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초동맹 >
우선 왜 범 아주 조약기구의 여타 제후국들이 청해 사업에 주목했는가-하면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19세기에는 군사력이야말로 그 나라의 국가적 위상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척도였기 때문이다. 아직 GDP나 GNP 등의 체계적인 통계자료가 존재하지 않던 시대이다 보니, 유사시 얼마나 많은 병사와 전함을 동원할 수 있는가가 사실상 국력을 평가하기 위한 유일한 척도가 되고 있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봐도 한국이 부정할 수 없는 아시아 대륙 제1위의 열강임이 확실해진 상황에서 왜 일부러 군사력을 과시하여 국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는가? 그 해답은 간단했다.
이 무렵 범 아주 조약기구에 속한 제후국이라면 누구나 장차 범 아주 조약기구의 가맹국이 대폭 늘어날 것을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아주 조약기구는 겉으로는 평등을 자칭하여도, 그 속으로는 다분히 수직적인 질서가 만들어질 수밖에는 없다. 모두가 평등한 대우를 받는다면 더욱 강하고, 더욱 일찍 아주조약에 참여하였으며, 아주를 풍족하게 만드는 데에 더욱 많은 이바지를 한 나라들이 큰 불만을 품게 될 것임에 자명한 까닭이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위에 서기에 적합한지를 가리는 것이다. 어차피 정점이야 대한으로 정해져 있으니 결코 바뀔 수 없고 또한 바뀌어서도 안 되지만, 그 아래부터는 다르다. 순번을 가르기 위한 척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 가장 알기 쉬운 척도는 필연적으로 그 나라의 힘이 될 수밖에는 없다.
더욱 부강하고, 더욱 많은 이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귀인이 더욱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건 사뭇 당연한 이치가 아니던가?"
이는 초왕 이문하의 사견이었으나, 동시에 이 무렵 범 아주 조약기구에 속한 뭇 제후국들이 품고 있던 생각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인식이기도 하였다. 본래부터 기존 천조 질서가 개량된 것이라 여겨지던 범 아주 조약기구였기에, 그리고 명칭부터가 제후국이었던 만큼 이들은 자신들을 대한이라고 하는 황제국에 속한 번국이라고 인식했다.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본래 법도에 따르자면 동아시아에서 번국이라는 것은 황제국만이 가질 수 있어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가령, 고려만 해도 탐라국을 발아래에 두면서 권위를 세우지 않았던가. 자연히, 기존 제후국들에 새로운 가맹국들의 가입은 그들 또한 번국을 가지기 위한 기회로 받아들여졌다.
이때 새로이 가맹한 신규 제후국들을 번국으로 두기 위해서 가장 절실한 건 당연히 국력이다. 더욱 정확히는, 한눈에 다른 나라를 압도할 수 있는 국력의 척도였다. 그리고 이 시대에 국력을 가늠하기 위한 가장 좋은 척도는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군사력이었다.
꼭 청해 사업이 아니었다고 해도, 각 제후국이 군사력을 늘리는 것은 사뭇 당연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대한이 으뜸에 서는 것은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작금의 천하에서 대한을 배제한다면 아주는 결코 하나로 남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대한이 이룩한 질서 속에서 최대한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럼 지금의 질서에서 힘을 가질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당연히 우리와 뜻을 함께해줄 나라를 늘리는 것이다. 숫자가 늘어나면 회맹에서의 목소리도 더욱 커질 것이고, 표결 시에 우리의 제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그들을 번국이라 부르건, 형제국이라 부르건, 동맹국이라 부르건 표현은 어떻게 해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나라를 확보하는가가 이 아주의 재상이 누구인가를 가늠하게 되리라는 것이고, 우리 대초는 이러한 경쟁에서 누구보다 유리한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번국을 늘리는 데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것이 바로 초국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아래에 있는 월남이 범 아주 조약기구에 가입하지 않았던가? 본격적으로 경제블록과 합종군에 편입되는 것은 아직 시기를 두고 있었지만, 결국 시간의 문제일 뿐 월남의 가맹 자체는 이미 확정된 미래의 일이었다.
