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해사업 >
이날의 밀담은 이형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뜻하지 않게 두 마리 토끼를 얻은 것과 같았다. 우선 첫째로는 그간 한국의 발을 두고두고 잡아 온 독자적인 제철 기술의 부재를 해결했다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선뜻 배제하기도 어려웠던 카네기 제철의 막대한 경제적 영향력을 손쉽게 해결했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천운이 따랐던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순신급 전함 사업에는 커다란 난점이 남아 있었다. 바로 한국에서 그와 같은 거대한 전함을 건조해본 경험이 당연히 없거니와, 무엇보다 그 이전에 한국에서 독자적인 기술력을 통하여 건조한 군함은 초계함급이 최대였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 부분은 앞선 철강업 기술에 비하면 이렇다 할 걸림돌도 되지 못했다.
"우리에게 그와 같은 기술도 비결도 없다면, 이제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리면 되는 것 아닌가? 우선은 초계함, 그다음에는 구축함, 그다음에는 순양함들로 차근차근 밟아 나가면 되겠지. 장차 이 대한의 모든 조선소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서 군함을 만들 수 있도록 하라."
이형의 해답은 실로 간단했다. 부족한 비결을 최대한 다양하고 많은 함선은 건조하면서 메우기 위하여 대대적인 건조사업을 지시하였던 것이다. 어차피 이제는 월남까지 범 아주 조약기구에 가입하여 저 멀리 남안까지 방위하기 위해서라도 해군력 증강이 절실해지기도 했던 만큼, 이는 시기적절한 사업이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결정은 다소 모험이기도 하였다. 당장에 만국박람회에 신농유업 사업 등 천문학적인 재화와 인력이 동원될 수밖에 없는 사업을 연달아 벌이면서 동시에 장차 이순신급 전함 건조를 위한 해군력 증강과 건조 기술 축적에 나선다는 것부터가 그러했다. 10년 안에 이순신 전함을 건조하기 위한 기술력을 축적한다는 목표로 매년 수십 척씩 신형함이 건조되고 취역 될 예정인 초대형 건조사업이 국력 소모가 적을 리가 만무했다.
거기에 이걸로 끝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국민보험을 위시한 기초국민복지 도입도 있지 않던가? 새롭게 돈이 들어올 구석은 없이 돈을 쓸 구석만 나날이 늘어가는 판국이었다. 만일 도중에 공황이 찾아오거나 한다면 당장 사업이 축소되거나 취소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재정이 파탄 날 위험이 컸다.
그러나 이형은 이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아시아는 평화로웠던 반면에 유럽이 전쟁 중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시아 대륙은 전에 없는 호황기를 맞이하고 있던 것이다. 말하자면, 새롭게 돈이 들어올 구석이 생긴 것은 아니었어도 기존의 수익이 크게 불어난 정도는 되었던 셈이다.
'이건 거품 같은 호황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어차피 끝날 호황이야. 그리고 이 거품이 꺼지고 호황이 끝나고 나면 코쟁이들이 대가를 요구하겠지. 그 전에 최대한 일을 벌여두고 결실을 봐둬야 해.'
무엇보다 이형은 자신이 무리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모를 수가 없었다. 당장 본인의 입으로 국민보험 등의 기초 복지가 얼마나 전후 유럽 열강들에 재정부담이 될 것인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이형이 일부러 이를 밀어붙인 건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안정적인 성장이 아니라 또 한차례의 속도전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형은 직접 영국 귀족원에서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 엿듣지는 못했으나, 그들이 한국의 성장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무언가 대책을 연구하고 있을 것이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이 반대의 관점이었다면 어떠했을까만 생각해도 이형에게는 눈에 선했다. 그간 한국의 맹방이라 할 수 있던 미국도 이번에는 믿을 구석이 못 되었다.
그간은 미국의 시장이자 경제영토였기에 보호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아니었다. 당장은 영국이 더 급했으니까 적당히 태평양 한복판에 선을 그어 신사협정을 맺었던 것이지, 이제 전쟁이 끝나고 영국과의 관계가 대강 정리되고 나면 본격적인 견제 겸 보복이 시작될 터였다.
