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심 >
약속의 날.
"정말로 괜찮을는지요."
"아, 글쎄 괜찮을 거래도."
이형은 근래 드물게 황후와 가벼운 말다툼을 했다. 사유는 말할 것도 없이 이하응의 귀국에 대해서였다. 이형이 나이를 먹으면서 적잖게 철이든 이래로는 어지간하면 남편의 뜻을 존중해주던 그녀였으나, 역시 그녀도 그토록 경계하고 두려워하던 이하응이 다시 조선 땅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고 하니 심려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그리고 이형 또한 그 걱정이 꼭 괜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하응은 분명 권력욕도 강하고, 제 아들을 대신하여 저 자신이 왕처럼 행세하며 왕으로서 살고자 하였던 인물이었다. 또 그 야망을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다가, 그 마지막의 마지막에서야 미주 대륙으로 건너가 새 삶을 살아가는 듯 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진실인지 아니면 와신상담을 위한 연기였는지 누가 안다는 말이던가.
물론 이제 와 대한제국 황제라는 자리가 그리 간단하게 흔들릴 수 있는 지위는 결단코 아니다. 하지만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듯, 혹시나 해가 될지도 모르는 잔가지를 치워버리고 싶은 심정이야 충분히 이해가 갈 만했다.
그러나 이형에게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
"이제 그 양반도 일흔이 넘었소. 기력도 쇠할 대로 쇠하였을 것이고, 미주에서 살며 미주의 말과 문화를 익혔을 테니 오늘 짐이 만나게 될 아버지라는 양반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적의 아버지와 똑같지는 않을 것이오. 더욱 자유롭고, 더욱 유쾌해졌을 테지. 무엇보다 이제는 오롯이 혼자서 책임져야 할 백성이 생겼으니, 결코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을 거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 양반은 이제 얼마 안 가서 죽겠지.'
이형은 들키지 않도록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이하응은 곧 죽는다. 지금껏 이형이 보아온 인물들이 그러했듯이 이하응 또한 역사 속 그날 그 시간에 죽지는 않겠으나, 다소의 오차범위는 있어도 그의 수명이 이즈음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사실 이미 일흔을 넘겼으니, 이 시대 기준으로도 충분히 장수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이형에게 안도감을 주는 한편으로, 씁쓸함을 느끼게 하는 사실이었다. 그의 가장 큰 정적이었던 이하응이 사라지면서 이제는 정말로 이형의 정적이라고 부를만한 존재가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하였던 동시에, 이형의 첫 번째 전우이자 피만 이어진 아버지였던 그가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하여 마음이 소용돌이치는 듯하였다.
그리고 이 두 감정의 대립 중 끝내 승리한 것은 후자였다. 이형이 손주를 안으며 이하응의 심정을 조금씩 이해하고 그를 동정하게 된 덕택이었다. 이형은 이하응이 그의 피붙이들이 그를 돌보는 속에서 그 파란만장한 삶을 다하기를 바랐다. 그것이 그의 정적을 향한 최고의 예우일 것이며, 또 첫 전우를 위한 최고의 고별사가 될 테니 말이다.
단지 과욕을 부린 죄로 혈육들과 멀리 떨어진 만리타향에서 쓸쓸히 숨을 다하는 벌을 받는다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 아니던가.
"또 제 아비 되는 사람을 이토록 오래도록 머나먼 만리타향에 유배를 보내는 것도 세간 사람들이 보기에 좋지 않을 거요. 무릇 일국의 군왕이란 그 나라 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하지 않소. 그런데 그 모범이 되어야 할 군왕이라는 작자가 앞장서서 불효를 저지르고 있으니, 이래서야 우리 백성은 물론이오, 온 천하가 조선은 아비를 함부로 대하는 불효막심한 나라라 생각하지 않겠소?"
"···폐하께서 그리도 깊이 생각하고 계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하오면, 그날 약물에 손을 대셨던 것도-."
"에헤이, 또 다 지난 일 가지고서···. 그건 잘못했다고 했잖소."
뜨뜻미지근한 시선을 향해오는 황후의 눈초리에, 이형은 애써 험하게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제아무리 장황하게 궤변을 늘어놓아 봐야 옛적에 제가 보인 행적에 꼼짝없이 역으로 당하게 되니, 이 또한 이형의 업이었다. 한참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정면을 향해서만 내달리던 한창 젊었던 시절의 혈기라 이형은 애써 얼버무리려 했다.
