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4화 국민의 왕
이미 앞서 설명하였지만, 유교 민주주의를 짧게 5가지로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보수주의적 도덕관, 대중주의적 정치관, 계몽주의적 국가관, 개입주의적 경제관, 자유주의적 인간관.
이는 정치 이념적으로 모호한 위치에 서 있음을 의미했다. 현대를 기준으로 보수주의적 도덕관과 자유주의적 인간관은 누가 봐도 확연한 우파적 이념에 속했으나, 대중주의적 정치관과 개입주의적 경제관은 좌파적 이념에 속했고, 계몽주의적 국가관은 좌파나 우파로 구분되지 않는 봉건 체제 타파를 외치는 혁명이념이었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좌냐 우냐를 가리자면, 아시아 대륙에서는 온건 우파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아시아에서는 시장에 어떠한 개입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비간섭 주의가 19세기에 들어서야 겨우 유입된 새로운 개념이었으며 개입주의야말로 그동안 수천 년에 걸쳐 유지되어 온 경제관이었기 때문이다.
대중주의적 정치관은 현 아주의 황제인 이형을 대표하는 사상이니 말하자면 통치이념인 셈이고, 유교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보수주의적 도덕관도 결국 전통적인 유교적 도덕관을 뜻하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 계몽주의를 더하면 아주에서 유교 민주주의는 온건 우파적 혁명 사상이 된다.
"그렇다. 유교 민주주의야말로 우리 아주가 나아갈 길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너무 과격하다. 파시스트들은 너무 지독하다. 서구식 자유주의는 너무 방탕하다. 오직 유교 민주주의만이 우리 아주를 위한 길이다!"
"국민은 국가를 이루며, 다시 국가는 국민을 위하고, 더 나아가 천하를 평안케 하고자 노력한다! 오늘날의 아주가 바로 그와 같지 않던가? 우리는 앞으로도 지금의 아주를 지켜나가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는 아시아에서 유교 민주주의가 쉽사리 확산한 가장 큰 원인이기도 했다. 물론 아주의 패권국가인 한국에서 몸소 주창한 이념인 시점에서 늦건 빠르건 어차피 전 아시아 대륙에 걸쳐 확산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것이 사실상 어떠한 반발도 없이 수월하게 퍼질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유교 민주주의에서 주장하는 바가 아주인들에게 더없이 친숙한 주장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근대화와 민주주의,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혁명이념이기도 했다. 일반적인 대중들이 이를 친숙한 주장이었기에 받아들였다면, 지식인들은 바로 이 점에 혹했다. 특히, 아주에서도 근대화가 잘 진전되지 않아 심정적으로 답답해하는 지식인들이 많은 나라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랬다.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안 그래도 한 번 세상에 들이받고 싶던 차에 하늘에서 어떻게 들이받으면 되는지를 알려주는 이정표와 들이받는 데 필요한 후원자가 동시에 내려온 격이었다. 혁명은 유교 민주주의를 내세워서 하면 되고, 그걸 후원해줄 후원자로는 바로 이웃한 강대국인 대한제국이 있었다.
그렇다면 더는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아주의 지식인들은 그들의 우파 혁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날뛰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나라가 국민을 위해 국민보험이라는 걸 만들었다는데, 이놈의 나라는 그 흔해 빠진 노동법은커녕 아직 10살도 안 된 어린애들이 밭일이나 돕다가 학교에 갈 시기를 놓치고 있다! 이게 나라냐?"
"인간은 선하지 않고 추하다더니, 지금 초의 지주들이 딱 그러하다! 저 작자들은 추하다! 입으로 오물을 쏟아내고 끔찍한 폐수로 온 나라를 더럽히는 절대 악이다! 저 작자들은 나라는 생각도 않고서 매일 같이 제 한 몸의 부귀영화를 누릴 생각뿐이다! 전함? 대양함대? 웃기지도 않는 노릇이다. 우리 초에 그런 걸 사들일 돈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아직 이 나라 백성의 반절 가량이 제 이름 석 자를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데 도대체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부국강병이라는 말이던가!"
