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486화 (486/530)

486화 일본 혁명

일본혁명의 배경 자체는 다른 나라들과 다르지 않았다. 우선 그간 사회개혁이 미진하게 진행되어 사회 전반적으로 불만이 지속해서 누적되고 있었으며, 그런 와중 초에서 학생혁명이 시작되면서 그동안 눌려있던 불만의 목소리가 학생운동이라는 형태로 발현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대륙의 여타 혁명운동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두 가지가 있었다.

"봉건 잔재 타파하자! 국민혁명 완수하자! 지번사들을 해임하고 군현제를 도입하라! 봉건 귀족들만의 귀족원을 해산하고, 민중을 위한 연방상원을 도입하라! 대 일본국 만세! 유교 민주주의 만세!"

"쯧쯧! 학생이라는 놈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서 조선물이나 들어서는···. 뭘 멀뚱멀뚱 구경만 하는 거냐? 모조리 짓밟아버려!"

"괘, 괜찮겠습니까? 저 학생, 아니 폭도들이 태극기를 들고서 행진하고 있습니다만···."

"그게 무슨 대수라도 된다는 말이더냐? 애초에, 태극기가 뭐가 그리 특별한가? 고작 해봐야 조선의 국기잖나! 여긴 일본이고, 일본에는 접시꽃이 있다. 상관 말고 모조리 밟아버려!"

우선 첫째로, 그들의 왕이 한국 황실의 종친이 아니었다는 점. 따라서 태극기를 들었다고 해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거기에 기나긴 투쟁과 좌절의 역사를 거쳐 한족 민족주의 운동이 뿌리뽑히다시피 한 중화 대륙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여전히 국학을 위시한 일본 민족주의, 더 나아가 일본 국수주의 사상이 힘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는 사소해 보이지만 굉장히 커다란 차이점이었다. 초에서는 설령 군벌 귀족이라고 하여도 그들이 군벌 귀족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한국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었던 까닭에 한국의 눈치를 보는 수밖에 없었지만, 일본의 지번사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본래부터 귀족이었으며, 그들이 통치하고 있는 땅은 본래부터 그들 가문의 영지였고, 이 땅에 사는 백성은 모두 그들 가문의 영민들이었다.

당연히 한국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을뿐더러, 자신의 영지 내에서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에 대하여 고민하는데 한국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자존심 상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쉽게 말하여, 「여기선 내가 왕인데 한국의 황제고 나발이고 무슨 상관이냐」라는 것이었다.

"듣자니 한국에서 태극기를 더럽혔다면서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합니다. 특히, 경찰이 태극기를 불태우는 사진이 보도되면서 이번에 전하께서 또 한국에 다녀오게 되셨다고 하는데··· 이대로 괜찮을까요? 이제라도 우리도 지나의 제후들처럼 태극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라 지령을 내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어처구니가 없군.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그건 에도의 문제고, 우리 지번의 문제가 아니지 않나. 그리고 깃발을 태웠으니 그야 당연히 조선에서도 불평하겠지. 그것도 예상 못 하고서 이 일을 하는 건가?"

"무, 물론 그 말씀대로입니다만···. 이대로 가면 한국과 전쟁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지간하면 그런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태가 악화하기만 한다면 정말로 어쩌면···."

"푸하핫! 조선과 전쟁이라고? 갑자기 뭔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그걸 두려워하고 있었던 건가? 정말이지 자네는 너무 걱정이 많군그래. 조선이 우리 일본을 침략하려 한다고?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지! 아무래도 지난 임진년 때의 기억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니, 그때에는 두 번 다시 우리 대 일본국을 무시할 수 없도록 이 몸이 앞장서서 초전박살을 내주겠다!"

여기에 두 번째로, 일본과 한국이 전쟁을 치러본 마지막 경험이 임진왜란이었던 것도 컸다. 쉽게 말하여 중화 대륙에서는 제아무리 귀족들이라고 해도 한국군과 싸우면서 한국군이 얼마나 강한지를 뼛속 깊이 체감해봤지만, 일본의 지번사들은 아니었다. 이들이 경험해본 가장 최근에 벌어진 전쟁은 일본인 간의 내전이었고, 그걸 제외하면 회맹의 요청을 받고서 대륙에서 벌어진 전쟁에 불려 갔던 정도가 끝이었다.