'무역전쟁은 아닐 거다. 전후복구가 급한 유럽에서 우리에게 무역전쟁을 거는 건 자살행위고, 미국이 우리와 무역전쟁을 할 거였다면 태평양에 선을 그으려 하지 않았어. 아마도 그런 직접적이고 알기 쉬운 공격이 아니라, 민간차원의 금융 공격이 이루어지겠지. 민간차원의 일이니 정부 차원에서 책임을 추궁당할 가능성도 적고, 무엇보다 일방적으로 때릴 수 있을 테니까.'
당연한 이야기였다. 아시아에는 금융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부족하거나 없었으나, 저들에게는 수백 년간 이어져 온 금융가가 있었다. 본격적인 견제가 시작된다면 아시아 증시는 혼돈의 도가니가 될 것이고, 그 끝은 높은 확률로 불경기를 동반한 경제공황이었다. 설령 성공적으로 이를 방어해내더라도, 아시아의 성장동력이 한동안 크게 저하될 것이라는 건 분명했다.
시간제한은 짧으면 10년, 길면 20년. 이를 피하거나, 막으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덩치를 키우는 것이었다. 거대한 덩치로 함부로 공격할 수 없도록 하거나, 설령 공격당하더라도 그 거대한 덩치에서 나오는 맷집으로 쉽게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말이다.
'다행히도, 아직은 저놈들도 그렇게까지 교활하지 못해.'
이형은 내심 아직 시대가 19세기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만일 20세기를 넘어갔다면 빚을 내서 무리하게 덩치를 키우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은 되지 못했을 터였다. 하루 만에 중진국 하나를 파탄 낼 수 있는 초대형 헤지펀드가 굴러다녔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19세기에 그와 같은 초대형 헤지펀드는 존재하지 않았고, 열강들이 후발주자들을 찍어누르기 위한 사다리 걷어차기는 교활한 지략 싸움보다는 보통 무력에 의지하는 것이 많았다.
그러니까 반대로 말하자면, 전쟁 준비만 튼실히 해놔도 사다리 걷어차기를 당할 위험이 확 준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현재 한국의 전쟁 준비를 논할 때 가장 부족한 것은 당연히 해군력이었다. 또한, 그 나라의 해군력은 그 나라의 경제력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한국이 세계에도 한 손에 꼽히는 해군 강국으로 우뚝 서는 순간 한국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도 한국이 한 손에 꼽히는 경제 강국이라고 과시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보자, 그럼 우선 순양함부터 시작해야겠지. 그간 설계도만 잔뜩 그려두고서 창고에 처박아둔 게 억울하지도 않더냐? 예산은 얼마든지 줄 테니, 늦어도 내후년부터는 양산에 들어갈 수 있도록 빈틈없이 준비하여라."
그리하여 시작된 한국의 해군 증강사업은 이형에 의하여 「청해 사업」이라고 명명되었으며, 이를 위하여 가장 먼저 설계되었던 방호 순양함에는 장보고급이라는 함명이 붙었다. 이 청해 사업은 전주 만국박람회가 한창이던 와중에 시작되었는데, 평화를 외치는 와중 군비를 증강한다는 모순에도 딱히 언론에 의해 문제시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신형 전함들을 이만큼 사들이겠다! 라고 발표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청해 사업에서 한국이 발표한 건 장보고급 방호 순양함을 위시하여 연안 방어에 사용할 중소형함정들을 국산화하겠다는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열강의 지위나 국력을 고려하자면, 본격적인 전쟁 준비라기보다는 글자 그대로 최소한의 국방을 위한 군비증강이라고 해석된 것이다.
다만 그들이 한 가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그 규모였다. 더욱 정확히는, 그 진행 방식이었다.
"그간 우리 아주는 병장기를 만들 적에도 항상 하나였다. 어찌 군선이라고 다를 수 있겠느냐? 이번 사업은 아주 공동으로 진행될 것이며, 발주 또한 각국의 기여도에 따라서 선착순으로 진행될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지급할 능력이 있는지도 따져봐야겠지만."
