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419화 (419/530)

< 고르디우스의 매듭 >

한편, 한양에서 영미 양국이 가까스로 평화를 되찾고 있을 무렵.

"어처구니가 없구려."

"무엇이 그리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입니까?"

모스크바, 차리치노 궁전.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크렘린이 황실을 가두기 위한 철창 없는 교도소로 전락한 이래로 모스크바 군정의 심장부가 된 그곳에서는 한바탕 피보라가 몰아칠 기미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어윤중을 위시한 한국인 고문단과 미하일이 이끄는 러시아 군정 사령부가 있었다.

"그러니까 차르를 시해하라···고 하였소?"

미하일은 지금 자신이 똑바로 들은 것이 맞는지 몇 번이고 의심하면서 되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욱 직설적으로 지금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었다. 더욱 솔직하게 말하자면, 제정신이 아니었으면 했다.

이건 러시아에 대한 끔찍한 무지 또는 작정하고서 미하일과 군정 사령부를 파멸시킬 생각이 없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요구였으니까.

"시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벌하라고 하였지요."

그러나 어윤중의 대답은 사뭇 담담했다. 그도 내심 꺼려지는지 눈살을 찌푸리기는 했으나, 그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다. 미하일은 직감적으로 이것이 한국의 황제로부터 내려온 명령이라는 걸 눈치챘다. 상식적으로 그게 아니고서야 한국 또한 제정국가인데 다른 나라의 황제를 주살하라는 이야기를 함부로 입에 담지는 않을 터였다.

미하일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내 못 들은 거로 하리다."

"협력하지 않으시겠다는 겁니까?"

"그렇소. 물론 나는 이미 역적이오. 지상에 임한 신과도 같다던 차르에게서 권력을 빼앗은 희대의 악당이지. 그러나 나는 이 나라의 살아있는 신을 죽인 적그리스도로서 죽고 싶지는 않소."

미하일의 대답은 사뭇 진중했다. 그는 자신이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고 확신했다. 러시아인들에게, 러시아 제국에 있어서 차르란 그런 존재였다.

차르는 살아있는 신이었다. 차르는 러시아의 구심점이자, 현실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러시아 그 자체였다. 류리크 왕조가 이끌던 모스크바 공국 시절부터 다시 그 류리크의 피를 이은 로마노프 왕조의 루스 차르국-다시 오늘날의 러시아 제국에 이르기까지. 제위 찬탈은 흔히 있었으며, 황권이 무력한 시대도 흔히 있었다.

그러나 제위 찬탈은 어디까지나 황족 간의 내전이었고 황권이 무력하다고 한들 왕조가 교체된 적은 없었다. 미하일이 차르를 무력화시키고 사실상 차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된 이후에도 차르를 죽이지도, 폐하지도 않고서 크렘린에 가두기만 한 것 또한 그 자신이 결코 차르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차르를 죽이고서 공화국의, 혹은 새로운 제국의 건국 시조가 되라니!

"물론 알렉산드르 대공은 툭 까놓고 말해서 더는 차르라 불릴 자격이 없소. 당장 그자를 폐하고서 새 차르를 세운다고 한들 그리 대단하지 않은 일이겠지. 그러나 대공을 시해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요. 차라리 암살을 권하시오. 공개처형이라니, 난 그런 끔찍한 야만에 동참할 생각이 조금도 없소."

미하일은 일부러 '대공'이라는 지위를 강조했다. 그가 사실상 폐위 되었음을 다시금 강조한 것이다. 이는 곧 폐위로 만족하고서 이만 물러나 달라는 간곡한 요청이기도 했다. 사실, 미하일로서는 딱히 알렉산드르 3세에게 대단한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 한국에서 구태여 그를 죽이라고 요구한 이유부터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어윤중은 물러나지 않았다.

"지금 이대로는 그저 패전을 유예하는 것뿐이라는 걸 알고 계실 텐데요?"

"아니, 모르겠소. 독일인들은 스몰렌스크와 프스코프에서 발이 멈추어 더는 동쪽으로 오지 못하고 있고, 동쪽에서 온 든든한 동지들이 새로이 지원군을 파병해주었지 않았소? 이제 남은 건 반격의 봉화를 올리는 것뿐이라고 나는 믿소."