물론 이렇게 대륙에 파병되어 싸워본 이들이라던가 정기훈련에 참여해본 이들은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요시노부 직속의 중앙군과 그 가신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쉽게 말해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번들일수록 한국의 힘을 과소평가하거나 일본의 힘을 과대평가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이들은 한국이 일본에 개입할 가능성 그 자체를 다소 과도하게 저평가하거나, 아니면 설령 한국이 개입한다고 해도 가뿐하게 뿌리칠 수 있다고 과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좋은 의미에서도 나쁜 의미에서도 우물 안 개구리투성이였던 것이다.

"쯧쯧, 하여간에 요즘에는 조선물이나 먹고서 뭐든지 입만 열면 조선에서는 어쩌고, 조선이라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놈들투성이니 큰일이야. 저런 놈들이 자라서 이 나라 일본을 이끌어갈 판국이라니, 정말이지 말세가 따로 없어!"

"누가 아니라나? 요즘 것들은 전통문화에 대한 존중이 없다니까. 대륙에서는 다르다느니, 조선에서는 이렇게 한다느니 허구한 날 할 줄 아는 말은 그것뿐이니 원. 저게 어떻게 우리 일본의 건아야? 명예 조선인이지."

"명예 조선인이라! 그래, 말 한번 잘 생각해냈네. 저것들은 일본인이 아니라 명예 조선인이지. 암. 그렇고말고!"

"그러게 말이야. 명예 조선인이라면 조선이나 갈 것이지 도대체 왜 우리 일본에서 이러쿵저러쿵 설치고 다니는 거래? 내 눈꼴 사나워서 정말!"

결정적으로 일본에서는 한국물을 과하게 먹은 사고뭉치 애송이들의 폭동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했다.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끄나풀 즈음으로 본 것이다. 이렇다 보니, 지번사들은 학생운동이 처음 고개를 드는 것과 동시에 강경 진압을 주문했다. 그들은 이 학생운동을 한국의 사주를 받은 농민봉기- 그러니까 잇키 즈음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잇키를 진압하는 건 그들의 당연한 권리였고, 의무였다.

이는 학생운동 자체가 평화적으로 시작되기도 어려웠으며, 또 평화적으로 진정되기도 어려웠음을 뜻했다. 그나마 요시노부의 영향력에 종속되어있던 에도와 그 인근 지번은 사정이 다소 나았지만, 에도에서 멀어질수록 학생운동은 평화적 시위가 아니라 폭동이나 반란의 성격을 띠었고 이를 진압하는 수위도 경찰, 헌병, 사병 순으로 강화되었다.

특히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규슈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는 한국과 가까웠던 만큼 한국에 대항의식을 느끼는 이들도 가장 많았지만, 동시에 앞서가는 한국을 동경하고 닮고자 하는 이들도 가장 많았던 까닭이다. 거기에 한국과 가장 가깝다 보니 한국인 대학생들이 학생운동을 돕고자 하기에도 가장 수월했던 점도 컸다.

"이봐, 그거 들었나? 요즈음 지나 놈들이 조선과 짜고서 여기 규슈 땅을 홀라당 삼키려고 한다는구먼! 글쎄 아직 어리고 잘 모르는 학생들을 혁명이라는 말로 홀려서 이 규슈 땅에 화교 왕국을 세우려고 한다는 거야!"

"뭐야, 그게 사실인가? 이, 이런 못된 놈들! 하여간에 지나 놈들과는 상종을 말라더니, 꼭 그 말대로였어! 내 저것들을 요절을 내줘야지 그냥!"

"하이고, 이 사람아. 너무 흥분하지 말게. 우리 같은 것들이 나서봐야 무슨 큰일을 도모한다는 말인가? 다 지번사 나리께서 알아서 해주실 테니 꾹 참고 그분의 지령을 기다리세나. 분명 그분도 이 일을 가만히 보고만 있으시지는 않을 거야."

