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442화 (442/530)

< 아주종합미학전시관 >

당연하게도 이러한 예술인들의 개인작품들은 한국 정부에 의하여 적극 장려되었다. 사상의 자유 같은 거창한 것을 논할 필요 없이, 애당초 이들의 사상 기저에 깔린 아시아주의 자체가 이 당시 한국 정부의 대외적 선전이었으니 지원했으면 지원했지 배척될 이유가 없었다.

이에 따라, 아주예술위원회에서 배정받은 「아주 종합미학전시관」은 사실상 「대한제국 전시관」과 거의 동급의 투자와 지원을 받았다. 이 무렵 한국 정부에서는 이들 아주예술위원회의 구성인원들 상당수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부분을 가장 고평가했다. 비록 지도부가 한국인이 아니라 통제가 어려웠음에도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아주예술위원회가 뚜렷한 주도적인 국가 없이 여러 나라에서 자발적으로 모여든 인재들이라는 것 자체가 아시아주의가 단순히 한국의 패권유지를 위한 선전이 아니라, 진정으로 아주인들이 스스로 원하여 따르고 있는 이념임을 과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경우 오히려 이들을 주도하는 게 한국계가 아니라는 것이 이들이 한국 정부에서 만들어낸 관영조직이 아님을 증명했다.

"괜히 손대지 마라. 소위 예술을 하는 놈들이 얼마나 드세고 자존심 높은데, 이래라저래라 참견하면 얼마나 고깝고 아니꼽겠냐? 내 이 자리를 빌려 엄중히 말하건대, 저들의 창작에 함부로 훼방을 놓거나 평론을 할 것도 아니면서 함부로 품평하는 놈들은 가만두지 않으리라."

그리고 결정적으로, 황제가 이들을 두고서 몸소 나서 이들 아주예술위원회의 창작에 간섭하지 말라고 엄중히 명하면서 진정으로 아주예술위원회는 한국 정부의 관영정당이 아닌, 진정 자발적으로 아시아주의를 추종하여 자유로이 창작하는 아시아 대륙의 예술인들을 위한 조직이 되었다.

무엇보다 황제는 아주예술위원회의 창작을 위하여 기꺼이 황실의 자산을 기부했다. 이는 현장관료들에게 아주예술위원회의 창작활동에 참견하거나 훼방을 놓는 걸 막아줄 결정적인 방패막이 되어주었다. 그 액수도 액수였지만, 황실의 후원을 받는 조직에 함부로 참견한다는 것 자체가 어지간한 각오나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비호 속에서, 아주예술위원회는 자신들의 자유로운 창작을 약속해준 황제의 은혜를 칭송하며 마음껏 창작의 나래를 펼쳐갔다.

이렇게 아주예술위원회가 주도하여 만들어간 소위 미래의 아주 문화는, 크게 3가지 갈래로 나누어졌다.

"서역의 교회 미술을 보라. 그 세련된 벽화들과, 장엄한 대리석 기둥, 찬란한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라. 단 한 번이라도 서역의 그 위대한 석조 건축물들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고 왔다면, 그 엄숙하고 장엄한 기운에 압도되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성당은 그 위대함만으로 그들의 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실증해내고 있다!

우리 아주도 그와 같이 해보자. 저 웅장한 석조 건축물을 흉내 내 부처가, 태상노군이, 진시황제가 임하는 웅장한 석재신전을 만들어보자. 우리의 위대한 건축으로 우리의 신이 실재함을 실증해보자!"

"나라별로 말이 다르고, 글자도 다르다. 그러나 아주 대륙에 있다면 누구나 석가의 가르침 즈음은 알고 있지 않은가. 미륵이 하루빨리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지장보살께 기대어 죽은 자들의 넋을 기리고, 관세음보살께서 우리네 가엾은 인생을 돌봐주십사, 하고 불공을 드리는 건 어느 나라나 같다.

분명 종파별로 가르침은 제각각 다를 것이다. 사찰을 운영하는 방식도 제각각 다르고, 으뜸으로 섬기는 보살마저 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석가여래의 가르침을 쫓는 석가여래의 제자들임은 모두 같을지라. 나무아미타불의 이름 아래 진정 아주는 하나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천하관은 제각각 다를지라도, 천상과 저승은 아주 어느 나라나 비슷한 법이다. 저승에는 염라대왕이 계시고, 천상에는 옥황상제가 계시다. 달에는 달 토끼가 절구질을 하고, 매년 칠석날에는 견우와 직녀가 일 년에 한번 오작교에서 만나 애틋한 사랑을 나누며, 용오름이 이는 까닭은 이무기가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날아오르기 때문이다.

