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2화 국민보험
그날 이후로 이형은 한숨이 늘었다.
"바둑이도 나를 떠나가는구나."
이형은 짧게 탄식했다. 그야 물론 말의 평균 수명이 수의학이 발달한 현대에도 25~30년 정도이고 20세기 초를 기준으로는 20여 년 정도가 평균이니, 그 두 배를 산 것이지만 역시나 사람에 비하면 짧았다. 이것이 그가 아끼던 무언가를 잃어버린 첫 번째 경험은 아니었으나, 그러한 경험들은 모두 상대가 그보다 나이가 많을 경우였으니 그렇게 떠나보내며 안타까워하면서도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바둑이는 조금 달랐다. 처음 그에게 찾아올 무렵에는 막 망아지 티를 벗은 앳된 모습이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이형으로서는 사실상 소꿉친구나 다름없던 사람, 아니 말을 떠나보낸 것이다. 막 입으로는 40년이면 오래 살았다고, 영물이라면서 보내줘도 결국 우울해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런데도 이형에게는 우울해할 겨를이 없었다. 아직도 할 일이 많았다. 우선은, 병술 보고서를 마무리 짓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이형은 우선 당장에 실행할 수 있는 것들부터 차근차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이거 안 되겠어. 될 수 있으면 나도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여유 있을 때부터 시작하고 싶었네만, 지금부터 앞당기기로 하지. 우선 지금 당장 지출을 줄일 수 있는 것들부터 이야기해보세나. 지금 당장 줄일 수 있는 것들이 몇 가지나 있나?"
"예? 앗, 예. 우선 당장 줄이기 쉬운 것은 군비가 있습니다. 아직 구주 등은 혼란스럽고 폭력적인 정세가 지속하고 있습니다만, 적어도 아주에서는 지금 당장으로서는 전쟁이 날 만한 구석이 없으니 당장 군비를 줄인다고 무언가 해가 되지는 않을 거라 생각됩니다. 또, 그 외에는 현재 범 아주 조약기구를 통하여 지출되는 예산들이 있습니다만···."
"그럼 이번 기회에 육군 규모를 조금 줄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육군 쪽은 규모를 지금보다 줄이고 더욱 정예화하는 대신에 해군 쪽으로 예산을 조금 더 돌리게. 그리고 어차피 신농유업 사업도 우리 대한에서 꼭 나서야 하는 단계는 이미 지나지 않았던가? 슬슬 이쪽도 투자를 줄여보게. 대신에 식농기구의 분화는 조금 뒤로 미루기로 하고."
어윤중을 은밀히 부른 이형은 그 길로 병술 보고서 시행을 앞당기기 위한 예산 절감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장 먼저 튀어나온 것은 역시나 군비와 국제기구와 같은 무형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들어가는 예산이었다. 당장 근방에 전쟁 위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아주 조약기구 내에서 지분을 두고서 경쟁할만한 맞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당연한 대답이었다.
그 때문에 이형은 어윤중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그것이 최선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줄이지 않으면 복지나 교육, 인프라 건설 등에서 깎아야 하는데 기초적인 복지를 도입하기 위하여 복지예산을 깎는 건 웃기지도 않는 소리고 교육이나 인프라 건설 등을 깎는 건 현재를 위해 미래를 팔아먹는 짓이었다.
그러나 막상 이형이 선선히 동의하니 어윤중은 어딘가 불안해하는 얼굴이었다. 당연히 반전주의자인 그가 군비축소를 문제시 삼은 건 아니었고, 신농유업 사업에 대한 투자 축소를 문제시 삼은 것이었다.
"···괜찮겠습니까? 군축은 몰라도, 조약기구에 대한 투자 축소는 조약기구의 영향력 감소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만···."
"괜찮네. 그런 단계는 이미 지났어. 이제부터는 우리 대한에서 빠진다고 해도 저것들이 어떻게든 여력을 쥐어짜서 억지로라도 유지해야 할 판이야. 이제 와 각자 따로 살자고 나설 수 있을 리가 없지. 오히려 걱정해야 할 것은 영향력 감소일걸세. 그렇지만 뭐, 언제까지고 우리 대한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대신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부터라도 어느 정도는 각자 알아서 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제는 슬슬 산업화도 마무리 단계 아니던가? 그놈들에게 조금 더 쓰라고 하세나. 이것들이 요즈음에 아주 우리 대한에 빌붙으려고 하는 모양이던데 이 기회에 버릇을 고쳐놔야겠어."
