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꼬임 >
"뭣···."
이는 이형에게도 전혀 의외의 일격이었다. 설마하니 하루에 암살 기도를 두 번이나 당할 줄은 미처 몰랐다-라는 것도 있었지만, 하필이면 이하응과 악수를 하던 참이라 몸을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던 것이 더 컸다. 함부로 달리거나, 탄환을 피하려 몸을 휙-하고 젖히는 순간 이하응까지 덩달아 바닥에 내팽개쳐질 게 뻔했다. 그리고 이미 노쇠한 이하응의 육신은 그와 같은 충격을 감당할 수 없으리라.
최악은 죽을 것이고, 최선이라도 뼈가 부러지던가 반신불수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형은 그를 노리는 암살자가 눈앞에 나타난 그 순간에도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총알을 피하고자 몸을 비트는 순간 저 자신은 살 수 있어도, 이하응이 죽거나 다칠 테니까. 뒤늦게 이원철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 후회되던 이형이었다.
그때였다.
"흐읍!"
이형과 악수를 주고받고 있던 이하응이 이형을 있는 힘껏 잡아당긴 것이다. 그건 전혀 뜻밖의 행동이었다. 우선 노쇠하여 다 죽어가는 노인에게 어찌 그런 힘이 나올 수 있는지도 놀라웠으나, 그보다도 이형에게는 이하응이 자신을 구하기 위하여 위험을 감수했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이 경우 이형은 무사할지 몰라도, 이하응이 크게 다치게 될 텐데 말이다.
세 차례 총성이 울려 퍼졌다. 첫 번째 탄환은 엉뚱한 곳을 향해 날아갔다. 두 번째 탄환은 아슬아슬하게 이형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세 번째 총탄은 이형의 오른쪽 견장을 뜯어갔다. 이하응이 있는 힘껏 잡아당기면서 균형이 무너진 이형은 그대로 그를 잡아당긴 이하응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 충격에 이하응은 비틀거리며 나지막이 신음을 토했다.
당장이라도 뒤로 넘어가려는 듯 위태로이 휘청거리는 이하응의 모습은 바로 전에 추돌이 노쇠한 몸에 결코 가벼운 충격은 아니었음을 보이고 있었다. 이형은 서둘러 팔을 뻗어 이하응의 허리에 둘렀다. 이하응의 노쇠한 몸을 바쳐주기 위해서였다. 허리는 가느다랬고, 힘없이 구부러져 있었다.
이형은 놀라 소리쳤다.
"위험하지 않소!"
"그럼 황상께서는 안전하시답니까?"
이하응은 힘없이 껄껄,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눈가를 파르르 떨며 오른 손목을 왼손으로 쭈물거리고 있는 것이, 조금 전 있는 힘껏 이형을 잡아당기다가 근육이 놀란 모양이었다. 아니, 노쇠하고 부상에 취약한 육신을 생각하면 탈골이 되었는지도 몰랐다. 조금 전에 있는 힘껏 몸통박치기를 당했으니 갈비뼈에도 무리가 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하응은 제 부상에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이번에는 두 손으로 이형의 양어깨를 뒤로 밀쳤다. 앞선 당기기에 힘을 모두 소진했는지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는 가볍고 공허한 밀치기였다. 그러나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절실하고 따스한 밀치기였다.
그에 밀리듯 이형은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힘에서 밀린 것이 아니라, 지금은 밀리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이하응과 떨어진 다음에야 이형은 조금 전 그를 암살하려 시도한 노인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커 헉! 콜록, 콜록, 콜록, 커 흑!"
노인은 그의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끝났음을 두 눈으로 확인함과 동시에 이형을 향하여 달려 나오려 했다. 아니, 더욱 정확히는 뛰쳐나오려 했다. 그 뒤에서 어느 청년이 노인의 뒷덜미를 붙잡아 있는 힘껏 잡아당기지 않았더라면 그는 두 번째 기회를 잡을 수 있었으리라. 경비병들이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서 멍하니 서 있는 동안 청년은 노인의 다리를 걸어버렸다.
