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민주 공화국 >
"바쿠닌 동지 만세! 소렐 동지 만세! 크로프트킨 동지 만만세!"
"혁명 만세! 인민 만세! 세계혁명 만만세!"
1893년 12월 7일.
모스크바 철도노조를 중심으로 한 적위대가 앞서 한국군이 점령한 크렘린궁에 진입하였다. 이미 미하일 대원수의 시신이 한국군에 의해 발견되어 모스크바 군위사단이 투항하면서 시가전은 종식되었으나, 이로써 모스크바 정권은 공식적으로 역사책 일부로 전락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내전 자체가 인민주의자들이 혁명을 위하여 고의로 부추긴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 것을 고려하자면, 사실상 러시아 내전은 시작부터 끝까지 이들의 손에 놀아났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외세의 손을 빌려 간신히 크렘린에 입성한 표트르 크로프트킨을 맹주로 한 혁명 수반들은, 그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여 따라온 인민들이 승리의 기쁨에 취하는 동안 현실의 지엄함을 느껴야만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새로운 혁명 러시아에는 그 어떠한 권위도, 권력도 요구하지 않소. 군대라고 하여도 예외가 될 수는 없소!"
"그럼 지금의 민병대 합종군을 당신들 나라의 새로운 군대로 내세우겠다, 그 말이오?"
"그렇소! 군대 또한 직접민주제의 예외가 될 수는 없소!"
"이건 뭐 군의 ㄱ자도 모르는 샌님들 소굴이구먼. 지랄하지 마시오. 그럴 바에야 그냥 노국에서 군대를 없애고 말지, 그따위 머릿수 채우기도 안 될 홍건적을 동맹군으로 인정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소."
채 하루가 되기도 전에, 원세개를 위시한 한국 장교단과 혁명 수반들은 새로운 러시아의 군대를 두고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크로프트킨을 위시한 혁명 수반들은 그들이 지향하는 지방분권 직접 민주주의 체제를 새로운 러시아의 군대에도 고스란히 이식하려 했으나, 한국 장교단은 이를 한마디로 거부했다.
한국군의 시선으로 보기에 그들의 협력자들이 목표로 하는 새로운 러시아군은 그냥 19세기에 끄트머리에 재등장한 홍건적이었다. 뚜렷한 명령체계도 없고, 같은 깃발을 내걸고 있다는 걸 제외하면 서로 이렇다 할 연결점도 없으며, 현지 노조 내지는 향촌 사회의 명사들을 장교랍시고 추대하고서는 직접 민주주의라는 핑계로 입방아 찧기에나 바쁜 홍건적 말이다.
결국, 원세개가 직접 「그럴 바에야 러시아군을 해체하고 말겠다」라고 통보한 다음에야 인민주의자들은 항복을 선언했다. 현실적으로, 한국군의 도움 없이 페트로그라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란 어려울 것이라는 걸 그들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끝이 아니었다.
"직접 민주주의라면서 자유주의를 금지하겠다는 건 퍽 우습구려. 분명 신도 없고 주인도 없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와서 멋대로 자본주의도 자유주의도 금지해 버리겠다니. 그대들이 바로 그 신과 주인이구려."
"표를 세는 것까지 지방의 자율에 맡기겠다니 제정신이오? 진지하게 묻겠는데, 그대들은 지방에 몇이나 되는 백성이 사는지 알고는 있소? 그들이 멋대로 수를 늘리거나 줄여서 보고하면 그걸 파악할 방법은 있고?"
"전시경제를 지방의 자율에 맡기겠다니 제정신이 아니구먼. 솔직히 말하리다. 이건 지방의 자율을 보장하는 일이 아니오. 중앙이 책임을 지방에 떠넘기는 거지! 나보고 관료제에 전 책상물림이라고 뒤에서 수군덕거리는 거야 잘 아는데, 하다못해 단 하루라도 이 빌어먹을 책상 앞에 앉아 봤으면 이런 멍청한 소리는 할 수 없었을 거요!"