이형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야기하면서도 제나라의 얌체 짓이 떠오른 까닭이다. 어차피 무슨 일이 일어나도 대한제국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테니 거창한 군대 같은 건 필요 없다면서 반쯤 무장을 해제하고서 오로지 경제발전에만 투자한 것도 영 아니꼬웠는데, 막상 그렇게 산업화를 이룩하고 나서는 다른 나라들의 산업화를 돕는 게 아니라 꼭 저들에게 이익이 될 이권을 사들이는 데에만 투자하고 있었다.
그야 물론 국제사회에서 모든 국가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는 것이 아니던가? 손해는 조금도 보지 않으려 하면서 제 이익만 챙기려 드는 얌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듯이, 국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이웃 국가 간의 협력과 공생을 표방하는 국제기구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한국 다음으로 고도로 산업화한 나라가 그렇게 얌체 짓을 하고 있는데 좋은 이야기가 나올 리가 없었다.
"그거라면 다른 나라들도 문제 삼지는 않겠군요."
범 아주 조약기구에 대한 투자를 줄이겠다는 이형의 발언에 우려하는 모습을 보이던 어윤중도 그만큼 제에서 벌충하자고 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나라의 소행이 고까운 건 둘째치고서, 마침 그들의 얌체 짓으로 아주 조약기구 내에서 이런저런 뒷말이 나오던 참이었으니 더 늦기 전에 수습하는 게 옳다고 판단하는 것이야 식견이 있다면 당연한 결론이었다.
무엇보다 제는 일본처럼 대한에서도 어떻게 하기 곤란한 덩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다못해 군사력이라도 대단했다면 모를까, 대한제국에 거의 전적으로 국방을 의존하고 있는 신세이니 대한제국에서 한번 으름장을 놓기 시작하면 어떻게 거절할 방법도 없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대한제국에 실망하여 군비를 증강하기 시작하던가, 다른 나라들과의 협력을 늘린다든가 하는 수도 있겠지만― 이형은 그다지 소용없을 거라 여겼다. 지금의 제는 워낙에 군비에 소홀하여 군사전통이라고 부를만한 게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다른 나라들과 협력을 구하려고 해도 그들을 아니꼽게 보고 있는 건 대한제국만이 아닌 까닭이다.
"좋습니다. 곧장 김 장관과 이 문제에 관하여 의논해 보겠습니다."
"음, 수고하게나. 내 기다림세."
어윤중의 대답에 이형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이하응을 의식하고서 바뀌려고 노력하고, 밤이 새는 일이 많아지면서 신경이 날카로워지면서도 이형은 그간 알고 지내던 장관들에게까지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제 와 일부러 소리 지를 필요도 없었을뿐더러, 그 또한 사람인지라 알고 지내던 가까운 사람들에게 아무 때나 고함을 지를 수는 없던 까닭이다.
물론 그동안 알고 지내던 장관들이나 가족들에게까지 뭐라 소리를 지르거나 윽박지르거나 하지 않는 만큼, 그보다 아랫선이나 비교적 신인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상대로는 거침없이 지적하고 쪼이고 윽박질렀지만 말이다. 이는 그들이 황제가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죄를 추궁받아 마땅한 잘못을 꾸준히 저지르고 있는 까닭이었으니 꼭 이형의 탓이라고 하기에도 뭣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 제에서 얼마나 성심성의를 다하여 상국을 모셨는데 이런 대접이라니요! 정말이지 너무 하십니다!"
그리고 이다음 회맹에서 대한제국 측이 압박하기 시작하자, 예상했던 대로 제에서는 어찌할 줄 모르고서 고개를 숙였다. 대한제국에서 투자를 줄인 만큼 제에서 추가로 지급하기로 이야기가 된 것이다. 그만큼 자국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되었지만, 제에서는 전혀 기뻐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애당초, 그들은 한 번도 아주회맹에서 패권을 추구한 적이 없었다.
