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범 >
그리고 전주 만국박람회가 그 본격적인 막을 올리기 1달여 전.
"조선 땅, 이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멘토 시, 으뜸 교회. 모두가 잠든 어둑한 밤.
교회 한쪽의 개인실에서 이제는 일흔셋의 노인이 된 이하응은 가스등에 의지하여 그의 앞으로 날아온 초대장을 읽으며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의 사랑하는 손주가 직접 펜으로 한 자 한 자 공들여 눌러쓴 흔적이 엿보이는 정성스러운 편지였다. 눈을 감자니 은은한 나무 향이 감도는 것이, 종이부터가 공장에서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공산품과는 차원이 다른 물건이었다.
세세한 미사여구는 제하고서 초대장의 핵심내용만 발췌하여 읽자면, 전주 만국박람회에 참여하여 자리를 영광스럽게 하여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황제-그러니 개똥이가 보위에 오른 지 30주년을 맞이하여 전주에서 열린 뜻깊은 행사이니만큼, 황실의 큰 어른이 빠져서야 하겠느냐는 이야기도 덧붙여져 있었다. 물론, 뉘앙스가 그랬다는 것이지 실제로 그렇게 무례하게 적혀있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 무례한 내용은 애증 섞인 그의 아들, 개똥이나 보여줄 수 있으리라. 그리고 단언컨대, 그 개똥이가 이하응에게 직접 편지를 쓰는 일은 앞으로 죽는 날까지 없으리라. 적어도 이하응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이제 와서 무슨 낯으로 조선 땅을 밟겠는가."
음미하듯이 몇 번이고 공들여 쓴 초대장을 읽던 이하응은, 이내 손에서 초대장을 내려놓았다. 딱히 미국에서의 생활이 너무나 즐겁고 만족스러워서 조선에 대한 생각은 조금도 나지 않는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 증거로, 손에서 초대장을 내려놓은 뒤에도 이하응은 몇 번이고 주먹을 쥐었다가 피며 못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하는 그의 모습은 어딘가 애틋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이하응에게 조선땅은 각별했다. 미국에서의 생활에서 질렸다거나 아니면 생활고에 빠졌다거나 하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곳이 그가 태어나고 자란 땅이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금의환향이라는 말이 괜스레 있겠는가. 만리타향에서 보란 듯이 성공을 이뤘으면, 마땅히 고향으로 돌아가 내가 이렇게 성공했노라고 자랑도 하고 해야 속이 시원한 게 사람 심리가 아니던가. 그러나 이하응은 그럼에도 차마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의 손주가 손수 쓴 편지로 그를 초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이유야 말할 것도 없이, 이 미국 땅에 정착하면서 그가 내걸었던 조건이 이제 두 번 다시 조선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제 황제의 통치도 반석에 올라 더는 이하응이 무슨 일을 한 들 흔들릴 일도 없겠으나, 바로 그렇기에 황제의 입에서 직접 그 약속을 없던 걸로 하겠다고 하거나 이번 일은 예외로 두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에야 이하응은 결코 조선땅을 밟지 못할 터였다.
"내 팔자도 참 기구하구나."
결국 이하응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고서는 초대장을 그의 책상 서랍 맨 아랫간에 집어넣었다. 덜컥, 하고 서랍이 닫히는 소리에 가슴이 이 덩달아 덜컥하고 내려앉는 듯했다. 하다못해 그의 교회에 다니는 막노동꾼들조차 드물게 성공하여 목돈을 모아 고향에 다녀오거나 하던데, 이 미주 땅에서 제일 성공한 동양인이라 할 수 있는 그 자신은 죽는 날까지 고향에 다녀올 수도, 돌아갈 수도 없다.
그것이 이하응에게는 못내 미련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 미련은 요즈음 들어 나날이 더욱더 커져만 가고 있었다. 이제 으뜸 교회를 필두로 한 한인 사회도, 검계조직들도 안정적으로 뿌리내려 더는 그가 하나하나 지시하고 조율할 필요가 사라져 혼자서 멍하니 보내는 시간이 늘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더욱 괜한 생각이 드는 것 같아 수묵화도 그려보고 한시도 짓기 시작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더 조선땅 생각이 각별해졌다. 그림을 그려도 삼천리금수강산이요, 시를 지어도 반 천 년 유구한 역사의 전주 이씨 대조선국이니 되려 더욱 증세가 심해진 것 같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직접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간 그토록 부정해 왔으나, 더 이상은 부정할 수 없게 된 이유였다.