원세개가 새로운 러시아군과 지휘권을 두고서 혁명 수반들과 다투었다면, 어윤중은 혁명정부의 수립 과정에서 끝없이 개입하였다. 그나마 원세개는 그의 소관인 군문에 관해서만 관심을 보였지만, 어윤중은 달랐다. 그는 애당초 황제의 명을 받아 러시아를 번듯한 동맹국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나키즘에 근간한 지방분권 직접민주제를 지향하는 인민주의자들과 유교적 관료주의 전통에 근간한 중앙집권에 익숙한 어윤중을 위시한 한국 고문단은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특히 이 한국 고문단 대다수가 어윤중을 따라온 현장실무진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이들은 혁명정부의 좌충우돌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조차 견디기 어려워했다. 나라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책임져줘야 하는 보모 국가에서 파견 나온 이들에게 중앙의 역할을 최소화하여 사실상 지워 없애려는 혁명정부의 갖은 노력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끔찍한 것들이었다.
"「나는 우리의 사명이 노국을 대한의 번국으로 만드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틀렸다. 우리의 사명은 노국을 지도에서 지워 없애려는 작자들에게서 노서아를 지켜내는 일이었다.」"
이 한국 고문단에 참여하였던 이경호라는 이름의 젊은 관료가 자신의 일기장에 서술한 내용은 한국 고문단이 이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어윤중은 모스크바가 혁명정부의 손에 떨어지는 바로 그다음 날부터 원세개에게 협력을 요청하여 15사단으로 하여금 모스크바 정권 아래에서 일하고 있던 러시아의 모든 행정관료를 호위하도록 하였다.
혁명 정부에게 이들은 독재자에게 부역한 끄나풀이자 혁명 이후 가장 먼저 사라져야 할 관료주의에 물든 반동분자들이었으나, 고문단에 이들은 모스크바의 실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행정인력이자 한국에 목줄이 잡힌 최고의 협력자들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혁명정부도 치워버리고 이들 관료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렇게 한국에서 그들의 안전을 보장한 다음에야 행정관료들의 모스크바 탈출 시도도 우선은 잦아들었다. 물론, 보호를 명분으로 착 달라붙어 바깥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눈을 부라린 탓도 있었다. 그런데도 혁명 초기의 혼란기 동안 모스크바는 30% 이상의 행정관료가 도시를 탈출하며 끔찍한 행정혼선을 경험해야만 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세수통계? 인구분포도? 징집표?"
"부탁합니다. 제발 우리 가족들에게도 저와 같은 보호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발 이렇게 부탁합니다!"
스스로 남은 것이건, 한국군의 감시 탓에 붙들린 것이건 모스크바에 남은 러시아의 행정관료 집단은 그 누구보다 절박하게 한국에 매달렸다. 만일 한국에서 호위를 위하여 군대를 배치하면서까지 그들을 지켜주지 않았다면 당장에 목이 날아갔을 처지였으니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
이는 모스크바의 교회와 귀족들이 한국에 돌아섰다는 이야기였다. 러시아 제국의 행정을 지탱하는 것이 바로 교회와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무사히 모스크바를 탈출한 이들이라면 모를까, 모스크바를 탈출하지 못하고서 남은 이들에게 살길은 한국에 협력하여 쓸모를 증명하는 길뿐이었다.
당연하지만, 이는 혁명정부의 적폐청산을 한국 고문단이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가로막았다는 이야기 또한 되었다.
"한국인들은 동쪽으로 돌아가라!"
"우리는 한국에 사사건건 간섭당하기 위해서 혁명에 투신한 것이 아니다!"
"혁명 만세! 자주독립 만세!"
혁명이 끝난 지 채 일주일이 되지 않아 한국 고문단과 인민주의 정권의 관계는 빠르게 냉각되어 갔다. 혁명정부가 의욕적으로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고자 나서면, 한국 고문단은 여러 이유를 들어 퇴짜를 놓았고 그것이 번번이 반복되었다. 동쪽에서 온 친구들을 칭송하는 목소리는 금세 사그라졌고, 혁명에 사사건건 퇴짜를 놓는 한국을 향한 불만이 누적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누군가에게 강한 적의를 심어주는 조치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강한 호의를 심어주는 법이었다.
"인민주의자들은 인간 개인의 의지라고 하는 비유물론적이고 봉건주의적인 개념을 추앙한 나머지 간신히 태어난 우리의 새로운 사회주의 조국을 갈가리 찢어놓으려 하고 있다! 당장에 러시아의 절반도 손에 거머쥐지 못한 우리 혁명정부가 내전에서 승리할 길은 오로지 단결하는 것뿐이다!"
