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415화 (415/530)

< 요동치는 전선 >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 당선인이 정식으로 대통령에 등극한 1893년 3월, 전황은 당장에라도 대영제국이 무너질 것 같았던 1월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항복하리다. 난 충분히 조국을 위하여 헌신했다고 확신하오. 우리 프랑스군은 더는 런던을 시민의 분노와 귀국의 병사들로부터 지켜낼 수 않소. 내가 이 도시를 잠시나마 통치하면서 귀국 시민의 편의를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하였듯이, 귀국 또한 내 부하들에게 인도적인 처우를 베풀기를 요구하오."

"물론입니다. 현명하신 판단에 감사합니다. 런던은 오늘 장군님께서 보여주신 결단을 영원토록 기억할 것입니다."

"그거 고맙구려. 그리고 이건 내 사적인 부탁인데··· 저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줄 수는 없겠소? 저들은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인 선량한 이들이라오."

"선량하다? 여왕 폐하께 칼을 들이댄 역도들이 말입니까? ···흠흠. 제가 좀 흥분했군요. 그러나 이건 분명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전능하신 그분의 권능에 맹세코, 저 역도들에게 자비는 절대 베풀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일단 가장 큰 변동점은, 런던이 영국군에 수복되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저지대 방위를 위하여 파병 나가 있었던 영국 육군 병력이 런던 수복을 위하여 본토로 돌아오자, 프랑스가 런던에 한때 수립하였던 브리튼 자유국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무너져내렸다. 안으로는 런던 시민이 저항하고 밖으로는 영국군의 포위가 이어지니 한 줌도 안 되는 프랑스군으로서는 대적할 수 없던 것이다.

이때 나폴레옹 4세는 원정군에게 런던을 불태울 것을 명령했으나, 이 명령서는 런던을 포위한 영국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결국, 조지프 갈리에니가 이끈 프랑스의 영국 원정군은 최후의 발악을 택하는 대신에 항복을 택했다.

「우리는 군인이지 훈족이 아니다」라는 이유였다. 프랑스군은 런던을 포위한 영국 육군에 백기 투항했고, 그 덕에 이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본국에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 스코틀랜드에 마련된 포로수용소에 갇힌 것이었지만, 그게 어딘가. 브리튼 자유국에 협력한 이들이 반역죄를 선고받아 런던 시민의 오물 세례를 받으면서 총살당하거나 런던탑에 갇힌 것에 비하면 침략자의 응보로서는 값쌌다. 그만큼 런던을 불태우는 대신에 순순히 항복한 점을 고평가받은 것이다.

"오늘로써 네덜란드 왕국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 프랑스 제국의 오랜 형제국 홀란트 왕국이 부활하였음을 선언하는 바이다!"

""프랑스 만세! 홀란트 왕국 만세! 홀란트 국왕 빅토르 보나파르트 폐하 만만세!""

그리고 영국이 본토방위를 위해 주력을 빼냈다는 건, 그만큼 네덜란드 전선의 방비가 허술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따라서 두 번째 변동사항은 다름 아닌 암스테르담의 함락과 이에 따른 네덜란드 왕국의 멸망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이를 두고서 영국이 자신들을 배신하였다고 치를 떨었으나, 영국도 잠시나마 수도를 상실해야 했으니 변명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바닷길이 아직 열려있던 덕분에 이제 갓 14살 먹은 어린 여왕과 정부 수반들은 무사히 혼란에 빠진 암스테르담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게 네덜란드인들에게는 위안 아닌 위안이었다. 당장 조국이 이국의 침략자들에게 유린당하고 각지의 저항세력들도 씨가 말라가는 마당에 무슨 소용이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암스테르담을 점령한 프랑스는 그날로 네덜란드 왕국의 멸망을 선언한 다음, 홀란트 왕국의 국왕으로 빅토르 보나파르트를 내세웠다. 그나마 대등한 동맹국인 양 내숭이라도 떨었던 브리튼 자유국 때와는 다르게, 네덜란드를 점령한 프랑스는 홀란트 왕국이 자신들의 괴뢰국임을 구태여 숨기려 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홀란트 왕국에서 영국의 파운드화나 네덜란드 왕국의 길더화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서 프랑스 프랑만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고, 모든 행정 언어를 프랑스어로 통일시켰다. 독일어가 강세인 지역은 내통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주민을 프랑스-스페인 접경지대로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당장은 몰라도 중장기적으로는 괴뢰국이라는 허울마저 때려치우고서. 프랑스 일부로 완전히 합병할 작정이라는 걸 처음부터 보인 것이다.