"세속주의에 교회가 등을 돌렸고, 군국주의에 귀족들이 등을 돌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외세까지 끌어들여 민족주의자들을 실망하게 하셨지요. 민중들은 지배계층끼리의 내전에 무관심합니다. 그럼 인민주의자들을 끌어들이는 것 외에 현실적으로 대안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허."

미하일은 눈을 부릅떴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아픈 구석을 날카롭게 찔렸다. 이미 모스크바 군정이 더는 유지될 수 있는 동력이나 명분을 모두 잃은 지 오래라는 걸 꿰뚫어 본 것이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우수한 자인 건가, 아니면 또 그 절름발이 티무르의 짓인가.'

미하일은 고뇌했다. 그러나 어느 쪽이건 사실 크게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차르를 처형하라는 요구가 현 상황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터무니 없는 요구가 아니라, 오히려 고르디우스의 매듭 끊기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더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오?"

미하일은 뒷목을 잡으며 되물었다. 한국이야 인민주의자, 러시아어로 나로드니키에 시달려본 적이 없으니 그 악명에 귀가 어두울지도 모른다. 그들이 얼마나 악랄한지 말이다. 그들이야말로 닥치는 대로 정부 고관들을 암살하고, 정부 기관을 파괴하고, 혁명을 부추기던 반정부집단이 아닌가.

러시아 귀족인 미하일로서는 나로드니키보다는야 차라리 독일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더 나을 지경이었다. 똑같이 반정부집단이라지만 당장 위세를 떨치는 나로드니키에 비하면 세력도 좁쌀만 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차라리 귀엽지 않던가.

"당신도 그 작자들과 한마디만 나눠보면 차마 상종할 족속들이 못 된다는 걸 잘 알게 될 거요. 그리고 상식적으로 대공을 죽인다고 한들 그들이 우리에게 합류할 리가 있겠소? 저들에게 있어서는 우리 모스크바 군정도 대공과 하등 다를 게 없는 족속이란 말이오."

"그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체르니셰프스키 씨가 일전에 제 방에 찾아와주셨습니다."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 말이요?"

미하일은 설마 하면서 되물었다. 마음속으로 설마 자신이 아는 그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는 아니기를 빌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어긋나고 말았다.

"생각 이상으로 우리 대한과 접점이 많더군요. 장차 우리 대한의 향촌 사회를 본받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쳤군."

미하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미하일은 일전에 한국에서 추진한 새마을 운동을 떠올렸다. 그 새마을 운동과 토지개혁이야말로 본질에서 나로드니키들이 추구하는 지역 공동체 주도의 향촌 사회와 맞닿아 있다는 점도 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로드니키들의 이상향과는 정반대로 한국은 여전히 황제의 전제권력이 지배하는 전제제국이라는 점이겠으나- 적어도 나로드니키들에 있어서는 지금의 러시아 제국보다는 부분적으로나마 자신들의 이상향이 이루어진 한국이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했다.

미하일은 점점 자신이 궁지에 몰리고 있음을 자각했다.

'일부러 이걸 내게 알려주었다는 건, 이제 한국에는 대안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은 거냐. 빌어먹을 놈들.'

절로 이가 갈렸다. 국외를 전전하던 나로드니키들이 내전을 틈타 국내로 돌아왔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으나, 모스크바에까지 침투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던 미하일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나로드니키들이 자발적으로 한국에 접촉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으로서는 이제 미하일이 자신들을 따르지 않겠다면 나로드니키들을 새로 내세우는 것도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게 된 것이다.

특히, 차르의 처형에 있어서는 미하일보다 나로드니키들이 훨씬 적극적일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로드니키들에 처형을 맡긴다면 그들은 기꺼이 차르 일가를 처형하기 위하여 총을 겨눌 것이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차르 일가를 벌집으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피곤하구려.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시오. 이 일은 좀 더 생각해보아야겠소."

'미쳤군, 미쳤어! 이건 제정신이 아니야. 한국 놈들은 미쳤어!'

미하일은 어윤중에게 축객령을 내리면서, 속으로는 몇 번이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애초에 그가 원해서 군정을 수립하게 된 것도, 한국을 끌어들였던 것도 아니었지만 이건 상상을 초월했다.

