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두운 미래 >
다만, 빌헬름 2세가 제시한 고민 해결법이란 다소 과격···하다는 표현만으로도 부족한 것이기는 했다.
시작은 어느 날, 베를린에서 비밀리에 영국 대사와 만난 빌헬름 2세가 전후 신성로마제국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논하게 되었을 무렵이었다.
"이제 전쟁을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소? 어차피 우리 프로이센이 애초 원하였던 것은 독립을 인정받는 것이었고, 이는 오늘날 우리가 이룩한 전공으로서 충분히 달성되었다고 보오. 짐은 이제 우리 두 나라가 전쟁이 끝난 다음을 논할 때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소."
"예, 분명 그 말씀대로입니다. 우리 대영제국에서는 이번 종전 협상에서-."
"그저께였던가? 신문에서 실로 오만방자하기 그지없는 논설을 읽었소. 극동의 이교도 황제가 세계평화가 어떻다느니 유럽에서의 전쟁이 어떻다느니 마치 우리에게 들으라는 듯이 가당치도 않은 설교를 늘어놓고 있더구려."
"···예?"
그 순간, 영국인 대사의 머릿속은 한마디로 줄여서 「도대체 지금 그게 왜 여기에서 튀어나오는 거야?」로 압축되고 말았다. 그 또한 만국박람회가 화려한 막을 올리면서 한국의 황제가 어떤 연설을 늘어놓았는지는 읽었고, 벌써 세계를 논하는 황제의 다소 과한 포부에는 혀를 차기도 했지만-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라는 말이던가.
분명 한국은, 아시아는 전후 위협적인 경쟁상대가 될 것이 분명했다. 본국 또한 이에 대하여 골머리를 싸매고 있다는 것도 들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점은, 그걸 왜 프로이센의 국왕이 지적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전대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3세 시절부터 식민지가 부재한 프로이센은 한국과의 관계개선으로 아시아 시장 진출을 꾀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들이 노릴 수 있던 유럽 바깥의 시장이라고 부를만한 곳은 오직 아시아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점 때문에, 영국에서는 전후 한국을 어떻게 견제하면 좋을까 고민하면서도 프로이센의 도움을 기대하기란 어려울 것이라는 중론이 모여지고 있었다. 전후 빠른 전후복구와 경제회복을 위해서라도 더욱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면 맺었지 결코 멀어질 수는 없는 위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빌헬름 2세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이러한 영국 외교부의 판단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내용이었다.
"감히 극동의 노란 원숭이들이 전쟁을 어서 끝내라며 독촉을 하다니. 너무나 굴욕적인 글이었소. 도대체가 그런 변방의 야만인들이 세계를 논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오?"
"흠, 흠! 폐하, 흥분하셨습니다. 잠시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자, 우선 이 뉘른베르크 자유시 설치 문제에 대하여 우리 대영제국에서는-."
"아니, 난 충분히 냉정하다고 확신하오. 애당초, 그 이교도 황제의 오만방자한 논설을 당당히 신문에 실은 기자라는 작자들은 또 무슨 생각인 거요? 제아무리 화제를 만드는 게 저들의 일이라지만, 정도가 있어야지! 전선에서의 승리에 관하여 한 자라도 더 적어도 부족할 중요한 시기에 이따위 얼토당토않은 헛소리로 내 백성의 마음을 어지럽히려는 저의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이오!"
국왕은 진노한 듯 보였다. 아니, 진심으로 진노하였음이 틀림없었다. 대사가 일부러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서 주제를 돌리려고 했는데도 무시하고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즈음부터 대사는 자신이 원하였던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한참은 더 필요할 것이라는 걸 직감하였다.
괜한 걸음을 하지 않으려면 일단 지금은 국왕의 분노를 받아내고서, 어느 정도 진이 빠진 다음 적절한 시기에 화제를 돌리는 게 최선일 것이라 대사는 판단하였고, 그 이후로도 국왕의 진노는 계속하여 이어졌다.
"더욱 모욕적인 사실은, 이러한 모욕에 어떠한 대응도 할 수 없는 우리의 비참한 현실이겠지. 우린 너무나 오래도록 같은 기독교 형제들끼리 다투고 말았소. 짐은 지금이야말로 서로 간의 묵은 원한을 잠시 뒤로 미뤄두고서, 저 동쪽으로부터의 위협에 더욱 집중하여야 할 때라고 판단하오."
"예, 분명 그렇습니다. 특히나 지난 반 세기간 한국인들의 성장은 분명 위협적이었지요."