"이건 어느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범죄행위다!"

"너 네덜란드여, 영원하여라! 우리는 최후까지 프랑스 침략자들과 맞서 싸울 것이다!"

런던에 이사한 네덜란드 정부는 결사 항전을 선언했다. 영국은 동맹국으로서 네덜란드인들의 저항운동을 마지막까지 지원할 것이라 천명하였고, 어린 여왕을 대신하여 네덜란드의 정부 수반들은 자국의 식민지 정부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가장 유감스러웠던 사실은, 그들에게 남은 가장 거대한 식민지이자 젖줄이라 할 수 있었던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중립을 선언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변명은 있었다. 월남이 공식적으로 국권을 회복하고, 프랑스의 우호국이자 잠재적 적국인 한국 남방 함대의 견제 탓에 임시정부를 지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가 봐도 이는 단지 변명일 뿐, 동인도 식민정부가 간을 보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그리고 식민정부에서 임시정부가 두 번 다시 본토에 돌아갈 수 없을 확률에 걸었다는 것도 말이다. 통탄할 노릇이었으나, 누구를 탓할까. 다만 힘이 부족했음인 것을.

"압제자 헝가리인들은 물러가라! 슬로벤스코는 자유다!"

"공화국 만세! 자유 슬로바키아 만만세!"

세 번째 변동점은 프로이센군의 보헤미아 점령이었다. 이는 신성로마제국이 궁지에 몰렸음을 의미했다. 프로이센은 보헤미아의 체코-슬라브 민족주의자들을 부추겨 독립을 선언하도록 하였고, 오스트리아의 통치에 비교적 만족하던 체코 민족주의자들은 이에 난색을 보였으나 헝가리의 압제에 이를 갈던 슬라브 민족주의자들은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수립을 부르짖었다.

당장 전선에서 함께 싸울 동맹국이 급했던 프로이센은 곧장 슬로바키아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였고, 오스트리아에 협조적인 모습을 보인 체코에서는 프로이센의 군정이 이뤄지게 되었다. 프로이센 상부에서 오랜 통치로 독일화가 상당히 진행되었다는 이유로 합병안이 검토되었음은 물론이었다. 물론, 당장은 전쟁에서 이기는 게 우선이라고 미뤄졌지만 말이다.

제국의 허리이자 가장 거대한 산업지대였던 보헤미아를 상실한 신성로마제국은 이때를 기점으로 전 전선에 걸쳐 수세로 전환하였다. 승리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설령 패하더라도 단 한 치의 땅이라도 더 많이 사수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다만 새해 초부터 대공세를 펼친 프로이센군도 기진맥진했던 것은 매한가지였던지라, 이때를 기점으로 독일 전선은 또 한동안 소강을 보였다.

"나가서 싸우자, 형제들! 저 짐승 같은 오스트리아 놈들에게서 우리 자매들을 지켜내자!"

"이탈리아 왕국이여, 영원하여라! 로마여, 영원하여라!"

한편, 프로이센이 보헤미아를 함락시키는 등 그야말로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면, 이탈리아는 글자 그대로 신성로마제국군의 공세에 '살아남음으로써' 그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다 못해 수도 로마가 포위되는 와중에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게 이탈리아가 보여주고 있는 가장 눈부신 활약(?)이었다.

그나마 영국 지중해 함대의 원호 덕분에 남부 해안가는 무사했으나, 이탈리아 해군이 제국 해군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한 아드리아해는 논외였다. 신성로마제국군은 이탈리아의 국경 요새지대를 우회하여 이탈리아반도의 동부 해안가 지대를 짓밟았고, 졸지에 후방이 뚫리면서 등을 보인 북방의 주력군이 제국군에게 포위 섬멸당하면서 정규군 전력의 60% 이상을 상실했다.

그렇게 정규군이 씨가 마르고 부랴부랴 징집한 소년병들 따위로 간신히 민방위군을 만들어내서 로마 방위전을 치르던 와중에 보헤미아 함락을 전후로 하여 제국군의 공세가 멈추니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가 따로 없었다. 독일 전선이 양측이 기진맥진해지는 바람에 소강상태가 되었다면, 이탈리아 전선은 당장에라도 T.K.O 당하기 직전인 마당에 간발의 차로 벨이 울리면서 다음 라운드를 기약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노서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각하! 본관은-."

