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438화 (438/530)

< 아나코-원시주의 >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딱 잘라 말해서, 이 무렵 혁명 직후 러시아의 혼란상은 그야말로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새로운 사회주의 조국에 화폐는 필요 없다! 화폐는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탐욕에 눈멀게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새로운 사회주의 조국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이 화폐라는 이름의 만 가지 악의 근원부터 없애야 한다!"

"임금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임금을 지급하는 자본가들에게 저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종국에는 노동자들을 이름만 바꾼 노예계급으로 전락시켰다. 새로운 사회주의 조국에서는 마땅히 임금노동을 철폐하고 모든 지역조합이 그들의 생산품을 공정하게 나눌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도시에서의 삶은 사람을 획일화시키고,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기계부품과 다를 바 없이 만든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란 말인가? 인간은 그 자체로서 존귀한 것이며, 그들은 사회의 소모품처럼 사용되지 않을 정당한 권리가 있다! 모두 농촌으로 돌아가자! 밭을 갈고, 밀을 수확하며, 정당한 노동의 대가와 인간다운 삶을 취하자!"

"새로운 사회주의 조국에 직업이라는 개념은 불필요하다. 어째서 인간이 노동에 속박되어야만 한다는 말인가? 인간은 일하기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자고. 이러한 직업으로부터의 자유야말로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위한 기초 토대라 할 수 있다!"

"성당을 파괴하라! 저 끔찍한 봉건주의적 가치관의 피뢰침을 깨부수자! 저 흉물들이 이 러시아 땅에 남아있는 한, 진정한 사회주의 조국은 이 땅에 도래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가장 큰 문제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였다. 좋게 말하자면 정권을 잡은 나로드니키들은 인간의 선함을 과신했고, 나쁘게 말하자면 머릿속이 현실이 아니라 저 멀리 어딘가에 피터팬과 팅커벨이 하하호호 날아다니는 원더랜드 즈음에 가 있었다.

권위를 파괴하고, 감시를 최소화하고, 인간의 자율성을 제약한다고 판단되는 모든 사회적 규범들을 치워버리는 일련의 행동은 분명 그간 전근대적인 권위주의적 질서에 익숙해져 있던 러시아에서는 그전까지 찾아보기 어려웠던 새로움 그 자체의 혁신적인 행동이었으나, 문제는 새롭기만 할 뿐 전혀 현실에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화폐 개혁도, 임금 개혁도! 모두 검토 중이라고만 되어있을 뿐 실제 성과는 하나도 없지 않소! 지금 혁명을 배반하겠다는 거요!"

"그럴 리가 있소. 우리는 모두 새로운 사회주의 조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함께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뜻을 함께하고 있는 엄연한 혁명동지들이 아니겠소. 다만 우리가 지향하는 바와 모스크바의 동무들이 지향하는 바는 조금 그 방향이 다른 듯하구려."

"이 반동분자가!"

무엇보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다름 아닌 본인들이 이와 같은 급진적인 개혁을 밀어붙이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중앙정부의 권위와 권력을 최소화시켰다는 점이었다. 한마디로, 중앙에서 제아무리 개혁과 혁명을 외쳐도 지방에서는 저들에게 유리해 보이는 것만 골라서 가져갔을 뿐 그 외의 중앙정부 명령에 대해서는 외면했다는 것이다.

애당초 이 무렵, 나로드니키를 지지하는 농민들이 지지하는 건 그들의 토지개혁 정책이었지 그 외에 아나코-생디칼리즘적 혁명과 개혁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러시아의 농민들에게 이미 혁명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 다음이었다. 설령 그것이 외세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당연히 이들은 중앙에서 어떤 혼란이 일어나건 외면했다. 이러한 지방의 외면은 결과적으로 중앙을 고립시키고 러시아의 경제와 정치를 온통 중구난방으로 만들어 놓았고, 혁명의 심장 모스크바의 여론을 극단화시켰다.

"지방자치도 좋고, 인권도 좋고, 인간 본성의 자유도 좋다. 다 좋지만, 그 전에 우선 혁명을 달성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직 혁명이 마무리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지방자치를 명분으로 지방 조합정부가 모스크바를 외면하고 있으니 근심이다."