"그렇소.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시피, 옛 대 로마제국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서구 기독교 문명은 오래도록 이 야만과 무지의 어둠으로 물든 세상을 밝히기 위하여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안배하신 한줄기 등불과도 같았소. 우리는 무수한 위기를 경험하였고, 그때마다 눈부신 용기와 찬란한 지혜, 그리고 전능한 창조주를 향한 깊은 믿음으로 이를 극복했소.
그러나 지금 그 등불은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롭소. 우리 백인들의 피가 오대양과 육대주를 물들이고 있다는 말이오. 우리 신실한 백인들의 피로 오대양이 붉은빛으로 물드는 동안 우리의 적들은 우리의 분열을 부추기고 조롱하며 나날이 그 세력을 키워왔소. 이제는 때가 왔다는 말이오."
"유럽이 다시금 하나가 될 때를 말씀하시는군요?"
"바로 그렇소! 그리고 그 선봉에는 튜튼 기사단의 후예, 기독교 문명의 방패, 우리 프로이센이 있을 것이오! 만일 그대들 영국이 저들과 전쟁을 각오한다면, 우리 프로이센은 언제건 이 위대한 십자군을 위하여 노력과 성의를 아끼지 않을 것이라 약속드리리다!"
빌헬름 2세는 열변을 토해내며 있는 힘껏 팔을 붕붕 휘둘렀다. 그는 진심으로 또 한차례의 전쟁을 바라는 듯 보였다. 이미 전쟁을 치르고 있는 와중에 말이다. 그의 언변에서는 일종의 신앙마저 느껴졌다. 무언가 이익을 추구하고자 전쟁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 길이 옳다고 믿기에 전쟁을 외치는 광신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열적인 언변이 영국 대사에게도 그와 같은 정열을 불러일으켰는가 하면- 정반대였다는 것이다.
'지금 이 작자가 제정신으로 이런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건가?'
대사는 내심 헛웃음을 흘렸다. 한국과 싸우자. 아시아를 견제하자. 그런 방향성은 좋다. 영국 내에서도 은근히 그와 같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아주 잘못된 주장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도대체 왜 영국에서 먼저 제안한 것도 아닌데 저 혼자 열을 받아서는 영국에 전쟁하자고 부추기냐는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후일에라도 유럽과 아시아가 완전히 척을 지고 나면 가장 곤란한 건 프로이센이 아니던가? 영국이 프로이센의 물주라면, 아시아는 프로이센의 가장 큰 고객이 아니던가. 물주에게 싸움을 거는 미치광이도 제정신은 아니지만, 단골에게 싸움을 거는 미치광이는 그보다 더했다.
'틀렸어. 이래서야 한국에 맞선 다국적 연합군 같은 건 꿈속에 꿈이야. 국익과 이해관계로 똘똘 뭉쳐도 부족할 판국에 이런 호전광이 아군이라니, 맙소사. 이대로 두면 알아서 저들에게 명분을 떠먹여 줄 판국이잖은가.'
대사는 머릿속으로 잠시 빌헬름 2세의 주장대로 십자군이 조직될 경우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안 그래도 제국주의 침략자와 피해국이라는 구도가 만들어진 판국에 저런 호전광이 한 축을 담당하여 매일 같이 호전적인 언사를 늘어놓는다고 생각해보자. 누가 봐도 침략자 그 자체가 아닌가.
빌헬름 2세를 위시한 황화론에 물든 여러 나라가 이와 같은 언사를 공식 외교 석상에서 쏟아낸다면 아시아 나라들은 침묵하고만 있어도 도덕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설령 공적인 외교 석상에서는 이 정도까지 호전적인 발언을 내뱉지 않는다고 쳐도, 머릿속이 이런 지경이라면 가벼운 도발만으로 전쟁을 감행하거나 반대로 전쟁을 기도하여 무력도발을 취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물론 그 두 가지 경우 모두 세계적으로 침략자나 호전광 낙인이 찍히는 건 당연하다. 영국의 딜레마는, 이런 호전적인 동맹을 끌어들여 반 아시아 공동전선을 구축한다는 것도 미친 짓이지만 그렇다고 누구보다 적극 반 아시아 공동전선을 외치는 이들을 버리고 가는 것도 모양새가 빠진다는 점이었다.
겉으로는 반 아시아 공동전선을 외치고 있지만, 프로이센처럼 적극 공동전선에 합류하고자 하는 나라를 배제하는 걸 보면 결국 진짜 목적은 아시아와 맞서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말에 고분고분한 나라들을 끌어모아다가 패권을 구축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게 프로이센 정부의 전체의 뜻인지, 아니면 국왕 개인의 사적인 의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시한폭탄을 떠안고 가기란 무리다.'
