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화 유교 민주주의
병술 보고서의 완성이 의미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우선 너무나 당연하게도 국민의 기초 생활을 보장함으로써 정부를 향한 국민의 지지도가 더욱 탄탄해진 것. 다만 이 점은 그렇게까지 큰 영향을 발휘하지는 않았다. 딱히 국민에게 이러한 변화가 새롭지 않았다거나 달갑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국민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들의 조국을- 보다 정확히는 그 조국을 지배하는 황제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형 그 자신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운 결과였을지는 몰라도, 역설적이게도 그동안 이형은 이미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고작해야 기초 생활 복지의 도입 정도로는 유의미한 지지율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지경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오히려 그렇게까지 큰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그보다도 대한제국과 범 아주 조약기구에 직접 영향을 끼쳤던 점은, 바로 이러한 황제의 노력이 하나의 완성된 통치이념을 새로이 만들어냈다는 점이었다.
"오늘날 황제 폐하께서는 항상 천하에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바가 있다. 바로 그분 또한 하늘에서 내린 특별한 인물이 아닌 한낮 인간이며 한 사람의 국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분의 직업이 그저 황제일 뿐이시며, 그분의 거주지는 그저 궁정일 뿐이시고, 그분의 가문이 그저 전주 이씨 본가일 따름이라고 황제 폐하께서는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어째서 황제 폐하께서는 태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를 거부하셨는가? 간단하다. 그분의 권위가 그분의 지위가 한낮 하늘 따위에게서 오는 것도 아니요, 그분의 고귀한 혈통에서 오는 것도 아닌, 만백성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다. 이는 곧 천리를 부정한 것이오, 괴력난신의 권위를 부정한 것과 같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세상을 온전히 인간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신 것이다.
이는 대단히 낯설고, 어쩌면 오만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런다. 그렇게 낯설어해야 할 이유도 없다. 왕후장상의 싹이 따로 있겠는가? 이미 수십 차례고 수백 차례고 반복된 이야기가 아닌가. 과거의 위정자들은 민심이 곧 천심이라고 하였다. 이는 물론 민심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맞지만, 민심을 근간으로 하여 천심의 간택을 얻는다고 여긴 것이니 여전히 괴력난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있던 것이다.
황제 폐하께서는 오늘날 더 나아가 천심을 치워버리고 민심만을 두셨다. 천심 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며, 황제를 황제로 만드는 것은 오로지 민심뿐이라 만천하를 향해 몸소 실천하면서 보여준 것이다. 이로써 아주는 비로소 기나긴 봉건주의의 고삐에서 풀려나 세속적 합리주의에 근간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진정으로 아주를 근대화시키셨다. 단지 서역의 문물과 이념을 도입하여 서구화하신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우리 아주의 천하관에서 괴력난신의 마지막 속박마저 풀어버리고서 기계론적 자연관을 도입하시고, 낡은 선현들의 낡은 말들만 되풀이하던 구태의연한 선비들을 일깨우시고자 이 나라의 참된 주인은 백성이라는 것을 행동으로써 보여주시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 어느 쪽인가? 해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황제 폐하께서 닦으시고, 보여주신 이 길을 쫓아 끝까지 달려가면 된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지쳐서 제자리에 멈춰 서지 않는 한, 그 길은 언제까지고 이어지리라."
말하자면, 유교 민주주의의 탄생이었다. 전창혁을 위시한 성균관의 정치학자들이 새로이 고안한 이 새로운 정치이념은 전통적으로 고수해온 도덕적 기준을 옹호하기 때문에 유럽의 기독교 민주주의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실제로도 그동안의 정치철학을 시대에 맞게 개량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시작점은 기독교 민주주의와 사실상 일치했다.
