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421화 (421/530)

< 돌아가야 할 곳 >

모스크바, 차리치노 궁전.

"가, 각하! 큰일 났습니다! 고려인들이!"

"알고 있다. 본관은 온 도시가 난리가 났는데 큰일이 났다는 것 하나 모를 만큼 멍청하지 않아."

미하일은 허겁지겁 집무실로 뛰쳐 들어온 부하를 향해 매몰차게 쏘아붙였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한국의 배신이야 이미 진즉 알려지지 않았던가.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떨 이유가 있는 것일까.

제법 가까운 곳에서 총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한국군이 어느새 궁전 근방까지 진입한 것이다. 마지막 동아줄로 근위사단의 전투력을 믿어보고 싶었지만, 역시나 안으로는 폭도들이 날뛰고 밖으로는 한국 침략자들이 물밀 듯이 몰려오는 상황이니만큼 금세 밀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하일은 뒤늦게 페르토그라드과의 협상이 순탄하게 풀린 나머지 제 발밑을 미처 살피지 못한 자신의 우행을 한탄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은 다음이었다.

그는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각하! 아직 스몰렌스크에는 우군 주력군이 남아있습니다. 전황이 좋지 않으니, 잠시 몸을 피하셨다가-."

"멍청한 소리."

미하일은 코웃음 쳤다. 미하일은 서랍에서 원수봉을 꺼내 손에 쥐었다. 그가 배신한 그의 옛 주군에게서 받은 원수봉이었다. 원수봉 끄트머리에 황금으로 장식된 로마노프 황가의 쌍두독수리가 반역자를 저주하는 듯했다.

물론 기분 탓일 터였다. 이 쌍두독수리가 살아있었다면, 페름이 빨갱이들의 손에 떨어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모스크바를 떠나? 차르를 두고서 말인가, 차르와 함께 말인가? 차르를 두고 떠난다면 본관은 더는 러시아의 대원수가 아니오, 차르와 함께 떠난다면 힘을 잃은 본관은 곧 주벌당할 것이다. 본관은 죽으나 사나 모스크바와 운명을 함께할 것이다. 그 이외에 본관에게 남아있는 길은 없다."

"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각하,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넌 겁이 나거든 떠나거라. 단, 탈영하거든 서쪽으로 가라. 한때라도 그 녹슨 철 냄비로 누린내 나는 보르시를 함께 나눠 먹었던 전우가 저 빨갱이들과 붙어먹는다면 본관에게 있어서 그보다 더한 불명예가 어디 있겠느냐?"

미하일은 한마디 쏘아붙이고서는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전황은 절대 좋지 않았다. 모스크바 교외에 주둔 중이던 한국군을 다시 발견한 곳이 붉은 광장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후방 특유의 경계 소홀이라고 평할 수도 있겠으나, 지금 모스크바를 지키는 건 최정예 근위사단이다. 경계 소홀이라니 있을 수 없다.

그럼 결론은 하나였다. 군정 사령부에 내통자가 있다. 그 배신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브루실로프? 스칼론? 아니, 배신자 색출은 우선 살아남은 다음으로 미뤄도 상관없을 터였다.

"내 말을 대령하라! 대초원의 사나이에게 묫자리는 말안장 위면 충분하다!"

미하일은 고함을 질렀다. 따로 누군가를 지정하고서 내린 명령은 아니었다. 아무나 한 사람, 아직 이 궁전에서 도망치지 않고서 그의 명령에 귀를 기울일 자를 향한 명령이었다.

미하일은 궁전을 나섰다. 문을 나서니, 그의 애마가 보였다. 그 옆에는 그에게 도망치라 권하였던 앳된 청년 장교가 함께 있었다.

그건 조금 의외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도망칠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여기 대령했습니다, 각하!"

"자네,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말에 오르는 대신에, 미하일은 청년 장교에게 이름을 물었다. 그의 기대를 배신한 머저리를 위한 벌이었다.

전형적인 동양인의 모습을 한 청년은 기쁘게 미소 지으며 소리쳤다.

"라브르 코르닐로프라고 합니다, 각하!"

"그래, 라브르 코르닐로프 중위. 승마 경험은 있나?"

"물론입니다, 각하!"

"그거 잘 되었군."

주벌은 그거면 충분했다. 미하일은 획 돌아서 말 위에 올랐다. 급할 건 없었다. 지금쯤 브루실로프가 근위사단을 지휘하여 어떻게든 모스크바 함락을 단 1초라도 늦춰보려 애쓰고 있을 터였다. 미하일은 천천히 말을 몰았다. 행선지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전선이었다.

