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413화 (413/530)

< 정당정치 >

시작을 알린 건 상석에 앉은 황제의 조언이었다.

"자, 그럼 어디 시작해보도록 하여라. 미리 순번을 정해왔다···라고 들었으나, 기실 구태여 따를 필요는 없느니라. 다만 다른 논객이 주장을 펴는 동안에는 정숙하여 경청한 다음 자신의 주장을 펼쳐야 할 것이며, 반론 또한 그리하여야 할 것이다. 예의를 지키고, 서로 존중한다면 무엇이든지 허하겠노라."

물론 그걸 진짜로 조언이라고 받아들인 이들은 드물었다. 이걸 일부러 황제가 말하는 이유가 뭐였겠는가. 다시 말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황제는 자신의 의견을 펼치려고 온 것이 아니라 논객들이 흥분하여 도를 넘어서지 않도록 심판을 봐주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공연히 흥분하여 토론의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아니면 자신의 주장만을 펼치는 순간 황제로부터 직접 제지가 들어올 것이라는 이야기다. 설마 그러지야 않겠지만, 때에 따라서는 불경죄가 될 수도 있다. 그럼 그 즉시 철창행이다. 과연 저 3천여 명의 군중 중 단 한 명의 사복경찰도 없을까.

황제가 시작을 알린 이후로도 한동안 연단 위에서는 침 넘기는 소리만 꼴깍꼴깍 울려 퍼졌다. 순서에 상관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 과연 괜한 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하필이면 제일 처음 순번을 배정받았던 것이 빈민 구축파였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기대에 찬 눈동자를 연단을 향해오는 군중 앞에서 빈민들을 모조리 죽여없애야 한다는 주장으로 첫 포문을 열어야 했던 것이다. 이때만큼은 사석에서는 그토록 서로 미워하고 싸워왔던 논객들도 일제히 사회진화론 진영에 동정의 눈초리를 향하였을 지경이었다.

"···가난은 단언컨대 사회의 책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순번을 넘기지 않고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첫 포문을 연 박영효의 담력은 과연 범인에 비할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으리라.

그는 첫 포문을 여는 순간 일제히 터져 나오는 탄식에 굴하지 않겠다는 듯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우리 모두 솔직해집시다. 지금이 어떤 시기입니까? 우리 대한의 국운이 나날이 하늘 높이 치솟는 단군 이래 최대의 전성기가 아닙니까. 모든 경제 지표는 지난 30년간 간헐적이고 짧은 불경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고공 상승을 그릴 따름이었고, 수차례의 전쟁과 그 모든 전쟁에서의 승리는 무수한 전쟁영웅을 낳았습니다.

그리하여 오늘이 왔습니다. 이 중에서 30년 전보다 가계사정이 더욱 형편없어졌다 하는 분들이 몇이나 있습니까? 있다면 손 한 번 들어보십시오."

박영효는 얼굴을 붉히며 빠르게 관중석을 둘러보았다. 그제야 비로소 야유와 탄식이 끊기고 침묵이 찾아왔다. 사실, 설령 있다고 해도 손을 들 수 있는 용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하물며 황제가 보는 앞에서 말이다.

그제야 박영효는 비 오듯 흘러내리던 땀을 닦아내고서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주장을 마무리 지었다.

"보십시오. 우리가 모두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자그마한 논 한 마지기가 고작이던 집안에서 그 자그마한 논 한마디지 위에 공장이 세워진다고 하여 보상금을 한 움큼 받아가 가세를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제가 들은 것만 10번이 넘습니다. 우리는 모두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경제는 앞으로도 계속하여 고공 성장할 것이고, 우리 국민의 호주머니는 나날이 두둑해져 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누군가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고 나라에서 그들의 삶을 책임져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어지십니까? 이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얻은 것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되냐는 말입니다. 하다못해 지난 전란기에 나라를 위하여 이 한 몸 던지기만 하였어도! 그때 나라에서 받은 포상금으로 가세를 일으키고도 남았을 텐데! 아직도 가난에 허덕이다니!

감히 묻겠습니다. 도대체 당신들은 그동안 무엇을 해왔기에 아직도 이 사회에 그토록 불평만 늘어놓고 있는 겁니까? 도대체 그동안 뭘 해왔기에 나라에 더욱더 많이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까? 당신들이 이 나라를 위해 한 것이 뭐가 있다고 이 나라에 감 내놔라 배 내놔라 야단법석을 피운단 말입니까!"