신화란 곧 그 문화권의 정신적 뿌리이다. 신화를 논하지 않고서 그 나라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우리가 노래해야 할 것은 마땅히 우리의 신화이다. 우리는 우리 신화의 아름다움과 유사함을 노래함으로써 아주 단합의 첫걸음을 내디딜 것이다."

첫번째 갈래는 종교적으로 접근하는 부류였다. 이들은 또 크게 유럽의 고딕, 바로크 건축양식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고전주의적 건축가들과 단일종파를 꿈꾸던 아주 대륙의 불교 미술인들, 그리고 아주 각 나라의 신화적 유사성을 연구하는 설화주의자들로 나뉘었다.

이들은 공통으로 옛것을 알아야 새것을 바로 익힐 수 있는 법이라는 온고지신의 고사에 충실한 갈래였다. 아주 대륙의 문화적 공통점을 찾고자 종교를 꺼내 들었던 것이다. 물론 불교 미술인들처럼 처음부터 종교적 접근으로 나선 이들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이들에게 종교란 곧 아주 단합을 위한 도구였지 목표 그 자체는 아니었다.

"아, 마음 같아서는 우리의 위대한 신들에게 그들을 위한 집을 제각각 하나씩 만들어주고 싶다! 내 일생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그렇게 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우리에게 할당된 부지가 턱없이 부족하다! 따라서 우리가 만들어야만 할 것은 만신전이다. 옛 로마의 판테온과 똑 닮은, 그러나 분명히 다른 우리 아시아 대륙만을 위한 만신전 말이다!

자, 시작해보자! 우리들의 신을 위한, 신들의 공동주택을 만들어 보자! 그리하여 먼 훗날에 우리가 모두 사라지고 잊힌 다음에도, 이 아주 대륙에는 이토록 위대한 존재들이 살아 숨 쉬고 있었음을 전하자!"

고전주의자들이 전시관에 설치한 조형물은 이들 중 단연 압권으로 로마의 판테온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거대한 만신전이었다. 이 얼핏 시대착오적인 대리석 건축물은, 그 외관만 보았을 때는 아시아 대륙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나 로마 어딘가의 유적지대에 위치해있어야 할 것처럼 아시아적인 모습은 단연코 없었다.

이 만신전의 진정한 가치는 그 내부에 있었다. 정문으로 입장하면, 그 양옆으로 인자하게 가부좌를 틀고 있는 석가와 물소 위에 앉아 지팡이를 짚고 있는 태상노군 사이로 단령을 걸쳐입고 복두를 쓴 공자가 책을 읽는 가운데 상하 전후좌우로 아주 대륙의 신화 같은 존재들의 대리석 조각상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 조각양식은 더 없이 서구적이었으나, 그 대리석 조각상들이 흉내 내는 것들은 모두 더 없이 아주다운 신화 속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만신전이라는 이름 그대로, 건물 가득히 은은히 흐르는 향 냄새는 그 안을 구경하던 이들로 하여금 절로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하였다.

또한 이 만신전은 일체의 인공적인 조명을 피하고, 온전히 촛불과 등불을 비롯한 고전적인 발광체들만을 사용하여 보는 이들의 경건함을 극대화 시켰다. 방문객들이 신을 섬기건, 그렇지 않건 누구나 그 경건함과 장엄함에 경의를 표하고 아주 대륙의 신화적 공통점을 깨닫고서 떠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가르침을 적는 것도 좋을 것이다. 설교를 전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여래의 가르침을 설파하고자 함이 아니다. 어느 나라에나 여래의 가르침은 평등하며, 부처의 대자대비함은 누구에게나 공평함을 알리기 위함이다. 이 너무나 당연해서 흔히들 깨닫지 못하는 바를 전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저 불상을 만드리라. 관세음보살의 옥체를 흉내 내고 또 흉내 내 만들고 또 만들 것이다. 이 천하에 백 개의 나라와 백 개의 문화가 있다면 마땅히 불상을 만드는 법 또한 백 개가 있어야 옳다. 우리는 이 백 가지 불상을 한데 모아 중생들에게 여래의 가르침을 설파하리라."

