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430화 (430/530)

< 에조치(蝦夷地) >

어째서 하필이면 홋카이도 남단 마쓰마에 번에서 처음으로 식량농업기구를 끌어들였는가를 설명하자면, 여기에는 이 무렵 개척이 한창 이어지던 홋카이도에 대하여 설명해야만 했다.

본래 역사에서, 메이지 정부는 홋카이도를 개척하기 위하여 토착 아이누들을 인간과 유사하게 생긴 날짐승 즈음으로 규정하여 그들의 권리를 박탈하였으며 그들의 토지와 재물을 빼앗아 홋카이도 개척을 위하여 찾아온 일본인들에게 분배하였다. 이는 메이지 정부가 메이지 유신 이후로 새롭게 태어난 일본 제국을 근대적 국민 국가로 규정하였던 까닭에, 「일본 민족」이 아닌 아이누를 배척하는 것이 당연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의 황제에게서 책봉을 받아 일본국의 국왕이 된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다스리는 도쿠가와 정권은 그들의 정체성을 근대적 국민 국가로 규정지은 바가 없었다. 이 무렵 일본의 정체성은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나 근대적 국민 국가라기보다는 봉건적 귀족국가에 더욱 가까웠다. 따라서 이들에게 「일본 민족」이라는 개념은 사뭇 낯설고, 꺼려지는 개념일 수밖에 없었다.

민족주의를 이식하게 될 경우, 고분고분한 신민이었던 백성이 어느 순간 참정권을 요구하는 당당한 시민계급으로 성장하지는 않을까 우려하였던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일본국의 민족주의적 정체성을 희박하게 만들었으나, 홋카이도 개척에서 토착 아이누들에게 일종의 관용을 베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구태여 저 오랑캐들을 토벌할 이유가 무엇인가? 저들이 에도에 계신 전하께 충성을 다하고 일본국의 충용무쌍한 신민이 되고자 자처한다면, 우리가 일부러 저들을 멸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본관은 노서아가 시비련 동토를 개척할 적에 그러했듯이, 저 오랑캐 부족장들을 마쓰마에 가문의 가로로서 받아들이고자 한다."

말하자면, 도쿠가와 정권의 홋카이도 개척은 근대적인 식민지 개척과 국민 국가의 영토확장이라기보다는 전통적인 야만족 교화와 봉건주의적인 영토확장의 성격을 가졌다. 도쿠가와 정권은 자신들의 통치에 저항하는 아이누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으나, 개척에 협력하는 아이누 부족의 지도자에게는 사무라이 계급으로 편입될 기회와 그들 부족을 영민으로 삼아 봉토를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이 경우 해당 아이누 부족장은 일본식 성씨를 마쓰마에 번의 번주에게서 하사받고 일본의 풍습을 받아들이도록 강제되었으나, 그 대신 주군의 보호와 지원을 받으며 이웃 부족들을 침략- 병탄하며 영지를 늘릴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다름 아닌 변경 개척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말이다. 이는 근대적 민족의식이나 동족의식이 희박하던 현지 아이누 부족들이 앞다투어 동포들을 배반하게 하였다.

결과, 개척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 지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 홋카이도의 70%에 달하는 지역은 일본화된 아이누계 영주들의 지배하에 들어와 있었다. 실제로는 나머지 30%에 홋카이도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주거하고 있는 등 사실상 텅 빈 변경을 나눠준 것이었으나, 어쨌건 간에 이들은 어엿한 사무라이였으며 일본국의 지배계급 중 하나로서 존중받았다.

"에도는 멀고, 마쓰마에는 가깝다."

"하코다테에서 샌프란시스코 보다, 하코다테에서 사쓰마가 더욱 멀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홋카이도와 혼슈 사이에 묘한 분리의식이 싹텄다는 점이었다. 개척이 막 시작될 무렵만 해도 이는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일본국에서도 홋카이도는 본래 그들의 영토가 아닌, 앞으로 개척해야 할 영토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0여 년이 지나 이제 점차 통합의 순서를 밟아야 할 때도 이 모양이었으니 문제가 된 것이다.

가장 큰 문제점은 도쿠가와 정권을 주도하는 전통적인 귀족층과 민간의 인식이 크게 엇갈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 무렵까지도 도쿠가와 정권의 귀족층에 중요한 건 혈통이었다. 요컨대, 고귀한 피인가 그렇지 않는가였다. 따라서 본래 아이누 오랑캐였다고 하여도 사무라이로서 주군에게 도검을 하사받고, 다른 고귀한 피들과 피를 섞으면 차별의식이 전혀 없지는 않더라도 겉으로는 사무라이로서 존중하였다.