"이게 지방자치라니 코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이건 지방자치가 아니라 우리의 위대한 조국을 파괴하고 있는 것뿐이다! 고작 해봐야 모스크바 하나 온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사회주의 혁명은 무슨 얼어 죽을!"

어윤중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열차에 오를 무렵, 모스크바의 여론은 크게 둘로 나뉘어 있었다. 전자는 점차 이 난장판에 조금씩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한 나로드니키들이었고, 후자는 처음부터 중앙이 힘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그간은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는 모양새였으나, 이 무렵에 접어들어서는 후자가 전자를 밀어붙이는 형국이 되었다. 지방은 중앙을 외면하고, 중앙은 중앙대로 함부로 화폐를 없애고 협동조합들의 물물교환 경제로 전환했다가 물자부족으로 노조가 총파업을 일으키고, 철도운영을 철도 노조의 자율에 맡겼다가 노선 시간이 꼬여서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열차끼리 추돌하는 등 사태가 연발하는데 처음부터 집권 여당세력이 그 책임을 추궁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기회주의적, 권력 지향적 행보를 경고하던 나로드니키 당원들도 이 무렵에 와서는 「권위와 권력은 필요악이다」라며 어느 정도 현실을 직시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권위와 권력이 사라진 모스크바에 어떤 혼란상이 벌어졌는가는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매일 같이 서류를 통해 보고를 받고 있으면서 그걸 모른다는 건 결국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보고도 모른척한다는 말 밖에는 되지 않았다.

"경찰이다! 지하창고에서 밀주를 제조하고 있다는 신고를 받고 왔다. 당장 문 열어!"

"경찰? 그래서 뭐가 어쩌라고. 우린 조합연맹에 이름을 올려둔 어엿한 협동조합이고, 이건 우리 사업일 뿐이다! 경찰 따위가 협동조합의 사업을 방해해도 되는 거냐!"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세수감소였다. 법에 따른 독재를 경계한 나머지 경찰을 위시한 치안을 집행해야 할 공권력의 힘이 약해지고 반대로 지역 협동조합의 힘이 늘어나면서, 지역 협동조합이 공권력을 무시하고서 무법을 일삼았던 것이다. 단지 이 무법행위가 치안을 악화시키고 사람들을 죽거나 다치게 하는 정도였다면 혁명을 위해 필요 불가피한 희생이었다고 선전할 수도 있었겠지만, 밀주산업이 성행하면서 주류세 수익이 반으로 줄어드니 이야기가 달라졌다.

밀주산업은 하루가 다르게 눈부시게 퍼져 나갔다. 안 그래도 보드카를 위시하여 주류 소비량이 어마어마핟너 러시아였고, 아나키즘 혁명으로 공권력이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연출되니 지역 협동조합들은 당장 밀주를 제조함으로써 얻을 수 있을 이익에 눈이 돌아가 버렸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이 무렵 러시아의 협동조합이란 기실 말만 좋아서 협동조합이지 애당초 지역 공동체의 다른 이름이거나 범죄조직인 경우가 다수였다는 점이다. 미국이었다면 선키스트를 위시하여 크고 작은 협동조합들이 활동하고 있으니 별 탈 없었을지 몰라도, 협동조합은커녕 주식회사조차 드물었던 러시아에서 협동조합 중심의 경제활동은 엄청난 혼란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화폐를 없애겠다, 협동조합 주도의 물물교환 경제를 건설하겠다며 러시아라는 나라를 빌려 초대형 사회실험을 하면서 경제가 나날이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와중 세수가 줄고 혁명의 선봉장이라던 협동조합이 앞장서서 범죄와 일탈행위를 일삼으니 그야 정신이 나간 게 아니고서야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나로드니키들은 그들이 바라건 바라지 않건 한국의 간섭,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반격, 그리고 국민의 원망 속에서 현실을 깨달아가며 강제로 유니콘이 각설탕을 뜯어먹으며 뛰어노는 무지개 동산에서 질척하고 더럽고 어두컴컴한 현실로 반강제로 끌려 내려와야만 했다. 이마저도 너무 늦은 감이 있었지만 말이다.