그런 그의 뒤를 쫓아 하나둘씩 말발굽 소리가 모였다. 미하일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듣는 것으로 충분했다. 둘, 다섯, 열, 스물, 쉰. 어느새 1개 중대가 모였다.

아무런 소식도 약속도 없이 홀연히 나타난, 대원수를 쫓아 모인 한 무리의 머저리들이었다.

"하여간에 죽고 싶어서 환장한 녀석들."

미하일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대원수가 멈춰 서고, 뒤따르던 병사들이 멈춰 섰다. 저기 멀리서 흑적기와 태극기를 나란히 휘두르고 있는 공산 반군이 눈에 들어왔다. 도시 구획 하나를 통째로 점거하고 있는 수백의 무장폭도는 무질서했으나,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적어도, 주포의 도움 없이 돌파를 시도할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말 안장 위에서 죽을 역적이야 한 놈이면 충분하지 않겠나? 명령이다. 다들 서쪽으로 도망쳐라. 실수로라도 동쪽으로 도망치지는 말도록. 방향을 착각하는 머저리는 본관이 친히 즉결심판을 내려주겠다."

미하일은 짐짓 젠체하며 말했다. 뒤에서 돌아온 대답은 낄낄거리는 웃음소리였다. 죽음의 공포보다도, 방금 대원수의 농담이 우스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머저리들은 웃었다.

미하일도 따라서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비로소 이쪽을 발견한 것인지 무장폭도들은 허둥지둥하기 시작했다. 전방경계의 기본도 안된 녀석들이라고 미하일은 비웃었다. 피차 경계에 실패한 처지에 남 말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미안하구나! 제군들도 잘 알다시피 본관이 준비성이 부족하여, 제군들을 가슴 뛰게 할 연설 같은 건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미하일은 허리춤에서 기병도를 뽑아 들었다. 그와 함께 기백의 병사들이 함께 검을 뽑아 들었다. 무장폭도들은 아직도 미처 방진을 가다듬지 못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건물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면 상대하기 불편했을 것을, 당황한 나머지 그런 발상도 미처 못하고서 얼기설기 만들어진 바리케이드 뒤에 몸을 숨기기에 바빴다.

푸르륵, 하고 그의 애마 타타르가 울부짖었다. 패잔병을 마주한 군마는 유약한 초식동물 따위가 아니었다. 전사와 함께 오합지졸들을 짓뭉개고 그 피와 살을 마시기를 즐기는 맹수였다.

미하일은 하늘 높이 그의 기병도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하지만, 말 위에서 태어난 기병이 말 안장 위에서 죽겠다는데 무슨 그런 거창한 이유 같은 게 필요할까!"

"만세!"

"대원수 각하 만세!"

병사들은 소리 높여 만세를 외쳤다. 폭도들은 그 기세등등한 모습에 이미 기가 죽어 하나둘씩 뒤돌아서서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하일은 그들이 무사히 동쪽으로 도망칠 수 있도록 가만히 보고만 있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노라!"

미하일은 우렁차게 소리치며 있는 힘껏 애마의 궁둥짝을 두들겼다. 그거면 충분했다. 한발 먼저 내달리기 시작한 대원수의 뒤를 쫓아, 기백의 전사들이 질풍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폭도들은 감히 그들에게 맞설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들은 단숨에 사기가 꺾여 뒤돌아서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간헐적으로 총을 쏘며 저항하는 용기 있는 이들도 있었으나, 생전 처음 총을 잡아보는 듯 그 조준은 형편없이 빛나가기 일쑤였다.

미하일은 질풍처럼 내달려 개중 하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하고 기분 좋은 손맛이 오른손을 스치며 자신이 죽었는지도 모른 채 얼빠진 얼굴을 하는 폭도의 수급이 허공을 나뒹굴었다.

"크하핫-!"

미하일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가슴이 다 뻥 뚫리는 듯했다. 비로소 살아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말안장 위에 앉아, 말과 함께 질풍처럼 전장을 내달리며, 용맹하게 적과 맞서 싸운다. 대초원의 사나이에게 그보다 보람찬 삶이 또 어디에 있을까.

새삼스레, 그간의 세월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무엇 하러 그토록 페트로그라드에, 모스크바에 매달려 있었을까. 이런 답답하고 꽉 막힌 도시는 기병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그가 돌아가야 할 곳은 언제나 한 곳,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초원이었다.

"각하! 고려인들입니다! 고려 기병대입니다!"