그 청년이 사복경찰일지, 아니면 단순한 민간협력자인지 하는 건 그 자리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튼, 뒷덜미를 붙잡히고 다리에 걸린 노인은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고, 탕하는 소리와 함께 발사된 네 번째 총탄은 목표하였던 황제가 아니라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내 쿵-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노인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숨도 쉬지 못하고서 연신 콜록콜록하고 기침해댔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 이상 발버둥 치기에 노인은 너무나 노쇠하였고, 유약했다. 잘 단련된 한창때의 병사조차 제대로 된 낙법 없이 돌바닥에 등부터 부딪히면 최악에는 반신불수가 될 수도 있는 판국에, 어림잡아 족히 이순은 넘을 노인네가 뒷덜미를 붙잡혀 돌바닥에 내팽개쳐진 것이다. 살아서 기침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에잇!"
뒤이어 청년은 있는 힘껏 노인의 손을 짓밟았다. 권총을 손에서 놓게 하기 위함이었다. 단 한 번의 발차기만으로 권총은 힘없이 노인의 손에서 미끄러지듯 풀려났다. 청년은 그 즉시 권총을 멀리 걷어찼다. 핑그르르-하는 소리를 내며 권총은 족히 5m를 미끄러지듯 굴러갔다. 그걸로 노인의 무장해제는 사실상 끝이 났다.
노인은 그 와중에도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것인지 바닥을 뒹굴며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노쇠하고 병든 몸이 도저히 머리를 따라주지를 못하고 있었다. 보글보글하고 게거품이 입가에 맺히고 있는 걸 보면, 이미 정신을 잃었음에도 무의식적으로 계속하여 암살계획을 이어가려고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자, 잡아라! 어서 저 미친 노인네를 붙잡아!"
하지만 그것도 끝이었다. 헌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노인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 위에 포개어 제 몸무게로 누르고 있던 청년을 포함해 3명의 장정이 한꺼번에 덤비니, 제아무리 정신력을 쥐어짜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노인은 그대로 헌병들에게 붙들려 무대 너머로 사라졌다.
"실로 하늘이 도우셨습니다."
흘끗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하고서, 이하응은 희미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부상자는 암살을 시도한 노인과 이하응 두 사람뿐이었다. 표적이었던 이형이 입은 피해라고는 고작해야 오른쪽 견장이 총알에 맞고 뜯겨나간 것뿐이었고, 그 외에는 이하응과 부딪히면서 약간의 타박상을 입은 정도였다.
그마저도 대부분의 충격은 이하응이 흡수한 까닭에 막상 이형이 받은 충격은 극히 미미했다. 이하응은 금이 쩍쩍 간 외눈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어차피 금이 쩍쩍 가 있으니 이대로 계속 쓰고 있겠다고 한들 안경으로서 제 역할을 하기란 어려울 터였다.
"당신···."
이형은 그런 이하응을 혼란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암살 기도야 놀라울 건 없다. 그간 그의 목숨을 노려온 이들이 좀 많았으며, 또 그 연령대나 출신도 좀 다양했던가. 그에게 있어서 이번 암살 기도는 그 무수한 암살 기도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하응이 이형을 구했다. 이건 이야기가 좀 달랐다. 지난날, 이형을 암살하려는 암살자가 나타나 전봉준이 크게 다치게 되었을 때 이형이 가장 먼저 의심한 사람이 누구였던가. 이하응이 아니었던가. 물론 이는 사실과 다름이 확인되었지만, 암살 기도가 발발함과 동시에 가장 먼저 이하응을 의심했던 것부터가 이형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마키아벨리주의자, 그게 이형이 알고 있는 이하응이라는 인물이었다. 이번에도 그 권력을 위해서 이형에게 빚을 지워두려 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만에 하나 저 늙은 몸으로 총에 맞기라도 했다면 오늘을 넘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권력도 살아야 휘둘러 보는 것이지, 죽으면서 이형에게 빚을 지워둬 봐야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이하응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말로 여차하면 죽을 각오를 하고서 이형을 구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따로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 그 자리에서 반사적으로 말이다. 이형은 무언가 말을 건네려다가 말기를 수 번 반복했다. 죽을 작정이기라도 했던 건지, 혹시 저 암살자와 짜고 치는 건 아닌지, 이것저것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이형이 진정으로 묻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도대체 왜?'
