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9화 반란
그러나 그건 영국의 사정이었을 뿐. 영국의 구애에 대한 한국의 반응은 이미 시작 전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참 유감이구려. 그렇지만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서 이번 결정을 뒤엎는다는 말이오? 대단히 유감스러운 이야기지만, 이번 일은 그대들 영길리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인 것 같소."
당장 영국의 구애에 대한 이형의 대꾸부터가 이러했다. 물론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한국에 힘이 없다는 말을 믿을 사람은 이 세상에 더는 없을 터였다. 이미 아시아 대륙은 외세의 침략을 자력으로 방어해낼 힘을 충분히 갖춘 지 오래였고, 한국은 더 나아가 이웃 대륙을 침략할 능력마저 조금씩 갖추어가고 있었다.
19세기의 마지막 날, 인천의 해군 조병창에서 막 흉골이 완성된 이순신급 전함이 그 증거였다. 아직은 흉골이 완성된 것뿐이오, 건조가 마무리되고 취역까지 끝나려면 적어도 1903, 4년은 되어야 할 거라고 예상되었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결국,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가까운 미래에 한국 해군이 대양을 건널 여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인데 말이다.
프랑스는 세계 통치를 논하고 있지만 지금 당장은 미 해군에 밀리는 건 물론이오, 한국에 세계 제3위의 해군이란 지위를 빼앗긴 처지였고, 미국은 세계 제2위의 해군으로 우뚝 섰지만, 대대적인 군축으로 빠르게 허물어져 가고 있는 세계 1위의 영국 해군을 따라잡지는 못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한불미 3개국이 작당하고서 영국을 몰락시키려 한다면 영국으로서는 속수무책이더라도, 한국이 빠지기만 해도 영국으로서는 충분히 미불 2개국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은 영국의 구애에도 이를 뿌리쳤다. 이유는 간단했다.
'솔직히 이제 영국 놈들은 그만 보고 싶다는 말이지. 보나 마나 이 녀석들 내가 저번에 인도와 아시아 식민지들 독립시키라고 뭐라 했던 거로 앙심을 품고 있을 테고, 내가 이번에 이 녀석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봐야 괜히 뒤에서 찔리기밖에 더하겠어?
물론 영국에 더는 한국이 혹하게 할만한 당근이 없던 것도 물론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이형부터가 영국의 몰락을 내심 바라고 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요구가 아시아 국가들의 시선으로 보면 당연할지 몰라도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에게는 더없이 불쾌하고 모욕적이었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유럽의 국가지도자들은 대개 제국주의자였다.
일찍이 영미를 위시한 서구권 금융가들의 경제적 공격을 우려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 있었다. 물론 서구에도 반제국주의자 지식인들은 있었지만, 그들은 대개 비주류였으며 별종 취급을 받고는 했다. 이형은 서구는 여전히 제국주의와 인종주의의 총본산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고, 이러한 인식은 편견일지 모르겠으나 대개 잘 들어맞았다.
즉, 이형은 지금 영국이 당장 제 사정이 급해서 한국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리고 있지만, 기회가 온다면 언제라도 한국의 뒤통수를 치려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겉과 속이 다른 건 영국인의 기본 소양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현 상황에서 이형이 취할 수 있는 제일 나은 선택은 간단했다.
'이 기회에 두 다리를 분질러 놓는 게 나아. 물론 내가 다리를 분지르지는 않을 것이고, 남들이 두 다리를 분질러 놓는 걸 팔짱 끼고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을 테지만. 이번 기회에 그냥 두 번 다시 두 다리로 뛸 수 없게 된다면 좋겠군.'
그리고 황제인 이형부터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김옥균을 위시한 한국 외부에서 까딱할 리가 없었다. 영국 외교부에서 제아무리 이런저런 당근을 내밀면서 달래고 친목을 도모하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이들은 무엇이 황제의 뜻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황제는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없게 빙빙 돌려서 말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아마 영길리에서 어지간히 귀찮게 굴 텐데,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도록. 어차피 우리 대한이랑은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적당히 음식이나 대접받고 배 채우거든 선물 같은 건 꿈도 꾸지 말고 빨리 빠져나오는 게 좋을 게다."