그때였다. 청년 장교의 앳된 비명이 고막을 간질였다. 고개를 들어 정면을 올려다보니, 과연 그 말대로 한 무리의 기병대가 이쪽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칠흑의 제복에, 만주 팔기를 흉내 내 부대마다 다르게 형형색색의 안옷을 기워입은 기병들. 의심할 여지 없이 한국의 기병들이었다. 이리도 금방 대응에 나선 걸 보면, 우연하게도 동선이 겹친 모양이었다.

장교는 겁을 먹은 듯했다. 너무나 금세 모습을 드러낸 한국 기병대의 모습에 그나마 실낱같던 승산마저 꺾이고 말았다며 동요하는 것이다.

"그래, 본관도 비록 노쇠하였으나 아직 눈이 멀지는 않았다! 보인다! 보이는구나! 우리의 배다른 형제들이 본관의 눈에 이리도 또렷하게 보이고 있도다!"

그러나 미하일은 겁을 집어먹기는커녕 환호성을 질렀다. 상성이 좋지 않게도, 저 시야 너머에서 달려드는 기병들은 창기병이었다. 정면 승부는 무모했고, 이럴 때는 자리를 피하거나 건물에 숨어들어 벽을 방패 삼아 기병총으로 하나둘씩 정리하는 것이 정석이리라.

"깃대를 이리 다오!"

하지만 미하일은 도망칠 생각이라고는 추호도 없었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실컷 만끽하고 있었다. 그는 부러진 부대기를 들어 정면을 향해 겨누었다. 보통의 창보다도 배는 기다란 깃대는 과거 기사들의 시대에 기사들이 꼬나쥐었다는 란스처럼 보였다. 깃발의 무게 탓에 휘어진 게 흠이었지만 말이다.

미하일은 망설임 없이 부대기를 뜯어냈다. 부대기를 뜯어내고 나니, 이제는 앙상한 깃대만이 남았다. 올곧고, 뾰족한 란스였다. 미하일은 하늘 높이 부러진 깃대를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모스크바의 시민이여, 보라! 이 창이야말로 제국 기병대의 기상이오, 긍지일지라!"

당연하지만 그가 소리 지른다고 창문 바깥을 내다보는 멍청한 이는 없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랴. 미하일은 있는 힘껏 고삐를 당겼다. 저 시야 너머의 적 기병대가 어느새 서로의 얼굴을 또렷이 알아볼 수 있을 거리까지 접근해 있었다.

"러시아 만세! Ура! Ура! Ура――!"

미하일은 고함을 내지르며 정면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그가 표적으로 삼은 것은 그가 살아온 세월의 반의반도 살아오지 못했을 앳된 얼굴의 청년이었다. 미하일은 청년을 똑바로 노려다 보았고, 청년은 대원수와 미처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였다. 그는 당장 이 광기의 현장에서 도망치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청년의 애마는 공포에 질린 주인에게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그저 정면을 향해 달리고 달렸다. 서로 노려다 보고서 있는 힘껏 내달린 두 군마가 머리를 맞부딪히는 데에는, 불과 2초도 필요하지 않았다.

미하일이 있는 힘껏 내지른 깃대는, 청년의 복부를 관통하고 다시 말의 엉덩이를 관통해 바닥에 내리꽂혔다. 그 충격에 미하일의 오른팔도 함께 부러졌다.

"커, 커억···."

그러나 미하일에게 승리를 기뻐할 시간은 없었다. 충돌 순간의 충격에 말고삐를 놓친 미하일은 그대로 공중으로 솟구쳐 세 바퀴를 회전한 다음 바닥에 내팽개쳐져 다시 다섯 바퀴를 굴렀다. 그는 숨이 허파에 머물지 못하고서 새어나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가슴부터 바닥에 처박혔으니 그야 갈비뼈가 멀쩡할 리가 없었다.

피가 흘렀다. 하염없이 흐르는 피가 시야를 조금씩 가리고 있었다. 바닥을 나뒹굴면서 뭉개졌는지 왼눈은 보이지도 않았다. 하염없이 좁아지고, 흐릿해져 가는 반쪽짜리 시야에는 낯익은 사물이 가득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흙먼지로 더럽혀진 러시아 제국의 쌍두독수리 깃발이었다.

"···쿨럭!"

미하일은 피를 한 움큼 토했다. 의식이 멀어지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온다는 죽음이 이제는 그에게 찾아오고 있었다. 미하일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서 걸레짝 같은 몸뚱어리가 깔고 뭉갠 쌍두독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미하일은 두 번 다시 움직이지 못했다.