황후는 그런 이형을 팔짱을 끼고서 가만히 노려다 보았다. 영 못 미덥다는 눈초리였다. 그간 이형이 온갖 사고를 벌이는 꼴을 누구보다 가까운 위치에서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고 두 귀로 들어온 황후였기에, 이번에도 이형이 또 무언가 사고를 치려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향한 것이다.
그 눈초리에 이형은 내심 분해하면서도 뭐라 반박하지는 못했다. 저 시선에 맞서기에는 그가 생각해도 그간 자신이 쌓아온 업이 너무나 화려했다.
"···진정으로 바뀌셨을는지요."
그런데도 결국, 먼저 항복한 것은 황후였다. 이번만큼은 막으려고 하면 막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 여기서 이형을 꺾는다고 하여 끝이 아니라 이형보다 먼저 선수를 쳐 이하응을 조선에 불러들이려 한 이원철과도 부딪혀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화려한 경력에 비추어 보건대, 황후와 태자의 고집 대결은 대개 태자의 승리로 마무리되고는 했다.
무엇보다 황후가 스스로 생각해도 반대할 대의명분이 마땅치가 않았다. 우선 꼴이 너무 우스웠다. 시아버지를 집 안에 모시기 싫어서 한 나라의 국모가 남편과 장남을 상대로 입씨름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지 않던가. 결국, 황후는 이형의 기대대로 이하응이 바뀌었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뭐, 바뀌지 않았더라면 내 여차여차해서 어련히 잘 빠져나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약을 하고서 노서아 마적단과 부딪혔어도 살아남은 놈이 아무렴 이제 와 다 죽어가는 늙은이 하나 두려워해서 만나지도 못할까."
"황상."
"···험험."
황후의 서슬 퍼런 눈초리에, 이형은 애써 시선을 피했다. 결국, 황후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는 열차를 타고서 전주로 향하는 내내 가실 줄을 몰랐다. 이제는 이하응이 바뀌었을 것이라는 건 믿어도 이형이 아무 사건사고 없이 무사히 끝내고 오는 걸 못 믿겠다는 눈초리였다.
전과가 원체 화려했던 이형은 그저 시선을 피하는 것 외에는 달리 대항할 수단이 없었다.
"와! 빠르다! 저, 이렇게 빠른 건 처음 타봐요!"
"어허, 가만히 있지 못하겠니. 다들 곤란해하고 있지 않으냐."
"에이, 거짓말. 다들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걸! 그죠?"
"그러게 그건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다들 말하지 못하고 있는 거래도···! ···끙."
.
한편, 자식들 쪽은 한결 왁자지껄했다. 한창 이리저리 뛰어놀 나이인 삼남 이휴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전용칸을 들쑤셔 놨기 때문이다. 막내 공주들은 도리어 진득하니 소학을 읽고 있는 와중에, 이휴는 눈 오는 날 마당에 풀어놓은 강아지처럼 날뛰었다. 차라리 창밖을 내다보면서 경치 구경이나 하면 지켜보는 사람도 편했을 것을, 이휴는 호위 무관들의 수염을 당기거나 하면서 사람들을 귀찮게 하였다.
누가 봐도 이건 경우가 아니었으나, 그런데도 환자는 환자인지라. 결국, 아랫사람들은 막지를 못하니 윗사람들이 나서야 하는데, 이남 이강은 평소와 같이 병치레로 불참하였고 황제와 황후는 아직도 묘한 기 싸움이 한창이었다. 그러자니 결국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장남 이원철이라, 그는 열차가 전주에 도착할 때까지 이휴가 사고를 칠 수 없도록 품 안에 꼭 끌어안고 있어야 했다.
저가 아직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고서 아등바등하며 큰형의 옆구리 살을 있는 힘껏 꼬집는 삼남의 괴롭힘을 견디면서 말이다.
"우와···!"
그나마 이원철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전주가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 그런 이휴의 괴롭힘도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이휴의 관심이 장난치거나 형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바깥 경관을 구경하는 것으로 바뀐 덕택이었다. 그만큼, 뒤바뀐 전주의 모습은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의 시선마저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강렬했던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전주 만국박람회의 영향이 컸다. 본격적인 행사준비가 시작된 것은 몇 년 전이었어도, 즉위 30주년을 기념하여 만국박람회를 열겠다 예고한 것은 십수 년 전. 따라서 전주는 그전부터 미리 만국박람회를 준비하기 위해서 찾아온 예술인들과 다시 또 그 예술인들을 만나기 위하여 모여든 예술인, 그리고 전주가 예술인들이 지내기에 좋다는 소식을 듣고서 몰려든 아주 각지의 예술인들로 북적거려왔다.
