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412화 (412/530)

< 개회사 >

결전의 날, 1893년 3월 17일.

세상 한쪽에서는 미국이 영국에 북미 대륙을 떠나라는 최종통보를 전달하며 오랜 유럽 열강의 신대륙 식민통치에 종지부를 알릴 무렵, 아시아에서도 역사의 한 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하늘 같던 황제가 보는 앞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논객들이 모여 한바탕 입씨름을 벌인다는 소문으로 온 나라가 들썩거리던 것이 어언 1달여. 이미 국민의 기대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거기, 임자. 임자는 누가 천하제일의 입씨름꾼일 것 같나?"

"아유, 그야 당연히 면암 어르신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건 몰라도 입씨름으로는 면암 선생을 따를 사람이 있겠을는지요?"

"그래? 그럼 난 전창혁 그 양반에게 걸지. 면암 그 사람 입씨름 솜씨야 나도 잘 알지만, 총애를 이기지는 못할걸!"

물론 그것이 순전히 학술적이고 정치적인 이유였다고 생각하면 곤란했다. 국민 대다수에게 이 토론회는 유희 거리에 가까웠다. 애당초 이때까지도 백성이 나라님 얼굴도 모르는 태평성대에 대한 동경이 남아있던 한국에서는 국민의 정치 참여 의지가 희박한 경향이 강했다.

「위에서 어련히 나라를 잘 이끌어 나가고 있는데 뭣 하러 우리 같은 것들까지 정치에 목을 매느냐?」가 보편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병술 보고서로 촉발된 식자층 간의 대결 구도도 일종의 가십거리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러한 인식은 어전 토론으로 더욱 굳어졌다. 대중이 인식하는 황제란 놀기 좋아하는 유쾌한 귀한 분이었지, 이런 학술적인 무대와는 거리가 멀었던 까닭이다.

요컨대, 이 무렵 대다수 백성은 이 어전 토론을 천하제일 무술대회 때와 비슷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 중앙 도서관을 에워싸고 10만여 명에 달하는 인파가 몰렸고, 이 중 4만여 명이 실내에 발을 디디는 데에 성공했으며 다시 3천여 명이 중앙강당에 들어오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런 가벼운 동기로 모여든 청중들이 진지한 태도로 임했을 리가 없었다.

"푸하하! 저 어르신들 보소! 갓에 도포에 아주 그냥 박물관에서 튀어나오셨구먼그래!"

"저 빨갱이 녀석은 맨날 무슨 푯말 들고 다니더니 그건 어디다 치우고서 맨몸으로만 오셨나? 왜, 구운 옥수수 두느냐 팻말이라도 빌려주랴?"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쳐부수자, 선생들!"

이들의 태도는 좋게 말해도 나쁘게 말해도 스포츠리그 응원전이었다. 이들에게 어전 토론은 입씨름이었고, 재미난 구경거리였던 것이다. 황제가 참여한 대다수의 행사가 가볍고 유쾌하게 진행되었음을 기억하고 있던 청중들은 이번에도 그렇게 진행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저, 저, 저런 천박한 놈들이 어딜 감히···! 어허! 저리 가지 못하겠느냐! 훠이, 훠이!"

"에휴, 내가 무슨 영광을 누리자고 이런 자리까지 나와 이런 망신을 당하는지···."

그야말로 노골적인 광대 대우에 논객들이 기뻐했을 리 만무했다. 그들 하나하나가 각자의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둔 대학자들이 아니던가. 자신은 이런 자리에 충분히 초청을 받을만하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토론회가 시작되기 1달여 전부터 이날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온 이들이었다.

어전 토론에 모여든 30여 명의 논객이 그들의 처지를 비관하기 시작하는 데에는 불과 5분도 필요하지 않았다. 병술 보고서와 극빈층의 처우에 대한 학술적인 기대로 참여한 극히 일부를 제외한 청중 대다수는 이들을 마치 광대처럼 대우했고, 제법 높은 확률로 이 점은 황제 또한 그리 다르지 않을 터였다.

어디 그간 황제가 선비들을 후히 대접해주기를 했던가. 그나마 나이를 먹으면서 철이 들었다고 하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독선까지 고쳐졌다는 이야기는 그간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자리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은 황제가 그들을 초청했다는 상징성 탓이었다.