"이 새끼가 지금 말 다 했느냐!"

"옳소! 말 잘한다!"

박영효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주장을 마무리 지음과 동시에 강당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누군가는 자리에서 기립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삿대질을 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자리에서 기립하여 박수갈채를 보내면서 휘파람을 불어댔다. 그 즉시 안전요원들이 투입되면서 어떻게든 폭력사태는 피할 수 있었지만, 박영효와 사회진화론을 펼친 논객들이 서 있는 연단에 야유가 쏟아지는 걸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박영효는 연설을 끝낸 다음 군중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황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일단 최대한 황제의 치세를 띄워 주면서 모든 책임을 애국심도 없고 게으르며 무책임하기까지 한 빈민들에게 떠넘겼지만, 병술 보고서가 황제의 지시 아래 진행된 국책임을 아는 만큼 혹 조금 전 발언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았나 확인할 필요가 있던 것이다.

하지만 상석 위의 황제는 비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건 곧 박영효의 발언이 마음에 들었거나, 최소한 황제가 정한 토론의 법칙을 어긴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제야 박영효는 나지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서 다시 청중들을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이 게을러 빠진 인간들아! 부끄러운 줄 알아라! 너희 같은 게으르고 남 탓만 하는 것들이 이 나라를 좀먹고 있는 거야! 제 꼴이 처량한 줄 알면 집에나 기어들어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지, 뭘 집구석에서 기어 나와서는 못 선량한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하느냐!"

"뭐가 어드렇고 어떻다고? 이 간나새끼가!"

"시발 오래 살다 보니 별의별 개소리를 다 듣네! 야 이놈아! 여기 팔 잘린 거 안 보여? 네가 로스께 놈들하고 칼질해봤느냐!"

그건 그야말로 화룡점정이었다. 그나마 황제가 있었으니 망정이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흥분한 청중들이 진즉 연단 위로 뛰어 올라갈 기세였다. 황제가 보는 앞에서 욕지거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것도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속이 다 시원하구먼! 그래, 바로 그거지! 시답잖은 것들이 하여간에 나라에서 오냐오냐해주니까 불평만 늘어서는, 쯧쯧!"

"아주 그냥 인물이 났구먼, 인물이 났어! 정말이지 최고다!"

그러나 또 한쪽으로는 야유 소리에 맞먹는 수준에 박수 소리와 환호 소리가 터져 나온 것도 사실이었다. 애당초 이 자리에는 빈민들만 모여있는 게 아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빈민들보다는 중산층과 상류층이 배 이상 많았다. 애당초 도서관에서 토론회가 열리는데 빈민들이 다수일 수는 없던 셈이다.

그러니 황제나 논객들을 상대로 하여 연설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들을 표적으로 하여 주장을 펼쳤던 것이 유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연단에 모인 논객들에게 앞으로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결정적인 힌트가 되어주었다.

애당초 황제가 뭐라고 하였던가.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고, 이 토론회는 국민을 위한 경연이라고 생각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가장 먼저 이를 눈치채고서 전면에 나선 것은 전창혁이었다.

"조금 전 박 의원님의 발언은 논지를 흐리고 있습니다! 저들이 이 나라에 해준 것이 없다고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 나라의 병역법은 모든 만 19세 이상의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하여 국방의 의무를 지도록 명시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은 이상에야 이 자리에 모인 대부분이 이 나라를 위하여 의무를 다하였다는 것입니다!

받은 것이 있다면 돌아가는 것이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권리 없는 의무는 노예들만이 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나라의 형법은 인신매매를 엄격히 금하고 있으며, 이 나라의 헌법은 모든 국민은 자유인임을 엄숙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나라의 헌정이 진정 건재하다면! 이 나라는 의무를 다한 모든 가정에 그 권리를 돌려주어야 합니다.

의무가 상황에 따라 유예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사라지거나 하지 않는다면, 권리 또한 마땅히 그래야만 할 것입니다!"

"굉장히 인상적인 주장이십니다만, 논지를 흐리고 있다는 지적에는 공감할 수 없군요. 그야 물론 헌법과 형법은 모든 국민의 자유인 신분과 권리와 의무에 대하여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가난한 국민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무까지 명시되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하물며 저 가난한 자들이 국가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권리는 또 어떻습니까?