그리고 다름 아닌 황제가 이렇게 전주에 예술인들이 모여들어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도록 안배해 왔다 보니, 이러한 경향은 나날이 강해질 따름이었다. 만국박람회를 전후로 하여 투입된 인부들을 대상으로 한 유흥시설들이 빠르게 발달하면서부터는 이러한 도시 차원에서의 거품 경제는 정점을 찍었다.
그 결과가 오늘날의 전주였다. 정주가 약동하는 강철의 도시이고, 한성이 눈 부신 빛의 도시라면 전주는 화려함의 도시였다. 거리에는 늘 한국 어느 곳으로 가도 볼 수 없는 화려하고 세련된 건물 양식들로 가득했고, 소문으로는 아주 제일의 미남 미녀들은 모두 전주에 모여있다고도 하였다.
이런 전주에 만국박람회를 보기 위하여 모여든 관람객들이 합쳐져 일종의 거품현상이 더해지니, 아직 낮인데도 하늘보다 지상이 더욱 빛나는 듯하였다. 비록 아직은 햇볕이 쨍쨍하게 비추어 그 진가를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였으나, 그것만으로도 이휴의 시선을 사로잡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이거 면암 그 양반이 여기에 함께 왔었다가는 왕실의 본관을 광대들 소굴로 만들어 놨다고 게거품을 물겠군."
한편 한껏 달라진 전주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한 이형의 반응은 이러했다. 입으로는 곤란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으나, 전혀 곤란한 기색은 아니었다. 되려 기대한 대로 이루어졌다고 만족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얼핏 기차를 타고 가면서 둘러보아도, 거리에는 온통 제각각의 악기나 미술용품들을 지고서 활보하는 예술인들로 가득했다.
비록 이형이 듣자 하니 몸 쓰는 걸 생업으로 삼는 거친 인부들을 대상으로 한 유흥업이 발달하여 치안이 다소 악화하고 저속한 가게들이 늘었다고 했지만, 그런 가게들은 만국박람회를 맞이하여 모두 눈에 띌 일 없는 외곽으로 몰아냈다고 하였다. 그러니 적어도 이형과 그 가족들의 눈에 띌 일은 없었다.
사실, 이형으로서는 눈에 보인다고 해봐야 마약이 유통되거나 거물 범죄조직들의 온상이 되었다는 소리만 안 들리면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내심 저속하다면 얼마나 저속하다는 것인지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던 이형이었다.
"""황제 폐하 만세! 대한제국 만세!"""
"""상제여, 황제를 보우하소서!"""
그렇게 전주에 다다른 황제와 그 가족들을 반기던 것은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역을 가득 메운 환영인파였다. 족히 수천은 될 인파가 단지 황제를 가까운 곳에서 실루엣이나마 보겠다는 일념하에서 모여든 것이다. 아직 어린 이휴나 막내딸들은 이런 격한 반응을 예상하지 못하였던 듯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이형과 이원철 등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며 마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항상 있는 일이지만, 이러고 있으니 꼭 광대라도 된 것 같아 기분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그래, 광대라면 광대겠지. 그렇지만 그게 뭐가 그리 대수랴. 정 마음에 안 들거든, 이 또한 일이라 여기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거라."
물론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어도, 속마음은 조금 달랐다. 처음에는 가슴이 벅차고, 이들이 진정 내 사람들이구나 하여 절로 열정이 샘솟아도 그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공적인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이러면 역시 사람인 이상 질리는 법이 아니겠는가.
거기에 황제 부자가 손을 흔들면 잔뜩 흥분해서는 곳곳에서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보겠다면서 있는 힘껏 손을 뻗는 자들이 종종 나오기도 했다. 물론, 그런 자들은 대부분은 보안요원들에게 두들겨 맞고서 끌려가거나 했지만, 무슨 좀비도 아니고서 어디 갈 때마다 수십, 수백 개는 될 손들이 튀어나오면 당하는 처지에서는 그리 좋은 감상을 품기는 어려웠다.
이형이 말한 대로, 이 또한 일이다-하는 마음가짐으로 대응해야 할 상황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인기인은 괴로운 법이다.
"오, 오오! 황상께서 손을 흔들어주셨다!"
"어떡해, 눈 마주쳤어! 폐하께서 날 똑바로 바라보셨다고!"
"이 멍청이야. 네가 아니라 네 뒤의 시계탑을 보신 거겠지!"