"대한제국 황제 폐하 납시오!"

""만세! 만세! 황제 폐하 만만세!""

그나마 황제가 강당에 들어서면서 청중의 웃음소리는 사라졌으나, 그 사실에 위안을 받는 사람은 없었다. 그간 황제가 보여온 행보에 비추어 보아, 이것도 요식행위일 뿐 으레 형식적인 절차만 끝나고 나면 유쾌하고 가볍게 이어지리라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기대가 배신당한 것은 강당으로 들어서는 황제의 모습을 그들 모두가 확인하게 된 다음이었다.

"음, 다들 수고가 많구먼."

일제히 기립하여 만세 삼창하고 있는 수천 명의 청중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서 뒷짐을 진 채 저벅저벅 연단까지 걸어가는 그 오만방자함은 언제나 대로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복식이었다.

제례를 올릴 때를 제외하면 언제나 대한제국 육군 원수복 차림으로 공식행사들을 소화하던 황제가 이날만큼은 황룡포에 익선관까지 쓴 채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간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려고 일부러 피하던 지팡이까지 짚고서 말이다.

그 뒤를 따라 입장한 황태자 또한 이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뒷짐을 지고서 어슬렁어슬렁 연단에 올라선 황제와는 달리 황태자는 고개를 숙인 채로 엄숙한 걸음걸이로 연단에 올라섰다.

그뿐일까. 이날만큼은 황제와 함께 연단에 오른 조정의 관료들이나 수행원들도 하나같이 단령을 차려입고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야 청중들도 무언가 다르다는 걸 눈치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연단에 올라선 황제가 개회사를 시작했다.

"오늘 짐이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은 이 멍청한 놈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함이니라."

멍청한 놈? 실수?

그게 누구를 가르치는지, 무엇을 뜻하는지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황제는 쿵쿵하고 가볍게 제 가슴을 두드렸다. 그걸로 그 멍청한 놈이 누구인지는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알게 되었다.

그럼 실수가 무엇인지를 말할 차례였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모두가 결코 황제의 입에서 나올 리 없으리라 여겼던 말을 듣게 되었다.

"일찍이 짐이 경연을 폐하였음을 모두가 기억하고 있으리라."

경연(經筵).

그 이름 그대로, 경전을 공부하는 자리.

그러나 황제가 보위에 오르고, 개화가 시작된 이래로는 단 한 번도 언급조차 되지 못하여 으레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낡은 시대의 낡은 절차라고 여기게 된 행사.

"어린 날 짐은 짐이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오롯이 진리이니, 구태여 공부할 필요도 옛 선현들의 지혜를 구할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 모든 진리는 내 안에 있으니, 무엇 하려 아까운 시간과 기력을 낭비하여 새로이 배우고 시비를 논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저 국사를 돌보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선비 놀음이라 여겼을 따름이다.

하나 오늘날 짐이 장성한 자식이 있을 만큼 나이를 먹어, 세상의 커다람을 알고 나니 비로소 지난날의 짐이 얼마나 오만방자하였으며 배움이 부족하였는지를 알겠더라. 자 왈, 배움에는 끝이 없으며 정신은 넓고 크다(氣有浩然學無止境)라더니, 작금에 와서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으니 실로 그러하였다."

이어지는 말에 청중들은 눈을 껌뻑거릴 따름이었다. 누구보다 반발해야 할 급진개화파 논객들도, 누구보다 기뻐해야 할 수구파 논객들도 그저 황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서 눈만 껌뻑거렸다. 지난 30년간 보여온 황제의 모든 행보를 통틀어 오늘의 행보가 그들에게는 가장 놀랍고 충격적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제는 목을 한 번 축이고서는 제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자 왈, 삼인행필유아사언 택기선자이종지 기불선자이개지(三人行必有我師焉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라. 옛 선현이 이르기를 사람이 셋만 모여도 개 중에 반드시 스승이 있다고 하였을진대 내 어찌 그간 귀를 닫고 오롯이 이 어리석은 놈의 생각만이 옳다고 여겼을꼬?

이것이야말로 대양을 모르는 개구리의 어리석음이오, 눈 뜬 봉사가 코끼리의 거대함을 안다고 함이라. 지난날의 오만방자함을 돌이켜 생각하면 그저 후회만이 앞설 따름이다. 하나, 반성은 하지 않고서 후회만 앞선다면 그 또한 세상에 둘도 없을 머저리의 작태가 아니겠는가.