"도덕이란 결국 우리의 옛 지배자들이 힘없는 약자들을 속박하고 길들이기 위하여 만들어놓은 형체 없는 쇠사슬에 지나지 않는다. 저 강자들이 도덕에 얽매이는 걸 본 적이 있는가? 법은 또 어떠한가? 모든 법과 도덕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진정으로 인간을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돌도끼를 만드는 데에는 1명의 인간의 하루 치의 노동이 필요했다. 청동검을 만들 때에는 그보다 많은 사람과 시간이 필요했고, 철기는 그보다 더욱 많은 사람과 시간이, 그리고 작금의 기계 문명을 만들고 관리하고 연료를 대는 데에는 전 인류가 그들의 일생을 소모하여 일해도 턱없이 부족하여 다음 세대마저 착취당하기를 힘없이 기다리고만 있다. 그렇다면, 우리 다음 시대는 어떠할까?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욱 많은 인간과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건 자명하다. 점차 인간은 독립된 자유인으로서가 아니라, 이 끔찍한 기계문명을 지탱하기 위한 기계부품으로서 남용되고 소모되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린 이 연쇄의 사슬을 끊어야만 한다. 문명을 단호히 거부하고, 기계들을 부수고, 우리 선조가 그러했듯이 돌도끼를 꺼내 들어 원시 사회로 돌아가자!"

"인류가 문명을 만들어낸 것은 인류에게 있어서 최악의 실패였고 곧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우리의 선조가 아직 움막에서 거닐 때, 그때는 도덕규범도 없었고 국가도 없었으나 우리 선조는 그 어떠한 부족함 없이 생활할 수 있었으며 그 어떠한 권위와 질서에도 구속되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루소가 말하였듯이, 오로지 원시적 자연인 상태에서만이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우리는 더욱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라도 더 늦기 전에 이 기계문명을 파괴해야만 한다!"

"문명을 파괴하라! 책들을 찢어버려라! 벽돌 건물을 허물고, 도시를 불태워 없애라! 모든 인간이 움막으로 돌아가 수렵인으로서 살아갈 때 비로소 인류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것이다! 인간 해방 만세! 만만세!"

물론 그들 모두가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이대로는 안된다고 깨달았지만, 다른 누군가는 더욱 먼 곳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유니콘이 각설탕을 뜯어먹으며 뛰어노는 무지개 동산을 넘어 사이키델릭 락 스피릿 넘치는 날개 달린 분홍 코끼리가 코끝에서 LSD를 뿜어대는 히피 천국을 향해서 말이다.

이들은 그들 자신을 당당하게 아나코-원시주의자라고 자칭했다. 그리고 이들이 주장하는 바의 요지는 간단했다. 문명이 발전하면 발전할 수록 인간은 거대한 사회를 굴러가게 하기 위한 부품으로서 소모될 뿐이니, 모든 도덕규범과 문명을 파괴하고 움막으로 돌아가 농업조차 포기하고 수렵생활로 생업을 이어갈 때 비로소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허무맹랑한 주장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이들은 드물었다. 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온건했던(?) 나로드니키들조차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조금씩 자신들의 정책을 바꾸어나가던 판국에 지금보다 더욱 탈권위를 향해 내달리자는 주장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결코 기죽는 일 없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해 나갔다. 기차역에 불을 지르거나, 도서관에 폭탄을 집어 던지거나 학교에 가던 어린이들을 납치해서 기계문명에 오염되지 않도록 보호(?)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 아나코-원시주의자들의 준동은 처음에는 혁명에 호의적이던 이들까지 진저리를 내게 하였다.

"이럴 바에는 혁명 따위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도대체 혁명 전과 비교하여 지금이 더 나은 점이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경제는 파탄 났고, 협동조합은 그냥 이름만 바꾼 날치기 불량배들의 소굴이며, 불량배들을 단속해야 할 경찰이 되려 상습적으로 구타를 당하면서 그 누구도 경찰 선거에 출마하려 하지 않으니 결국 주변의 강압을 견디다 못한 이들이 억지로 끌려나오는 게 대부분이다.