그렇지만 유교 민주주의가 기독교 민주주의의 한국판이라는 걸 의미했던 것은 아니었다. 유교 민주주의의 자연관은 형이상학적인 성리학을 부정하면서 태어났던 까닭에 단순한 합리주의에서 더 나아가 기계주의에 맞닿아 있었다. 당연히 이들은 신은커녕 모든 종류의 괴력난신을 부정했다. 이러한 자연관이 태생부터가 괴력난신인 이형에게서 근거했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었지만 말이다.
종교관은 여전히 불교와 기독교, 도교 등에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며 국가무신론에 근접한 수준의 철저한 세속주의를 지향했고, 정치철학적으로는 대중의 절대적인 지지 위에 군림하는 민중의 황제를 긍정하는 보나파르트주의와 유사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이 1인 독재가 아닌 의회 민주주의를 긍정했다는 점이었다. 이는 이형이 의회 민주주의 도입에 열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유교 민주주의는 이형이 그간 이룩한 업적들을 유교적으로 해석하려는 한국 유학자들의 노력과 결실의 완성판이었다. 아전인수격이거나 불필요했던 곁가지들은 쳐내고서 핵심만 정리해 집대성한 것이다.
"본질로 돌아가자. 우리 조선에서 가장 잘하는 일들이 바로 옛 선현들의 지혜를 빌리는 것이 아니던가? 지독하리만큼 진보하지 못하고서 과거에 매달리던 것은 분명 우리 아주의 나쁜 전통이었으나, 그렇게 과거에 끝도 없이 매달렸던 것은 결국 그만큼 영광스럽고 찬란한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던가. 우리가 오늘날 재조명해야 할 것은 순자의 가르침이다.
순자가 말하기를, 인성이란, 날 때부터 이익을 좋아함에 있다고 하였다. 곧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순자는 인간의 본성은 혐오스럽다고 하여 성오설을 주장하였다. 주자학자들은 이를 일컬어 인간을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보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오늘날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저기 서역의 제국주의자들이 무엇을 저질렀는가를 보라.
정녕 인간은 선한가? 갓난아이조차 물건을 훔치고 거짓말을 하거늘, 정녕 인간이 이타적인가? 그들의 지나친 낙관주의야말로 우리를 그동안이 끔찍한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게 하고, 억지로 눈을 돌리게 하지 않았는가? 인간은 이기적이다. 그리하여 이기적인 인간이 모인 시장은 난세를 방불케 하는 인외마경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모두가 그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까닭이다.
그 때문에 시장에는 언제나 민중의 정부가 필요한 것이다. 단지 민중의 지지를 얻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백성이 곧 정부요, 정부가 곧 백성인 경지야말로 실로 바람직하다. 그래야지만 백성은 그들의 사익을 쫓을 수 있다. 시장에서 그들은 한낮 힘없는 일개 개개인에 불과하나, 민중의 정부 속에서 백성은 시장에서 제 것만을 챙기는 부자들에게 맞서 당당히 자신의 것을 주장할 수 있는 강자가 된다.
이러한 힘의 논리에는 어떠한 도덕적 명분론도 필요하지 않다. 시장에서 모든 인간은 그들의 이익을 좇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이야말로 바람직하다. 이익을 좇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인 까닭이다. 순자는 이를 두고 인간의 본성은 추악하다고 하였으나, 나는 달리 말하고 싶다. 인간은 추악한 것이 아니다. 인간 또한 특별한 것 없는 머리 검은 짐승이다.
다만 우리가 목표로 해야 하는 것은 약자가 도태되지 아니하고서 어떤 식으로건 자신의 몫을 주장할 수 있도록 끝없이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계속하여 정비하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물이 고이지 않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피가 수혈되어 더욱 활기찬 사회를 이룰 수 있다. 우리는 인간 또한 한낮 짐승에 지나지 않는 것을 긍정하고,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긍정할 필요가 있다."