"아직도 백성이 아편에 손대는 나라는 우리 초뿐이다! 이게 다 병원이 충분히 갖추어지지 못해서 무고한 백성이 쉽게 고칠 수 있는 병도 치료를 받지 못하여 그런 것이다! 어리석은 백성이 고통에 몸부림치다 끝내는 아편에 손대고 마는 까닭이다! 그것이 어찌 배우지 못한 백성의 잘못이겠는가? 이게 다 이 나라 초의 위정자들 잘못이다!
저들은 이 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면서도, 저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 나라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에는 전혀 투자하지 않고서 되지도 않는 패권놀음에만 몰두하고 있다! 저들을 쓸어버리지 못한다면 우리 초는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도대체 이 나라의 권력자라는 집단은 과연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위해 일할 생각이 있기는 한 건가? 지금껏 이 나라 초가 이룩한 모든 근대화 성과는 식농기구에 의하여 추진된 것들이 아니면 외세가 세운 철도와 옛 중화제국 시절에 세워놓은 학교와 병원들이 고작이니 정말로 통탄할 노릇이다. 전 아주가, 하다못해 저 월남조차 조금씩 진보하고 있는 와중 되려 퇴보하고 있는 건 우리 초뿐이다.
정말 이 나라가 어찌 되려고 이러는 건가! 저들은 이 나라를 위해, 이 나라의 백성을 위해 일해보고자 하는 의지가 있기는 한 것인가?"
"오직 혁명만이 답이다! 혁명을 일으켜 지금 이 썩어빠진 지주들을 쓸어버리고서 진정 이 나라를 위한 정치를 할 헌신적인 정치인들을 국민의 손으로 가려 뽑아야 한다!"
이에 가장 강력하고,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나라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초와 일본 두 나라였다. 우선 초를 이야기하자면, 초 지식인들은 공공연히 혁명을 이야기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조바심이 점차 벅차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현 초 기득권층이 한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지역 패권주의를 추구하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국내의 불만을 패권주의를 통해 누르면서 현상 유지를 꾀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초의 지역 패권주의를 경멸했다. 그것이 국익과는 무관한 국내 시선 돌리 기용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는 이러한 지식인들의 목소리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래 초는 한족 민족주의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던 만큼 지식인들은 크게 한족 민족주의에 찬동하거나 아시아주의에 찬동하여 한족 민족주의에 맞서거나 둘 중 하나의 계파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도 설명했지만 20세기에 접어들었을 무렵 중화 대륙에서는 이미 한족 민족주의가 궤멸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러니 이제 둘로 나누어져 있던 혁명의 목소리는 하나로 합쳐졌다. 더불어서, 초를 떠나 다른 중화계 제후국들을 떠돌면서 지지를 호소하던 혁명가들의 국외수출도 사라졌다. 이는 곧 본래는 국외로 뻗어 나가야 할 혁명의 목소리가 국내로 모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
"중화 통일이니, 대 초 패권이니, 더는 개소리하지 마라! 당장 나라 꼴이 이 모양인데 도대체 언제까지 허세만 부리고 있을 거냐!"
"우선은 나라를 바꾸는 게 우선이다! 국민이 행복하지 않은 나라가 어떻게 국민의 지지 위에 성립할 수 있는가? 작금의 초는 국민국가가 아니라 지긋지긋한 봉건영주들에 의하여 유지되는 귀족국가에 불과하다!"
"난 이놈의 투표가 나라를 바꾸는 걸 단 한 차례도 보지 못했다! 제아무리 의회에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어도 저 봉건 지주들은 코웃음 치면서 무시할 따름이다! 국왕은 힘을 지니지 못하고, 민회는 있으나 마나 하니, 결국 이 나라의 유일한 정치기구는 귀족원뿐이다. 이게 도대체 어딜 봐서 의회 민주제에 입각한 입헌군주국이란 말인가? 중세에서 튀어나온 귀족공화국이지!"
이제 더는 초의 혁명가들은 중화 통일이나 한족 민족주의를 주장하지 않았다. 대신에, 이들은 초라는 그들의 조국을 인정하고서 이 초를 어떻게든 바꾸어 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핏 현실과 타협했다고 보일 수도 있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이들은 오히려 처음부터 초지일관을 지키고 있었던 경우였다. 이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시대가 바뀌면서 이들에게 힘이 모이게 된 것이다.