한편, 불교 미술인들이 전시관에 설치한 조형물은 그에 비하면 상당히 평범했다. 겉으로만 보기에는 아무런 특색도 없는 전형적인 사찰로 보였고, 실제로 입구의 금강역사 목상을 지나칠 때만 해도 그렇게 보인다. 이들의 진가는 그 내부에 진열된 정확히 1,000개에 달하는 관세음보살 불상이었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이 1,000개의 불상 모두가 제각각 다른 제작자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 재료도, 만들어진 방식도, 양식도 제각각 달랐다는 것이다. 같은 목상이라도 은행나무를 썼는가 참나무를 썼는가 등으로 갈렸고, 같은 돌을 썼더라도 화강암을 썼는가 대리석을 썼는가로 또 갈렸고 금속을 썼더라도 철인가 청동인가 황금인가로 또 갈리었다.

거기에 이 1,000개의 불상 모두가 제각각 다른 지역과 나라의 불교문화를 상징하다 보니, 모두가 같은 관세음보살을 형상화하였음에도 그들의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을 묘사한 듯이 제각각 달랐다. 어떤 관세음보살은 온화하게 웃고 있었고, 어떤 관세음보살은 그의 앞에 엎드린 중생을 동정하듯 희미하게 울상을 짓고 있었으며, 또 어떤 관세음보살은 죄업에 진노한 듯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1,000개의 제각각 다른 불상은 그 자체로서 이 아시아 대륙에서 불교라는 종교가 행사하는 영향력과, 그 다양함을 과시하였다. 전시관 한쪽에는 한자와 만주어, 일본어, 한글, 산스크리트어 등 각 나라의 문자로 적혀진 반야심경이 전열 되어있어, 필요하다면 꺼내서 읽을 수 있도록 안배하기도 하였다.

"우리의 신화는 곧 우리 정신의 뿌리이다. 그러나 신화가 정체되어 있어서는 언제까지고 대중들에게 외면받을 뿐이며 대중에게 외면을 받은 이야기는 그 생명이 다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야기가 살아 숨쉬기 위해서는 보다 역동적이어야 한다. 대중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그들의 몸짓 하나하나에 대중이 감탄하고 또 탄식하여야 하며, 이야기가 대중들의 삶 속에 자연스레 녹아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자면 방법은 하나뿐이 아니겠는가? 이야기 극이다. 우리는 분칠을 할 것이고, 탈을 뒤집어쓰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것이다. 우스꽝스럽게, 장엄하게, 화려하게, 애틋하게. 우리의 신화와 전설들을 잊히고 정체된 옛이야기가 아니라, 생명을 가지고서 작금의 시대 속에 약동하는 우리네 이야기로 바꾸었을 때 비로소 아주는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으리라!"

설화주의자들은 또 다른 방향으로 접근하였다. 이들은 거창한 건축물이나 조각상들을 준비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이들은 충분한 크기의 무대와 좌석, 그리고 배우들과 연주자들을 불러모았다. 이들은 서양의 오페라와 동양의 전통적인 탈춤, 가부키, 경극 등을 참조하여 아주의 신화나 전설, 설화들을 이야기 극으로 정립해갔다.

그리고 이들이 가장 먼저 준비하여 연습하였던 연극은 다름 아닌 견우와 직녀 설화였다. 견우와 직녀 전설은 어느 나라에나 잘 알려졌으며, 뚜렷한 정치적 색채도 없을뿐더러 그 이야기도 다분히 서정적이고 애틋한 사랑 이야기인지라 가장 쉽게 대중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본 것이다.

이들에게 가장 큰 난점으로 다가왔던 것은 바로 관중이 연극 내용을 과연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였다. 일단 연극 자체는 이 무렵 아주의 공용어나 다름없던 조선말로 준비되었으나, 관객들 모두가 조선말을 할 줄 아는 건 아니었고 설령 할 줄 알더라도 모든 어휘를 이해하고 구사할 수 있을 만큼 수준급으로 할 줄 아는 이들은 드물었다.

따라서, 이들의 가극은 다른 대륙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오페라들보다 배우들에게 더욱 격렬하고 정열적인 춤사위를 요구하였다. 설령 관객들이 대사를 알아듣지 못하고 연극을 이해하지 못해도 하다못해 배우들의 화려한 분장과 정열적인 춤사위, 폭발적인 성량과 장엄한 무대장식만으로 관객들을 압도하기 위해서였다. 말초적인 자극을 통해 이목을 사로잡으려 했던 것이다.