그는 이제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그래. 그래도 서신을 받았으니, 마땅히 답신을 드려야겠지."
이하응은 첫째 서랍을 열어 여분의 백지와 필기구를 하나하나 꺼내었다. 고작 그것뿐인 동작이었거늘, 손이 뜻처럼 움직여주지를 않았다. 느릿했고, 부정확했으며, 이따금 덜덜 하고 떨리기도 하였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태자가 보는 앞에서 아직 정정하다고 괄괄하게 웃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웃는 것도 힘들어져 가고 있었다.
몸이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늙어가고 있다는 걸 자각한 지야 벌써 수십 년이 지나 늙었다고 자조하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일 뿐일 테지 만, 그럼에도 이하응은 요즈음에야 비로소 자신이 늙어서 죽어가고 있다는 걸 스스로 깨닫고 인정하고야 말았다. 자신은 아직 괜찮다. 아직은 더 할 수 있다. 앞으로 30년은 넉넉하게 살아서 100년은 꽉꽉 채울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게 불과 1년 전이었거늘, 늙고 나니 그 짧은 1년의 차이가 너무나 컸다.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이하응은 자신의 총명하던 두뇌도 나날이 굳어가고 몸은 더욱 무거워지고 허약해져 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죽음이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절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듯하였다. 가슴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이 욱신거렸다. 죽음 그 자체에 대한 공포보다도, 자신이 죽는 그 순간에 피붙이들이 곁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두려워서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개똥이 녀석···."
이하응은 애증을 담아 피붙이의 이름을 불렀다. 황제로서의 존함이 아니라, 한창 아장아장 조잘조잘할 적의 아명을 말이다. 이제는 아련하기만 한, 그 매일 같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똥강아지 마냥 뒹굴던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자면 절로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 아장아장 조잘조잘하던 똥강아지가 훗날 자라 그를 조선에서 내쫓은 장본인이 아니던가. 그걸 떠올리자면 느슨해지던 입가도 절로 굳어졌다. 물론 그가 저지른 일이 있기도 했고, 원래 권력 앞에서는 부모도 친구도 없는 거라지만-그래도 어찌 자식 된 도리로서 부모에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그렇지만 그 괘씸한 불효자식이라도, 그의 피붙이 중 으뜸으로 잘난 것 또한 사실이 아니던가. 그 아장아장 조잘조잘하던 갓난아이가 그의 품에서 벗어나 그 작고 나약했던 조선을 이토록 부강한 대제국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다시 또 입꼬리가 느슨해졌다. 이 세상에 자식자랑 늘어놓기 싫어하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고,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쁜 법일진데.
하지만 그 고슴도치 새끼는 제가 죽을 적에 곁에 없겠지. 그리 생각하니 이하응은 또 금방 울적해졌다. 앞으로 피붙이와 두 번 다시 만나지도, 이야기를 나누지도, 손 한번 잡아보지도 못하고서 죽는다니. 이보다 울적한 이야기가 또 어디에 있을까.
"올해가 지난다면, 이제는 설령 개똥이가 조선으로 오라고 하여도 몸이 뜻대로 움직여주지를 않아서 돌아갈 수도 없겠구나."
이하응은 나지막이 한탄하였다. 그저 답답했다. 하다못해 미물에 불과한 연어조차 죽을 때가 다가오면 온 힘을 다해서 고향으로 돌아가 기력을 모두 소진하고서 죽는다던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뜻대로 할 수 없으니 이게 무슨 꼴이라는 말이던가. 이하응은 첫 줄도 쓰지 못하고서 그저 흰 백지만 빤히 한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 라고 적어서 돌려보내고 싶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조선땅을 밟아본다는 말이던가? 지난해 정정했던 육신이 올해 들어서 급작스레 용태가 나빠졌다면, 내년에도 이보다 더욱 용태가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절대 호전되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는 제힘으로 변소를 오고 다니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처지일지도 모른다.