"암.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 말고···. 못된 놈들. 정말로 못된 놈들. 오갈 곳이 없는 놈들을 받아줬더니 인제 와서는 이 땅을 아예 먹어치우려 하고 있었다니. 이게 도대체 물에 빠진 놈을 건져줬더니 보따리까지 내놓으라고 우기는 꼴이 아니고서야 뭔가?"

거기에 더해 이전에 요시노부가 구 삿초동맹을 억누르기 위하여 고의로 이 지역에 화교들을 대거 정착시켰던 점도 문제가 되었다. 당연히 이들 화교는 그들의 고향에서 시작된 학생혁명에 호의적이었고, 자신들 또한 그 혁명에 동참하고자 했다. 이 점은 토착 주민에게 낯설고, 이질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혐오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규슈에 정착한 이후에도 토착 문화에 동화되려 하지 않고서 저들끼리 모여 사는 화교들이 이제는 그들 나라에서 시작된 혁명이라는 걸 규슈에 강요하려고 한다고 생각된 것이다. 몇몇 이들은 더 나아가 혁명 그 자체가 일본의 토착 문화를 훼손하고자 하는 화교들의 음모라는 논리를 펼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무렵 규슈에는 화교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요시노부가 두 번 다시 사츠마가 에도에 대항하지 못하도록 고의로 화교 이주를 장려한 데다가 회맹 시대 이후 국경이 반쯤 허물어지다 보니, 이 무렵 규슈의 화교 인구는 70만에 달했다. 이들이 규슈를 주도하거나 정권을 뒤집어 보기에는 부족한 인구지만, 규슈를 뒤집어 보려는 세력에게 힘을 더해주기에는 더없이 충분했다.

당연하게도, 이는 혁명-반혁명 대결에 더하여 토착 주민과 화교 간에 민족 감정을 촉발했다.

"군현제를 시행하라! 보통선거를 시행하라! 자유 민주주의만-."

"모두 조준-! 발포!"

타 타 탕!

"어, 어···! 초, 총을 쐈다! 군인들이 총을 쏜다!"

"저 살인마 새끼들! 저것들이 우리한테 총을 쐈어! 저 개자식들!"

"타케오, 타케오가 죽었다! 모두 돌격! 타케오의 원수를 갚으러 가자!"

구마모토에서 평화롭게 행진하던 학생들에게 군인들이 일제히 발포한 이래로 폭력시위는 규슈 전역으로 확산하였다. 피를 본 시위대는 분노한 폭도가 되어 병사들을 습격했고, 숫자에 밀려 내쫓긴 병사들은 분을 못 이겨서 근처에 있던 차이나타운을 습격하여 물건을 약탈하고 주민을 학살했다.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은 전부 토착 주민이 아니라 화교이거나 조선인일 거라는 어처구니없는 논리 탓이었다.

기가 찬 점은, 이렇게 민간인을 학살하고서도 병사들은 징계를 받기는커녕 규슈를 넘보는 조선-지나 연합군의 선봉대를 무너트렸다면서 박수갈채를 받았다는 점이다. 치안을 지켜야 할 공권력이 앞장서서 피와 살육을 부추기니 당연히 혼란은 더욱 강화될 뿐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미 피가 흩뿌려지기 시작한 이상, 도망치지도 맞서 싸우지도 않는다면 그저 무의미하게 목숨을 헌납하는 꼴이었다.

처음에는 단지 구호를 외치면서 시가지를 행군하던 수준에 그치던 시위대는 점차 각목과 화염병 등으로 무장했고, 그걸로도 대항이 되지 않자 엽총과 불법 총기 따위로 맞서기 시작했다.

"저 살인마 놈들이야말로 살아 숨 쉬는 봉건 적폐다! 봉건귀족들의 사냥개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을 위해서는 뭐든 하는 개놈들! 그러니 설령 죽여도 파손이지 살인은 아니다! 죽여라!"

"저놈들은 지나 놈들과 작당하여 규슈 정복을 꾀하는 조선-지나 연합군의 침략 선봉대다! 자랑스러운 사츠마의 건아들아, 대륙의 침략에 맞서 용감히 싸워 우리의 고향 땅을 지켜내자! 모두 돌격!"