한족 민족주의자들과 대치되는 위치였던 만큼, 이들은 기본적으로 친한파였으며 동시에 아시아주의자였다. 한족 민족주의자들이 초가 근대화를 이룩하지 못하는 이유를 한국의 간섭에서 찾았다면, 이들은 초의 전근대적인 체제에서 찾았다. 당연히, 이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숙적은 초를 지배하는 귀족원의 봉건 지주들이었다.
이는 한족 민족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아군이 귀족원의 봉건 지주들이었던 것과는 차별화되는 점이었다. 한족 민족주의자들은 그들의 폐단을 인정하면서도 한국에서 독립하기 위해서는 그나마 힘을 지닌 이들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다고 여겼지만, 이들은 정반대로 한국의 지원을 받아서라도 이들을 어떻게든 없애보고자 했다.
"국왕에게 권력을 돌려주자! 물론 최선의 방식은 민회가 민주주의적 절차를 통하여 적법한 권력을 지니고서 귀족원과 초의 봉건 악습들을 타파하는 것이겠지만, 현실적으로 국민의 절반가량이 기초적인 국민교육의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고차원적인 정치 활동이 가능할 거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한국의 선례야말로 우리에게 적합하다.
우리 초에 가장 절실한 건 제 한 몸 건사하기 바쁜 귀족원 따위가 아니라 민중의 국왕이다. 한국의 선례를 본받아 국왕에 힘을 모아 귀족원을 타파한 다음, 귀족원의 자리를 연방의회로 대체하여 인구가 부족하고 낙후되었다고 특정 지방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도록 배려하자!"
"초는 넓은 나라다. 이는 장점이기도 하지만, 단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현시점에서 보면 단점이 더 많다. 나라가 넓으니 도로를 아무리 깔아도 부족하고, 사람이 너무나 많다 보니 학교를 아무리 세워도 모든 국민이 국민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국민 다수가 농노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보니 도시화도 느려지고 결국 근대화도 산업화도 민주화도 모두 답보 상태다.
초에 가장 절실한 건 바로 나라를 나누는 것이다. 미리견의 연방제를 본받아 지방 정부에게 보다 폭넓은 자치권을 부여하여 지방에서 스스로 발전을 꾀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그 전에 지방의 지주들을 타파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초는 결코 근대적 국가로 다시 태어날 수 없다."
동시에, 이들은 보나파르트주의자이자 연성 자치론자이기도 했다. 이들은 초와 이문하가 한국의 이형이 그러했듯이 초의 민중들을 위한 국민의 왕이 되어주기를 기대했다. 국민이 힘을 모아 국왕에게 권력을 건네주면 국왕이 귀족원의 썩어빠지고 구태의연한 봉건 지주들을 쓸어버리고 다시 권력을 민회에 돌려줄 거라 기대한 것이다.
이는 그들이 얼마나 이상주의적인 사상가들인가를 바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들 또한 한족 민족주의자들과는 또 다른 방향으로 이상주의에 심취해 있던 것이다. 물론, 이미 한국에서 그와 같은 사례가 일어난 적이 있었던 상황이었으니 이들의 기대가 순전히 몽상이라고 하기도 어려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기대가 아무리 허황되고 헛되어 보여도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진 실제 사례가 있었다. 그것이 이들이 힘을 가진 이유이기도 했다. 단지 이야기뿐이라면 그건 몽상이지만, 그것이 현실에 이루어진 실제 사례가 있다면 그건 혁명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혁명을 꿈꾸고 있었다.
"더는 참을 수 없다!"
"한국은 저 멀리 훨훨 날아가고 있는데 아직도 우리 초는 바닥을 걷기는커녕 거북이처럼 바닥을 기고 있다!"
"모두 국기를 들고서 거리로 나가자!"
병술 보고서에 근거한 국민보험의 도입과 기초 생활 복지의 완성은 계기가 되었다. 이런 그들에게 유교 민주주의자라는 이념이 더해진 것은 범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과 같았다. 그저 말만 앞서던 젊은 혁명가들에게 비로소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도구를 줬던 것이다.