"순자 말하기를, 하늘이 백성을 낳은 것은 군주를 위함이 아니나, 하늘이 군주를 세운 것은 백성을 위함이라고 하였다. 결국, 작금의 천하에서 황제께서 말씀하고자 하심은 이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는 병술 보고서를 시작으로 하여 우리 국민에게 기초적인 생활 복지를 제공해주기 위해 노력하신 것이다. 이는 황제께서 특별히 백성을 아끼시는 성인군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곧 황제 폐하께서도 또한 사적이고 속된 이익을 추구하시는 한 사람의 추악한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께서는 더는 국민의 지지를 끓어올라실 필요가 없지만, 그 후대의 황제들은 다르다. 복지의 부재는 빈민의 확대를 일으킬 것이고, 이는 결국 사회적 불만을 확대할 것이며 종국에는 황실에 누런 송곳니를 드러낼 잠재적 역도들을 마구 창출하게 될 것이다.
황제께서는 현명하게도 그 전에 전주 이씨의 제국이 언제까지고 이어질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해주신 것에 불과하다. 당연히 이 문제에 선악을 논하는 건 무의미하다. 이는 약자들의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크게 울리도록 하기 위한 안전장치에 불과하며, 또한 이 나라가 조금이라도 오래도록 지속하기 위하여 노력한 인간 지혜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사익을 추구함에 어찌 선악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만, 현명함과 어리석음으로써 평가할 수는 있겠다. 황제 폐하께서 이를 도입한 것은 이 나라 대한의 수명을 반 천년 더 크게 늘린 현명한 결정이었으며, 이를 무르거나 약화하기 위하여 시도하는 모든 종류의 노력은 당장 이익에 눈멀어 나라의 수명을 단축하는 어리석은 것이다."
그런 반면에 경제적으로는 이형 체제하의 경제체제와 병술 보고서를 참고했기에 유럽의 사민주의적 경제이념과 일맥상통했다. 이는 정치를 경제에 우선하는 유가적 경제이념과도 맞닿아 있었기에 이렇다 할 반발 없이 받아들여졌다. 한마디로, 경제가 정치적 안정을 뒤흔드는 위험요소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정부에 의한 시장통제를 긍정했다.
이들은 빈민을 구제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선한 행위이기 때문이 아니라, 빈민들이 나라를 멸망시키려 드는 걸 막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이 점에서 유교 민주주의는 비스마르크적 보수주의와 맞닿아 있었다. 이는 본질적으로 이 유교 민주주의를 완성한 이들이 기득권층에 가까웠기에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이들은 인간을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존재라 규정한 시장 자유주의자들이기도 했다. 이 점은 정부에 의한 시장통제를 긍정하면서도 사회주의와 분명하게 선을 긋는 부분이었다. 이들은 작금의 사회, 경제적 모순이 부르주아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단정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빈부격차가 생기는 이유는 인간이 이기적이기 때문이지 특정 계층의 잘못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들은 구태여 설명하자면 다소 이르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케인스주의자들이었다. 정부에 의한 시장개입을 긍정하되, 아예 정부가 시장을 하나부터 열까지 끌어가는 계획경제에 대해서는 분명히 제동을 건 것이다. 물론, 이 정도만 해도 시장 무간섭주의가 주류 경제학이던 이 시대에는 한없이 사회주의에 가까운 사상이었지만 말이다.
"그렇다! 그동안 순자는 너무나 저평가되고 있었다! 그 결과 모두가 주자를 쫓으며 형이상학적 이기론 따위에 취하여 서구에서 찬란한 발전과 산업혁명을 보여주는 동안 우리 조선은 장장 반 천년이라는 세월 동안을 주자학에만 매달리면서 정체하고, 때로는 퇴보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황제 폐하께서 몸소 조선의 기나긴 봉건시대에 종지부를 찍어주셨다!
