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1화 지천명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이형도 아니었다. 애당초,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역시 젊은 시절에 너무 몸을 마음대로 썼어."
이형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던 펄프지 하나를 주워서 거기다가 퉤, 하고 가래침을 뱉었다. 황갈색에, 끈적한 가래였다. 아직 어두운 새벽 탓인지는 몰라도 어쩐지 검게 보이기도 하였다. 물론 이형은 그게 아닐 거라는 걸 잘 알았다. 아닌 말로, 그가 10대 시절에 몸을 좀 막 썼던가.
전쟁터에서 총에 맞은 것쯤이야 예삿일이고, 출혈이 멈추지 않는 상처를 지져서 틀어막느라 사경을 헤매기도 했고, 결국 다리 한 짝이 반쯤 불구가 되어 절뚝거리게 되기도 했다. 약을 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거기에 매일 같이 술까지 마셔댔으니 간 기능이 그때 즈음에 벌써 반쯤 맛이 갔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나이가 들어서도 운동은 제법 했으나 매일 같이 술을 마셨고, 태자가 물려받을 나라를 만든답시고 매일 같이 일에 몰두했다. 돌이켜 보면 스스로 수명을 깎아내고 있던 셈이었다. 이형은 문득 제 오른손을 하늘 높이 펼쳤다. 펼쳤다가, 다시 오므렸다가 하면서 제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자세히 관찰했다.
아직 손이 덜덜 떨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제야 이형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 늦기 전에 술부터 끊고서 보약이나 지어 먹기 시작해야겠군."
스스로 생각해도 낯설기 그지없는 발언에 이형은 피식 웃었다. 지천명에 접어들어서야 겨우 건강을 살피기 시작한 제 꼴이 퍽 우습기도 했다. 시작하려면 진즉 시작했어야 할 일을, 미루고 미루다가 기어이는 몸이 하나둘 맛이 가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 다음에야 무언가 고쳐보려는 제 꼴이 제가 생각해도 퍽 우스웠던 것이다.
그렇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 또한 인간이라면, 인간적 결점이 있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인데. 이형은 문득 이하응을 떠올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내가 체면이 있지, 이하응 그 양반보다 오래 살지는 못해도 그 양반만큼은 살아야 할 텐데. 이거야 원, 저승에 가거든 얼굴부터 붉히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시답잖은 혼잣말하면서 이형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진 종이들을 하나하나 주워다가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보잘것없지만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한장 한장 채우다 보니, 막상 핵심내용은 그렇게까지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소모된 종이는 끝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형은 인내심을 가지고서 종이들을 마저 치웠다. 모두 치우고 나니 그가 예상했던 대로 오전 5시 30분을 넘겨 오전 6시에 접어들고 있었다. 일하러 갈 시간이었다.
"그럼 또 시작해보실까."
이형은 히죽 웃었다.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깨우러 오는 궁인의 발소리였다.
일부러 기다릴 것도 없이, 이형은 벌컥 문을 열고서 방을 나섰다.
* * *
이 무렵 이형이 크게 공을 들이고 있던 것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천하회맹의 안정적인 정착, 다른 하나는 이순신급 전함의 확보, 그리고 신농유업 사업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차근차근 모이고 있는 여분의 재화를 이용해 병술 보고서를 마무리 짓는 것.
그리고 이 무렵 이형에게 이 중에서 가장 쉬웠던 것을 고르라면 단연 병술 보고서였다. 이미 행정적인 난점은 모두 해결되고 단지 실행에 앞선 예산 확보만 남아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형도 따로 서류 작업을 돕거나 할 것도 없이,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오는 순간 승인만 내리면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저기, 내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올해에만 안전기준법 위반으로 공장에서 사람 팔목이 잘렸다는 기사를 벌써 3번째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내 기억이 혹시 틀렸나? 이 기사가 맞는다면 이건 심지어는 지난 1896년에 개정되기 전에 안전기준법조차 미달하고 있었다는데, 이런 공장이 어떻게 도성에 남아있을 수 있나? 응?
입이 달려있으면 어디 설명해보라는 말이네!"
"시, 시정하겠습니다! 즉각 조처하겠습니다!"