기뻐하는 대신, 그 뒤에 혼자 골이 나서는 악을 썼다. 물론 거기에 동조하는 나라는 없었다. 일본, 청, 초, 진, 대만 등 기존에 회맹에 가입하고 있던 나라들은 누구나 말이다. 주변에 적국도 없고, 패권에 대한 야욕도 없다는 핑계로 그들이 얼마나 혼자서 꿀을 빨았는지 모르는 나라들이 없었던 까닭이다.
새로이 가입하여 아직 이게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했던 시암과 월남 쪽 대표 정도나 얼떨떨해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들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던지라 뭐라 나서지는 않고서 멀뚱멀뚱 사태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결국, 제 측 대표단은 완전히 울상이 되어 아주 회맹에서의 자국 영향력 확대를 억지로 수용해야만 했다.
"쯧. 그러게 평소에 좀 베풀고 살았어야지."
이형은 혀를 찼다. 여전히 반성하기는커녕 남 탓하기나 바쁜 그들의 행실이 영 아니꼬웠던 까닭이다. 장장 30여 년을 한국에 국방을 맡겨놓다시피 한 다음 산업화에 모든 국력을 쏟아부어 꿀을 빨아왔으면서 뭐가 그리도 군소리가 많은지 이형으로서는 정말로 모를 노릇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번 기회에 자립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하다못해 도움이 되어보려 노력하라고 한소리 하고 싶었지만, 아무튼 이형에게 당장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기에 우선은 눈 감고서 넘어갔다. 만일 그들이 이형 밑에서 일하는 관료들이었다면 이렇게 가볍게 넘어가지는 않았겠지만, 일단 저들은 일국의 대표단이자 얼굴들이었다.
일단은 서로 간에 평등한 국제기구임을 표방하는 범 아주 조약기구의 한계상 애당초 이형이 다른 나라에 그렇게 내정간섭을 할 수도 없던 것이다. 슬프다면 슬픈 한계였다.
"보자, 우선 당장 마련된 예산으로는 건강보험과 노인연금부터 시작하지. 노인을 공경하라. 실로 당연한 제도 아니던가. 이렇게 노인연금으로 돌리면 농지연금은 아무래도 예산이 부족해질 테니 민간자본의 도움을 조금 받기로 하고. 고용보험과 실업급여는 당장 전국적인 시행은 무리고. 우선 경기부터 시작해서 관서, 충청, 영남 순으로 차차 넓혀가지. 가장 공장들도 많고, 가장 혜택이 있어야 하는 이들도 많은 곳이니까.
그리고 문제는 근로복지공사인데··· 흠. 이건 어디서 예산과 인력을 뽑아내야 할지 잘 모르겠군. 일단 인력 쪽은 홍집이 녀석과 상담해보고, 예산은 윤중이 녀석과 이야기를 더 나눠봐야겠어. 정 부족하면 황실 자산을 꺼내써도 되겠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당장 필요했던 예산을 확보한 이형은 곧장 병술 보고서의 본격적인 실행에 착수했다. 이렇게 이형이 다소 조급하게나마 개혁을 앞당길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상당 부분이 마무리 직전까지 진전되어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몇 번이고 말했지만, 지금 당장 한국에 부족했던 건 행정업무가 아닌 예산이었던 까닭이다.
이미 기초적인 노동법은 의회를 통과하여 발효된 지 오래였고, 최저임금제도를 비롯하여 국가에서 부담해야 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회보장제도들은 이미 시행되고 있었다. 또 의회의 만장일치로 통과된 노인연금제도나 농지연금과 같이 유교적 이상향과 맞은 제도들도 이미 통과되어 다만 발효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러니 이형이 다소 과로하면서 관료들을 달달 볶고, 군비와 국외투자를 비롯하여 당장 어떻게든 줄일 수 있는 지출들을 하나둘씩 줄이는 것만으로 어떻게든 진도를 뽑아낼 수 있던 것이다. 물론, 이 또한 당장 아주 조약기구가 안정된 상태라 이렇게 사치스러운 예산편성이 가능했던 것이었지만 말이다.