아니, 내년에는 노망이 나지 말라는 법은 또 어디에 있을까. 작년까지만 해도 자신이 올해 들어서 이토록 나약해질 거라고 상상은 해봤던가. 어쩌면 내년에는 온전한 정신마저 잃고서 벽에 변칠 이나 하는 미치광이 노인네가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대원군이 되고 난 이래로 제 늙은 몸이 나이를 먹는 걸 기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요즈음에 들어서는 두렵기만 할 따름이었다
결국 이하응은 한숨을 내쉬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고 싶은 말은 참 많았지만,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이었다. 그러자니 답신을 적을 의욕도 사라지고 말았다. 온갖 가식을 떨어가며 구절구절 안되는 이유를 억지로 적어 내려가기에는, 그의 심신은 너무나 지쳐있었다.
"거짓부렁을 말하는 것이 이토록 기력을 소모하는 일이었을 줄이야."
콕콕, 하고 펜촉으로 백지 한쪽을 찌르고서는, 이하응은 마침내 그 펜마저 손에서 놓아버리고 말았다. 아무튼, 황태자가, 그의 사랑하는 손자가 손수 공들여 적어 보낸 편지인 이상 언젠가 분명 답신을 해야 하기는 할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도저히 그런 마음이 들지를 않았다. 자정이 지난 새벽녘이라서 그런지도 몰랐다. 원래 새벽에는 사람의 감수성이 유독 제멋대로 굴기 쉽다고 하지 않던가.
지금 이대로 가면 저도 모르게 초대를 받아들여 조선으로 돌아가겠다고 적어 내려가거나, 구질구질한 신세 한탄을 늘어놓게 될지도 몰랐다. 그건 그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구질구질한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 건 죽은 다음에 염라 앞에서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그즈음이면 싫어도 신세 한탄할 수 밖에는 없을 텐데 말이다.
어차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겉으로 보이기에는 떳떳하고 의연하게 떠나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다못해 그가 사랑하는 손자에게 추한 꼴을 보이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답신은 내일 아침에마저 적으면 되겠지."
결국 이날 이하응은 단 한자도 적지 못하고서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마저 적으면 그만이라고 스스로 변명하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내일이라고 과연 가식으로 가득 찬 회답을 보낸 기분이 들까. 그건 그 자신도 모를 일었다.
그 다음 날은 월요일이었다. 전날에 예배를 진행하며 기력을 소진하기도 하였겠다, 이날은 보통 이하응은 긴 수면을 취하면서 몸의 피로를 없애고는 하였다.
그러나 이날은 달랐다.
"허, 이건 또 근래에 보기 드문 손님이 오셨군 그려."
이하응은 그의 교회에 모습을 드러낸 손님을 향해 나지막이 조소했다. 이 미주땅에 절대 어울리지 않을 손님이었다. 이하응에게는 낯설기만 한, 일면식도 없는 손님이었다. 그 손님은 까마귀를 연상케 하는 새까만 군복을 차려입은 대한제국 시위군 장교였다.
무슨 용무가 있기에 그의 교회를 찾아온 것일까. 이하응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별로 긍정적인 가정은 떠오르지 않았다. 기껏해야 그의 마지막 숨을 거두어온 저승사자는 아닌가 하는 의심만 들었을 따름이다. 물론 이제와 다 늙은 추레한 노인네를 죽이러 일부러 한국군이 찾아오는 것도 우스운 꼴이겠지만, 자신과 개똥이의 관계를 떠올리자면 아주 불가능한 가정만도 아니라는 것이 이하응의 생각이었다.
"안으로 들어오시게. 내 나름은 천주당을 빙자하고 있으니, 상담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도와주겠네. 다른 용무가 있다면, 그것도 안에서 듣도록 하지."
그리 부정적인 가정부터 머릿속에 떠올렸으면서도, 이하응은 선뜻 의외의 손님을 그의 교회에 들였다. 정말로 죽이러 온 것이라면 이미 조금씩 죽어가는 몸뚱어리니 괜히 요란 떨 것 없이 실내에서 조용히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 나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 다른 일 때문에 찾아온 것이라면 당연히 만리타향까지 찾아온 손님을 밖에 세워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당연히 실내에 들여야 했다.
그리고 순순히 실내까지 따라 들어온 장교가 밝힌 용무에, 이하응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똥이···그러니까 황상께서 이 늙은이에게 이걸 전하라 했다는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이게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고?"
