 없던 일로 만들겠나?"
이형의 대답은 대단히 직설적이고 명료했다. 이 병술 보고서를 위하여 투입된 대한제국의 경제관료들은 꼭 병술 보고서가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건 역사에 한 획을 그었을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이었다. 죽은 사람이 돌아올 수 있을 리도 없으니, 이제 와 병술 보고서를 없던 일로 만들면 그들은 매몰 비용이 되어버린다.
재화야 다시 벌면 그만이라지만, 이들은 무슨 수로 대체한다는 말인가. 병술 보고서를 기반으로 기초 복지를 도입하는 데 필요한 재화나 이제 와 병술 보고서를 없던 일로 만들 때 파묻어야 할 매몰 비용을 비교하면 후자가 압도적이다.
물론 그렇다고 어윤중의 걱정이 모두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하오나, 혹여 황상의 고매하신 뜻을 미처 읽지 못한 우매한 자들이 이를 두고서 황상께서 뜻을 고치신 줄 오판하여 오만방자하게 굴지는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러라고 하는 일이네만?"
"···예?"
이형의 엉뚱한 대답에 어윤중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러건 말건 이형은 제 할 말을 이어갔다.
"경이 불란서에 유학하던 적에 불란서는 그럭저럭 의회정치가 유지되던 곳이었지."
"예, 그러했습니다. 그 시절의 불란서는 영길리에 비하면 부족함은 있어도 오늘날에 비하면 대단히 건전한 의회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던 나라였습니다."
"그래, 바로 보았으니 이야기가 빠르겠군. 그럼 말해보게. 그때의 불란서에 비교하여 우리 대한의 의회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그건···."
어윤중은 대답을 주저했다. 정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정답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윤중은 조심스럽게 정답을 말했다.
"···설령 불란서 황제의 하교라 하여도 듣지 않고서 반대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자유분방함이었나이다."
"음, 하기 어려운 이야기였을 텐데 잘 말해주었군그래. 그럼 현실적으로 이 나라에서 지금 짐의 하교라 하여도 상관하지 않고서 반대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자유분방함이 가능하다고 보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불가한 줄 아뢰옵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열성조의 대업을 통틀어도 오늘날 대제께서 이룩하신 과업과 견줄 수 없는 까닭입니다."
어윤중은 고개를 푹 숙였다. 단순한 아부가 아니었다. 황제의 개발독재도 개발독재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황제의 권위였다. 전쟁을 벌였다 하면 연전연승에,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이제는 그 과정에서 희생되었을 백성을 가엾게 여기어 민생을 책임지고자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의 뜻에 거역한다면, 불경하다. 이전에 도대체 어째서? 라는 반응을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자유로운 의견 개진은 현실적으로 반백 년에서 백 년간은 무리다. 대가 바뀌어 한국이 세계대전에서 패하거나 경제 대공황이 아시아를 곧바로 덮치고 그 과정에서 황제가 터무니없는 무능함을 보여준 다음에야 나폴레옹 3세 시절의 불란서 제국과 같은 수준의 자유분방함 의견 개진이 가능해질 터였다.
그건 결국 이형의 살아생전에는 무리라는 말과 같다. 이형 또한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형은 말했다.
"그럼 열성조의 대업을 통틀어도 감히 견줄 수 없을 과업을 이룩한 짐이 장차 온 나라의 백성이 자유로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한다면 어떻겠는가?"
"분명 괄목할만한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오나-."
"아니, 뒷말은 필요 없네. 경이 걱정할 일이 아니니까. 그보다, 잠시 노서아에 다녀와 주겠나?"
"노서아 말씀이십니까?"
어윤중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차마 황제를 비난하지는 못하고 병술 보고서를 작성한 장본인인 어윤중을 맹비난하는 여론이 스멀스멀 퍼지고 있으니, 여론이 가라앉을 때까지 시베리아에서 귀양살이하게 되나 해서였다.
물론 전혀 엉뚱한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그래, 공식적인 직함은 노서아 혁명 공화국의 수석행정고문이 될 걸세. 무슨 말인지 알겠나?"
"···노서아의 상국 노릇을 하라는 말씀이시로군요."
"바로 맞췄네. 당연히 홀몸으로 보낼 생각은 없어. 봉준이 놈을 붙여주겠네. 친위대가 가 있으면 원가 놈도 감히 경을 무시하지는 못하겠지. 가서 로베스피에르 흉내를 내줘야겠어."