한국의 외교관들은 황제의 이러한 방침에 충실히 따랐다. 사실,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들이 사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고 어떤 약속을 해봐야 황제의 방침이 흔들리지 않는 이상 한국의 대외적인 입장은 결코 흔들릴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걸 잘 알고 있었던 영국의 외교관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아 백기를 들고 말았다.
애당초 한국의 외교적 전략은 이렇게 직설적이고 알기 쉬운 황제의 언행을 통해 「최소한 한국은 한 입으로 두말은 하지 않는다」하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호의에는 호의로, 적의에는 적의를 돌려주면서 알기 쉽게 행동하여 최소한 한국은 속이거나 배신하지는 않는다고 다른 나라들이 인식하게 하는 것이 이 대전략의 기본이었다.
다시 말해, 한국 황제가 이 일에는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면 한국의 본심은 「조금 더 세게 불러봐라」가 아니라 「우린 진짜로 이 일에 관심이 없다」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영국 외교부라고 이걸 모르지는 않았으니, 별수 없다고 포기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하다못해 제대로 천하회맹만이라도 끝마치자. 어떻게든 바게트나 양키 놈들이 공격할만한 여지는 줄이고!"
결국, 한국마저 영국을 외면하면서 영국으로서는 더욱더 상황이 급해졌다. 일단 천하회맹 발족까지 앞으로 보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고, 여전히 총선을 도둑맞았다고 성을 내고 있는 영국 노동당 휘하의 노동조합들은 파업을 연달아 일으키고 있었으며 아일랜드 독립군은 이제 영국 본토에서까지 테러를 일으키며 영국 국내 여론을 더욱 강경하게 만들고 있었다.
영국의 정치 원로들은 고심하기 시작했다. 우선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은 아일랜드 문제였다. 노조의 파업이야 이제는 국내의 문제였지만, 아일랜드 독립운동은 달랐다. 미국 내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후원하고 있던 아일랜드 독립운동은 누가 봐도 외세로부터의 공격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제국을 두 조각 내려는 미국인들의 음모였다.
당연히 이에 대하여 항의하기도 했고 험한 말이 오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미국의 답변은 「민간 차원의 자발적인 지원」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꼭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무튼, 미국 정부 차원의 움직임은 없었으니까. 미국 정부는 직접 영국과 맞서려고 하기보다는,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자국 내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의 행동을 방조하면서 은근히 영국에 맞서고 있었다.
이제 해결책은 두 가지였다.
"우리는 충분히 참았소. 이제는 검을 뽑을 때요! 지금 당장 아일랜드 해협을 봉쇄합시다! 아일랜드 근해를 봉쇄하여 우리 정부의 허가 없이 접근하는 상선들은 모두 나포하거나 격침 시키도록 한다면 제아무리 미국인들이라도 날개가 달린 게 아닌 이상에야 어떻게 할 수 없을 거요!"
"지금 미국과 전쟁이라도 하자는 거요? 이미 미국은 제아무리 우리 연합왕국이라도 함부로 이겨낼 수 없는 강적이라는 걸 우리 모두 보지 않았소! 이만 아일랜드인들과 타협합시다. 지금은 아일랜드에서 명예롭게 걸어 나오기 위한 타협점을 생각할 시간이지, 괜한 욕심을 부릴 때가 아니란 말이오!"
전쟁인가, 타협인가. 둘 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우선 전쟁은 미국과의 전쟁으로 확대될 우려마저 있었고, 무엇보다 일개 민병대를 상대로 대대적인 전쟁을 감행하여 막대한 전비를 소모한 끝에 다시 아일랜드를 굴복시킨다고 한들 과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과연 영국이 전쟁에서 이긴다고 한들 아일랜드인들이 다시금 영국에 진심으로 충성할까?