이형은 청해 사업에 범 아주 조약기구에 속한 제후국들을 있는 대로 끌어들였다. 신농유업 사업이 그러했듯이, 청해 사업도 아주 공동으로 진행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실질적인 개발과 설계 및 생산은 한국에서 주도하겠지만, 다른 나라들 또한 청해 사업을 통해 건조된 군함들을 운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결정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한국에서 건조한 함선을 구태여 한국에서 쓸 필요 없이 주변 가맹국들에 매각하여도 상관없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이는 구축함, 순양함 등 소형, 중형함들을 매각하는 건 범 아주 조약기구의 해군 규격을 한국을 중심으로 통일시키는 효과도 있을 터였다.
그간 한국과 일본 양강 해군 대국을 제외하면 다른 가맹국들에는 이렇다 할 해군전력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던 만큼, 한국산 구축함과 순양함들을 대거 매각한다면 한국의 재정적 부담도 덜뿐더러 범 아주 조약기구의 평균적인 해군력을 크게 개선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다.
주변 가맹국들의 해군력이 증강될수록 그들이 한국의 뜻을 거스를 위험도 커진다는 단점도 있었으나, 어차피 한국의 최종 목표는 이순신급 전함을 보유하여 본격적인 대양 함대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아직 항공기가 발명되지 않은 시대에 전함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오직 같은 전함뿐이라는 걸 고려하면, 제아무리 구축함과 순양함을 늘려봐야 전함을 보유한 한국에는 대항할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기저에 깔렸던 셈이었다.
"뭇 무기라는 것은 잘난 놈도 못난 놈도 누구나 사용할 수 있을수록 우수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사용할 수 있어야 하고 함부로 고장 나지도 않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병장기를 만듦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로 그 무기를 만들 장인의 솜씨요, 둘째가 설계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땅히 천하를 지킬 군선들은 우리 대한의 우수한 장인들의 손길로 만들어져야 옳다."
물론 여기에는 더 큰 함정이 도사려 있었다. 바로 이 청해 사업을 통하여 개발된 군함들을 오로지 한국 국내에 존재하는 조선소들에서만 건조할 수 있도록 제약을 건 것이다. 그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기술 축적과 한국 조선업 활성화였다. 결국, 다른 제후국들은 한국과 공동 개발한 군함을 한국에 돈을 주고 사 가서 한국의 조선소들이 밤낮 할 것 없이 돌아갈 수 있도록 땔감을 제공하는 역할이었던 셈이다.
다만 이는 한편으로 어쩔 수 없는 방침이기도 했다. 애당초 범 아주 조약기구의 제후국 중 한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배수량이 1,000t을 넘어가는 함선을 건조해본 경험이 있는 나라들이 없었다. 설령 이형이 일부러 이런 제약을 걸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그들이 순양함을 보유할 방법은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에서 사들이는 것밖에는 없던 셈이다.
무엇보다 이 무렵 범 아주 조약기구의 개발방침은 우선 아시아의 맹주인 한국에 모든 성장동력을 몰아줘서 한국을 번듯한 대국으로 성장시켜 아시아 대륙의 방패막이로 삼은 다음, 다시 그 한국의 지원으로 나머지 나라들도 차례대로 산업화를 이룩한다는 범 아주 조약기구 창설 초기의 방침에서 이탈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한국은 이 방침에 충실히 따랐고, 오늘날 신농유업 사업과 대륙종단철도를 비롯해 각국의 산업화를 도우면서 자신들이 약속한 바를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즉, 이형의 사업방침은 다른 산업들이 그러했듯이 조선업 또한 우선 한국에 모든 역량을 몰아주고 그다음에 다시 한국에서 다른 나라의 조선업 성장을 돕는다, 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가령 다섯 형제가 사과나무에 탐스럽게 열린 사과를 따 먹으려 한다고 생각해보자. 이때 가장 빠르고 손쉽게 사과를 따려는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모두가 힘을 합하여 개 중에 한 사람, 가령 장남이 그들을 대표하여 사과나무에 오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다음에는 이제 선택이 한결 여유롭다. 다른 이들도 사과나무에 오를 수 있도록 위에서 끌어올려 줄 수도 있고, 반대로 위에서 내려주는 사과를 받아먹어도 된다.
