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딤돌 >
황제가 연단에 서는 순간, 군중의 반응은 그들의 국적에 따라 극명하게 갈렸다.
"오오, 다행히 무사하셨구나!"
"다행이야. 참으로 하늘에서 도우셨어! 하늘에서 우리 대한을 도우시는구나!"
"아무렴, 저분이 저런 같잖은 역도 따위에 당하실 분이신가? 절대로 아니지. 아니고말고. 암!"
한국인들과 범 아주 조약기구에 속한 제후국 국민의 반응은 안도였다. 실로 당연한 일이었다. 작금의 천하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건, 그렇지 않은 이건 간에 그들 모두가 공감하는 바가 있다면 지금 아시아가 무수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건 저 황제 한 사람의 용력 덕분이라는 것이었다.
즉, 황제의 죽음은 곧 전쟁을 의미했다. 그건 그 누구도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민중이 황제의 죽음을 간절히 바라기에는 그들의 삶은 '그럭저럭' 살만했다. 딱히 그들 모두가 한국 수준의 삶의 질을 확보한 것은 아니었고, 아시아에서 가장 우수한 삶의 질을 확보한 한국조차 모두가 행복하고 부유한 지상낙원을 구축한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튼, 그들의 삶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그럼 그걸로 충분했다. 아직 민주주의도, 국민주권의식도 무르익지 못한 아시아 대륙에서 백성 대다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여전히 굶주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작금의 황제는 그들이 굶주리지 않게 하려고 이런저런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황제는 한국 바깥의 백성에게 성군은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자신들을 위해주는 범군 이상은 되었다.
그들 모두가 앞다투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린 것 또한, 당연한 반응이었던 셈이다.
"쓰읍, 아시아도 썩 안전하지는 않은 건가?"
"이쪽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 전 그건 분명히 총성이었지···? 설마하니 공포탄은 아니었을 테고. 이거 영 심상치 않은데···."
"하여간에 배짱 하나는 대단한 황제야. 적당한 대타를 세우고 도망쳤어도 아무도 탓하지 않았을 텐데 기어이 연단에 서다니, 괜히 티무르나 칭기즈칸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군."
"잠깐, 이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어. 이게 도대체 뭔 일이야. 조금 전 그 미친 노인네는 도대체 누구고? 그냥 광인인 건가, 아니면 사상범인 건가? 미친 노인네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문제지만, 저 노인네가 사상범이라면 저 사상에 동조하는 놈들이 몇이나 더 있는지가 문제인데···!"
하지만 범 아주 조약기구 바깥에서 온 외국인들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이들은 황제가 살아 있다는 것에 안도하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황제를 노린 암살 기도야 그동안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것이 아시아 대륙 바깥의 외국인들이 보는 앞에서 벌어진 건 처음이었던 까닭이다. 아시아 대륙 또한,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여도 속으로는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단순 관광객들에게도 이는 적잖은 부담이었지만, 잠시 몸을 피할 작정으로 한국을 점찍었던 이들에게 이러한 사실은 그들 자신의 결정을 재검토하게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말도 통하지 않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국을 점찍었던 이유는 딱 한 가지, 한국이 현 지표상에 존재하는 나라 중 가장 평화롭고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도 그렇게 안전하지만은 않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럼 한국은 도피처로서 조금도 매력이 없었다. 물가가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 비해서 값싸다는 정도를 빼면 말이다. 그나마 그 물가도 한국까지 오는 뱃삯과 시간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인종적으로도 다르고, 말도 통하지 않고, 멀 뿐 아니라 그리 안전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한국으로 몸을 피할 바에야 조금 더 가까운 미국이 배는 낫다. 2차 미영전쟁 이래로 극히 냉각된 영미관계가 다소 우려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말은 통하며 가깝고 인종도 같지 않은가. 이러한 매력적인 대체재의 존재는 망명자들이 끝없이 동요하게 하였다.
'일단 잠시 살피고,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지 않으면 만국박람회가 끝나는 대로 한국을 뜨자!'
'그래도 일단 황제는 무사한 것 같으니까, 당분간 경찰도 크게 늘리고 단속도 강화하고 하면서 철저하게 관리하려 할 테지. 그럼 오히려 사건 이전보다 안전해질 수도 있는 거 아닐까?'
