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5화 시대정신
이형이 대학생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초의 민중혁명은 비교적 평화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시위 도중에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여 피가 흐르거나 하는 사태가 전혀 발생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적어도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가 투입되거나 혁명이 완수된 이후 대대적인 공개처형으로 공포정치가 펼쳐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귀족원은 해산되었고, 귀족들의 특권은 회수되었으며 그들의 토지는 압류되어 소작농들을 위하여 재분배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병을 동원해 저항하는 귀족들도 가끔 있었으나, 그들 대부분은 초의 요청에 따라 투입된 합동군-보다 정확히는 한국군-에 의하여 제대로 된 전투도 치러보지 못하고서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극히 일부, 무기를 동원해 저항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이들은 오래가지 못했다. 민중은 그들을 외면했고, 국왕은 귀족들을 숙청하여 그들의 권력을 빼앗고 있었으며, 군권은 국왕에게 집중되었다. 제아무리 용을 써도 추악한 발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던 것이다.
결국, 그 해가 지나기 전에 초의 혁명은 완수되었다. 군벌 귀족들의 사병들은 그대로 초의 중앙군에 흡수되었고, 귀족들은 더는 어떠한 특권이나 권력도 가지지 못한 일개 시민으로 전락했다. 그들 중 몇몇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자결을 택했으나, 대개는 현실에 수긍하고서 살아가는 길을 택했다. 이형이 대학생들의 손을 들어준 시점에서 저항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던 까닭이다.
"이럴 거였으면 그때 조선의 황제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게 아니었다! 아, 내 꼴이 꼭 오삼계와 같아지고 말았구나!"
뒤늦게 군벌 귀족들은 이형에게 고개를 숙였던 것을 후회하며 한탄했지만, 이미 대세는 완전히 기운 다음이었다. 그리고 사실, 이제 와 후회하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였다. 한국에서 강남을 평정할 적에 아무런 저항도 없이 냉큼 주워 먹었던가? 당장에 증국번처럼 절개를 지킨 선비도 있었고, 그 뒤에도 끝없이 한국에 맞서 중화 부흥을 꾀하는 한족 민족주의자들이 투쟁해왔다.
애초에 그들이 왜 군벌 귀족이 되었던가. 이들은 한국군의 강압 탓이라고 변명하겠으나, 과연 그게 전부던가? 거기에 한성근을 위시한 한국군의 회유와 강압을 이겨내지 못했다-라는 변명도 구질구질했다. 그 회유와 강압을 거절하고서 맞서 싸운 이들은 과연 없던가?
그 한 몸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그리고 당장 화를 피하고서 후일 천하를 도모해보려는 알량한 야심 탓에 한국에 고개를 숙이고 한국의 통치에 저항하는 이들을 앞장서서 토벌해왔기 때문에 귀족이 되지 않았던가. 당연히 식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들을 매국노라 경멸했지 귀족이라 공경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매국노가 되었으면 주인에 충성을 다해 예쁨을 받아야 했는데, 이들은 딱히 이형에게 충성을 다하지도 않았다. 초왕이 급사하여 초왕 이문하가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올랐을 무렵에는 왕을 진심으로 섬기기는커녕 섭정 어재연이 대한제국에 원병을 간청해야 했던 과거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어린 왕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한국의 천하가 평안해지는 데 이바지했다면 당연히 이런 일은 없었어야 했다.
물론 그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반란이나 쿠데타 같은 건 없었고, 이문하가 장성하고 나서는 국왕을 업신여겼을지언정 한국에 다시 누런 이를 드러낸 적은 없다. 이렇게 겉으로는 충성을 다했으니, 그들로서는 벌써 몇십 년 전의 일을 두고서 설마 책임을 추궁당하기라도 하겠느냐-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저놈들이 도대체 뭐가 예쁘다고 편을 들어줘?"