차라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끌어들이고 말지, 인민주의자들이라니. 전자는 한 줌도 안 되니 통제하기도 어렵지 않겠지만, 후자는 이야기가 다르다. 눈 하나 깜빡하면 군정이 무너지고 인민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을지도 모른다.

그다음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프랑스에서 정권을 거머쥔 자코뱅들이 무엇을 했던가? 러시아에서도 그와 꼭 같은 일들이 되풀이될 것이다.

'이제라도 항복할까?'

미하일은 뒤늦게 페트로그라드 정권과의 화해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오늘 이 자리에서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 저들에게 전하고 미쳤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이 흉악한 계획을 폭로하면 하다못해 목숨 정도는 부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섞인 기대였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걸 미하일은 알았다. 이미 그는 역적이고, 매국노이며, 독재자였다. 그러나 그는 최소한 살아있는 신을 처형하고 러시아를 인민주의자들에게 넘긴 작자로 후세에 악명을 떨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마침 전선도 소강세겠다, 한번 이야기해볼 여지는 있겠어.'

미하일은 마음을 굳혔다. 가능성이야 높지 않겠으나, 최소한 차르를 살해하고 혁명 공화국을 수립한다는 계획에 동의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미하일에게는 있었다.

설령 도중에 들켜서 한국인들의 손에 잡혀 죽는다고 한들, 신살자가 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 * *

"생각 이상으로 완고하군."

한편, 차리치노 궁전을 나서는 어윤중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대답을 미루는 미하일의 모습에서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기란 어려울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리 달갑지 않은 사실이었다. 무수한 결격사유에도 아직 모스크바 군사정부가 유지되고 있는 건 미하일 대원수라는 알기 쉬운 상급자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상명하복이라는 질서가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군부에 있어서 그보다 알기 쉬운 권위와 권력도 또 없던 것이다.

과연 지금 상황에서 미하일이 비협조적이라고 하여 위에서 치워버리면 과연 남아 있는 러시아군은 새로운 정권에 협력할까? 아니면 한국을 밀어내려고 들까? 하물며 그 미하일보다도 위에 있는 차르까지 처형한다면?

'지금 이대로 가면 모스크바 정권은 말라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미하일 대원수를 실각시키거나 차르를 처형한다면 구심점을 잃고서 곧바로 붕괴한다.'

그야말로 난제였다. 꼬이고 꼬인 매듭을 단칼에 잘라낼 수 있다면 좋겠으나, 말이 쉽지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렇다고 러시아에 혁명 공화국을 수립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거스를 수도 없는 일인데, 막상 직접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민심을 살피니 러시아 민중들은 혁명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이들의 관심은 오로지 토지개혁을 향하고 있었다. 러시아 원정군 주도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빠르게 러시아의 민심을 모스크바 정권을 향해 기울게 하고 있었다. 농업 국가 러시아에 있어서 토지개혁보다 알기 쉬운 대중영합주의 정책도 또 없었다.

문제는 또 한편으로는 이 토지개혁이 러시아군과 원정군 사이에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병사들이야 농노들이라지만, 군정을 이끄는 장교들은 토지 귀족들이 아니던가? 이들에게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날강도 짓이었다.

이러다 보니 안 그래도 그리 높다고 할 수 없었던 사기가 날로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동안은 병사들이 열의가 없어서 문제였다면, 이제는 장교들과 병사들 사이의 의견이 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꼭 토지를 나눠 받았다고 해서 토지개혁에 호의적인 것도 아니었다. 토지개혁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걸 알고 난 다음에도 그저 관습적이고 맹목적으로 귀족들에게 충성하느라 토지개혁에 반대하는 이들도 절대 적지 않았다.

'이제 온 천하가 우리 대한이 원흉이라는 걸 알고야 말았으니 원···.'

어윤중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스크바 정권을 이끌어가는 장교들이 토지개혁에 그 누구보다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는데도 계속 토지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게 과연 모스크바 정권의 자의일까? 타의일까? 누가 봐도 외압이 있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다.