그런데도 사건 직후 군중들 틈새에 군데군데 숨어든 망명자들 사이에서는 즉시 몸을 피하는 게 아니라 상황을 잠시 더 지켜보자고 판단하자는 여론이 주류를 차지했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지금부터 한국을 떠나 다시 미국으로 기반을 옮기는 건 그것대로 끔찍한 수고를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단에 선 황제의 연설은 오히려 아시아 각국의 백성에게보다도 이들에게 더욱 많은 관심을 받았다. 사건 직후 황제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느냐가 곧 앞으로 한국이 나아갈 방향이 될 테니 말이다.
"「내게는 꿈이 있소.」"
'테러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세상이겠지. 보나 마나 철저한 보복과 응징을 이야기할걸. 한동안 시끄럽겠군그래.'
'저 꿈의 내용이 무엇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결론은 우리의 고결한 꿈은 테러 따위에 절대 꺾이지 않는다-하는 내용이겠지.'
'그동안 아시아주의를 심심하면 들먹였으니 오늘 같은 불미스러운 일에도 동요하지 않고서 앞으로도 아시아인들이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자고 말할 것 같은데.'
'아시아가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게 꿈일지도 모르지. 마침 유럽이 흔들리고 있기도 하고, 워낙에 야심만만한 인간이니 충분히 그러고도 남아.'
황제가 꿈이 있다면서 처음 입을 연 순간, 이들은 제각각 황제의 꿈이 무엇일지에 대하여 머릿속으로 추론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들의 추측 모두가 제각각 그 나름대로 합리적인 증거를 지니고 있었다. 당장 암살 기도에서 죽다 살아난 처지니 이 연설을 통해 황제가 자신의 건재함을 알려야 할 필요가 있는 건 그야말로 당연했고, 나머지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암살 기도는 세계인이 보는 앞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황제에게 있어서 최대의 위기이기도 했으나, 이러한 위기가 언제나 그렇듯이 곧 가장 큰 기회이기도 하였다. 위기를 핑계로 또 한 번 아시아를 일치단결시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들은 황제가 이번 위기를 계기로 아시아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갈지 궁금해했다.
이번 암살 기도를 무마하기 위해 더욱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통해 패권을 노려볼 것인가, 아니면 내부의 적을 지목하여 숙청의 기회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관용과 포용을 내세워 아시아주의라는 그들의 이상을 재확인하고 사실의 결속력을 다질 것인가.
그러나, 황제가 뒤이어 입에 담은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저 태평양의 가장 깊은 심해에서 히말라야산맥의 가장 높은 산꼭대기까지. 우리의 자손 중 그 누구도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지 아니하고, 그 누구도 우리의 또 다른 자손의 손에 목숨을 잃지 아니하는, 그런 세상을 짐은 꿈꾸고 있소.」"
엄밀하게 말하자면, 조금도 예상할 수 없는 내용이었던 건 아니었다. 이번 전주 만국박람회의 주제가 무엇이었던가. 평화가 아니었는가. 그러니 개막 연설을 맡은 황제가 세계평화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딱 하나, 암살 기도가 없었다면 말이다. 더욱이 당장 자신이 죽을 뻔하였고, 황제의 용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작금의 질서가 공중분해 될 뻔했던 위기를 바로 직전에 겪고서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만국박람회의 주제로 돌아온 그 천연덕스러움에는 차마 말을 잃지 않을 수 없었다.
저게 과연 미리 준비된 대본일지, 아니면 즉석에서 읊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쪽이건 황당한 건 마찬가지였다. 전자건 후자건 조금 전 사건을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만들 작정이라는 뜻이었으니까. 그야 물론 황제의 권위가 절대적인 아시아 내에서라면 무리 없이 그렇게 만들 수 있겠지만, 외신기자들은 어쩔 셈인가?
'제 권력을 너무 과신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들려 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의 입을 모조리 틀어막는 건 불가능할 텐데?'
외신기자들은 아연해 했다. 이들은 황제가 자신들의 입을 틀어막으려 하는 것이라고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암살 기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이미 만국박람회와 세계평화라는 본론으로 넘어간 마당에 이제 와 다시 암살 기도라는 소주제로 돌아가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황제는 조금 전 불상사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하지도 않을 작정인 듯 보였다.