"아무렴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아니 잠깐, 즉각 조처하겠다? 그럼 내가 이 말을 꺼내기 전에는 아직 아무런 조치도 내려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인가? 임자, 혹시 집에 돌아가서 푹 쉬고 싶은데 여기 나와서 일하고 있는 건가? 손자들 옹알이가 간절했던 모양이지?"
"아, 아닙니다! 단지, 요즈음 들어서 최저임금제 도입과 관련하여 탄원서가 연달아 올라오는 바람에 그만···!"
"내가 변명하라는 소리는 한마디도 안 했는데 말이야. 그리고 내가 뭐 최저임금을 올리자고 했나, 아니면 뭐 시간제 근무만 하고서 먹고 살 수 있게 해주자고 했나, 실업수당으로 일가족이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게 해주자고 했나? 그냥 최저임금이라는 걸 도입하자는 이야기 아닌가. 혹여나 이 탓에 사정이 어렵게 되거든 지원도 해주겠다고 했고.
그런데 아직도 이 일 때문에 내가 이런 군소리를 들어야겠나? 응?"
"그렇지 않습니다! 실망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알아들었으면 빨리 가서 일이나 하게. 오늘 오후 4시 전에 내 집무실에 임자가 말한 조치인가 뭔가가 올라와 있지 않거든 내일부터는 출근하지 말고 손자들 옹알이 들으러 가도 좋네. 알겠나?"
"네, 넷!"
물론 그게 쉽다고 하여 진짜로 쉬운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형이 쉴 틈 없이 무언가 차질이 있지는 않은가 확인하고, 혹여나 무언가 차질이 생겼다는 사실을 발견한 날에는 곧장 불호령을 내리면서 관료들을 갈구고 또 갈궜기에 꾸준히 무언가 변화가 발생하고 있던 것이었다. 어느새 지천명, 그러니까 쉰에 접어든 이형은 전에 없이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워져 있었다.
사실 성질이 더러웠던 거야 젊은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무렵 이형의 성질 더러움과 젊은 시절의 성질 더러움은 방향 그 자체가 달랐다. 젊은 시절에 이형은 그저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서 막무가내로 일을 저지르고, 절차나 관습을 무시하고서 자기 뜻을 관철하는 식으로 주변인들을 곤혹스럽게 했다면 이 무렵의 이형은 특유의 꼬장꼬장함으로 주변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평소에도 즐겨 읽던 신문에 나온 시사 문제로 관료들을 쪼는 건 예삿일이었고, 이따금 황실 직속의 국정원을 동원하여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곳에서 벌어지고 있던 태업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나마 나이를 먹으면서 대뜸 욕지거리하는 경우는 사라졌지만, 때로는 차라리 욕지거리를 해주었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빌게 하였으니 이것도 관료들에게는 잘 와 닿지 않는 부분이었다.
"경찰에서 내게 보고하기를, 이번에 자네들 국정원의 정재석 과장이라는 놈이 제 장인어른이 하는 사업이랍시고 흑룡강 근방에서 허락도 안 받고 나무를 베는 놈들을 뒤에서 봐주고 있다던데··· 딱 1분, 내게 변명할 시간을 주겠네. 사실인가?"
"···죽여주십시오! 모두 제가 부덕하여 부하를 미처 올바른 길로 이끌지 못한 탓입니다. 제가 책임을 지고서 옷을 벗겠습니다!"
"시키지도 않은 일은 하지 말게. 내가 언제 옷 벗으라고 했나? 변명을 해보라고 했지. 아무튼, 그럼 사실이라는 거군. 이 문제는 또 따로 보고를 받기로 하고, 오늘은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우리 둘 다 즐길 수 있는 이야기를 해보세나."
"예? ···저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혼자서 벌 받는 건 억울하지 않나. 어디 하나쯤 생각나는 대로 뱉어보게. 그 경찰이라는 놈들은 요즘 뒤에서 어떻게 호박씨를 까고 있나. 헌병에서 말하기를 요즘 경찰 놈들이 호남 앞바다에서 묘한 사업을 하고 있다던데, 혹시 자네도 더 아는 것이 있다면 우리 여기에서부터 시작해보는 건 어떤가?"