이 시점에서 초국은 '당연히' 월남이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야 한다고 인식했다. 마찬가지로 월남을 비롯해 그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장과 월, 두 이민족 국가도 말이다. 이 점에서는 중앙의 조선인 왕족이건 기존 강남의 토호들이건 의견을 함께하고 있었다.
조선인 왕족들이 판단하기에 이들은 스스로 힘으로는 독립을 지킬 수도 근대화를 이룩할 수도 없을 만큼 낙후된 후진국이었으며, 강남 토호들에게 이들은 전통적으로 강남 왕조에 복속된 영향권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인 왕족들은 초에서 문명국의 짐을 지어 이들을 일깨우고 보호해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결론에 도달했고, 토호들은 '당연히' 초가 이들을 복속시켜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결론에 도달했다.
말하자면, 초에서 항시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는 핵심이권 지대로 인식된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계속하여 혼란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초에서는 끊임없이 남쪽에 있는 이들 나라에 손을 뻗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청해 사업 참여를 통한 해군력 증강은 이들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고, 자국이야말로 남방의 패자임을 보이고자 하는 속셈이 기저에 깔렸었던 것이다.
"하, 거 참. 황상께 이걸 진언으로 올려야 하나?"
당연하게도, 다른 나라들이라고 그러한 속셈을 모를 리가 없었다. 특히 이러한 초나라의 남방정책에 직접 시달리고 있던 월왕 이재순에게는 초왕 이문하의 무리한 해군력 증강이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밖에는 없었다. 힘 있는 나라들에야 장차 아주 조약기구가 수직적인 국제기구로 재편될 거라는 소식이 기쁠 수밖에 없겠지만, 힘없는 나라들에는 어떠한가?
당연히 달가울 수가 없다. 장차 아주조약이 수직적인 구조가 되어갈수록 끝줄에 서야 할 월나라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그랬다. 인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영토가 넓은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대만처럼 황제 다음으로 피가 짙어서 전주 이씨 종친의 권위를 빌릴 수 있는 것도 아닌 월나라에게는 초의 압력은 자력으로는 결코 대항할 수 없는 공포 그 자체였다.
문제는 기본적으로 범 아주 조약기구는 딱히 한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정면으로 거스르지 않는 이상 가맹국 간의 외교 관계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다는 점이었다. 그야 전쟁위기가 고조되거나 한다면 당연히 한국에서 개입하겠으나, 초나라도 그걸 모르지는 않으니 전쟁위기까지 월나라를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당하는 처지에서는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차라리 아예 전쟁위기 직전까지 외교 관계가 악화하기라도 한다면 한국에서 개입하겠지만, 현재로서는 겉으로 보기에 월나라와 초나라는 매우 사이좋은 이웃 국가이자 주요거래국이었다. 초나라의 수입품목 대부분은 월나라의 것이 아니었으나, 월나라의 수출 대부분은 초나라에 종속되어있다는 점에서 비참하기 짝이 없는 관계였지만 말이다.
"안 되겠다. 뭐라도 해봐야지 이대로는 그냥 잡아먹힐 판국이야. 이렇게 된 이상 하다못해 숫자라도 늘려봐야지···!"
결국, 이재순은 동녕왕 이희에게 손을 벌리기로 했다. 어째서 제나라가 아닌 대만이었는가 하면, 제나라는 이 무렵 국방비를 거의 지출하지 않으면서 경제력 증강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딱히 적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어차피 전쟁이 나면 한국이 지켜주러 올 것이며, 그렇다고 패권을 노릴 것도 아닌데 무엇 하러 군사력에 투자하느냐는 것이 이 무렵 제나라의 방침이었다.