하지만 그조차 아니었다.
"「쉽지 않을 것이오. 아니, 어쩌면 우리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멸종하는 그 순간까지 이루어지지 않을 일일지도 모르지. 당장에 이 자리에 선 짐조차 조금 전 짐을 시해하려 하였던 괴한의 총구 앞에 서는 걸 모두가 보았거나, 들었을 거라 믿으리다. 그러나 짐은 그자를 비난한 생각도, 증오할 생각도 조금도 없소.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꿈을 꾸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하늘을 보라, 달을 보라, 태양을 보라. 이렇게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는 있을 것이오. 짐은 황제이니, 매일 정오 무렵이면 태양을 우러러보지 않는다면 벌금을 내도록 법을 제정하여 이 대한 땅의 모든 이들이 그리하도록 강요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 무의미하고 일견 바보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짓을 마음속 깊이 좋아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오.
우리의 육신은 부자유하오. 폭력은 너무나 쉽게 인간 개개인을 노예로 만들 수 있소. 그러나 그 어떤 강대한 폭력도 노예가 자유를 꿈꿀 권리마저 앗아갈 수는 없소. 그 어떤 부조리도 인간에게서 상상하고, 꿈꿀 권리를 앗아갈 수는 없소. 우리의 정신은 언제, 어떤 환경 속에서라도 자유롭소. 우리가 스스로 그런 자유로운 정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의 굳건한 정신은 결코 부조리에 굴하지 않소.
그 때문에 짐은 그자를 탓하지 않을 것이오. 평화를 바라는 것이 짐의 꿈이라면, 이 평화가 깨지는 것이야말로 그의 꿈일 테니까. 우리는 단지 생각하는 것이 달랐을 뿐이고, 꿈이 달랐을 뿐이오. 그러니 증오할 필요도, 탓할 필요도 없소. 단지 짐이 조금 더 조심하면 그만인 일이 아니겠소?」"
그런대로 이형의 연설을 따라가던 외신기자들은, 이 시점 부로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고 말았다. 일단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도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은 무한하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이념의 자유를 말하고 싶은 것인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세계평화인가. 그리고 증오하지 않는다는 건 그냥 하는 소리인가, 아니면 사면령을 내리기 위한 포석인가?
당장에라도 이게 다 무슨 말인지 설명해달라고 수첩과 펜을 챙겨 들고서 달려들고 싶어도, 황제는 그런 외신기자들의 혼란을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아니, 어쩌면 아예 관심 자체가 없는지도 모른다.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제 이야기를 계속하여 이어가고 있었다.
"「이렇듯, 모두가 평화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오. 누군가는 평화를 바라나, 또 누군가는 전쟁을 바랄 것이고, 아예 전쟁이건 평화건 무관심한 이들도 있을 테지. 그러니 세계평화란 어려운 것이오. 우리의 자손들이 손에 손잡고 근심, 걱정 없이 하하 호호하는 낙원은 우리 인간들이 멸종하는 그 순간까지도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오.
20억 인류 모두가 제각각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고 바라는 것이 다른데, 어찌 모두가 서로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겠소? 그건 공상에 지나지 않소. 그러니 그런 허무맹랑하고 어처구니없는 도원향 이야기는 이즈음 해두고서, 조금 더 현실적이고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 법한 평화 이야기를 해봅시다.
앞으로도 인류는 계속하여 서로 증오하고 힐난할 것이오. 머리채를 쥐어뜯으면서 너희 어미가 어떻고 너희 아비가 어떻고 지껄여대겠지.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달라서 다툴 것이고, 탐욕 때문에 다툴 것이고, 정욕 때문에 다툴 것이오. 하지만 최소한 이러한 폭력사태를 개인 차원의 일로 만드는 것 정도야 가능하겠지. 그리하면 여전히 인류는 평화롭지 않을 테지만, 세계는 평화로울 것이오.