결국, 대사의 결론은 이러했다. 그리고 이는 당연한 결론이었다. 한국과 아시아를 견제하려는 건 현시점에서 지극히 당연한 판단이었지만, 이 문제를 다루려는 일체의 외교적 행보는 폭탄을 해체하듯 조심스러워야 했다. 우선 한국은 현시점에서 영국과 왕실 간 혼인에 서약한 우방이었으며, 당장 도덕적 우위에서도 한국이 더욱 우세했다.
언젠가 파탄 날 수밖에 없는 관계라도, 그 파탄은 한국이 영국을 배신하였기에 시작되는 것처럼 연출 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국민은 어째서 이런 전쟁을 시작해야 하는지 의구심을 품을 것이고, 국제여론의 동정 또한 한국에 쏠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전쟁을 하려거든 언제든 연락하라는 빌헬름 2세의 제안은 고맙기는커녕 당혹스럽기만 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대사로서는 오늘의 이 대화가 혹 바깥으로 새어나가지는 않을까 두려워 미칠 지경이었다.
"굉장히 인상 깊군요. 훌륭한 말씀이십니다. 영국은 오랜 맹방 프로이센의 헌신을 기억할 것입니다."
"하하하, 그렇다면 다행이구려. 반드시 기억해주길 바라오. 오늘 내가 한 말을 결코 가볍게 듣지 마시오. 더 늦기 전에 저들을 치지 못하면 우리 백인들이 흘려야 할 피가 더욱 늘어나게 되고 말 것이오."
"알겠습니다. 기억해두지요. 하지만 시기상조가 아니겠습니까? 맥없이 밀리던 전쟁 초기와 다르게, 합스부르크 군은 나날이 강성해지고 있습니다. 분명 우군이 전략적으로 우위를 차지하였고, 앞으로도 이러한 우위는 더욱 공고해질 것으로 보입니다만- 저들은 아직 패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러시아 전선에 투입되어있던 전력이 하나둘 보헤미아에 재투입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시아도 물론 중요하지만, 우선은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발악을 정리한 다음에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에 맞지 않겠습니까?"
"···흠, 그것도 그렇구려. 실례했소."
빌헬름 2세는 눈살을 찌푸린 채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말을 대사가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았다는 걸 눈치채고서 불쾌해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계속하여 전선에서 들려오는 승전보에 취하여 신성로마제국군의 반격을 전혀 경계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 또한 되었다.
대사는 그날로 곧장 이날의 대화를 소상하게 정리한 암호문을 본국에 전달하였다. 당연하게도,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영국 외교부 장관 로버트 게스코인세실의 심경은 참담 그 자체였다.
"할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기존의 접근법으로 한국을 견제하기란 불가능하다. 어떻게 핑계를 대도 우린 추잡하게 기득권을 지키려 발악하는 제국주의 침략자로 끝나고 만다. 그렇다면 아예 우회하는 수밖에 없어."
결국, 영국 외교부는 아예 외교적 대전략을 새롭게 짜내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과 아시아에 맞서 유럽의 여러 열강과 힘을 합친다는 구상 그 자체는 그대로 유지하되, 아예 대외적으로는 별개의 목적을 가진 국제기구인체하자는 발상이었다. 이는 말하자면 일종의 유럽판 범 아주 조약기구와 같은 조직을 전후 유럽에 설치하자는 논의였다.
물론 아시아의 그것보다는 훨씬 구속력이 부족한, 일종의 초대형 관세동맹에 가까운 것이었다. 애당초 그 이상의 결속, 예를 들어서 군사동맹 같은 걸 요구하자면 무리가 많았다. 당장 서로 총을 겨누어 피 흘려 다투던 병사들이 적국 병사들과 함께 공동훈련을 진행하는 것부터가 불가능했다. 마찬가지로 국경 검문을 느슨하게 만드는 것도 미친 짓이다. 당장 러시아에 지금 어떤 성향의 정권이 들어섰던가?
이러한 논의에 가장 큰 장점은 당연하게도 직접적으로는 한국이나 아시아를 견제하려는 목적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빠르게 유럽의 여력을 회복시켜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사실, 아시아를 견제하자면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아시아는 지금 유럽을 무섭게 따라붙고 있는 것이지, 추월한 게 아니었다. 유럽이 전쟁이 끝나고서 본래의 성장세를 회복하기만 해도, 아시아의 추격을 여유롭게 따돌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영국에서 빌헬름 2세가 나서기 전에는 이와 같은 논의를 꺼리고 있었던 이유는, 그 장점을 아득히 웃도는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경제적으로 자살을 택했다. 그들의 패권주의적인 외교적 행보와 강압적인 독재정권은 그 누구도 프랑스와 거래하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나 독일이 둘로 나뉘고 런던이 잠시나마 프랑스군의 군화 아래 짓밟혔던 오늘날. 아시아에 맞선 공동전선을 꾀한다면··· 결국 우리는 좋건 싫건 프랑스와 거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그간 영국 외교부가 유럽판 범 아주 조약기구를 설치할까-하는 논의조차 하지 않았던 가장 큰 원흉이었다. 지금 이 유럽에서 가장 피해가 작은 열강을 꼽아보라고 하면 단연 프랑스가 으뜸이었던 것이다. 전후복구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유럽 각국이 관세동맹을 맺는다면, 유럽 경제는 빠르게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될 터였다.