* * *

붉은 광장은 그 이름대로 근위병과 시민군이 흘린 피로 흥건했고, 그 피바다의 끝에는 크렘린궁이 있었다. 한때 러시아의 심장이었던 곳이자, 이제는 차르를 가두기 위한 창살 없는 감옥이 되었던 곳. 그 크렘린궁도 전화의 피바람에서는 미처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끝이었다. 더는 크렘린궁에서 총성은 울려 퍼지지 않았다. 그리고 본래라면 쌍두독수리가, 그렇지 않다면 검 황 백 삼색기가 휘날려야 할 그곳에, 오늘은 태극기와 흑적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맨몸으로 한 무리의 낯선 병사들과 마주해야만 했던 알렉산드르 3세까지 포함하여 말이다.

"무엄하오. 짐은 이 나라의 유일무이한 차르요. 아무리 이국의 장군이라고 한들 한 나라의 황제를 함부로 다루는 예법은 들어본 바가 없소. 경의를 표하도록 하시오."

그런데도 알렉산드르 3세는 황제의 정복을 가지런히 차려입고서 당당히 맞섰다.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한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등지고선 그의 피붙이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추태를 보여줄 수는 없었다. 공포에 떠는 그의 피붙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알렉산드르 3세는 시종일관 당당한 모습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리고 -스스로 입에 담기에도 비참한 일이지만- 과연 그가 비굴하게 살려달라고 목숨을 구걸한다고 한들 과연 눈앞의 침략자들이 그를 동정하여 목숨만은 건질 수 있도록 해줄까? 아마 그렇지 않을 터였다.

알렉산드르 3세는 자꾸만 좁아지려고 하는 어깨를 있는 힘껏 펼쳤다.

"당장 총을 거두도록 하시오. 내 비록 귀국의 예법에 대하여는 미처 알지 못하나, 한 나라의 군주에게 총을 겨누는 것이 올바른 예법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소. 어서 예를 갖추시오."

"군주?"

장군은 코웃음을 쳤다. 장군은 여전히 차르 일가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그의 병사들을 뒤로한 채, 성큼성큼 다가와 알렉산드르 3세의 눈앞에 섰다.

그러고서, 장군은 서투른 러시아어로 말했다.

"당최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구려. 내 눈에는 백성의 고혈을 빨아 제 사욕을 채우고 민생을 파탄 낸 천하의 도적놈 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말이오."

"무엄하도다!"

"그거야말로 이 몸께서 할 말씀이시다. 이 미련한 놈아. 그게 어디 가엾은 백성을 대신하여 너를 벌하러 온 천상의 판관을 대하는 올바른 예법이더냐? 당장에 개처럼 바닥을 기며 용서를 구걸하여도 감형하여 줄까 말까 한데, 주제도 모르고서 바득바득 대는 꼴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구나."

"이놈! 이 몸이 곧 선량한 그리스도인의 수호자요, 전능하신 주를 대신하여 이 지상을 통치할 권리를 지닌 러시아의 유일무이한 차르이니라!"

알렉산드르 3세는 얼굴을 붉히며 고함을 질렀다. 이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가 패하였더라도, 이교도 장군의 태도는 도저히 한 나라의 황제를 대하는 태도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장군은 코웃음을 쳤다. 코웃음을 치고서는, 알렉산드르 3세의 목에 내걸린 황금 십자가 목걸이를 잡아 뜯어버렸다.

"이까짓 귀신이 대관절 나라를 다스리는 일과 무슨 상관이 있으며, 또 민심이 이미 돌아섰거늘 귀신의 수호에 기대어 봐야 무슨 소용이란 말이더냐?"

와그작.

장군-원세개는 그대로 황금 십자가를 바닥에 내던지고서는 군홧발로 짓뭉개 버렸다.

그는 망연자실한 알렉산드르 3세를 비웃으며 속삭였다.

"이 멍청한 것아. 천심이 너를 등졌다. 제아무리 힘센 귀신이라고 한들 너와 너의 족속을 살릴 수는 없으리라. 새로운 천하가 마침내 도래하였음을 기뻐하는 백성의 소리가 들리느냐? 저들이 너와 너의 족속들을 목매달고, 너희 조상의 묘를 파헤칠 것이다. 네가 섬기던 예수라는 귀신도 사당이 불타고 제단이 무너질 테니, 이게 다 네가 천심을 등진 까닭일지라."

"이, 이런 야만적인···!"

알렉산드르 3세는 채 말을 끝마치지도 못했다. 원세개는 군홧발로 차르의 정강이를 걷어차 부러트렸다.

와그작하는 파열음이 울려 퍼지고, 차르는 고통 섞인 신음을 흘리며 제자리에 무릎 꿇었다.

"그래, 이제야 좀 폐주답구나."

원세개는 차르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며 낄낄거리고 웃었다.

러시아 제국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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