하물며 토지개혁뿐일까. 모스크바 군사정권은 교회와 척을 진 다음에도 교회를 탄압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들 또한 정교회 신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고문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국은 모스크바 군사정권에 엄격한 정교분리와 세속주의 도입에 기반을 둔 총체적인 체질 개선을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는 당연히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어윤중은 이제 와서 황제가 명을 거두지 않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남은 건 두 갈래 길뿐이었다. 황제의 뜻을 무시하고서 모스크바 군사정권의 의사를 존중해주거나, 황제의 뜻에 따라 모스크바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서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는 것.

어윤중의 선택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단칼에 잘라내는 수밖에."

어윤중은 뒤늦게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떠올렸다. 그에게는 쾌도난마의 고사가 더욱 친숙했지만 말이다. 애당초, 황제가 그에게 요구하였던 것은 옛 혁명전쟁 시대의 프랑스가 그러했듯이 러시아에 억지로 계몽주의 혁명을 이식하라는 것이 아니었던가. 일이 이렇게 풀리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어윤중은 그 길로 원세개를 찾아가려 했다. 군사정권을 끌어내리기 위해서는 군사력이 필수적이라 판단한 까닭이었다.

그의 마차를 멈춘 것은 전혀 뜻밖의 행렬이었다.

"러시아를 사유화하려는 군부 정권 물러가라! 군부 독재 타도하자!"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반동주의적 행보 분쇄하자!"

"민중에게 영광 있으라! 러시아 만세! 민중 계몽 만만세!"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어윤중은 아연실색했다. 붉은 광장 가득히 한 무리의 군중이 모여 구호를 외치고 있던 것이다. 어림짐작으로 1,000명은 족히 될 법한 인파였다. 사실 러시아어에 그리 능통하지 못하던 어윤중으로서는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또렷이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그들이 어떤 성향의 군중인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 세상에 붉은 깃발을 휘두를 곳이 어디 둘씩 있을까. 어윤중은 한눈에 그들이 사회주의자들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세세하게 분류하자면 인민주의자라느니 마르크스주의자라느니 나뉘는 모양이었으나, 골수 시장 자유주의자인 어윤중에게는 거기서 거기였고 그놈이 그놈이었다. 좌우지간 때려죽여 마땅할 종자들이라는 점에서는 하등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런 어윤중도, 지금 이 순간 그의 시야에 들어온 풍경에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저 빨갱이들이 태극기를 휘두르고 있다는 말인가!"

어윤중은 소리 질렀다. 기뻐서라기보다는, 기겁했다는 게 더 정확했다. 만리타향에서 시뻘건 적기 바로 옆에서 태극기가 함께 펄럭이고 있으니 그보다 끔찍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태극기를 불태우기 위해서 꺼내온 거라면 이해하기 쉬웠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붉은 광장에 모인 시위대는 적기와 함께 태극기를 나란히 휘두르고 있었다. 어윤중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린다는 걸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윤중 스스로 미하일이 보는 앞에서 인민주의자들과 생각했던 것보다 접점이 많았다고 말하기는 했으나, 그건 미하일을 압박하기 위해서 한 말에 가까웠지 결코 진심은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윤중은 설령 혁명 공화국을 수립해도 인민주의자들에게 정권을 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설마···.'

그제야 어윤중은 한국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떠올렸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봉건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재분배하였으며, 향촌 사회 주도의 농촌 근대화를 추진하였고, 교회 권력을 억압하여 정교분리를 실현하고자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빈민구제를 위한 기초복지를 실현하려 하고 있다.

아시아에서야 이게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경자유전 원칙에 입각한 토지개혁이야 수 세기 전부터 논의되던 문제였고, 새마을 운동을 비롯한 농촌 운동도 품앗이를 위시한 기존 향촌 사회의 변형이고, 괴력난신 배격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었으며, 빈민구제를 위한 기초복지는 구휼제도의 근대적 복원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이 모든 걸 주장하는 진영이 어디인가? 자유주의인가, 보수주의인가, 봉건주의인가? 다 틀렸다.

사회주의다.

'이 나라에서는 우리 대한이야말로 세계에서 으뜸가는 빨갱이 나라였다는 말인가!'

어윤중은 그 자리에서 뒷목을 잡고 쓰러지고 말았다.

어윤중이 이들의 친한파 성향을 어떻게든 활용해볼 마음이 든 것은, 그로부터 반나절이 지난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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