미국의 국력이 시간이 지날수록 나날이 강해질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시점에서 이번 아일랜드 반란을 진압해봐야, 미국이 남아있는 이상 아일랜드인들이 2번째, 3번째 반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렇지만 타협도 문제였다. 일단 아일랜드인들과 타협한다는 것 자체가 대영제국에 있어서 굴욕적인 결정이라는 걸 둘째치고서, 아일랜드인들이 과연 그 타협에 응하겠느냐는 것도 문제였다.
타협한다고 치면, 아일랜드인들이 과연 자치권을 확대하는 수준의 온건한 타협을 바랄까, 아니면 지금 당장 독립하는 걸 바랄까? 당연히 후자다. 아일랜드 대기근 이후로 양국의 국민감정이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건 영국인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일랜드인들의 완전 독립을 승인하면? 일단 일차적으로 영국의 식량자급률이 급락하는 건 둘째치고서, 이차적으로 위신이 급락할 텐데- 이게 가장 문제였다.
위대한 대영제국을 아일랜드인들에게 팔아치웠다며 파시스트와 공산주의자들- 어쩌면 군대까지 대번에 들고 일어나 혁명을 꾀하려 들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이는 영국의 정치원로들에 가장 끔찍한 가정이었다.
"우선 승리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소? 지금은 저 아일랜드인들이 자치권 확대만으로도 감지덕지하게 하여 줍시다. 그게 안 된다면 그다음은 아일랜드의 독립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되, 앞으로도 대영제국의 자치령으로 남아있도록 해야 할 테고 말이오. 비록 어느 쪽이고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가 될 테지만, 그래도 최소한 신사답게 명예로이 물러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그런데도 결국, 선택한 것은 타협이었다. 물론, 가능한 한 영국에 유리한 타협을 하자는 뒷말이 붙었지만 말이다. 이러한 결론이 내려졌던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의 존재가 아니라, 그만큼 영국에서 천하회맹에 걸고 있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천하회맹을 통한 외교적 입지 확대야말로 그들이 꿈꿀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었기에 그랬다. 그런 천하회맹의 발족을 앞두고서 개최국인 영국이 전쟁 중이라는 인상을 주어 발족과 동시에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정계의 이러한 결정에 영국 군부가 불만을 품었던 것이다.
"해안가로 후퇴하라고···? 내가 잘못 이해한 게 아니라면, 내륙에서 꽁무니를 빼고 도망쳐 겁쟁이처럼 해안가 도시들만 지키고 있으라- 이건가? 그러니까, 우리보고 또 전쟁에서 지고 오라고? 하, 그거 멋지군. 또 언론쟁이 놈들에게 세금만 축내는 실업자 문제 해결을 위한 최종해결책이라고 찬사를 들을 수 있겠어!"
"이건 이길 수 있는 전쟁이고, 이길 수 있는 싸움이야! 왜 우리가 저 아일랜드 놈들에게 지고 오라는 건지 도통 모르겠군!"
이 무렵 영국 군부는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우선 미국을 해군력으로 찍어누르지 못하면서 더는 영국 해군은 무적이 아니게 되었고, 육전에서는 프랑스에 완패하며 유럽 대륙에서 내쫓기다시피 했다. 그렇다고 전쟁이 끝나고서 대우가 좋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형식적인 승전행사가 지나고서, 영국군은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더욱 정확히는, 영국 육군이 말이다. 그나마 해군은 군축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우대되었지만, 육군은 그렇지 않았다.
우선 대대적인 군축으로 군비가 크게 줄었고, 전쟁 중 조국을 위해 팔다리를 희생해가며 용감히 싸웠던 참전용사들에 대한 지원은 너무나 형편없었으며, 월급은 2달에 1번꼴로 지급되어 농담으로 분기급여라고 불렸다. 누구나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육군만 이렇게 힘든 것이 아니라고 되뇌어도 당장 그들이 소외당하고 있다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아일랜드 반란과 노조의 파업, 파시스트의 준동으로 육군을 필요로 하는 곳은 나날이 늘어갔지만, 막상 육군을 위한 지원은 나날이 줄어들었다. 런던의 정치원로들이 제일 나은 선택만을 찾는 동안, 제일 나은 선택이라는 명목 아래 조국을 위한 조건 없는 애국을 강요당한 육군의 분노는 임계점에 부딪히고야 말았다.