말하자면, 어차피 상선들은 한국과 일본에서 지켜줄 텐데 군함을 한 척 더 보유할 시간에 공장이라도 하나 더 세우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던 셈이다. 중원의 여러 제후국 중 가장 먼저 산업화가 진행되어 부르주아 계층이 지배하던 제나라다운 방침이라 할 수 있었으나, 이 탓에 제나라는 그들의 놀라운 경제성장에도 아시아 대륙에서 국력에 걸맞은 존중을 받지 못하는 등 부작용이 많았다.
그 반면에 대만은 국왕인 동녕왕 이희부터가 황제 이형의 친형이기도 했던 만큼 누가 봐도 알기 쉬운 구심점이었다. 국력만 따지면 초와 일본이 아주의 서열 2위를 다투고 있어도, 권위를 따지자면 단언컨대 동녕왕 이희야말로 아주의 서열 2위였던 것이다.
그리고 동녕왕 이희는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우리 대만국에서는 장갑 순양함을 1척, 방호 순양함을 3척, 구축함을 5척 발주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다분히 무리하게 쥐어짠 발주내용이었다. 대만의 국체를 생각하면 방호 순양함도 과하지 않은가 하는 이야기가 나올 판국에 장갑 순양함을 보유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 시기 장갑 순양함이 사실상 2선급 전함 즈음으로 대우 되던 것을 생각하면, 대만처럼 작은 나라가 전함을 보유하겠다고 나선 것이나 다름없던 것이다.
그런데도 동녕왕 이희가 이렇게 나선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이렇게 해서라도 장갑 순양함을 보유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초나라에 맞서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는 판단이 있던 것이다. 또 월왕에게 초에 맞서기 위한 반초동맹의 지도자 격으로 추대되기도 한 만큼, 지도자로서 모범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저기, 외람되지만 우리 진국에서도 구축함을 3척 발주할 수 있겠습니까?"
"···음? 그게 무슨 소리요. 진은 내륙국이잖소?"
"내륙국이라고 해군을 보유해서는 안 된다는 법이 있답니까? 항구는 빌려서 쓰면 되는 것이고, 훈련은 함께 받으면 되는 것이지요. 아주는 서로서로 형제와도 같은데, 항구 하나 함께 쓰지 못하겠습니까?"
"흐음···. 아주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지만, 크흠."
초, 대만에 이어서 진나라까지 청해 사업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당연히 이들의 목표는 언젠가 항구를 가지게 될 테니 그에 앞서 해군력을 육성해두겠다-하는 게 아니었다. 애당초 진나라가 항구를 가지려면 인도와 전쟁을 치르거나 같은 아주 제후국과 전쟁을 치르는 수밖에는 없었다.
이들의 주된 목적은 당연하게도 초나라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진나라에서는 초나라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하여 구축함 3척을 반초동맹에 보태준 것이다. 소속 상으로는 진나라 해군이 되겠지만, 어차피 주로 정박하게 될 곳은 월이나 대만 소속의 항구가 될 테고 훈련도 그들과 함께 받을 테니 사실상 그 두 나라의 해군이 되는 셈이었다.
그러자 이제는 그간 조용하던 제나라에서도 나섰다.
"그럼 우리 제나라에서도 전함 1척, 장갑 순양함을 1척, 방호 순양함을 2척, 구축함을 5척 발주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또··· 상당히 불균형한 구성이구려.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설명해줄 수 있겠소? 사견을 더한다면, 차라리 전함을 빼고서 방호 순양함과 구축함을 보다 풍족하게 발주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지 않을까 십사오만."