오늘날의 천하도 이와 같다. 모두가 힘들게 오르려 하며 다툴 것이 아니라, 모두가 힘을 합쳤을 때 비로소 최선의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 점은 청해 사업을 진행하면서 정기회맹 때 이형이 덧붙인 부연설명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그리고 이러한 이형의 주장은 너무나 간단하게 다른 제후들에 의하여 수용되었다. 이러한 주장이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면 한국에서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고 야욕이 나올 법도 하였지만, 애당초 범 아주 조약기구는 이러한 이념적 근간 위에 수립되었고 또한 존속되고 있는 국제기구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는 새로울 것도 없는 언제나 그대로의 일상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형함 수주 독점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한국 조선업을 전례 없는 호황기로 이끌었다. 당장에 청해 사업에 따르자면 범 아주 조약기구는 1910년까지 전함만 9척에 장갑 순양함을 18척, 방호 순양함을 28척, 구축함을 48척에 기타 보조함들을 다시 또 80척 이상 새롭게 건조할 예정이었다.
청해 사업이 계획된 것이 1894년, 본격적으로 신형함들이 진수되기 시작하는 것이 1896년으로 예정되어있음을 고려하면 15년 안에 100척 이상의 대함대를 건조하도록 예정되어있던 셈이다. 그리고 이 중 설계도가 완성된 건 방호순양함 장보고급까지가 끝이었을뿐더러, 9척의 전함은 전부 다 청해 사업이 진행되면서 동시에 진행될 기술 축적으로 완성할 이순신급 전함이었다.
즉, 100척을 넘는 대함대를 건조하면서 동시에 설계도도 이직인 신형함을 완성해야 했던 것이다. 다만 이러한 사업 규모는 이형이 처음부터 예정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아무리 이형이라도 15년 안에 100척이 넘는 대함대를 건조한다는 게 얼마나 무리한 짓인가를 모를 턱이 없었다.
그런데도 최종적으로 이렇게 되어버린 건 전적으로 1894년 정기회맹에서 각 제후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키면서였다.
'해군마저 놓친다면 우리 일본은 더는 이 아주의 둘째가는 대국이라고 자부할 수도 없게 된다. 그리고 우리 일본은 다른 제후들과 다르게 꼭 한국에 의지할 필요 없이 스스로 건조할 수 있는 역량도 있다. 대기열이 너무 길어져서 한국 혼자만으로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나머지 물량은 우리 일본에서 담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 일본국에서는 전함을 3척, 다시 장갑 순양함을 6척, 방호 순양함을 9척, 구축함을 12척을 발주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시작은 일본이었다. 다만 여기까지는 이형 또한 예상한 바이기도 했다. 오히려 일본이 이보다 낮은 숫자를 불렀다면 오히려 그쪽이 곤란했다. 그동안 바다에서 아시아 방위의 한 축을 담당해오던 일본이 그들의 역할을 포기하겠다고 나서는 꼴이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우리 대초국에서는 전함을 2척, 장갑 순양함을 4척, 방호 순양함을 6척, 구축함을 8척 발주하도록 하겠습니다."
"···뭐라?"
뒤이은 대초국에서 전함을 2척을 새로 발주하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이는 이형에게도 예상 밖이었을 뿐 아니라, 일본을 위시한 여타 제후국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농업을 위시한 일차 산업을 주된 생업으로 삼고 있는 초나라에서 장갑 순양함도 아니고 전함을, 그것도 2척씩이나 보유한다는 것 자체가 뱁새가 봉황을 쫓아보겠다고 나서는 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뭐 문제 될 것 있습니까? 대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주문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그러나 초나라에서는 이러한 결정을 무르려고 하지 않았다. 아무튼,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사지 못할 이유라도 있느냐고 나선 것이다. 기실 산업화가 낙후되어서 문제지 전함을 발주할 돈이 없는 건 아니었던 만큼,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일본에 지지 않으려고 무리해서라도 함대를 증강하려는 건 누가 봐도 뻔했지만, 그렇다고 본인들이 본인들 돈을 쓰겠다는데 옆에서 뭐라 하기에도 뭣했다.
문제는, 이를 시작으로 회맹장에서 이후 세계를 휩쓸게 될 건함경쟁의 예고편이 펼쳐졌다는 점이었다.
< 청해사업 > 끝
ⓒ 리첼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