그건 영국에 여우를 견제하기 위해 호랑이와 손을 잡으라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미 프랑스와 싸워 저지대에서 패하지 않았던가? 잠시나마 런던을 빼앗기기도 했던 만큼, 지금은 와신상담을 위해서라도 빠르게 전쟁을 끝내고서 힘을 회복할 차례였다.
"이는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가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이외에 달리 수가 없으니."
게스코인세실의 한탄은 이러한 영국 외교부의 딜레마를 무엇보다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이 무렵 영국 외교부는 그들과 세계의 미래를 어떻게든 가늠해보기 위하여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최선의 구도는 한국과 러시아, 프랑스와 미국이 양대세력을 중심으로 국제질서가 재편되고 영국은 제3의 세력으로 남았다가 결국에는 양대세력이 서로 다투어 공멸하고 영국만이 남는 구도였다. 그러나 영국 외교부 내에도 일이 이렇게 술술 풀리리라 기대하는 이들은 없었다. 무엇보다 공멸이 아니라 어느 한쪽이 나머지 세력을 정리하고 단독 승자가 되면 뒷감당할 수 없었다.
그다음 차선은 러시아가 혁명의 혼란기를 극복하지 못하고서 몰락하여 동방에는 한국만이 남고, 프랑스와 미국이 서구를 대표하는 양대 열강으로 경쟁하면서 영국은 그 사이에서 제4의 세력이자 조정자로서 대서양의 균형을 조율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 구도는 영국 외교부 내에서 그들이 목표로 해야 할 지향점이라 평가되었다. 그리고 가장 현실적이라 평가되기도 하였다.
한국은 프랑스, 미국과 사이가 나쁘지 않고, 장차 미국이 성장할수록 프랑스와 미국의 경쟁도 치열해질 테니 말이다. 물론 이 가정에는 영국이 쇠락하여 더는 프랑스와 미국에 경쟁상대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굴욕적인 전제 조건이 붙었으나, 그들은 이를 감수하기로 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이미 영국의 절정기는 지난 지 오래였으니까.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구도는 러시아, 프랑스, 영국, 미국, 한국 5대 열강의 경쟁 구도. 이 경우는 러시아가 혁명 초기의 혼란상을 빠르게 극복하여 한국의 영향력에서 조기 이탈하는 경우였다. 이 경우에는 이번 세계대전에서 초토화된 독일이 회복하고서 다시 주요 열강 중 하나로 우뚝 서고 머지않아 이탈리아까지 포함한 7대 열강으로 재편될 테니 영국은 열강 1위 자리를 놓치더라도 계속하여 일류 열강으로 남을 수 있을 터였다.
제아무리 영국이 쇠락하였어도 전쟁으로 초토화된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에 비할 바는 결코 아니었으니까.
단연 최악은 프랑스와 한국, 미국 3대 열강의 경쟁 구도로 재편되는 것. 이는 한국이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해군력을 충당하여 이들 3대 세력 간의 건함경쟁이 붙었을 경우다. 이 구도가 만들어지면 인도를 놓아준 영국이나 해군력이 보잘것없는 러시아는 자동으로 세계적 열강에서 탈락해 지역 열강으로 전락한다. 세계는 아시아를 독점한 한국과 유럽을 제패한 프랑스, 아메리카를 평정한 미국 3대 열강의 새로운 해상질서 아래 재편될 것이다.
이 경우 영국은 단독 세력으로 남을 수 없다. 늦기 전에 프랑스건 미국이건 한국이건 어느 한 세력을 고르지 않으면 당장에 대서양 패권을 갈망하는 미국과 프랑스 사이에 끼어서 파멸한다. 영국 혼자서는 글자 그대로 대륙 하나를 통째로 쥐어짜 전함을 건조할 재화를 뽑아낼 이들 3대 열강의 건함경쟁에 맞설 수가 없을 터였다.
"그럼, 이제 슬슬 이순신급 전함 사업의 진도를 뽑아 보실까?"
그리고 이는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곳에서 시시각각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 어두운 미래 > 끝
ⓒ 리첼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