"내 죽기 전에 조선 땅을 밟게 해준 보은이라고 생각하시오."
이하응은 계속해서 오른 손목을 왼손으로 쭈물거렸다. 붉게 부풀어 오르고 있는 것이 뼈가 접질렸는지 근육이 놀랐는지는 몰라도 단단히 무언가 잘못되긴 한 모양이었다.
이형은 눈살을 찌푸렸다.
"거 함부로 손대지 마쇼. 그러다가 더 성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요. 아무리 골골 팔십이라지만 건강하게 여든까지 갈 생각은 없는 거요?"
"원래 제 손이 약손 아니겠습니까. 의원의 침 한 방보다도 저는 제 손이 더 잘 듣더랍니다. 그러니 괜한 참견 마시지요."
"허, 참."
이형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하응은 답하지 않고서 히죽 하고 웃어 보였을 따름이다. 관중이 웅성거리고, 경관들이 보안요원들과 협력하여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공범을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동안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서로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아바마마! 할바마마! 무사하십니까?"
태자 이원철이 뒤늦게 두 사람을 향해 달려온 것은 그 무렵 즈음이었다. 본디 각국의 대표들과 함께 제단에 올라 개막 연설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이형을 대신하여 행사 진행을 총괄하기로 되어있던 만큼, 태자는 그 짧은 세에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었다. 온통 식은땀 범벅에 얼굴은 또 새파랗게 질려있으니 이 셋 중 가장 젊은이였음에도 당장 죽을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차하면 그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동시에 세상을 하직할 뻔했으니 그야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으리라.
"그래. ···이 양반 덕분에 말이다."
"건강해 보이니 참으로 다행이구나."
이형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떨떠름하게 답했다. 이하응은 껄껄거리며 환히 웃었다. 이원철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하응이 쉼 없이 손목을 쭈물거리고 있는 것이 불안하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당장 출혈이 눈으로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으니 이만하면 운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원철은 마음을 가다듬고서 이형에게 지금까지 그가 파악한 바를 전했다.
"일단 조금 전 범행은 단독범행이었던 것이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경찰 측에서 미행하고 있던 주요 폭력조직 인사 중 도중에 놓친 이는 없다고 합니다. 아마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신규 폭력조직에 속한 것이 아니라면, 이번 범행은 단독범행이거나 많아야 둘, 셋의 공범들만이 함께한 소규모 범행이라 추정됩니다."
"아니, 아마 공범은 없을 것이다. 공범이 있다면 적어도 이 총보다는 좋은 걸 구해줬겠지."
이형은 성큼성큼 걸어 바닥을 뒹굴고 있던 권총을 주워들었다. 낡아 빠진, 군데군데 녹이 슬어있는 총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그동안 제대로 손질도 하지 않고서 방치하고 있다가 손질도 안 하고 급하게 창고에서 꺼내온 듯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이형은 꼭 그것만이 원인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여기 인장을 봐라. 중화제국 남경 조병창이라고 되어있지 않더냐. 공범이라는 놈들이 있었다면 그리 좋지도 않은 철로 만들어 족히 20년은 현세에 묵힌 복제품을 쥐여주지는 않았겠지. 남경 조병창이라니. 거 참."
이형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참으로 알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역도와 그 동기였다. 한족 민족주의자들의 준동을 경계하고 있었더니, 중원의 선비가 그의 목숨을 노리고서 달려들었다. 자신들은 아직도 이렇게 건재하다고 변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로써 끝일 터였다. 이형은 흘끗 이하응을 돌아보고서는, 다시 이원철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럼 이 영감은 네가 책임지고서 안전한 곳으로 모셔가거라. 네 동생과 엄마도 마찬가지고. 보아하니 오늘 운수가 꼬일 대로 꼬여서 이대로 가면 오늘 하루 안에 암살 기도를 세 번을 당할지, 네 번을 당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를 않아. 난 됐으니까, 어서 너희는 몸을 피해두거라."
"아바마마, 함께 가시지요. 어찌 아바마마께서만 남으신다는 말씀입니까?"
"이놈아. 여기서 내가 몸을 피해 만국박람회가 엉망이 된다면 설령 내가 살아도 결국 저 노인네에게 진 거나 마찬가지다. 겨우 반석에 오른 대한의 천하가 고작해야 저런 다 죽어가는 노인 한 사람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꼴을 보고 싶더냐?"