"예. 황상께서 소인이 대독하거나 하는 일 없이, 직접 확인하도록 하라 전하셨습니다."
엉뚱하게도, 장교는 말하자면 일종의 편지 배달부였다. 물론 황제의 친서를 전하러 온 인물을 과연 일개 편지 배달부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이는 이하응으로서는 생각지도 않은 전개였다. 그를 죽이러 왔다거나, 아니면 조만간 뭔가 큰일이 있을 테니 지켜주러 왔다던가, 무언가 경고를 하러 왔다던가 하는 전개면 모를까 이제 와서 그의 말썽꾸러기 황제가 일부러 친서를 따로 적어 보낼 사안이 있기는 했던가.
이하응은 별다른 감흥 없이 친서를 건네받았다. 한눈에 봐도 글씨체가 정갈하지 못하고서 삐뚤빼뚤한 것이, 이것이 황제가 직접 쓴 친서라는 건 따로 검증해볼 필요도 없지 싶었다.
아니, 그 이전에 첫 문장부터가 누가 봐도 이 개똥이의 필체가 확실했다.
『거 꼬장이란 꼬장은 있는 대로 부리시다가 만리타향 미주에 틀어박히신 이래로 잘 지내고 계시는지 모르겠소. 이제는 목소리를 떠올려보려고 해도 왱왱거리기만 한 것이 지금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건 맞긴 한 것인지 모르겠구려.』
"이놈이 그래도 씨를 내려준 아비한테 못하는 말이 없구나."
이하응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날부터인가, 궁에 입궐한 이래였던가. 아무튼, 그 무렵 즈음부터 갑작스레 사람이 바뀐 듯이 막 나가기 시작한 그의 개망나니는 이제는 나이를 먹어 자식을 다섯이나 보고서도 여전히 망나니 놀음을 고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이제는 그도 이 미국 땅에 있으니 누가 저 망나니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는가.
결국 자식의 행실은 부모에게서 기하는 법이니, 제가 한창 자랄 적의 어린 자식 앞에서 행실을 바르게 하지 못한 걸 탓하는 게 옳을 터였다. 그리고 애당초 이런 소소한 도발 하나하나에 반응하기에는 이하응도 이제는 기력이 너무 쇠한 다음이었다.
무엇보다, 이 친서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다음 줄이었다.
「원래는 직접 찾아가서 전해 드릴까도 생각하였는데, 원래 사람이라는 게 안 하던 짓을 갑자기 하기 시작하면 죽을 날이 찾아온 거라고 하지들 않소? 내 아직도 살아갈 날이 창창한데 괜히 염라국 입궐할 일은 피하기로 하였소. 아무튼, 멋쩍지만 그래도 자식 된 도리로서 말씀드리리다. 축하하오. 이제 기어이 증조할아범이 되셨소. 이 현세에 댁의 증손주가 납셨다, 이 말이오.」
"···허."
그다음줄은 차마 읽을 수 없었다. 이하응은 무심코 손에서 친서를 놓쳐버렸다. 그것이 황제가 직접 친필로 적어간, 결코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귀한 물건이라는 사실조차 잊고서 말이다. 그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증조 할아버지, 증손주. 증조 할아버지, 증손주. 그렇게 몇 번을 속으로 곱씹어 보아도 실감이 나지를 않았다. 이제는 하다 하다 증손주를 볼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서가 아니었다. 증손주를 얻게 되어 기쁘다, 하는 것과도 조금 달랐다.
그에게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그에게 가장 기적 같았던 사실은, 이 소식을 다름 아닌 그 개똥이에게 직접 전해 듣게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아들이, 그 아비에게 증손을 얻었다고 알린다. 그 어찌 보면 너무나도 평범하고 일상적인 부자간의 주고받음이, 이하응에게는 기적처럼만 느껴졌다.
"전주까지 안전히 모셔 오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이하응에게 장교는 말했다. 그 뒤로 그 이름도 기억 못 하는 장교가 뭐라고 하는지, 무엇을 하는지도 이하응의 머릿속으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멍하니, 그저 희미하게 웃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래, 네게는 아직 이 늙은 놈이 아비였던 것이로구나."
어째서일까, 눈시울이 뜨듯했다.
< 아범 > 끝
ⓒ 리첼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