"간단합니다. 우리 제나라에는 이와 같은 거창한 함대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모두 강국의 하늘보다 드높고 청해보다 드넓은 덕분이지요. 그러나 만일 우리 부유한 제나라에서 지급을 아낀다면 그만큼 다른 제후국들이 끔찍한 재정부담을 안게 될 것입니다. 부유한 자가 인색하여 천하를 괴롭게 하다니, 그보다 더한 악업이 어디에 있겠으며 그보다 못한 불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여, 우리 제국에서는 이번 청해 사업의 성공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겉치레였다. 그간 군사력에 무관심하던 제나라가 일부러 전함을 보유하겠다며 나서는 데 그 목적이 단지 청해 사업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라니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었다. 이들이 이렇게 나선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첫째는 다른 제후국들이 그들을 인색하다고 비난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며, 둘째는 전함을 보유함으로써 자국의 부유함을 과시하기 위함이었고, 셋째는 말할 것도 없이 초나라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구태여 한국에서 나서거나 하지 않아도, 중원에 있는 제후국들에 초나라는 부담스럽고 꺼려지는 나쁜 이웃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그 거대한 덩치가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혹여나 무슨 사고는 치지 않을까 걱정되는 판국에 내부적으로는 혼돈의 끝을 달리고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한국 다음가는 대국이라며 으스대고 있으니 꺼려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제나라는 대한, 일본, 초를 이어서 네 번째로 아주에서 전함 보유를 결정한 대국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또한 역설적이게도, 이날 청해 사업에 참여한 나라 중 국력 대비 가장 가볍게 지출한 나라는 제나라이기도 했다. 각국의 산업 수준을 고려하면, 초와 제 양국은 서로 주문내용을 교체해야 알맞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제는 이 이상 지출하려 하지 않았고, 초는 자신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 분명한 해군 규모를 무리하게 유지하기로 했다.
"우리 월국은 방호 순양함을 1척, 구축함을 3척 발주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장국은 구축함을 1척 발주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청국은 장갑 순양함을 2척, 방호 순양함을 4척, 구축함을 6척 발주하도록 하겠습니다."
뒤이은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중 그들의 국력에 비례하여 가벼운 지출로 끝난 나라는 제나라와 초의 지배적 영향력을 용인한 장국 2개국밖에는 없었다. 하다못해 한국도 전함만 3척에 장갑 순양함을 4척, 방호 순양함을 7척, 구축함 10척을 발주했으니 적절한 수준의 지출이라고 평가되면 몰라도 가벼운 지출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웠다.
그리고 이들이 이렇게 무리한 발주를 결정한 문제의 중심에는 초나라가 있었다. 초나라가 무리한 발주를 결정하면서 다른 나라들도 어쩔 수 없이 초나라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무리할 수밖에는 없던 것이다. 그 초나라가 무리한 발주를 결정한 데에는 일본과 월남이 있었으니, 더 깊이 들어가면 이 두 나라의 책임이라고 해야 할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뭐,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군. 하지만 역시 이렇게 발주 군함이 많아지면 우리 한국의 조선소들을 몽땅 동원한다고 해도 시간 안에 완성하지 못할 테니, 일본이나 제나라에 발주 물량을 조금씩 돌려야겠어."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 대한 이형의 평가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였다. 그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사건이 터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건함경쟁은 초나라에는 자신들이 포위되어 있다는 인상을, 초나라의 주변국들에는 힘을 합쳐 초나라를 견제해야 한다는 공통된 의식을 가지게 해줬을 터였다.
다시 말해, 이제부터는 한국이 구태여 이인자 견제에 나설 필요도 없이 제후국들이 서로서로 견제하면서 절대적인 일인자는 있어도 절대적인 이인자는 없도록 서로의 발목을 잡을 터였다. 다소 무리한 건함경쟁도 제나라가 물러나면서 적절한 수준에서 마무리되었으니 문제 삼을 것까지는 없었다.
이형은 이를 국가 간의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건전한 수준의 경쟁 구도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럼 이제 슬슬 아랫것들을 쪼여보실까?"
이리하여, 청해 사업은 그 장대한 막을 올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한국 조선업계에게는 환희와 절망의 나날이 그 지긋지긋한 막을 올렸다.
< 반초동맹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