그것이 짐이 생각하는 세계평화요. 인간 개개인이 끝없이 다투고 증오한다고 한들, 국가 간의 대규모 폭력사태는 이루어지지 않거나 극히 드문 세상. 그것이야말로 짐이 꿈꾸는 꿈이라오.」"
거기까지 말하고서 황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고서는, 다시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혹자는 말할 것이오. 그게 무슨 세계평화냐고, 호랑이를 그리려 해야 고양이는 그리지 않겠느냐고 말이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황제란 지위는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꿈을 꾸는 자리가 아니오. 현실적으로 이룰 수 있는 당장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 나라를 이끌어가는 것이야말로 이 몸의 소임이 아니겠소? 짐은 이만하면 충분히 현실적인 타협점이라고 믿소.
물론 그래도 여전히 이조차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오. 그러나 옛 선현들이 이르기를 티클 모아 태산이라고 하였소. 기나긴 인류의 역사에서, 짐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중간지점에 지나지 않지. 짐의 세계평화는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하여 남길 디딤돌이 될 것이오. 우리의 다음 세대는 이 디딤돌을 디디고 올라서 이보다 높은 경지를 노릴 수 있겠지.
종국에는 그들도 또 새로운 디딤돌을 그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것이고, 그다음 세대도 그리 반복할 것이오. 그렇게 역사는 이어져 나갈 것이고, 그럴수록 조금씩 세계평화는 우리 세대에서 허무맹랑하다고 치부하였던 이상에 조금씩 가까워져 가겠지. 우리 세대의 세계평화는 그 위대한 통과지점이 될 것이오. 짐은 그렇게 믿소.」"
황제는 그리 말하면서 쿵쿵, 하고 가슴팍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외신기자들은 한껏 귀를 쫑긋거렸다. 이걸로, 황제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분명해졌다. 문제는, 그 이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맥락상, 그 수단은 바로 이다음에 나오게 될 터였다. 그것이 외신기자들에게 목이 마르게 하였다.
연단에 선 황제는 찬물을 한 모금 들이키고서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렇다면 우리 세대의 평화를 위하여 무엇이 필요할까. 짐이 단언컨대, 그 해답은 천하회맹에 있다고 믿소. 열강들이 평화를 수호할 패자가 되어 세상의 평화를 수호하고자 그 의무와 책임을 할 것이고, 세계 각국을 대표하는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세계의 중대사를 논하게 될 것이오. 물론 모이기조차 쉽지 않을 것이고, 무탈하게 운영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야 낫다고 짐은 확신하오. 우리 세대가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다음 세대가 더욱 높은 곳으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해주지 않는다면, 우리 다음 세대는 더욱 높은 곳을 노리기는커녕 제자리를 유지하는 것조차 벅차 허우적대기만 하다가 바통을 넘기게 되겠지.
그건 우리 자손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우리 자손들에게 대단한 선물을 물려줄 수는 없어도, 하다못해 우리가 진즉 처리해야 했을 짐 덩어리를 떠넘기지는 맙시다.」"
여기까지 말하고서 황제는 말을 멈추었다.
멈추고서, 연설을 마무리 지었다.
"「처음에는 무기를 겨누고 이야기할 테지. 그다음에는 무기를 은근히 과시하면서 이야기할 것이고, 그 뒤에는 무기를 숨긴 채 가식적인 미소를 띤 채 이야기하다가 마침내 우리 손에 쥐고 있던 무기를 자연스럽게 놓고서 이야기하게 되는 순간, 그 순간 비로소 세상은 진정으로 평화로워질 것이오.
짐은 오늘 이 만국박람회가 그 디딤돌이 되기를 바라오. 우리의 다음 세대가 이 디딤돌을 밟고서 더욱 높은 곳을 향하여 도약하기를 바라오. 그리고 이를 위하여 그대들 또한 짐과 뜻을 함께해주기를 바라오. 그것이야말로, 짐의 꿈이오.」"
황제는 청중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잠시간, 관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서 멍하니 연단 위에 선 황제를 올려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짝짝짝.
한참이 지난 뒤에야, 누군가가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박수 소리가 커지고, 함성이 섞여갔다. 종국에는, 행사장이 떠나갈 듯한 거대한 함성과 박수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다음 세대를 위한 디딤돌이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 디딤돌 > 끝
ⓒ 리첼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