하여, 오늘날 짐은 이 자리를 빌려 경연을 다시 열고자 하노라."

"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만세! 만만세!"

그때였다. 그제야 뒤늦게 감정이 복 받아친 최익현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서 황제에게 만세삼창을 올린 것이다. 황제가 마침내 제 잘못을 깨닫고서 삼강과 오륜을 바로 세우려 한다고 여긴 것이었다. 황제가 사석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조금도 믿지 않았겠지만, 지금 당장 이 강당에는 개회사를 듣고 있는 청중만 3천여 명이 모여있지 않는가.

도저히 허언일 수가 없었다. 수구파 논객 중 몇몇은 이미 승리를 직감하고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이 기쁨에 겨워하는 동안 그 반대편에 논객들 모두의 낯이 푸르죽죽하게 변해갔음은 물론이었다. 이제 와 대한제국이 옛 조선과 같은 성리학이 지배하는 나라로 돌아간다면 그들이 가장 먼저 숙청될 테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러자면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이제 만세삼창을 하는 최익현을 일으키면서 성리학의 화려한 부활을 공표해야 할 황제는 연단 위에서 냉수를 마시며 목이나 축이고 있고, 최익현을 일으키러 달려오는 건 황제가 아닌 황태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세태에 옛 경연이 부활하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지 않겠는가."

수구파가 일말의 불안을, 그 반대편의 모든 논객이 일말의 기대를 품고서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을 무렵, 다시 황제의 입이 열렸다. 다양하게 해석할 여지가 있는 말이었다. 경연이 부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까 더욱 수구적으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경연은 시대에 뒤처졌으니까 이름만 유지하고서 제 마음대로 바꾸려고 한다는 이야기인지.

"애초에 옛 시대에 경연이 열린 까닭이 무엇이었는가. 모두가 배움이 부족하였으니 조금이라도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서라도 지혜를 주고받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에게 배움이 부족하였는가? 그야 물론 이 나라를 이끌어 갈 나라의 주인들에게 부족하였다. 그리고 옛 시대에서 이 이 나라의 주인이란 바로 왕과 선비들이었도다."

하나, 하고 황제는 한 번 더 말을 끊었다.

그러고서 가만히 청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오늘날 우리 대한국의 헌법 1조 1항은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명시하고 있느니라. 하여, 내 묻건대- 이 대한국의 주인은 누구인고?"

침묵만이 이어졌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 대답을 몰라서라기보다는, 감히 답하기 불경스러웠기 때문이다.

"그야 물론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 불경한 대답을 황제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저 스스로 선뜻 입에 담았다. 곳곳에서 숨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간 그렇게 머리로 알고 있던 것과 황제가 제 입으로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고 말하는 건 그 무게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루소가 말하기를 주권은 항상 국민에게 속하며, 양도될 수 없다 하였다. 짐은 언제나 그 말을 가슴에 새겨왔느니라. 이 위대한 나라가 어찌 이 한 몸의 사유물일 수가 있겠는가? 절대왕권을 부르짖은 홉스조차 생존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양보 될 수 없다고 하였거늘. 그러나 어디 생존권뿐이겠는가? 이 나라의 주인인 그대들이 오롯이 법에 따르는 것밖에는 할 수 없다는 말인가?"

애당초 황제가 무엇이 그리도 특별하단 말인가?"

그리 말하며 황제는 정중히 익선관을 벗어 연단 위에 내려놓았다. 그 모습에 모두가 경악하는 와중에도 황제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여기 있는 이 아무개는 한 사람의 국민일 뿐이다. 저 혼자서는 무엇도 할 줄 모르는 주민등록번호 1000001번의 무능력자다. 이런 놈이 어떻게 이 나라의 황제일 수가 있겠는가? 귀한 피를 타고 태어나서? 그렇지 않다. 국민의 지지를 받아 국민을 대표하기에 비로소 짐은 황제이다. 이 나라의 참된 주인은 언제나 국민인 까닭이다.

하여, 짐은 이 자리를 마련했다."

황제는 여기까지 말하고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고서 청중들을 둘러보며 개회사를 마무리 지었다.