"로, 로베스···."
이형이 대수롭지 않은 듯 툭 하고 던진 한마디에 어윤중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침이 절로 꼴깍꼴깍 넘어갔다. 제 왕의 목을 자른 그 불경한 역도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는다는 것부터가 어윤중에게는 현기증이 절로 일었다.
만일 후학 중에 가볍게 그 이름을 입에 담는 자가 있었다면 즉각 무언가 조처를 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 불경한 이름을 감히 입에 담은 게 다름 아닌 황제였던 것을.
설마 하는 심경으로 어윤중은 되물었다.
"혹, 그 말씀은 노서아 황제의-."
"목을 자르게. 물론 대외적으로는 미하일 그놈이 한 거로 하고. 단두대를 설치해 목을 자르고 황제가 죽었음을 만백성이 알게 한 다음 그 시체는 광장에 내걸어 오물 세례를 받도록 하여 그게 신의 대리인 따위가 아니라 한낮 인간이었음을 보이게. 경이 노서아로 가거든 봉준이 녀석과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늙은 쌍두독수리의 목을 비틀고 그 육편 위에 공화국을 세우는 일이야."
휘청.
어윤중은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제아무리 젊은 시절에 불란서 유학을 다녀왔기로서니 왕정국가에서 고귀한 피로 태어나 자라온 어윤중이었다. 차라리 역성혁명이라면 모를까, 고귀한 혈통을 개돼지처럼 도살하라는 명령은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제 말을 계속 이어갔다.
"불란서에서 혁명 시대의 역사 정도는 가르쳤으리라 믿네."
"폐,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이건···."
"송구할 필요 없으니까 듣게. 그렇게 목을 자르고 나면 이제 온갖 불순분자들이 좋다고 쏟아져 나올 거야. 그냥 빨갱이건 공화주의 역도건 무정부주의자건 보나파르트주의자건 좌우지간에 그놈들을 이용하게. 지금 노서아 내전에서 이기려면 그놈들을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어. 일단 끌어들이고 나중에 토사구팽하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일단 끌어들이고 보게.
그렇지만 될 수 있으면 불란서 물 듬뿍 먹은 보나파르트주의자 놈들을 가장 중히 쓰게. 우리 대한도 그렇지만, 노서아 놈들은 불란서 문화라면 껌뻑 죽으니까 찾기도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그놈들이 힘을 얻어야 나중에라도 다시 제국을 세우거나 하지 않겠는가."
그리 말하면서 이형은 슬쩍 명령서를 내밀었다. 일전에 이형이 작성하였던, 어윤중이 노서아에서 해야 할 일들이 세세하게 적혀져 있는 명령서였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명령서를 건네받아 읽어내려가는 어윤중을 빤히 쳐다보면서 이형은 물었다.
"받들겠나?"
할 수 있겠는가, 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윤중의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받들겠습니다."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며 어윤중은 답했다.
여론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몸을 피하게 되는 거야 이미 각오한 바였지만, 팔자에도 없는 역도 노릇을 할 걸 생각하니 그저 눈앞이 아득했다.
* * *
경복궁 재건과 더불어 마포구에 신설된 황립 중앙도서관의 가장 큰 구조적인 특징은, 책장들과 서적들 정도를 제외하면 건축에 목재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그야 물론 화재방지였지만, 또 다른 이유는 한국의 공업역량 과시와 건축학적인 실험에 있었다.
이 무렵 한국의 건축학은 전 세계를 기준으로 하여도 대단히 혁신적인 수준, 아니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를 촉진시킨 건 다름 아닌 황제였다. 황제는 일전에 서태후가 우화등선한(?) 정주의 천궁을 세울 적에, 설계도를 가져다 바친 책임자들에게 대뜸 한마디를 던져 그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다 좋은데, 너무 꽉 막힌 느낌이군. 구태여 이 외벽들을 꼭 끼워야 할 필요가 있는가? 무게를 지탱하려면 기둥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한마디로, 무게를 지탱할 외벽들 없이 오로지 기둥만으로 마천루를 세우라는 이야기였다. 철근 콘크리트 건축이 이제 막 세상에 널리 퍼지던 와중에 이 철골 구조 하나만 믿고 외벽들을 모조리 정리해버리라는 황제의 명령은 혁신적이다 못해 혁명적이었고, 미래지향적이다 못해 시대를 건너뛴 수준의 발상이었다.