시작은 1903년 10월 말엽이었다. 대개 이 무렵이면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기말고사까지 시간이 비는 만큼 학생들이 모이기 가장 수월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담연개(譚延闓)를 중심으로 한 남경 대학교 학생회가 이날 학생궐기를 꾀한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 남경 대학교 학생회는 초와 한국의 국기를 나란히 들고서 시위에 나섰다. 태극기를 챙겨 들었던 것은 이들이 기본적으로 친한파였기 때문도 있었지만, 딱히 친한파가 아니라도 일단 태극기를 방패 삼아 나서야 시위가 성공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총칼에 찔려 죽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도 컸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계산은 적중했다.
2차 아편전쟁이라는 쓰린 기억이 남아있었던 강남의 권력자들은 타국의 국기를 함부로 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들은 이들이 관공서로 돌진하지 못하도록 저지했을 뿐 이들 대학생을 함부로 때려눕히거나 하지는 못했다. 설령 때려눕히더라도, 그전에 반드시 태극기를 압수했다.
한국에서 국기를 훼손했다는 핑계로 군사력을 동원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물론, 터무니없는 걱정이었지만 말이다.
"국민의 왕 만세! 대 초국 만세!"
"귀족원은 꺼져라! 대 초에는 더 이상 봉건영주들이 필요 없다!"
이처럼 경찰의 소극적인 모습은 학생시위를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이들을 하나둘씩 끌어모았다. 처음에는 1,000여 명 남짓하던 학생시위는 그리 오래지 않아 수만, 십수만, 수십만이 참여하는 초대형 시위가 되었다. 시위가 남경을 시작으로 항주, 합비 등 다른 도시들에 확산하는 데는 1달이 채 필요하지 않았다.
국왕을 찾는 시위대의 외침에 초와 이문하는 침묵했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는 시위를 빌미로 귀족들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문하는 적극 시위대를 도우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군대의 출동을 그의 권위를 이용해 막으면서 시위대가 마음껏 날뛸 수 있도록 내버려 뒀다.
이러한 국왕의 태도는 시위대에게도 그리 만족스러운 모습은 아니었지만, 귀족원의 귀족들에게도 난처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아무리 그들이 초를 이끌어가는 실질적인 권력자들이라고 해도 한국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는 왕을 무시하고서 멋대로 할 수는 없는데, 그 왕이 군대가 출동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던 것이다. 학생시위를 농민반란의 서막 즈음으로 여기고 있던 이들에게는 난처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시위대가 줄어들기는커녕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지지부진한 근대화와 구태의연한 귀족들에게 염증을 내고 있던 건 지식인들만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시위대는 갈수록 불어나 연말에 접어들었을 무렵에는 사실상 초의 모든 도시에서 크고 작은 시위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초와 이문하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가 무르익었다가 여긴 것이다. 이제 시위대는 군의 경호를 받게 되었다.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대한을 위하여 충성을 다해왔는데 천자께서 우리를 외면하실 리는 없다. 왕이 아직 경험이 부족해 폭도들의 속된 선동에 속아 넘어가려 하고 있으니, 어서 천자께 왕의 실정을 전하러 가자!"
그렇지만 귀족원의 귀족들이라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한국의 황제를 찾아가기로 했다. 자신들이 그동안 한국의 천하를 위해 협력한 공이 있으니 설마하니 매정하게 내치지는 않을 것이고, 딱히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더라도 그것참 유감이다- 정도의 한마디만 나와도 어느 정도 운신의 폭이 넓어질 테니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긴 것이다.
이는 그들이 그들 자신을 초의 귀족이라기보다는 대한의 귀족이라고 여기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쉽게 말하여 매국노의 논리였다. 자신이 나라를 팔아준 공로가 있는데 설마하니 그들 덕을 가장 많이 본 나라가 자신들을 버리겠느냐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러니까 한 줄로 줄여서 「우리가 이렇게 맞아 죽어 마땅할 놈입니다」를 뭘 그렇게 길고 구질구질하게 말하고 있는 거냐?"
설령 매국노의 논리로 생각하더라도, 자국 국내 여론 하나 달래지 못한 무능한 작자들을 한국에서 후대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는 점 말이다.
이형은 그 한마디와 함께 초의 귀족들을 내쫓았다.
1903년이 지나기 전에 초는 귀족원을 해산하고 연방의회를 설치하기 위해 다소 이른 총선을 계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