"아니, 황상께 설명은 들었으니 그냥 넘어가세나. 앞으로 갈 길이 바쁜데 한시라도 허투루 써서는 안 되겠지."

이러한 소강상태는 러시아 내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태풍이 몰아치기 직전에 폭풍전야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신성로마제국군이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동안 우랄산맥을 넘은 대한제국군은 연말에 있을 러시아 혁명 공화국 수립과 대공세를 준비했다. 대공세의 목표는 일차적으로는 캅카스의 확보였고, 가능하다면 크림반도까지 확보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선 러시아 공화국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하지 궁리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이미 황제에게 대강 어떻게 하면 좋을지 듣기는 했어도, 어윤중으로서는 이게 여간 골치가 아픈 게 아니었다.

황제는 일단 토지를 나눠준다고 하면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그건 농촌의 이야기고 대도시인 모스크바는 또 다르지 않던가. 제아무리 식자층을 끌어들여도 모스크바 시민이 전부 다 식자가 아닌 이상 어떻게든 시민을 회유할 방법을 따로 궁리해놔야 했다. 괜히 시간이 없다고 한 게 아닌 셈이다.

"진군하라! 정복하라! 아프리카는 이제 우리 프랑스 제국의 것이다-!"

"한 치도 밀리지 마라! 머지않아 인도에서 구원군이 올 거다! 제국의 신성한 강토를 단 한 치도 빼앗겨서는 안 된다!"

다만 이러한 유럽 전선의 소강상태와 아프리카 전선은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였다. 아프리카 대륙은 남북으로 갈라져 제각각 유니언 잭과 삼색기 아래 끝없이 서로 죽이고 죽였다. 참호전이 이루어지기에 아프리카 대륙은 너무나 넓고 인적도 드물었고, 기관총 같은 화기들도 드물었다. 이렇다 보니 대부분의 전투는 유럽에서와는 다르게 구식 총기와 총검 돌격으로 승부가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백인 병사들은 유럽에서 싸워야 했기에, 이들 아프리카 전선의 병사들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절대다수가 현지에서 징용한 토착민들로 이루어졌다. 당연히 이들에게 제대로 된 군사교육이나 훈련이 이루어졌을 리도 만무했다. 이들이 배운 건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면 앞으로 나가서 적을 죽여라, 나팔소리가 들리면 다시 후퇴해라 정도였다. 심지어는 총을 장전하는 법도 배우지 못하고서 전선에 투입되는 예도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어째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고서 싸워야 했다. 같은 마을이라도 백인들이 정한 경계에 따라 어제까지 식사를 같이한 혈연 사이나 호형호제하던 친구들끼리 무기를 겨누는 경우도 흔히 이뤄졌다.

"이, 이 장구벌레 같은 놈들! 내가 하는 말을 뭐로 들은 거냐! 한 치도 밀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내가 언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 있었나!"

"그, 그렇지만 중위님! 다, 다들 죽었어요!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만큼 있었는데! 지금은-."

"그래서 알게 뭐냐, 제기랄! 이 쓸모없는 놈! 혼자 남아 외로워서 내뺐다, 이거냐?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이 얼빠진 놈아! 네가 지켜야 했던 그 대포는 너 같은 검둥이들 100명이 평생 뼈 빠지게 일해도 살 수 없을 만큼 값비싼 물건이었단 말이다!"

백인 장교들은 기꺼이 이들을 총알받이로 사용했고, 전투에서 이기기 위하여 이들의 인명을 소모하는 데에 어떠한 거리낌도 없었다. 다만 명령을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병사의 기본 자질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작은 혼란에도 쉽게 도망치는 흑인 병사들의 형편없는 전투력에 불평하였을 따름이다.

이렇다 보니 그리 드물지 않게 흑인 병사들에 의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이때만큼은 적을 죽이는 데에는 그토록 인색하던 기관총이 거침없이 동원되었다. 구식 총기와 총검 따위로는 기관총과 대포를 앞세운 극소수의 백인 진압군을 이길 수 없었고, 그렇게 반란이 진압되고 나면 본보기로 적게는 수십에서 수백 이상의 원주민들이 학살당했다.