언제나 저지른 이는 금방 잊어도 당한 이는 오래도록 기억하는 법이었다. 이형의 이 한마디야말로 그가 초의 군벌 귀족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형식적으로나마 한국에 충성을 다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이 그들의 도움이 가장 절실했던 시기에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줬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이형은 그들에게 그때의 책임을 캐묻지도 않았으나, 그렇다고 그들을 구해주지도 않았다. 애당초 더는 살려둘 이유가 없는 사냥개들이었다. 한족 민족주의자들이 날뛰고 있을 무렵에는 이런 군벌 귀족들이라도 남아있어야 초가 유지되었으니까 살려둘 수밖에 없었으나, 이제는 달랐다. 한족 민족주의는 반쯤 몰락한 상태였고, 한족 민족주의의 본거지였던 초에서마저 각자도생을 꾀하고자 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 토사구팽이었다. 군벌 귀족들이라고 한족 민족주의자들이 사라지는 순간 그들이 설 자리도 없어질 거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던지라 겉으로는 한족 민족주의자들을 탄압하면서 뒤로는 은근히 그들의 활동을 돕고는 했지만, 그런 노력도 부질없이 일단 한족 민족주의자들이 뿌리뽑혀 버린 이상 그들의 이러한 행동은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생존을 위한 이적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초에서 알아서 처리하라고 해라. 우리 대한에서 이런 국내 사안까지 나설 이유는 없다."
그러니 도대체 누굴 탓하려. 결국, 모든 건 자업자득이었던 것을. 충성을 다하지도, 그렇다고 확실하게 변절할 시기를 잡지도 못했으니 남은 길은 이제 산채로 삶아 먹히는 것 외에는 없었던 셈이다. 이형은 군벌 귀족들의 처리에 대하여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고서 초의 자율에 맡겼다.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이러한 한국의 결정은 한편으로 엄청난 충격을 남겼다. 그간 한국에서 범 아주 조약기구에 가맹한 모든 제후국은 평등하다고 설명하고 실제로도 어느 정도 평등하게 회맹이 이루어지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아주의 제후국들은 한국에서 군사력을 동원하여 만들어낸 한국의 괴뢰국가들이라는 인식이 흐릿하게나마 남아있던 까닭이다.
그러나 이형이 초의 학생혁명을 긍정해버리면서 흐릿하게나마 남아있던 인식마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혁명 이전의 초가 한국에 나라를 팔아치운 매국노 군벌 귀족들의 귀족국가였다면, 혁명 이후의 초는 초의 민중들이 만들어낸 진정한 국민국가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형이 이를 긍정하였다는 것은, 한국은 진정으로 제후국들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존중해 줄 것이라는 신호로 해석될 수밖에는 없었다.
더 나아가 이형은 이렇게 말했다.
"짐이 이 드넓은 아주 땅에 우리 전주 이씨의 번왕들을 세운 것은 우리 전주 이씨에서 천하를 사유하고자 함이 아니라, 천하의 민심을 담을 그릇이 필요했던 까닭이다. 우리 대한의 민심을 담을 그릇으로서는 이 한 몸으로 충분하나, 천하에 어느 나라가 우리 대한 하나뿐이던가? 하여, 짐은 나와 피를 나누었던 우리 이씨 종친들이라면 짐을 대신하여 천하만국의 민심을 담을 만할 것이라 여겨 그들에게 천하만국을 맡겼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초왕 이문하가 진정으로 초의 민심을 담는 그릇으로 거듭났으니 참으로 바람직하다. 국민국가의 왕이란 모름지기 이와 같아야 하므로, 짐은 장차 천하만국의 왕들이 곧 이와 같기를 기대하는 바이노라."
이는 직접 무언가를 하라, 무언가를 바꾸라 하는 내정간섭은 아니었으나, 황제가 학생혁명을 공개 지지한 것이나 다름없는 언행이었다. 이 또한 세간에는 크나큰 충격을 남겼다. 보통이라면 기득권층, 그러니까 타도되어야 할 대상일 강대국의 황제가 그들의 제국 변두리에서 일어난 민중혁명을 긍정한 것이다.
만일, 이 민중혁명이 그들의 제국을 타도하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라면 그다음에 표적이 될 상대는 다름 아닌 그들일 텐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형은 사실상 공개적으로 초의 학생혁명을 긍정했다. 그들의 혁명이 한국을 표적으로 삼은 게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극명하게 대비되는 반응을 일으켰다.