거기다가 이형은 이 무렵 각 정부 부처가 앞다투어 서로의 흠집을 고발하도록 유도했다. 서로서로 시기하고 견제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분열하여 지배하라는 오랜 격언을 고스란히 실현한 것뿐이었으나, 이 또한 관료들의 피와 살을 메마르게 했다. 같은 관료들끼리, 동기들끼리 적당히 묻고서 넘어갈 수 있는 사소한 것들까지 거침없이 캐내어 쪼아대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두고서 뭐라 불평하기도 곤란했던 것이, 아무튼 황제가 직접 쪼아대는 문제점들은 대개 관료들이 쉬쉬 덮어주거나 가볍게 넘어가고 말 문제들투성이였다. 한마디로, 황제가 직접 쪼거나 해야지만 물 위로 올라올 문제들이었던 것이다. 적당히 봐줄 수도 있는 문제를 가지고서 황제가 너무하다고 뒤에서 몰래 투덜거릴 수는 있어도, 물 위로 올라오기에는 어려울 수밖에는 없었다.
뒷담화라면 모를까, 앞에서 불평했다가는 감히 황제가 하라는 일에 토를 단다고 불호령이 떨어지는 건 둘째치고서 저들이 부패 관료들이라는 걸 실토하는 꼴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슬슬 수확철이 되었지. 그래서 이번 기회에 올해 농사를 쭉 되짚어 보는데, 이상하게도 충청도 일대의 비료 사용량과 유통량만 따로 놀고 있더군. 혹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아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제 기억이 맞는다면 이번 여름에 천안에서 비료를 운반하던 기관차가 탈선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부족한 만큼 새로 경기, 강원 일대에서 여분의 비료들을 들여오다가 오차가 생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고작 기관차 1대가 엎어져 봐야 내게 올라오는 서류를 기준으로 하면 아무리 많아도 소수점 단위지 내게 발견될 만큼의 오차가 나오겠나? 아무래도 이상해. 한번 다시 확인해보게. 내가 생각하기에는 여기 평택항이 수상하니까, 우선 해양부 쪽에 협력을 구해서 뭔가 수상한 기록은 없나 샅샅이 살펴보게."
그리고 이렇게 서로 고발하지 않더라도, 이따금 서류를 쥐잡듯이 뒤져서 하자가 조금이라도 발견되면 그 또한 이형에게 불려 가 추궁당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불려 가기 싫다고 아예 거짓으로 적거나 한다면, 다른 부서들에서 작성한 보고서로 교차 검증하여 불호령을 내렸다.
당연히 편애하는 부서도 없었고, 그렇다고 일부러 홀대하는 부서도 없었다. 이 무렵 이형은 그야말로 대한제국 정부라고 하는 국가조직 안에 존재하는 모든 정부 부서들을 쥐어짜고 헤집고 시험했다. 그동안 전문가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거니-하고 넘어가던 젊은 황제는 어디에도 없었다.
여기에 더해서 피로가 쌓이고 나이를 먹으면서 야위어 볼살이 빠지게 되니 뼈가 툭 튀어나와 인상도 더욱 날카로워져 관료들의 공포는 나날이 커져만 갔다. 관료들 처지에서는 그야말로 마귀할멈이 따로 없었다. 전사를 연상케 하던 젊고 어렸던 소년왕은 어느새 세월이 흐르면서 손끝에서 진한 먹물 냄새를 풍기는 음흉한 늙은 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꼭 한창때의 흥선왕 전하를 보는 것 같구먼. 하기야 피가 어디를 가겠어. 젊으실 적에는 그렇게 살펴보아도 닮은 구석이 전혀 없는 것 같았는데, 이제 황상께서도 연로해지시니까 누가 따로 말 안 해줘도 흥선왕 전하 핏줄이구나-하고 알겠구먼."
이러한 이형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꺼리는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이러한 이형의 변화를 기껍게 여기는 여론도 적지 않았다. 한창때의 이하응을 보는 듯하다는 것이었다. 이형이 아직 소년왕이던 시절, 그를 대신해서 재상이자 섭정으로서 조선을 끌어가던 이하응 말이다.