"한자란 분명 배우기도, 쓰기도, 읽기도 어려운 문자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한자는 이 아주 대륙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공용문자이기도 하다. 이 愛 자를 어느 나라에서는 「애」라고 읽고, 어느 나라에서는 「아이」라고 읽지만, 사람이 심장을 손으로 감싸 쥐고 있으니 「사랑」이다라고 어느 나라에서나 그 의미가 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주의 단합을 논한다면 결코 이 한문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는 이 한문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해보자. 설령 관객들이 한문을 읽지 못한다고 하여도 상관없다. 그리면 된다! 이 한문을 풀어서 그림처럼 그려보자! 회교도들이 그들의 회교 문자로 범을 그리고, 말을 그리고, 하늘의 구름을 그리듯이. 우리도 이 한문을 풀어서 그림을 그려보자!"

"예로부터 우리 아주인들에게 목재란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아왔던 재료이자 자연물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벽돌과 돌을 찾아 쓸 수 있음에도 일부러 목재를 사용하여 건축하기도 하였던 예를 생각하면 틀림없이 그렇다. 우리는 이 아주 대륙의 목재 사랑에 관하여 이야기해보자.

분재한 나무를 전시하고, 정원을 가꾸어 나무들을 심고, 호수 위에 나무배를 띄워 자연 그대로의 정경을 즐길 수 있도록 하자. 관객들이 그 울창하고 아름다운 나무들에 파묻혀, 우리 선조가 어찌하여 그리도 나무를 사랑하였는지 단지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서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자!"

"이 아주 대륙에 바둑과 장기를 못하는 이들은 있어도 이를 싫어하거나 들어본 적도 없는 이들은 단언컨대 없을 것이다. 바둑과 장기는 오랜 옛날부터 우리 아주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왔던 놀이 문화이고, 지금에 와서도 그러하다. 그러한데 이 바둑과 장기가 예술이 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리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바둑과 장기가 어느 나라에서나 흥하고 있다면, 당연히 나라별로 바둑판과 장기판을 만들고 장식하는 법도 제각각 차이가 날 것이고 이 돌을 만들 때도 분명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이 바둑과 장기를 비롯하여 아주의 놀이문화를 있는 대로 끌어모아 그 특색 넘치는 놀이기구들을 관객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우리 아주는 이토록 다르지만, 또한 이만큼이나 비슷하다고 말이다!"

그런가하면 두 번째 갈래는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문화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표적으로 서예나 분재, 뱃놀이와 장기, 바둑 등의 놀이가 전시되었고 또 문화 체험을 위한 체험 시설이 제공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무난한 분파에 속했다. 애당초 이들이 내세운 것이 일상생활 속의 유사점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지만 말이다. 사실 이들의 의도는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낯익은 정취를 다른 아주 국가들도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던 만큼, 오히려 이런 무난함이야말로 당사자들이 원했던 바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이 탓에 이들은 다른 두 개의 갈래에 비해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아무래도 너무 무난하다 보니, 어떤 식으로건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다른 두 갈래에 비해서는 묻힐 수밖에 없던 것이다. 다만 그런 만큼 조용한 안식을 찾으러 온 이들에게는 선호되어, 그 나름대로 성황을 이루었다.

마지막 세 번째 갈래는,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가장 독특하고 이색적인 분파였다.

"미리 금을 그어놓은 벽에다가 망치를 후려쳐서 일그러진 초상화를 그려보자! 제목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우상」 즈음으로 하면 되겠지!"

"도대체 왜 나체는 안된다는 거지? 꽁꽁 싸매라니, 그럼 일부러 페인트칠해놓은 보람이 없잖아! 뭐? 공연음란죄? 멍청한 소리 하기는! 이 무능한 책상물림 놈들이 감히 예술의 진보를 가로막다니!"

"으흐흐! 어디 20세기의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 보실까! 마침 요 근처에 고물 점이 있어서 고철 걱정할 필요 없는 건 진짜 좋은걸!"

다른 이들이 과거와 현재를 통해 미래의 아주 문화를 예견하거나 창조하고자 하였다면, 이들은 아예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아주 새로운 것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 아주종합미학전시관 > 끝

ⓒ 리첼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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