"거봐, 내가 말했지! 황상께서 이 꼴을 가만히 보고만 있으실 리가 없다고!"
"진정으로 저분이야말로 우리 백성의 황제이시다! 제 잇속만 챙길 줄 아는 귀족들과는 다른, 진정으로 고귀한 분이셔!"
"""민중의 황제 만세! 아주의 황제 만세! 황제 폐하 만만세!"""
우선, 혁명 지도부-그러니까 남경 대학교 학생회를 필두로 한 대 초 학생회 연합은 한 입을 모아 황제를 찬양하며 열광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한국의 사례를 보고서 초도 한국과 같은 길을 걸었으면 하는 바람에 거리로 나선 이들이었으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들이 가장 예찬하던 바로 그 황제가 그들이 옳다고 편을 들어준 것이다. 열광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학생혁명 운동을 초를 중심으로 중화 대륙 방방곡곡까지 퍼져 나가게 했다. 여기에서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대만이나 유구 정도였다. 혁명을 외치는 학생들은 그들만의 국왕을 찾아 헤맸고, 그들의 국왕이 그들에게 주권을 돌려주기를 기대했다. 이를 통해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진정으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국민국가의 완성이었다.
"초도 해냈다. 우리라고 못 할 게 뭐가 있나?"
"모두 태극기를 챙겨라! 태극기를 들고 있으면 적어도 맞아 죽을 걱정은 없다!"
"황제께서 우리의 손을 들어주셨다! 도대체 무엇을 더 두려워할 게 있겠는가!"
이러한 학생혁명은 이 영향을 직접 받게 된 중화 대륙의 제후국들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군국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분위기가 강했던 진은 말할 것도 없었고, 가까스로 만주족과 한족의 화합이 이루어지는 듯했던 청은 다시 양 민족이 극명하게 갈라서면서 혼란이 빚어졌다. 가장 산업화가 진전되어있던 제의 경우에는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이 일어났고, 장 같은 비 한족계 국가들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다만 이러한 나라들은 확실히 호응이 덜했던 건 사실이었다. 대표적인 한족계 국가인 초에서 시작된 학생운동이었던 만큼, 여차하면 한족들에게 다시 종속될지도 모른다는 경계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보겠다는 혁명의식을 웃돌았던 까닭이다. 월남 또한 사정은 비슷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더불어 월남은 회맹에 가입한 지 얼마 안 되어 교통이 다른 나라들보다 불편했던 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경우에는 논외였다. 애당초 이 학생혁명들이 시작된 계기가 한국에서 이미 지나간 길을 뒤쫓기 위함이었는데, 한국에서 한국이 지나간 길을 뒤쫓자는 운동이 힘을 얻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한국에는 이 학생운동가들이 숭상하는 이형이 있었다.
"우리 대한이 어떤 나라인가? 말할 것도 없이, 우리 대한은 아주의 큰형이다. 그런데 우리 대한의 건아들이 아우국에서 우리 대한을 본받고자 하는데 어찌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오랜 세월 우리 대한은 대한을 시기하는 서역 오랑캐들에게 그들 제국주의자와 다를 바 없다는 끔찍하고 역겨운 모욕을 들어야만 했다. 물론 우리 대한의 건아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과연 그것이 우리만 알고 있어서 되는 문제인가?
우리가 행동으로 보여주자. 우리 대한은 그들과 다르다는 걸 보여주자! 우리 대한은 패(覇)가 아닌 인(仁)으로서 천하를 품에 안고자 한다는 걸 증명하자! 가자, 학우들이여! 서쪽으로 가자! 가서 아주의 혁명을 완수하자! 곤경에 처한 아우를 돕는 건 형 된 자로서 응당 당연한 도리다!"