결국, 이들은 기어이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아니, 그건 못 들어주겠네! 아일랜드 놈들에게 항복하려면 마음대로 하게! 그렇지만 우리 군은 계속 맞서 싸울걸세!"
시작은 항명이었다. 영국 육군은 정부의 국가전략을 거부했다. 이는 영국 정부가 더는 군부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어떻게 타협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육군이 문제 삼은 것은 표면적으로는 아일랜드 문제였지만, 결국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육군의 처우개선이었으니까.
이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시기였다. 바로 천하회맹 발족까지 고작 1주일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타협으로 시간을 끌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고, 다른 나라들이 영국 국내 정세의 불안정함을 지적하며 천하회맹을 깎아내리기에도 너무나 좋은 시간이었다.
경악한 영국 정부에서는 육군의 항명을 어떻게든 없던 것으로 만들거나, 대수롭지 않은 사건인 것처럼 축소하려 시도했다. 한편으로, 영국 정부에서는 육군에 타협을 제의했다. 이제부터라도 육군의 처우를 개선해줄 테니 이번 항명을 주도한 몇몇 장성들이 책임을 지고 퇴역하는 선에서 이야기를 마무리 짓자고 한 것이다.
"흥, 하여간에 정치가라는 놈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야 칼이 무서운 줄 아는구먼!"
이러한 타협은 성공적으로 보였다. 적어도, 폭발 직전까지 치달았던 육군의 분노는 일단 가라앉는 듯했다. 물론 이 또한 당장 급한 불만 끈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육군에게는 혹여나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거나 한다면 언제라도 뒤엎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당장 크롬웰이라는 전례가 있지 않던가? 한 번 해본 일을 두 번이라고 못할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육군의 이러한 항명 사태는 영국의 무수한 정치 세력들에게 육군이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분리되었다는 걸 알려주었다. 이는 육군이 정부를 미심쩍게 보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정변을 위한 최적의 시기라는 의미였다. 그렇게 정부를 무너뜨리고, 불만으로 가득 찬 육군을 포섭하는 데 성공한다면 혁명이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점은 당연히 영국 정부 또한 누구보다 잘 숙지하고 있었다. 육군이 어떤 곳인가? 바로 그 크롬웰이라는 전적을 남긴 잠재적인 역도들의 소굴이 아니던가?
"설마하니 그런 일은 없을 거라 믿지만, 혹시나 모르는 일이지. 적어도 천하회맹 발족이 성공적으로 끝나기 전까지는 해군육전대에 런던 방위를 맡기자."
영국 정부는 이러한 판단 아래 해군을 끌어들였다. 육군이 계속된 홀대로 불만에 가득 찼던 데에 비해, 해군은 건조계획들이 줄고 예산 부족으로 기존에 있던 전함들도 대거 해체하고 있기는 해도 최소한 월급과 연금은 꼬박꼬박 지급되고 있었으니 정부에게 충성을 다할 거라 판단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영국 정부의 판단이 영국 육군에게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뭐? 해군 놈들이 런던에 모여들고 있다고···? 이런 개자식들! 역시나 이럴 줄 알았어! 처음부터 약속을 지킬 생각 따위는 없었던 거야!"
이 무렵 영국 육군의 정부에 대한 신뢰는 바닥에 치닫고 있었다. 좋을 대로 부려 먹기만 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우는 따라오지 않고 있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육군은 정부에서 해군을 끌어들인 것이 육군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함이라고 판단했다. 다시 말해, 정부에서 약속한 처우개선 자체가 해군육전대가 런던에 진입해 육군을 진압하는 데까지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함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남겨진 선택은 하나였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선수를 친다! 가자, 웨스트민스터로!"
육군은 반란을 택했다.
성공한다면 혁명이라 기록될 역사적인 반란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