"인민주의자들은 혁명을 지지하는 인민들이 과반수라는 착각에 빠져있다. 이보다 멍청한 착각이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여전히 소수다. 혁명을 지지하는 인민은 한 줌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의 적들은 아직도 너무나 강대하고 거대하다! 이처럼 비참한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 독재뿐이다!"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를 위시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바로 그러한 이들의 대표격이었다. 이들은 인민주의자들과는 다르게 한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에 호의를 드러냈다기보다는, 한국이 러시아 혁명정부에 개입하는 방향에 호의를 드러냈다.
이들은 규모에는 인민주의자들의 절반도 되지 않았고, 혁명에서 이바지한 바도 대단하지 않았으나 인민주의자들과는 정반대로 중앙집권을 긍정했기에 어윤중을 위시한 한국 고문단의 예쁨을 받았다. 어차피 인민주의자건 마르크스주의자건 제정을 부정하는 역도들이라는 점은 똑같았으니 차별할 이유도 없기도 했다.
그렇게 한국 고문단의 지지가 더해지면서 비로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스크바 혁명정부에서 자신들의 지분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서쪽으로 도망치는 대신에 모스크바에 남은 일부 러시아 장교들이 민병대 전통을 밀어붙이려는 인민주의자들에게 등을 돌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노동해방당에 합류하면서 자체적인 군사력을 얻자 더는 꺼릴 것도 없었다.
그리고 일부의 예외로 간주 되었으나, 혁명정부에는 극소수지만 자유주의자나 보수주의자도 포함되었다. 한국- 보다 정확히는 어윤중이 억지로 끼워 넣은 이들은 혁명정부의 주류에서 괴리된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였지만, 바로 그렇기에 누구보다 한국에 협력했다. 한국의 보호 아래에 놓여있었던 모스크바의 행정관료들은 이들 우파 세력의 대표격이었다.
"러시아 민주 공화국 인민민주주의 만세! 세계혁명 만만세!"
그리하여 인민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 우파 세력의 불안 불안한 연립정권 아래 러시아 민주 공화국(Русская 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이 수립되었다.
직접 민주정, 지방분권, 협동조합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표방한 이들 러시아 민주 공화국은 베를린 코뮌 이래로 세계에 모습을 드러낸 두 번째 사회주의 국가였다.
그리고 같은 날 붉은 광장에서는 차르를 위시한 모스크바 군사정권에 부역한 주요 정부 수반들의 공개총살이 이루어졌다. 한쪽에서는 인민의 승리를 축하하며 인터내셔널가를 부르짖고, 한쪽에서는 차르의 영혼이 구원받기를 기도하는 찬송가를 부르짖는 어수선한 환경 속에서도 형의 집행은 곧바로 이루어졌다.
최후의 순간, 알렉산드르 3세의 유언은
"아버지 조국이여, 영원하여라!"
였다.
그것이 동정을 사기 위함이었는지, 왕정주의자들을 결속시키기 위함이었는지는 몰라도 적위대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지지자들의 외마디 비명을 배경 삼아 폭군은 수십 발의 총탄에 벌집이 되어 무릎을 꿇었고, 그렇게 공식적으로 모스크바 군사정권이 소멸하고 러시아 민주 공화국이 국제사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알렉산드르 3세에게 있어서 다행이었던 사실은, 구체제의 상징으로서 목숨을 잃은 그와는 다르게 그의 가족들은 이제 드문드문 선로가 운행되기 시작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하여 한국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은 그들을 노서아 황조의 후예로 융숭히 대접하였고, 니콜라이 황태자에게 연해주 북쪽에 작은 마을 하나를 내려 대대로 그곳에 거하며 조상에게 제례를 올릴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과연 그러한 배려가 고향을 억지로 떠나 한국에서 인질로 잡힌 니콜라이 황태자에게도 기쁜 일이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혁명정부에서는 본래 일가를 몰살하거나 노동 교화를 강제할 작정이었으니 그나마도 감지덕지해야 할 처지였다.
"타타르인들이 사회주의 역도들을 내세워 아버지 조국을 짓밟으려 하고 있다! 타타르인들이 우리에게 심어준 멍에는 한 번으로 충분하다. 자랑스러운 러시아의 자식들이여, 모여라!"