"저들이 우리 대한과 같은 길을 걷고자 한다면, 먼저 그 길을 걸어간 자로서 손을 건네는 것이야말로 도리가 아니겠는가? 배우는 걸 꺼리지 말 것이며, 가르치는 걸 두려워하지 말자. 먼저 이 길을 걸어간 자로서, 우리의 후배들에게 가르침을 베풀러 가자!"
이렇다 보니 한국은 되려 학생운동가 수출국에 가까웠다. 성균관 대학교 학생회장 안창호의 「선각자론」를 시작으로, 이 무렵 한국 대학생들은 중화 대륙에서 일어나는 학생혁명에 단순히 호의적인 수준을 넘어서서 적극 서쪽으로 건너가 학생운동을 돕고자 발 벗고 나섰다.
그들의 조부 세대가 조선을 전주 이씨의 왕조 국가로 여겼으며, 그들의 아버지 세대가 한국을 아주의 패권국으로 여겼다면, 이들은 한국을 아주의 큰형이자 유교 민주주의 혁명의 대부로 여겼던 까닭이다. 그것이 오해라든가, 현실과 괴리 되어있다든가 하는 지적은 불필요했다.
적어도 한국의 대학생들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그들이 믿고 있는 바를 현실로 만들기 위하여 누구보다 정열적으로 나섰던 까닭이다. 고작 한 명의 꿈은 단지 몽상일 뿐이나, 한 세대의 꿈은 시대정신이었다. 하물며,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가 그들의 꿈을 긍정해주기까지 했다.
회맹 세대는 그들이 믿는 꿈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었다.
"아주는 모두 한 가족이다!"
"어찌 동생의 일을 형 된 도리로서 모른 척하겠으며, 어찌 동생 된 도리로서 형을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
국경은 차차 허물어져 갔다. 학생혁명은 점차 어느 한 나라에서 시작된 그 나라만의 무언가가 아닌, 아주 대륙 전체가 공유하는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이형조차 이를 긍정하고, 확산하여가는 과정을 방관했을 뿐 더는 이를 주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어쩌면 당연히 모두가 이러한 변화를 긍정적으로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 이전 세대들에게 회맹 세대의 혁명은 치기 어린 폭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물며 이들의 요구에 시달리고 있는 위정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가령, 요시노부도 그러했다.
그는 이형이 시위대의 손을 들어줬다는 소식을 들었던 바로 그 날, 예정에도 없던 한국행을 택했다. 이형을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더 늦기 전에 혁명을 논하는 역도들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리 어렵지 않게 이형을 만난 요시노부는 드물게도 이형에게 고함을 질렀다. 요시노부는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일본이야말로 이러한 학생혁명에 가장 급격한 영향을 받고 있던 나라였던 까닭이었다. 학생혁명이 갈수록 국제적인 협력운동으로 바뀌어 가면서 더는 일본도 아주 변두리의 섬나라라는 이유로 안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일본의 학생들도 변화를 요구했다. 그들의 손으로 그들의 조국을 주도적으로 바꾸어보려 노력했다. 한국의 대학생들은 이러한 일본 대학생들의 바람을 긍정하여 물씬 양명으로 일본 대학가의 학생운동을 도왔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당연히 일본을 사무라이를 위한 사무라이의 나라로 남겨두고자 했던 현 도쿠가와 정권에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쇄국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장차 나라를 끌어갈 대학생들을 쏴죽일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요시노부는 이형의 마음을 돌려놓으려 사력을 다했다. 혁명이 여기까지 확산한 이유가 이형이 학생혁명을 긍정해서이니, 이형이 말을 뒤집거나 과격성을 지적하면 조금이나마 진정될 거라 여긴 까닭이다.
하지만 요시노부의 설득에 맞선 이형의 대답은 이러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시작되었을 혁명이오. 그렇다면 내가 죽은 후에 시작되도록 만들 바에야, 차라리 내 생전에 내 손으로 시작해 버리는 게 낫지 않겠소?"
짧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간교한 성정의 요시노부가 이형의 머릿속을 헤아리기에는 더없이 충분한, 많은 뜻이 함축된 한마디였다. 결국, 요시노부는 설득을 포기하고서 귀향길에 올랐다.
그리고, 일본 혁명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