반면에 이 무렵 일본의 민간에서는 조금씩이지만 근대적 민족주의가 싹트고 있었다. 민간 교육을 주도하던 지식인들부터가 조선을 뒤따르자며 백성에게 민족주의를 이식하는 데에 적극적이었으니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 범 아주 조약기구를 통한 활발한 교류는 이들의 민족주의를 더욱 심화시켰다.

"어째서 조선인들은 여름철에도 훈도시를 입고 다니지 않는 거지? 한여름에 덥지도 않은 건가?"

"왜 만주인들은 계집아이도 아니고서 머리를 땋고 다니는 건가? 저들에게는 저게 멋있게 보이는 건가? 도대체 왜? 이해할 수가 없군!"

"지나인들은 물을 차게 먹는 법이 없군. 쳇, 주는 대로 받아마실 것이지 까다롭기는. 왜 우리 일본에서까지 저들의 풍습을 고집하는 거지?"

범 아주 조약기구가 주최하는 체육대회와 예술전, 학술적 교류와 경제적 교류 등은 일본의 평민들에게 이웃 국가들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그리고 이렇게 외국의 문화를 접할 때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과 이들 나라가 「다르다」라는 것을 자각하게 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들과 다른 나라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다르다는 고찰로 이어지는 순간, 이는 「일본 민족」을 스스로 규정짓게 하였다.

문제는, 이들이 무자각 중에 규정지은 일본 민족의 특징에 새롭게 일본국에 편입된 이들 아이누인들은 조금도 맞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자연히, 이들 아이누인들은 아무리 도검을 하사받고 성씨를 받아 일본의 사무라이가 되었다고 하나 어쩔 수 없는 「이민족」일 수밖에는 없었다. 이러한 분리의식은 자연스레 멸시와 배척으로 이어졌다.

설령 일본의 풍습을 받아들이고 일본의 귀족이 되어 위풍당당이 혼슈에 입성하여도, 백성은 그들을 외면하였으며 아슬아슬하게 불경법을 거스르지 않는 수준의 공경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아이누계 사무라이들이 발전된 일본의 문물을 동경하여 혼슈로 이주하였다가도, 이내 머지않아 크게 실망하여 홋카이도로 돌아가 버리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나는 태어나서 단 한 차례도 에도- 아니, 야마토 인들이 혼슈(本州:본토)라고 부르는 땅에 가본 적이 없다. 나는 이 에조 땅에서 태어나 자랐고, 마쓰마에 성에 계신 주군께 충성을 다하며 살아갈 것이다."

"일전에 주군을 따라 혼슈에 가본 적이 있다. 에조에서와는 다르게, 나는 허리춤에 도검을 차고 있었음에도 단 한 번도 사무라이로서 상인들에게 존중받지 못하였다. 그때에야 나는 에조와 이 땅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혼슈의 존중은 언제나 말뿐이다. 우리가 사무라이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이 에조 땅뿐이다. 오직 이곳에서만 우리는 도검을 찬 당당한 사무라이로서 존중받을 수 있다."

일본인들이 주변국들과의 문화교류로 자신들이 주변국과 다르다는 것을 자각하여 민족의식에 눈떴듯이, 이들 아이누인들은 일본과 자신들이 다르다는 것을 자각하며 민족의식에 눈떴다. 그간 자신들이 그토록 본받으려 노력하였고 일부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일본을 향한 동경이 오롯이 자신들만의 짝사랑이었음을 자각하며 분노하게 된 것이다.

도검을 패용하고 다니는 사무라이들조차 은근히 무시를 당하는 마당에, 보통의 아이누에 대한 혼슈의 차별대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 점은 홋카이도에 이주한 일본계 주민도 처지가 엇비슷한 상황이었다. 이유는 우습게도, 홋카이도로 이주하여 저급한 아이누들과 피를 섞으면서 피가 혼탁해졌기에 자신들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아이누와 일본인의 주거지는 엄연히 분리된 경우가 많았음을 생각하면 이는 순전히 누명이었다.

이렇다 보니, 이 무렵에 와서는 더는 홋카이도의 주민은 자신들을 '홋카이도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들은 흔히 '에조인'이라고 자칭하였고, 홋카이도인라고 그들이 그들 자신을 자칭할 때는 공문서에 출신지를 기재할 필요가 있을 때뿐이었다. 이때마저도 일부 과격파는 홋카이도라고 쓴 다음 그 밑에 에조라고 작게 적어놓으면서 그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강조하였다.

"과인이 근래에 천하의 대업을 돌보는 데에 바빠 미처 북방의 일에 신경 쓰지 못하였던 것 같다. 오늘날 변경의 백성이 조정에 크게 실망하였다고 들었으니, 각료들은 그 대책을 논하도록 하라."