진지하게 되묻건대, 이 러시아에 정말로 러시아 정부라는 국가조직이 존재하고 있는가? 만일 존재한다면, 그들은 지금의 혼란상을 통제하려 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하지 않으려는 것인가? 전자라면 무능하기 짝이 없는 정부는 사라지는 것이 나을 것이고, 후자라면 이 나라를 망치려고 작정한 저 미치광이 테러리스트 놈들을 당장 모조리 형장으로 보내야 할 것이다! "

물론, 이는 다소 극단적인 주장이었다. 무엇보다 혁명에 긍정적인 점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우선, 극좌 혁명은 확실하게 러시아를 바꿔놓았다. 그것 하나만큼은 낡은 체제에 진저리를 내고 있던 러시아인들의 기대에 꼭 맞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봉건주의는 파괴되었고, 그 시체는 짓밟히는 것으로 모자라 능멸당하고 불태워졌다. 러시아는 확실하게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다만, 나로드니키들은 러시아 국민을 내버려둔 채로 너무나 먼 곳을 향해 달려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지금보다 더욱 먼 곳까지 가지 못해서 안달을 내고 있었다. 자유를 위한다, 전근대적 권위주의를 타파한다는 의도 자체는 옳았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민심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현실 정치에 반영하는 데에 실패한 것이다.

그리고 나로드니키들의 실패는, 누군가에게는 기회를 상징하기도 하였다.

***

러시아 민주 공화국, 카잔.

"이게 다 뭐란 말인가?"

그곳에는 나로드니키들에 실망한 또 한 사람의 젊은 혁명가가 거리를 둘러보며 한탄을 늘어놓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시간이면 학교에 가는 어린 학생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건만, 지금은 그런 새가 지저귀는 듯한 어린아이들의 잡담소리는 조금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나코-원시주의자들이 어린이들을 기계문명으로부터 격리하겠다면서 통학 시간대에 맞추어 상습적으로 유아납치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부모로부터 격리된 그들은 아나코-원시주의자들의 이상에 따라 거의 모든 문명의 이기로부터 격리되어 스스로 먹을 것을 찾고 짱돌을 주워 만든 도구를 만들어내는 법을 배워야 했다.

지금의 러시아가 일반적인 정부라면, 하다못해 옛 차르의 독재정권이라고 하여도 이러한 아나코-원시주의자들의 활동은 군 병력이 투입되어서라도 처벌되었을 것이고 단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러시아 정부에 그런 힘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단속할 의지조차 없는지도 몰랐다.

겉으로는 번드르르한 말을 늘어놓아도 뒤로는 이 또한 자유로운 민간 정당활동의 일환이라며 감싸고 있을지 누가 안다는 말인가. 결국, 방향성은 달라도 그들 또한 아나키즘이라는 거대한 사상적 갈래에서 하나인데. 원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게 아니다. 혁명은 이런 무질서를 위한 것이 아니었어. 우리가 만들고자 했던 사회주의 혁명이란 이런 게 아니었을 것이야."

청년은 이를 갈았다.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형이 목숨 바쳐 이룩한 혁명이었다. 당연히, 그 혁명이란 그의 형이 목숨을 걸었던 만큼 가치 있는 일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현실은? 골수 혁명주의자라고 자부하던 그 자신조차 이게 차르가 지배하던 러시아 제국과 비교하여 더 나은 것이 맞는지 의심스럽지 않던가.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이 사무치지 않을 수 있을까.

결국, 청년은 굳게 다짐했다.

"바뀌어야만 한다. 차르의 낡은 망령들이 이 러시아에 돌아오기 전에, 내가 이 손으로 바꾸어야 해."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청년이 혼자 다짐한다고 해봐야, 지금 이 자리에서 청년은 고작 해봐야 방관자에 불과했다. 어두운 표정을 하고서 거리를 오가는 시민을 관찰하며, 현실을 개탄하는 힘 없고 나약한 지식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청년은 딱 하나, 그런 러시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던 불평불만 많은 지식인들과 비교하여 다른 점이 있었다.

"고려로 간다. 고려로 가서, 이 눈으로 직접 그 실정을 확인하고 그들의 지지를 얻어야만 해. 지금의 러시아에서 정권을 거머쥐려면, 국내에서 세력을 모으는 것보다 고려의 총애를 얻는 게 우선이다!"

청년에게는, 그 자신의 다짐을 현실로 바꾸기 위한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추진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청년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는, 그렇게 한국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 아나코-원시주의 > 끝

ⓒ 리첼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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