물론 이러한 발상 그 자체는 본래 현대인인 이형에게는 그리 대단한 발상도 아니었다. 당장에 63빌딩을 보자. 외벽이 돌이나 벽돌이던가? 아니지 않던가. 그러나 루트비히 반데어로에가 이러한 현대적인 마천루 모델을 건축학계에 제시된 것은 1920년대였다. 이제 막 철근 콘크리트라는 게 처음 세상에 선보여진 당대에는 혁신적이다 못해 상상만으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발상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황제의 주문은 기술진들을 고달프게 만들었다. 그들은 그날 이후로 필사적으로 오로지 철근 콘크리트 기둥만으로 제 무게를 지탱하는 앙상하고 투명한 건축학계의 이단아를 만들어내야만 했다. 그게 하다못해 어디 월스트리트의 졸부라거나 했다면 그러다가 무너지면 책임질 거냐고 뻗댔겠지만, 상대는 황제가 아니던가.
진짜로 무너진다고 한들 책임지면 그만이라는 게 문제였다. 한국의 기술관료들은 국외기술고문단의 조언을 받아가며 필사적으로 주판을 튕기고 또 튕겨야 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이게 무너진다면 백 명이 죽는 게 문제가 아니야. 어쩌면 천 명이 넘어갈지도 모르지. 금세기 최악의 인재가 될 거라고!"
"저게 제정신인가? 저 앙상한 뼈대만 남은 게 건물이라고? 차라리 과부제조기라는 게 올바른 표현일 것 같군!"
그리하여 나온 결과물은 충분히 건축학계의 주류를 거스르는 이단아 그 자체였다. 기술적 한계로 이형이 당초에 요구하였던 앙상한 기둥만으로 자체적인 무게를 유지하지는 못하고 대신에 외벽을 한없이 얇게 만드는 거로 대체했으나, 당대의 주류 건축학계가 보기에는 그 타협점도 충분히 살인적이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바람만 불어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던 것이다. 당대 사교계에서 이 천궁이 건설되는 와중에 무너질지, 아니면 완공식 도중에 무너질지 내기가 이루어졌다고 할 정도로 이 천궁의 설계구상은 지나치게 이단적이었다.
"아직도 조금 너무 답답하기는 한데··· 뭐, 첫술에 배부를 수도 없는 노릇인가. 아무튼, 좋네. 다들 수고했어. 여봐라. 국고를 열어 이들에게 2,500원씩 포상금을 나눠주어라."
막상 이를 지시한 황제 본인은 이조차 불만족스러워서 떨떠름해 했다는 게 후문이었지만 말이다. 이 당시 1,000원이면 한성에 집을 마련하고도 남았으니, 2,500원이라는 포상금은 잘만 굴린다면 평생을 놀고먹을 수 있는 거금이었다.
그야 한국 건축학계라고 혹여 천궁이 무너져내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다름 아닌 황제의 취향이 앙상하고 투명한 마천루라는데 그 누가 토를 단다는 말이던가. 되려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서라도 황제의 취향에 따라야만 했다.
한국 마천루 경쟁의 시작을 알린 건 1888년에 개성에 완공된 한국증권거래소였다. 기존에 쓰이던 낡은 벽돌 건물 대신에 한국의 국가 위신에 걸맞은 마천루를 세워야 한다는 게 이 새로운 한국증권거래소의 건설 명분이었다.
앞선 천궁이 앙상한 외벽으로 타협했다면, 한국증권거래소는 그조차 치워버리고서 철골 구조와 유리 외벽만으로 30층 높이의 건물을 세웠다. 그 높이야 천궁에 비할 바가 못 되었으되, 천궁이 타협해야만 했던 근대적 마천루를 현실화시켰다는 점에서 이 한국증권거래소의 의의는 가볍지 않았다.
"보기 좋구먼그래. 음, 그래 이제 좀 제대로 된 빌딩 같군. 아주 보기 좋네. 좋아, 내 술상이라도 한잔 내려주겠네. 어디 마음에 담아둔 말이 있거든 다 해보게나, 껄껄!"