당연하게도, 요시노부 또한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마쓰마에 번에서 본격적인 이반의 움직임을 보이기 전부터 에도의 조정은 세금을 감면하거나 학교를 비롯하여 개척에 필요한 시설들을 세우며 홋카이도의 민심을 달래고 불경법을 엄격히 적용하여 아이누계 사무라이들이 백성의 존중을 받도록 하며 지역 차별을 줄여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조치가 혼슈의 백성에게는 도쿠가와 정권이 아이누들을 끼고 돈다는 불만을 품게 하여 더욱 아이누들에게 울분을 토해내게 하였고, 에조의 백성에게는 사건이 터진 다음에야 입을 막으려 수를 쓰고 있다며 냉소하게 하였다는 점이었다. 애당초 이런 민족적 갈등에 능숙히 대처하기에 일본 정부는 지나치게 구시대적이었으며 경험도 턱없이 부족했다.

이렇게 에도의 중앙정권이 초동 대응에 실패하면서, 공은 홋카이도에 영지를 둔 지번사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강한 번인 마쓰마에 번에 넘어갔다. 그러나 이 마쓰마에 번의 지번사인 마쓰마에 나가히로는 처음부터 이 민족갈등을 수습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이 에조 땅이 독립된 하나의 나라로서 세계만방의 공인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왔다고 생각해보자. 이를 위하여 가장 필요한 이들은 누구일까? 당연히 아이누인들이다. 일본인을 내세우면 이는 지배계층 간의 권력다툼이 되나, 아이누인을 내세우면 이는 자신들만의 민족국가를 요구하는 약소민족의 정당한 목소리가 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이누인들 중 민족국가를 가지고자 하는 이들은 적지 않으나 그들의 새로운 나라에 얼굴이 되어줄 명망 높은 인재는 극히 드물다. 결국, 만에 하나 천에 하나라도 그와 같은 상황이 오는 순간, 이 에조 땅의 왕으로서 추대받을 가능성이 가장 큰 건 다름 아닌 본관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관은 오늘날의 갈등을 마음속 깊이 환영하고 있다!"

나가히로가 이러한 야심을 품게 된 것은 요시노부의 무리한 북방영토 매입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서 영토를 늘렸음을 내세워 위신을 드높이고 정권을 공고히 하는 건 좋았으나, 막대한 빚을 지어가며 무리하게 영토를 늘린 탓에 개척 초기에 홋카이도를 위시한 북방 변경의 번들이 개척에 필요한 중앙의 지원을 충분히 받지 못했던 것이다.

중앙 나름대로는 재정적으로 힘겨운 와중에도 어떻게든 여력을 쥐어짜 냈던 것이지만, 새롭게 봉토를 하사받아 가문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며 희희낙락하던 이들에게 중앙의 형편없는 지원은 얼핏 조롱하려는 의도로마저 비추어졌다. 이들에게 유의미한 도움이 된 것은 하코다테를 통해 들어오는 미국의 투자와 한국과의 교역, 그리고 이웃한 북방번들 간의 상호원조였다.

본토의 지번사들이 에도의 중앙정부와 힘겨루기에 눈이 돌아간 와중, 이런 환경에서 가장 큰 힘을 얻게 된 것은 북방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풍요롭던 마쓰마에 번이었다. 새로이 북방을 개척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이들은 마쓰마에 번과의 교역과 지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는 자연스레 마쓰마에 번을 북방의 패자이자 실권자로 우뚝 서게 만들어 주었다.

다시 말해서, 나가히로가 식량농업기구를 끌어들이며 독자노선을 가도록 선언한 것은 이렇게 해석될 수 있었다.

"불과 100년 전만 하여도 제아무리 천하인이라 하여도, 정이대장군이라 하여도 일국의 왕이 될 수는 없었다. 그 위에 천조대어신의 직계자손이라는 만세일계의 천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 천황은 일개 제사장으로 전락하였고, 정이대장군이 일본의 왕이 되었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고맙기 그지없게도 이제 일국의 왕이 되려면 필요한 것은 단 두 가지뿐이다.

조선 황제의 책봉과 본관을 왕으로서 섬기고자 하는 충용스러운 백성들. 본관은 머지않아 이 두 가지 모두를 손에 넣어 새로운 나라- 대 에조국의 왕이 될 것이며, 이번 일은 조선 황제의 책봉을 받기 위한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이 돌발적인 사태에 에도는 물론, 한성까지 발칵 뒤집혔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순서였다.

* * *

대한제국, 한성.

"이 시국에 친서라니,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야."