이러한 강경책은 충분한 효과를 거두어, 네덜란드가 함락되는 동안에도 영국군은 아프리카 전선에서 프랑스군과 대등하게 맞서거나 되려 밀어붙이는 양상을 보였다. 그리고 이들의 전과는 보도 과정에서 배 이상 과장되어 본국에 선전되었다. 잠시나마 런던을 상실했다는 정신적 충격을 지우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전황의 변화는 매킨리 정권의 대외정책 변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미국으로 돌아온 모건의 요구였지만 말이다.

"참전을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매킨리의 취임 연설이 이루어지기 보름 전.

은밀히 매킨리와 접선한 모건은 가장 먼저 대영 강경노선을 철회하라고 요청하였다. 매킨리는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모건으로서는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혹여나 미영전쟁이 시작되어 영국에서 자국 내 미국인 자산을 압류하려 드는 순간, 모건으로서는 꼼짝없이 파산신청을 해야 할 판국이었으니까.

"대단히 갑작스러운 말씀이시군요. 모건 씨께서도 제가 지지자들에게 무엇을 공약으로 내 걸으셨는지 모르시지도 않을 텐데요? 국민은 복수를 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복수를 명분으로 당선되었고요. 그런데 그걸 없었던 일로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예, 압니다. 잘 알고 말고요. 하지만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았던 영국은 끝내 런던을 자력으로 수복하면서 아직 저력이 남아있음을 보였고, 한국은 국내의 사안들로 정신이 팔렸으니 이제 곧 인도인 병사들이 하나둘씩 수에즈를 통해 유럽으로 옮겨질 겁니다. 그럼 이제 전쟁은 또 다른 양상이 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명분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모건은 매킨리에게 인도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영국 최후의 비상 금고이자 최대의 병영 말이다. 그동안이야 한국이 혹여나 영국을 칠지 모르니 인도에서 병사를 징용해봐야 유럽으로 돌릴 수가 없었으나, 한국이 국내 사안에 주력한다면 이야기가 또 달랐다.

그렇게 인도인 병사들을 투입한다고 과연 네덜란드를 수복하고 프랑스를 항복시킬 수 있는가-하면 역시 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지만, 최소한 영국은 무조건 항복의 위기는 확실하게 넘긴 셈이었다.

그리고 한국이 중립을 지키면서 한숨 돌린 영국이 본격적으로 대서양에 집중하기 시작한다면, 그때는 영국과 프랑스가 기진맥진한 틈을 타 대서양을 쓸어 담으려는 미국의 계획도 꼬일 수밖에는 없었다.

"흐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알겠습니다. 그럼 모건 씨의 고견을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 두 열강의 평화를 중재합시다. 어차피 프랑스는 이제 영국을 항복시킬 수단이 사라졌고, 반대로 영국도 유럽 대륙으로 돌아갈 수가 마땅치 않습니다. 우리 합중국은 전쟁에 참전하여 청년들의 아까운 피를 흘리는 대신에 유럽의 명예로운 평화를 중재하며 도덕성을 과시하는 한편으로 취할 수 있는 걸 취하자는 것이지요."

"그 경우에는 아무래도 우리 합중국에서 얻을 수 있는 지분이 줄어들겠군요."

"어차피 전쟁 때문에 국력이 쇠해서라도 저절로 합중국의 손에 떨어질 과실입니다. 구태여 피를 흘려가면서까지 앞당길 필요가 있겠습니까?"

"으음,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이 자리에서 확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우선은 이 주제에 관해서는 제 사람들과 따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우리 합중국 청년들의 운명이 각하의 손에 달렸습니다."

그리 말하며 모건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물론 가식에 지나지 않았다. 모건이 언제부터 그리도 청소년들의 목숨에 관심이 있었던가. 사실, 매킨리는 매킨리대로 언제부터 그리도 공약 이행에 관심을 뒀는지 따지기 시작하면 거기서 거기였지만 말이다.

'우선은 이걸로 되었다. 이제부터 차근차근 로비를 늘려가면서 압박하면 참전 논의도 질질 끄게 될 테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인가 흐지부지되겠지. 그럼 내 재산도 이제 안전해질 거야.'

아무튼, 모건은 매킨리의 대답에 내심 안도했다. 그 자리에서 확답을 받은 건 아니었으나, 우회적으로나마 긍정적인 대답을 얻어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은 고비를 넘긴 셈이었다.

그것이 섣부른 인식이었음을 모건이 자각한 것은 매킨리가 취임 직후 첫 행정명령으로 캐나다 침공을 명령한 직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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