"하오나···!"
"됐으니까 괘념치 말아라. 영감, 이 기회에 손주랑 두런두런 이야기나 좀 나누고 있으쇼. 여기는 이 못난 놈이 책임지고서 마무리 짓고 올 테니까."
"못 보는 사이에 허세만 또 느셨구려. 좋소. 간만에 혈육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겠지."
이하응은 껄껄 웃으며 이원철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보챘다. 이만 가자고 말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런 간단한 손짓조차도 욱신거리는지, 이하응은 그 직후 오만상을 지으며 제자리에 주저앉아 손목을 부여잡았다.
"끄으응···."
"할바마마! 의원! 의원을 불러오라!"
놀란 이원철이 이하응을 부축하고, 소리 높여 의원을 부르며 멀어져갔다. 그제야 이형은 홀로 남았다. 아니,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홀로 남은 건 아니었다. 이형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각국 대표단들의 앞에 섰다. 그들은 하나같이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혹시나 이번 암살사건과 연관하여 책임을 추궁당하거나 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던 것이다.
그러나 이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오늘같이 좋은 날 무얼 그리도 겁내고들 계시오? 자,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해 봅시다. 이런 가당치도 않은 일로 시간을 질질 끈다면 기다리고 있는 관중에게도 실례가 되지 않겠소?"
직후, 이형은 그대로 곧장 돌아서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뒤를 쫓아 타국의 대표들도 하나둘 조심스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형의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는 도저히 조금 전 암살당할 뻔했던 인물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이형은 마치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또 어디에서 누가 자신을 노리고 있는지 모르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이 당당한 모습은, 조금도 꾸미지 않은 것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럽과 달리 아시아는 평화롭다, 이번 만국박람회는 세계평화를 위한 만국박람회다, 그렇게 열심히 선전했는데···. 그 우라질 늙으신네 때문에 다 말아먹게 생겼군. 젠장 할.'
이형은 내심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역 앞에서 있었던 암살시도는 아무래도 좋다. 그것도 대중이 보는 앞에서 벌어지긴 했지만, 어차피 그들은 한국인이고, 여차하면 함구령을 내려 없던 일로 묻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만국박람회 회장 한복판에서 벌어진 암살 기도는 이야기가 다르지 않은가.
황제가 각국 대표단이 보는 앞에서 암살당할 뻔했는데 이제 어느 누가 아시아를 평화롭다고 생각할까. 물론 전쟁이 한창인 유럽보다야 평화롭겠지만, 유럽 못지않게 모순이 쌓일 대로 쌓인 위태로운 질서이고 거짓된 평화라고 생각할 것임이 틀림없다.
그렇게 되면 일부러 만국박람회의 주제를 평화로 선정한 보람도 없다. 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과시하여 더욱 국외투자를 유치해야 할 시국에 이와 같은 사태는 절대 달갑지 않다. 이형은 이를 악물었다.
'제기랄, 이것만큼은 꼭 남의 걸 훔치는 것 같아서 피하고 싶었는데···. 방법이 없군. 시작해 볼까.'
이형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단 옥상에는 작은 연단과 호른형 스피커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모두 이형의 개막 연설을 위하여 준비된 것들이었다. 본래라면, SP판에 기록할 평화를 기원하는 짧은 연설을 끝으로 제 역할을 다했을 물건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끝날 수 없었다. 그렇게 짧게 끝내고서 마무리 짓는다면, 보나 마나 암살 기도 때문에 급히 마무리 지은 것일 거라는 뒷말이 나올 게 분명했다. 그럼 SP판에 기록될 수 있는 짧디짧은 연설은 물 건너간 셈이었다. 이제 이형의 연설을 모두 기록하려면 적어도 레코드판은 필요할 것이고, 유감스럽게도 아직 이 세상에 레코드판은 개발되지 못했다.
이형은 깊이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숨을 고르고서, 연설을 시작했다.
"내게는 꿈이 있소-."
첫 문장부터 빌려 온 말로 꽉꽉 채워져 있는 연설을 말이다.
< 꼬임 > 끝
ⓒ 리첼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