권리와 의무! 당연한 이야기지요. 진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권리 중에 교수님께서 주장하신 권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전 교수님께서 오늘의 주제를 착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왜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십니까? 이 나라의 헌법은 분명하게 모든 20세 이상 성인의 참정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묻건대, 이를 투표에 부친다면 과연 찬성표가 더 많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반대표가 더 많을 것 같습니까? 이 나라의 헌법은 모든 국민은 나이의 많고 적음, 재산의 많고 적음과 무관하게 오직 한 표씩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불우이웃들 또한 참정권을 지닌 이 나라의 국민인 이상, 마땅히 그들의 사익을 추구할 권리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정 박 선생님께서 불우이웃들의 생존권 행사에 이해하실 수 없다면, 저는 이번 사안을 헌법이 보장하는 민주주의 원칙에 따른 국민투표로 해결할 것을 제의하겠습니다!"

"전 교수는 우민 쿠데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단지 저들이 숫자가 더 많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더욱 많은 과세를 부여받을 것이며 모든 혜택은 저 게으름뱅이들이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는 이 나라의 재산권을 농락하겠다는 주장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소수의 교양있는 국민을 위하여 우민 정치에 맞서 싸울 것입니다!"

"박 의원님의 주장은 다분히 귀족주의적이고, 시대에 뒤처진 엘리트주의적 사고방식입니다! 이 나라의 헌법은 다수결에 따른 민주주의 원칙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헌정질서를 어지럽히는 선동행위는 삼가주십시오!"

박영효는 군중을 돌아보며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그에 질세라 전창혁도 있는 힘껏 박영효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에 질세라 뒤늦게 다른 논객들도 일제히 의견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언제까지 우리는 위에서 내려오는 단 꿀에만 기대어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것이 축사에서 주인이 먹이를 내려주기만을 기다리는 돼지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돼지가 아닙니다. 모두 하나하나가 독자적 주체와 의지를 지닌 자유로운 인간입니다! 그리고 자유인이란, 위에서 내려오는 것에 기대지 않고서 스스로 쟁취하는 자들을 뜻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외칩시다! 우리가 바로 국민이다! 우리가 바로 인민이다! 우리의 생존권은 저 날강도 같은 자본가들과 맞서 싸워 스스로 쟁취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단결하십시오, 인민 여러분!"

"대단히 유감스럽니다만, 이 자리는 당 대회도 아니고 선동을 위하여 준비된 연단도 아닙니다! 이 자리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국가가 빈민들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는가 하는 논의라는 걸 기억해주십시오!"

"없습니다. 그래서 통탄할 노릇이라는 겁니다. 인민을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한 사회조직이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며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헌법으로 우리를 우롱하면서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두 눈을 가리고 있다니! 투쟁, 투쟁만이 살길입니다. 모두 단결하여 분노를 보입시다! 우리의 권리는 우리의 손으로 쟁취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이런 고얀 놈이···! 이놈아! 네가 지금 감히 역모를 꾀하겠다는 말이더냐!"

"미 독립선언서 재 2장은 정부가 애초의 건국목적을 배반하였을 때 인민의 행복과 안전의 수호를 위하여 그 정부를 파괴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권리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주인이 나라를 갈아엎겠다는데 그것이 어찌 역모겠습니까. 되려 나라를 바로 잡는 일이지요.

우리는 이번 양보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도 더욱 투쟁하고 더욱 저항하여야만 합니다. 끝없이 저항하고 투쟁하는 것만이 이 나라의 주인이 진정 누구인지를 보여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 아니 저 천인공노할 역도가 다 있나···!"

그리고 이 논쟁에서 힘을 발휘한 것은 진영을 막론하고서 개화파였다. 그도 그럴 것이, 수구파에게는 청중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인다든가 편을 가른다든가 하는 행동 자체가 낯설었다. 그들이 겪어온 언쟁은 고작해야 십수 명이 한데 모여 의견을 주고받는 것이었지, 3천여 명의 청중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편을 가르고 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토론이 시작되고서 그리 얼마 되지 않아 수구파의 존재감은 빠르게 종적을 감추기 시작했다. 이따금 이의를 제기하면서 존재감을 드문드문 보이긴 했으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제아무리 혼자서 목청을 키워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봐야 청중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여서 그 머릿수로 상대를 압박하는 그들로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전술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조선의 거유들은 손짓과 발짓을 더 해가며 청중들을 웃기고 울리고 분노하게 하는 논객들의 재주를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토록 일방적으로 당하다니!'