러시아 민주 공화국의 등장은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유럽 전역에 걸쳐서 크나큰 파문을 일으켰다. 우선 말할 것도 없으나, 대립 황제가 처형당하면서 이제는 정식으로 러시아 제국이 된 페트로그라드 정권은 이에 기함하며 사회주의에 맞선 성전을 선포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스몰렌스크에 주둔하고 있던 모스크바군이 대거 제국군에 합류하자 전 전선에 걸쳐 제국군이 강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야로슬라블에서 스몰렌스크, 다시 보로네슈를 걸쳐 볼고그라드까지 이어지던 기나긴 방위선이 한 번에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는 러시아 제국에 머지않아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품게 하였고, 12월 12일부터 열흘간에 걸친 대공세를 펼치게 하였다. 사전에 계획되지 않았던, 러시아 공화국이 자멸하고 있다는 확신하에 경솔하게 시작된 공세였다.
"아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요! 저 역도들은 이미 무너지고 있소. 이대로 쳐들어가서 가볍게 걷어차기만 해도 저 볏짚으로 지은 집은 손쉽게 무너져내릴 거란 말이오! 승리를 눈앞에 두고서 후퇴라니,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요!"
"빌어먹을, 우리라고 그걸 모를 것 같소? 탓하려거든 우리가 아니라 영국인들을 탓하시오. 제국에는 더는 러시아를 지원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이오!"
그리고 열흘에 걸친 대공세는 비참한 실패로 돌아갔다. 가장 큰 이유는 경솔한 공세와 턱없이 부족한 준비였겠지만, 러시아 제국의 동맹군이었던 신성로마제국군이 일제히 러시아에서 물러나기 시작하면서 전선에 구멍이 숭숭 뚫렸기 때문도 만만치 않았다.
이는 다름 아닌 2차 영미전쟁의 종전 덕분이었다. 프랑스와의 전쟁도 마무리 협상작업만 남아 있을 뿐이고, 미국과의 전쟁도 끝이 나자 영국은 가장 먼저 지중해와 북해의 안전을 위하여 프로이센과 이탈리아를 지원해 신성로마제국을 공격하는 데에 집중하였던 것이다.
보헤미아를 손에 넣은 것만으로 기진맥진하여 전쟁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고뇌하던 프로이센군은 시티 오브 런던에서 프로이센의 전쟁 국채를 마구 사들이기 시작하자 빠르게 힘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 반대로, 신성로마제국은 이제 라인란트를 향해 군침을 삼키고 있는 프랑스의 야욕까지 우려해야만 했다. 당장에 본국이 외침으로 위협받는 마당에 러시아에 국력을 낭비하는 건 사치였던 것이다.
"푸하핫! 정말이지 예뻐 죽겠구먼! 어찌 저렇게 기특할 수가 있을꼬? 대관절 저 참호를 어찌 뚫을까 고민하던 차에 알아서 참호에서 뛰쳐나와 주다니! 이제 더는 우리 군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결국, 제국군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들은 모스크바군이 붕괴하고 있다는 사실에만 주목해 아주 합종군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말았고, 그들의 동맹군이 후퇴하는 가운데 뚜렷한 공세계획 없이 무턱대고 모스크바를 향한 대공세를 시작하면서 각 부대가 유기적으로 협력하지 못하고 공격명령에 따라 산발적으로 돌격하여 제각각 적진 한복판에서 고립되는 최악의 결말에 도달했다.
그럼 남은 건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해 내는 데에 성공한 아주 합종군의 반격만이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원세개는 그의 지휘 아래로 들어온 노농적위군을 내세워 고립된 각 부대를 말려 죽였고, 그동안 아주 합종군은 방어병력이 사라진 텅 빈 방위선을 신속하게 돌파하여 남쪽을 향해 진격했다.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 일부나마 방어병력을 남겨둔 페트로그라드를 위시한 북부 전선과는 달리, 키예프와 캅카스를 위시한 남부 전선은 경솔한 대공세로 여유 병력을 모두 소진하였음을 꿰뚫어 본 것이다.
"나약한 농부들아, 공포에 떨어라! 몽골이 돌아왔도다!"
대단히 공교롭게도 최선두를 차지한 제2 몽골 기병사단이 도네츠크에 다다른 것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