그리고 황제 폐하와 함께 새로운 시대를 그려나갈 역사적 사명을 등에 짊어지게 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주자의 형이상학을 파괴하고 순자의 기계론을 드높이는 것이다! 그것만이 조선, 더 나아가 이 아주가 봉건시대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황제 폐하께서는 그분 또한 한 사람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이 얼마나 위대한 말씀이시며, 용감한 결정인가? 황제 폐하께서는 실로 위대하신 인간이시며, 또한 용감하신 인간이시다. 그렇다. 그분 또한 인간이시다. 추악하고 이기적이나, 위대하고 용감한 인간이다. 이는 우리가 인간 본성이 추악하다는 사실에 좌절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분명 이기적이고 추악하다. 그렇지만 그게 무슨 대수랴? 인간은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위대해질 수 있다. 순자 왈 「누구나 배우면 군자가 될 수 있다」 한 것 또한 이와 일맥상통하는 가르침이다. 처음부터 위대했기에 위대하게 산 신령과 처음에는 미력했으나 끊임없는 노력 끝에 위대해진 인간. 둘 중에 어느 쪽이 더욱더 위대한가?
그 대답은 당연히 후자일 수밖에 없다!"
"결국, 근대화란 그 나라 그 민족에게 알맞은 하나의 대답을 결정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인들은 자유주의를 선택했다. 프랑스인들은 보나파르트주의를 선택했다. 미국인들은 공화주의를 선택했으며, 러시아인들은 사회주의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대한의 대답이다. 오직 우리 대한만이 생각해낼 수 있었던 오직 우리 대한만의 대답이다!"
이러한 유교 민주주의는 기이하게도 유림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이들의 주장이 성리학을 부정하고 있었음에도 그러했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이형이 통치기가 장장 40년을 이어지면서 기존 성리학을 부정하고서 서구적 계몽주의를 도입한 새로운 유학을 주창하던 세대가 어느새 장성하여 유림을 주도하게 될 만큼의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기존 수구 성리학자들이 모두 늙어 죽을 만큼의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애당초 유교 민주주의라는 것 자체가 지난 40년간 유림 층이 세대교체를 거치면서 어떠한 변화를 겪었는지를 바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 무렵 더는 선비라는 단어는 양반으로 대표되는 특정한 특권 계층을 뜻하지 않았다. 춤추고 노래하던 광대가 뒤늦게 사서삼경을 달달 외운 끝에 성균관에 교수로 초빙되어 주자학을 가르치는 세상이었다.
이 무렵 선비라는 단어는 그보다는 보수 논객들이나 학자들을 칭하는 단어에 가까웠다. 근대화와 계몽주의를 긍정하면서도 유럽을 향한 사대주의를 경계하고 대한제국만의 가치와 전통을 중시하는 이들 말이다. 순백색의 개량 한복과 금테 외눈 안경, 곰방대에 중절모라는 다소 불균형한 조합은 이들 신진 선비들의 상징과도 같았다.
"공맹의 가르침은 우리의 뿌리이자 요람이었다. 제 뿌리를 잃은 자는 결국 다른 누군가의 뿌리에 종속될 수밖에는 없다. 그건 자신의 존재 증명을 타인의 몫으로 떠넘기는 무책임한 행위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뿌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자립하려 하지 않고서 늙어 죽을 때까지 요람에만 매달려 있다면 그건 부모를 죽이는 기생충이다.
우리가 맞이한 것은 요람에서의 자립이다. 곧 유년기의 끝이다! 우리는 선현들의 가르침을 존중하되, 그들에게서 이만 자립해야만 한다!"
만일 대한제국이 그저 지역 강국에 불과했다면 이러한 신진계층과 그들을 지탱하는 새로운 정치이념의 등장은 단지 한국의 유행 정도로 남았겠지만, 한국은 이미 아시아 대륙을 제패한 열강이었다. 당연히 유교 민주주의와 신진 선비들의 등장은 한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영역 전부에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이는 곧 아시아 대륙 전역이 이들의 영향력에 휩쓸렸다는 말과 같았다.
"오로지 유교 민주주의만이 우리 아주를 위한 길이다!"
이것이 곧 세 번째 변화였다.
바야흐로 변혁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