이러한 여론을 이형이라고 모르지는 않았다. 그는 관료들이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또 어떤 관료들은 이러한 자신의 변화를 호평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애당초 이 무렵 이형은 주변에서 그를 어떻게 평가하고 생각하는가를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제 그는 식사하거나 그의 가족들을 만날 때조차 항상 주변에서 그를 어떻게 평가할지를 염두에 두고 지냈다. 젊은 시절처럼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서 멋대로 제 뜻대로 모든 일을 밀어붙이기에는 너무나 먼 길을 지나온 까닭이다. 그때는 무슨 사고를 터뜨리려도 그가 책임지면 그만이었지만, 이제는 그가 아니라 태자가 그 책임을 대신 짊어지게 된 까닭이다.
그 때문에 이형은 나이를 먹으면서 변해버린 자신을 관료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게 된 그 날 홀로 남몰래 조소했다.
"이하응이라.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구먼. 어디 수염도 조금 더 기르고 목소리도 확 깔아보실까?"
그리고 그날로 이형은 마치 자신이 이하응이 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마침 나이도 지천명을 넘기어 머리나 수염도 희끗희끗하니 더는 꺼릴 것이 없었다. 신선처럼 수염도 기르고, 이따금 일부러 성대에 무리를 줘서 중후하고 위엄 넘치면서도 악을 쓰는 듯한 목소리를 만들어내니 그럭저럭 이형이 보아도 이하응처럼 보였다.
안 그래도 부모 자식이라 서로 닮을 수밖에 없던 마당에 그렇게 이형이 일부러 이하응을 흉내 내기 시작하니 이제는 정말로 한창때의 이하응과 똑같아졌다. 이형은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의 말을 경청할 때 팔을 괴거나 다리를 꼬는 등의 무례한 버릇도 의식해서 고쳤다. 나이에 걸맞은 위엄과 의젓함을 갖추고자 한 것이다.
좋아하던 술도 끊어버리고, 대신에 틈만 나면 도라지 차를 마셨다. 당연히 매일 올라오는 찬들도 맛 좋은 고기류보다는 건강에 좋은 야채류 위주에 홍삼 같은 한약류가 늘어났다. 누군가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이형은 그 스스로 다시 태어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범이 종일 풀이나 뜯어 먹고 살려니까 죽을 노릇이군."
당연히 그게 이형에게 즐거운 변화였을 리가 없었다. 이형은 매일 같이 홀로 투덜거리고는 했다. 다만 이렇게 변하고서도, 승마는 차마 끊지 못했다. 이형의 표현대로 범이 풀이나 뜯으며 살 수는 없다는 고집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이 무렵 바둑이가 숨이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승마도 보통의 승마와는 거리가 멀었다. 텅 빈 목초지에 바둑이를 풀어놓고서, 이형은 바둑이의 장녀-이형이 이름 붙이기를 말뚝이- 위에 올라타 서성거리다가 해가 저물거든 돌아오는 것이다. 이제는 더는 그를 태우지도 못하는 바둑이와 함께 조금이라도 오랫동안 거닐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때아닌 가을비가 매섭게 내리던 어느 가을날, 불현듯 바둑이가 생각나 이형이 목장은 찾아가니 그 전날 유독 힘차게 목장에서 뛰어놀던 바둑이가 홀로 조용히 숨을 거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형은 제자리에 잠자듯이 조용히 널브러져 있는 바둑이를 한참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이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한탄했다.
"그래, 오래 버텼구나. 말이 40년을 넘게 살았으면 영물이지. 영물이고 말고. 그동안, 이 망나니 놈과 어울려 주느라 네가 참 고생이 많았다. 고생이 많았어!"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으면서도, 이형은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하였다. 그런데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미 직감하고 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저 메말라 버렸던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이형은 그렇게 바둑이를 떠나보냈다. 거창한 장례식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옛 선현들의 가르침을 따라 푹 삶아 고깃국을 끓이지도 않았다. 도저히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대신에 이형은 바둑이를 땅에 묻었다. 제가 직접 삽질하여 덕수궁 후원에 말이다.
바둑이를 묻고 난 다음, 이형은 조용히 합장하며 기도했다.
"내세에는 나 같은 놈 만나지 말고, 귀한 집 자식으로 다시 태어나거라."
차마 또 함께 신나게 날뛰어 보자고 빌 수 없던 것은, 그에게 남은 일말의 양심이었으리라.
그날 이후로 이형은 마침내 그 좋아하던 승마마저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