이형은 각료들이 보는 앞에서 코웃음을 쳤다. 조금 전 이형에게 일본국의 변함없는 충성심을 봐서라도 중립을 지켜달라고 거듭 당부하며 비굴할 만큼 허리를 굽히다 떠나간 일본국의 외무대신을 은근히 흉본 것이다. 다분히 의도적인 몸짓이었다.

공개석상에서 망신을 주지는 않더라도- 이형의 기준에서 이 정도는 망신의 축에도 속하지 못하였기에- 이형 또한 일본의 독자 행동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는 걸 보인 것이다. 그간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어떻게든 간섭을 피하려고 하였던 주제에, 막상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 태도가 바뀌는데 좋은 말이 나올 리가 만무했다.

각료들 또한 공공연히 말하지는 않아도, 품고 있는 감상은 이형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애당초, 이들에게는 순전히 남의 나라 일이었으니 말이다. 한마디로 줄이자면, 쌤통이었다.

"구주가 아니라 북해도라니, 상당히 의외였습니다. 만에 하나 왜국에서 왜국 조정의 뜻에 반하는 세력이 나온다면 마땅히 구주의 살마(薩摩)번일 거로 생각했습니다만."

해군성 장관 이규석은 전혀 뜻밖이라는 듯이 말하였다. 다른 장관들 또한 그에 공감하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화주의 세력이 가장 공감을 얻고 있는 곳도 옛 내전 당시 막부에 맞섰던 지역들이었다. 반란도 한 번 일으켜본 곳이 잘한다고, 반역향이 괜히 반역향이던가.

그러나 이형은 이에 냉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바로 그렇기에 할 수 없는 것 아니겠나. 저들은 일전에 가증스럽게도 조선을 정벌하자며 함부로 입을 놀린 역도 무리가 아니던가. 그런 작자들이 이제 와 우리 대한을 끌어들이겠다고 나서봐야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할 걸 저들 자신도 알겠지."

"황상, 이는 하늘에서 내린 기회입니다. 이번에 우리 대한이 저들 북해도의 손을 들어준다면 저들은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고, 왜국이 나뉘게 된다면 우리 대한이 왜국을 조율하는 것 또한 한결 편해질 것입니다. 지금 당장 북해도민들을 지원하여야 합니다!"

한껏 들뜬 기세로 입을 연 것은 김가진이었다. 그로서는 기뻐할 수밖에는 없었다. 만일 이대로 중원에 이어 일본마저 쪼개진다면 그때야말로 진정으로 대한의 천하가 도래하지 않겠는가. 이웃 나라가 약해지는 건 언제나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여기에 김옥균은 눈살을 찌푸리며 김가진을 흘겨보았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요? 우리 대한이 처음 회맹을 이룰 적부터 함께하였던 나라의 불운마저 지지하는 꼴을 주변 제후들이 본다면 과연 뭐라고 생각하겠소. 대한은 언제건 제후들을 분열시키고 약하게 만들 궁리만 할 뿐이니, 겉과 속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겠소. 이게 당장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다가 큰 그림을 망치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오?"

"어찌 내가 그런 당연한 이치를 알지 못하겠소? 다만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하여도 이 기회에 왜국을 쪼개 놓을 수 있다면 대한의 천하는 앞으로 반 천 년은 더 거뜬할 것이요. 그리고 아직 저들이 갈라서겠다 선언한 것도 아니고, 이번에는 단지 우리 대한에 손을 내민 것뿐이지. 그게 뭐가 그리 대수겠소?"

"외교라는 건 본디 그렇게 작은 오해가 쌓여 큰 패착으로 이어지는 법이오. 부디 내부에서는 외부의 일에 관여하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구려!"

두 사람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서로 으르렁거렸다. 이제는 어전회의의 일상이 되어버린 풍경 중 하나였다. 이형은 두 사람을 딱히 말리려고 하지도 않고서, 슬쩍 김옥균을 돌아보며 물었다.

"대마도 도주- 그러니까 지번사는 뭐라고 하던가?"

"아직 침묵하고 있습니다. 저희 쪽 선을 거쳐 확인해본 결과 왜국을 상대로도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대한에서 견해를 밝히기 전까지 대마도는 계속하여 침묵을 지킬 것으로 보입니다."

"괜히 불똥을 맞고 싶지 않다는 거겠지. 하여간 이놈들은 예나 지금이나 자기들 편할 때만 일본이고 조선이군."

이형은 팔을 괴고서 잠시 골똘히 고민하였다. 각각의 일장일단은 분명히 있었다. 일본을 쪼개 놓는 대신에 주변 제후들의 우려를 사거나, 아니면 제후들을 안심시키는 대신에 이번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거나.

이형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

< 에조치(蝦夷地) > 끝

ⓒ 리첼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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