이는 최익현을 위시한 수구파 유학자들에게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이것저것 달라졌다지만 그들의 특기나 다름없는 논쟁에서 거의 아무런 말도 못 하고서 밀린 것이다. 그것도 논리에서 밀린 것이 아니라, 청중들을 아군으로 품지 못하고 저 혼자서만 목 아프게 목청을 키우다가 목소리 크기에서 밀려서 패한 것이었다.

그것도 황제가 보는 앞에서!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는 안 돼. 어찌하여 황상께 우리 유자들의 소리가 닿지 못하였는지를 알겠다. 이 소리의 장막을 뚫지 못한다면 이 나라의 유학은 그리 오래지 않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게야!'

최익현을 위시한 수구파는 뼛속부터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 여론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수구파가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지는 동안, 청중들의 논쟁 참여가 시작되었다. 불이 붙은 것이다.

물론 이들 중 제대로 된 주장을 하는 이들은 드물었지만 말이다.

"거 가진 것도 많은 양반이 쩨쩨하게 굴기는! 뭐 우리가 대단한 걸 바라기라도 했소? 거 우리도 성둥성둥한 무에 쌀밥 듬뿍 넣어서 뭇국이라도 양껏 먹어보자, 이 말이오!"

"제 피 같은 세금 단 1원, 아니, 단 1냥이라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인간 해충들을 위하여 쓰일 수는 없습니다! 이 나라의 주인은 저 거지들이 아닙니다!"

"불경한 작자들! 어딜 감히 황제 폐하께서 이미 정하신 일에 토를 달고 있는 건가! 폐하께서 뜻을 정하셨다면 그냥 그런 줄 알고 넘어갈 것이지, 감히 어찌!"

"어허, 그건 아니지. 이 자리를 마련한 건 짐이니라. 그대의 충정은 내 잘 알겠으나, 예로부터 으뜸가는 충신은 내게 제일 듣기 싫은 말을 해주는 자라고 하였다. 그대가 내게 충정을 다하고 있듯이 이들 또한 제국과 짐을 위하여 충정을 다하고 있는 것뿐이니라."

그때마다 황제는 적절히 관여하여 수위를 조절하거나 어긋난 발언에 수정을 가하였다. 그 덕에 이날의 어전 토론은 황제가 없었다면 진즉 패싸움이 되거나 해산되거나 하였을 고비를 몇 차례고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토론이 무난하게 끝났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이날 온종일, 양 진영은 서로를 향해 아낌없는 인신공격과 비꼼을 퍼부었다. 이제 더는 청중들에게 이 논쟁은 높으신 양반들만의 구름 위 싸움이 아니었다. 서로 헐뜯고 서로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싸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기에 마침 이날 토론에 참여한 박영효는 현직 국민당 소속 상원의원이기도 했다. 결국, 이날의 토론은 정치적 견해 차이를 맞부딪히는 자리가 되었다.

"자기들 입만 입인 줄 아는 수전노 새끼들!"

"남의 호주머니나 탐내는 도둑놈들!"

결국 토론의 결과는 나지 않았다. 다만 토론에 참여한 3천 명, 도서관에 모여든 10만여 명에게 자신이 찬성파인지 반대파인지를 깨닫게 하여 주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병술 보고서는 무사히 상원을 통과하여 정식으로 비준되었고, 이를 두고서 양 진영은 또 한 번 반응이 극명히 갈리면서 서로의 의견 차이를 재확인했다.

이로써 한국의 정치는 좌와 우로 갈렸다. 빈민 구제에 찬성하면 좌익이었고, 부자의 재산권을 우선시하면 우익이었다. 성리학 수구파조차 찬성파라는 이유로 좌익으로 분류되었다. 중립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전 토론 이후에도 논쟁은 계속되었다. 논쟁이 계속될 때마다 새로운 의견 차이가 발견되며 갈등도 더욱 심화 되어갔다. 요식행위나 다름없던 선거는, 마침내 좌익과 우익의 정면충돌 아래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단지 형식적이고 보여주기식 의견대립만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 정당정치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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