"""만세! 만세! 만만세!"""
그러나 그건 당사자들의 이야기고, 인파들의 감상은 또 달랐던지라.
이형이 호응해줄수록 더더욱 환호성도 커지고, 감정이 복 받아치다 못해 제자리에 주저앉아 꺼이꺼이 하고 울부짖는 인파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몇몇은 양팔을 묵주로 칭칭 휘감고서 황제를 향하여 두 손을 모으고서 눈을 질끈 감고 있는 것이, 신적 존재에게 소원을 빌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리고 대부분은 겉모습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러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한낱 인간이오, 위대한 황제일 뿐일지라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었으니까. 대부분 이런 이들은 무속인이거나 토속 무속에 심취한 자들이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왕왕 있었다. 자신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어떻게든 이를 이해해보려 하는 대신 신비에 의존하는 사람이야 어느 시대에나 있는 법이고, 특히나 지금은 아직 합리적인 이들보다 그렇지 않은 이들이 더 많은 시대인 까닭이었다.
당연히 이런 부류는 이형으로서는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자들이었다. 그래도 나름 뼈 빠지게 일하여 조선을 근대 국민국가로 바꾸어 놨더니 아직도 구시대적인 왕즉불, 왕권신수설에 미쳐서는 한낱 인간일 뿐인 황제를 신이라도 되는 양 숭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게 어딜 봐서 충성스러운 신민이야. 그냥 종교집회가 따로 없구먼. 한양은 그나마 좀 낫더라니, 역시 아직도 지방은 근대화 교육이 덜 되어서 그런가.'
이형은 남몰래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집어치우라고 면박이라도 주고 싶었으나, 오늘 같은 축젯날 공연히 얼굴 붉힐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소 지나치기는 해도, 아무튼 황제의 얼굴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에 모여든 충성스러운 백성이 아니던가. 그들을 무안하게 하는 것도 군왕으로서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오늘은 황제를 무조건 찬양하는 충성스러운 백성만 모인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놈, 걸주야! 내 오늘 하늘을 대신하여 네놈에게 천벌을 내리나- 윽!"
"이런 건 또 오랜만이구먼."
돌연 군중 속에 숨어있던 반반한 양복 차림의 청년이 그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려는 보안요원을 밀쳐 넘어트리고서 자리에서 뛰쳐나와 이형을 향해 총을 겨누었던 것이다. 다만 이 서툰 암살자의 시도는 허무하게 끝났다. 이형이 그대로 손을 뻗어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눈 청년의 손목을 비틀어 버렸던 것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청년은 바닥에 널브러진 보안요원을 대신하여 모여든 헌병대의 손에 끌려나갔고, 청년이 쥐고 있던 권총은 이형의 손에 회수되었다. 나름의 전리품이었던 셈이다. 워낙에 급작스럽게 끝난 일이었던지라, 군중은 무엇이 일어난 지도 모르고서 계속하여 황제를 향해 만세하고 외치기에 바빴거나 황제의 무예에 감격하기 바빴다.
"이건 왜놈들이 만들었던 권총이었을 텐데. 이름이 뭐였더라?"
이형은 자신의 전리품을 잠시 유심히 살피다가, 이내 별 관심 없는 듯 허리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암살자 치고서는 워낙에 어설펐던지라, 일본제 권총을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일본을 의심하기에는 너무 무리수가 컸던 것이다. 방아쇠 당길 시간에 장황하게 제가 거사를 다짐하게 된 이유나 늘어놓고 있던 걸 보면, 극단적 사상에 빠져든 외로운 늑대의 범행일 거라는 가정이 지금으로서는 더 설득력 있었다.
'뭐, 이런 놈들도 있어야 세상 살아가는 맛이 나는 거지. 아무튼, 이런 놈이 전주 땅에 둘씩이나 있을 리는 없을 테고, 신경 쓰지 말고서 즐기기나 하면 되겠군.'
따라서 이형은 이내 그 이름 모를 청년의 얼굴마저 잊었다. 기억할 이유가 없었다. 이 아시아 땅에 그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고, 암살시도는 또 한두 번이던가. 이제 와 놀라거나 마음에 담아두기에는 그는 지금껏 너무나 많은 암살시도를 겪어왔다. 따라서 이형은 내심 안심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기 전에 일이 터졌으니, 이제 행사 도중에는 조용하겠지-하고 지레짐작해 버린 것이다.
그가 꿈에도 알지 못했던 것은, 이날 그를 해하고자 모여든 장사는 고작 한 명으로 끝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 방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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