"주장하고, 배우고, 반박하라. 짐이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은 추악하게 다투도록 하기 위함도, 그대들을 우스갯거리로 만들기 위함도 아닐지라. 자유로이 의견을 말하고, 다른 이들의 의견을 경청하며 새로운 것을 배우고, 그것이 틀린 것 같다면 기꺼이 반박하라. 논거가 반드시 경전에 나온 고사일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나 함부로 내보이지는 않더라도 제 뜻을 담은 경전 하나쯤은 가슴 속에 있지 않던가. 논거는 그대들 가슴 속의 경전이면 충분하다. 그것이 틀렸다면 이번 기회에 반론을 들으며 고치면 되지 않는가. 그리하여 바로 알게 된다면 그보다 기쁘고 보람찬 일이 어디에 있을까?

앞으로도 이와 같은 어전 토론이 1달에 한 번씩은 마련될 것이다. 그때 만일 짐이 참여하지 못한다면 태자가, 태자가 참여하지 못한다면 황자가, 황자조차 참여하지 못한다면 황후와 황녀들이 참여하도록 할 것이다. 더불어, 오늘 토론은 필요하다면 내일모레까지 연장될 수도 있으니 주지하도록 하라."

그제야 황제는 익선관을 다시 쓰고서 연단에서 내려왔다. 한동안 강당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황제의 말이 너무 충격적이라 다들 얼이 빠졌던 것이다.

그러다가, 황제는 "아 참."하고서는 뒤돌아섰다.

그리고 연단에 올라선 황제는 확성기에 입을 가져다 대고서 한마디 툭 하고 내뱉었다.

"지금 연초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서고에서는 절대 금연이네. 알아서들 자제하게나."

그걸로 끝이었다.

황제는 뒷짐을 진 채 오만방자한 모습으로 상석에 주저앉았다.

* * *

"이게 도대체 무슨···."

전창혁은 신음을 흘렸다. 사방에서는 의례적인 박수갈채가 터져 나오고 있었고, 그 본인도 박수갈채를 치고 있었지만, 이 중에 조금 전 황제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고서 손뼉을 치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었을까.

많아 봐야 열 명도 되지 않을 거라고 전창혁은 확신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얼떨떨한 얼굴을 하는 청중들이나 감격해서는 얼굴을 붉히고 눈물 콧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학생들뿐이었다. 정말로 조금 전 말을 온전히 이해한 건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을 하는 최익현과 전창혁 그 자신, 그리고 사민당 대표라는 독일인 혼혈 청년뿐인 듯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다. 애초에 저들 대부분은 가벼운 마음으로 입씨름이나 보러- 혹은 황제를 멀리에서라도 보려고 모였다. 황제의 기나긴 연설도 그냥 막연하게 길다, 내지는 뭔가 감동적이다 정도밖에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설프게나마 황제의 조금 전 발언을 이해한 논객들은 하나같이 뭐라도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국민 선언도 국민 선언이지만, 지금 당장에 코앞까지 닥쳐온 토론부터가 첩첩산중이었다.

"저 꼬장꼬장한 작자들과 언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청중들에게까지 꼬투리를 잡힐 걱정을 하라니···."

전창혁은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사실 꼬투리를 잡힐 걱정뿐만이 아니었다. 여차하면 청중들이 의견을 개진할 수도 있을 거라고 황제가 암시를 주지 않았던가. 물론 정말로 아무나 의견을 개진하지는 않을 테고, 최소한의 절차 정도는 마련되어 있겠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게 그거다.

지금 이 강당에 모인 청중만 3천여 명이다. 100명 중의 한 명만 끼어든다고 쳐도 지금 모여든 30여 명의 논객에 더하여 30여 명의 청중 논객이 추가되는 판국이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야 어떤 사상을 품고 있는지 흔히 알려진 그 나름의 유명인사들이지만, 청중 논객들의 사상이야 도대체 누가 안다는 말인가.

막말로 저 중에 무정부주의자가 숨어있어도 누가 안다는 말인가. 그리고 도대체 무슨 사상을 품고 있는지도 불분명한 청중 논객들을 상대로 무슨 논리적 대비를 하란 말인가.

그리고 빈민 구축을 주제로 다름 아닌 그 당사자들과 논쟁을 하게 될 우생학자들은?

현기증이 절로 일었다.

자신이 교과서의 한 장을 장식하고 있는 거라는 부담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