"화,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이렇게 완성된 한국증권거래소를 보고서 황제가 기뻐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기 시작하니, 더 이상은 막을 게 없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한국의 건축이념은 더 없이 미래지향적으로 변모하였다. 아예 건물 중심부에 모든 기둥을 모아 버리자는 구상이 나오는가 하면, 반대로 가운데에 뻥 구멍을 뚫어서 도넛 모양의 마천루를 세우자는 구상이 나오기도 했다.
당연히 이러한 배경 속에서 완성된 황립 중앙도서관이라고 평범했을 리가 없다. 황립 중앙도서관의 설계 아이디어는 책을 쌓아 올린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그것도 올곧게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책을 쌓으면 으레 그렇듯이 삐뚤빼뚤하게 말이다.
물론 이러한 것은 어디까지나 외견뿐이고, 내부설계는 올곧게 되어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에 중앙도서관은 층마다 12도씩 비틀린 듯 보였다. 1층을 기준점으로 잡고서 2층은 좌로 6도, 3층은 우로 6도 이런 식으로 번갈아 가며 책을 쌓아 올린 인상을 준 것이다.
"이제는 시키지 않아도 별의별 걸 다 만들어내는구먼그래. 이제 슬슬 아파트 단지를 세우라고 해도 되겠어."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가 이 결과물에 만족했음은 물론이었다. 기술진은 황제가 언급한 아파트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그걸 완성하려면 또 얼마나 실험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설계와 기술력이 필요할지 우려했으나 차마 어전이라 이를 캐물어 볼 생각도 못 하고서 연신 고개를 숙여야 했다.
"엉? 그 아파트라는 게 그냥 다세대 공동주택이었어?"
"그렇다면야 간단하지. 그냥 철근 콘크리트로 위로 쌓아 올리고 또 옆으로 늘리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지, 그렇게 단순무식한 주제에 무슨 총애를 기대하는가. 보자, 그럼 일단 철골로 기와지붕을 재현해 보는 건 어떻겠나?"
그러면서도 막상 아파트를 알게 된 다음에는 어떻게든 뜯어 고쳐볼 궁리부터 했지만 말이다. 이 무렵 세계의 건축학계에서 한국을 일컬어 미래주의의 고향이라고 부르던 것이 괜한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건축학계조차 그 이단성에 학을 뗐는데, 시민들이야 오죽했을까.
한없이 미래지향적인 설계에 층수만 해도 지상으로 16층, 지하로 2층. 아시아 전역에서 모아온 장서만 800만 권에 달하는 중앙도서관을 처음으로 보게 된 한양 시민의 반응은, 그야말로 경악 그 자체였다.
공공연히 박제품이라고 불리던 수구파 선비들의 반응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허, 허어!"
"맙소사, 이게 도대체 뭔가? 온통 유리가 아닌가! 이놈이 벽도 없이 어떻게 서 있는 건가? 요, 요술이라도 쓴 건가?"
"예끼, 이 사람아! 선비라는 작자가 괴력난신 따위를 함부로 입에 담다니,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믿기지 않는구먼. 도저히 믿기지 않아. 서고가 이토록 투명하고 청량하다니. 마치 도원향에 온 듯해!"
이들은 대단히 새삼스럽게도 새로운 시대가 찾아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증기기관을 처음 접했을 때와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증기기관에 충격을 받았을 적에는 그 유용함과 힘에 충격을 받았다면, 중앙도서관은 그들에게 별세계에 온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하였다.
"에구머니나!"
"요, 용!"
외관만 해도 놀랍기 그지없었는데 그 안에 발을 디디니 더욱 놀랄 일 뿐이었다. 화원을 배경으로 하여 앙상하게 뼈만 남아있는 용이 전시되어있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고고학적 지식이 있었다면 그것이 고비 사막에서 발굴된 타르보사우루스의 화석이라는 걸 알 수 있었겠지만,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평생 경전만 펄럭이던 이들에게 그러한 지식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나마 대한 일보의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이런저런 잡지식을 쌓은 최익현 정도나 그게 공룡의 화석이라는 걸 눈치챘으나, 사실 그도 별 차이는 알지 못했다. 머나먼 옛날에 사람보다 거대하고 강인한 도마뱀(?)이 살았다면 그게 용이 아니고 또 뭐라는 말인가.
조선의 거유들은 새삼스럽게도 그들이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에 부끄러워할 시간은 없었다.
수천 명의 청중이 중앙강당에서 논객들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