"···이건 뭐 돌려막는 것도 아니고, 나 참."
기어이 황실 자산을 꺼내고 금융규제를 헐겁게 해주는 대가로 개성 금융가의 도움을 얻어 예산을 확보한 이형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형에게는 옛 궁상스럽던 조선을 떠올리게 하는 작업이었다. 청나라, 러시아와 일전을 각오하여 피 값을 따내고 어떻게든 고개를 숙여서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의 투자를 받아내고 그러고서도 돈이 부족해서 새로운 수단을 연구해야 하던 시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때와 지금을 온전히 빗대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애당초 본격적인 기초복지를 도입하기 위하여 이곳저곳에 손을 벌리고 다니는 것과 공장 하나 돌릴 기계를 살 예산조차 없어서 왕이 직접 말 타고 싸우러 나가 돈을 벌어야 했던 경험이 같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제는 벌써 40여 년 전의 머나먼 과거였지만 말이다.
당장 나라가 망하느냐 사느냐를 논하던 그때를 떠올리면 고작해야 국채가 위협적으로 불어난 정도로 고민하는 지금은 참으로 사치스러운 고민에 끙끙 앓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그가 하는 이 고민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다 하다 이런 생각을 다 하게 되다니. 이제 조금 더 늙으면 나 때는 나라가 망하느냐 사느냐 했는데 요즘 것들은 근성이 없다고 투덜대게 생겼군. 참, 오래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어."
결국, 이형은 웃어넘겼다. 애당초 억지로 진지해질 필요도 없는 사안이기도 했다. 공장 하나 없던 시절과 이제는 산업화도 거의 마무리 되어 나라 구석구석까지 철도가 놓이고 쉴 새 없이 공장에서 공산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절의 고민이 같을 수는 없는 것 아니던가? 어떤 시대건 그 시대에는 그 시대 나름대로 중요한 고민이 있는 것이고, 이형은 두 시대를 모두 경험한 자로서 지금 시대에 어울리는 고민에 매달리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1년여를 예산확보에 매달리니 이형이 얻게 된 결론은, 나라에 돈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실천 의지가 부족할 뿐이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각 부서의 예산 사용 내용을 쥐잡듯이 뒤지다 보니, 딱히 어느 곳이 유독 더 심하다고 말할 것도 없이 하나같이 관행을 핑계로 접대비를 비롯해 필요 이상의 지출이 어마어마하게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유독 술자리가 많았다. 도자기를 주고받는다고 나처럼 뭔가 거창한 지출이 없는 부서들도 술자리에서 다달이 나가는 공금이 적지 않았다. 아예 선물로 비싼 술들을 대신 주고받는 부서들도 적지 않았다.
"···설마 이거 나 때문인가?"
이형이 처음에 이를 문제 삼기 곤란했던 이유는, 그 자신도 술이라면 사족을 못 하던 술꾼이었기 때문이다. 부패를 저지르거나 일을 대충하거나 하는 흠은 당연히 그 자리에서 지적할 수 있었지만, 술은 그도 전적이 화려하다 보니 뭐라 함부로 참견하기가 곤란했다. 이형으로서는 내심 이런 관행이 자리 잡은 원인이 찔리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형은 더욱 오래 살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술을 끊은 지 오래였고, 당연히 더는 찔리는 구석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이형은 그날로 모든 부서를 한 자리에 모아 그야말로 불을 뿜듯이 호통을 쳤다.
"이것들이 감히 나도 못 먹는 술을 먹고 지랄이야!"
···물론 화를 내는 방향이 다소 그렇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황제가 몸소 금주를 실천하고 있는데 공금으로 술을 마시는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이들은 극히 드물었던 만큼, 이러한 관행은 이형이 관행을 뿌리 뽑기로 다짐한 그 날로 삽시간에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렇게 또 1년이 흘러 1903년 봄, 이형은 마침내 근 20여 년에 걸친 병술 보고서에 기반을 둔 국민보험의 시행과 도입을 완전히 끝마칠 수 있었다.
그가 세상을 등지기 전에 반드시 마쳐야만 했던 과업 중 하나가 마침내 끝이 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