"저 왜구 놈들은 비무장 상태의 우리 형제들을 학살한 피에 굶주린 학살마들이다! 여기서 밀려나면 저 왜구들은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혈육들마저 학살할 것이다! 모두 저 왜구 살인귀들에게서 가족들을 지키자!"

"그래, 그래! 바로 그거지! 더욱 싸우고, 더욱 혼란을 불러일으켜라! 난세가 우리에게 다시금 기회를 만들어주리라!"

여기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위시한 일본 공화파의 개입도 한몫했다. 이들은 작금의 일본혁명을 그간 안정된 듯 보이던 일본의 낡은 체제가 한계점에 도달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라고 여겼다. 장장 수십 년을 숨죽이며 살아온 그들에게는 생전에 돌아온 마지막 기회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들은 적극 무기를 유통하며 학생과 화교들을 무장시켰다.

이들은 특히 학생들보다도 화교들을 무장시키는데 더욱 많은 공을 들였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어차피 전장에 나가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같은 일본인보다는 화교가 낫지 않겠느냐는 논리였다. 안 그래도 소수민족에 사방팔방에서 공격을 받던 화교들은 일본 공화파의 지원을 받으며 앞다투어 무장했고, 이는 곧 지번사들을 비롯한 기득권층에게 이들 화교를 탄압해야만 하는 명분을 제공해주었다.

여기에 일본혁명을 돕고자 하는 중화계와 한국계 대학생들의 힘이 더해지니 애초에는 평화적인 시위로 시작되었던 규슈에서의 시위는 점차 내전으로 변질하여갔다.

"전하! 국민의 왕이 되어주소서! 일찍이 그 현안으로 이 나라 일본을 아주의 재상으로 만드셨듯이, 소신들의 간청에 귀 기울여 주소서! 부디 청컨대 이 나라를 바로 잡으소서!"

다만 여기까지 양자 간의 충돌이 심각했던 것은 화교라는 이질적인 존재 탓에 상호 간의 충돌도 다른 지역보다 과격할 수밖에 없었던 규슈 정도였다. 실제로 에도를 위시한 간토 수도권은 중화 대륙에서 벌어지던 평화적인 학생시위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양상을 보였다. 이들은 단지 구호를 외치고 태극기를 들고서 행진할 뿐이었고, 요시노부에게 일본을 개혁해달라고 간청할 따름이었다.

"왕이고, 황제고, 필요 없다! 우리 일본은 공화국이 될 것이다! 진정한 국민혁명을 위하여! 조시의 건아들아, 공화의 깃발 아래 모여라!"

그보다는 과격했던 간사이나 주고쿠, 시코쿠 등지도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 선에서 끝났다. 돌이 날아다니고, 달걀이 날아다니고, 기마 경찰들이 학생들을 짓밟고, 길바닥에 널브러진 학생들을 군홧발로 걷어차고, 몽둥이로 두들겨 댔지만, 아무튼 규슈처럼 서로가 총을 쏴대고 사제폭탄을 동원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에조는 자유다! 우리는 일본의 일부로 남기를 거부한다! 에조 왕국 만세! 자유 에조 만세!"

홋카이도에서는 토착 아이누들을 중심으로 독립시위가 벌어졌다. 다만 그 주장의 과격성과는 별개로 시위 자체는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어차피 시위대나 지도부나 한통속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원하는 게 같았고, 그것을 서로가 알고 있다 보니 그냥 홋카이도의 민심은 이러하다는 걸 과시하는 정도로 충분했던 것이다. 온 일본이 소란스러운 와중 미처 홋카이도에까지 신경을 쓸 수는 없을 것이라는 계산도 빼놓을 수 없었다.

"이 이상 폭동이 확산하지 못하도록 막아라! 조선이나 회맹에서 뭐라 참견하건 상관없다. 어차피 저들이 뭐라고 하건 수모를 겪는 건 우리가 아니라 에도다! 어떻게든 폭동을 진압하고 지번을 결사 사수하여야 한다!"

"저 봉건 귀족들을 죽여라! 저것들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이 나라는 언제까지고 사무라이의 나라로 남게 될 뿐이다! 대륙의 형제들이 우리를 돕고 있다. 형제들이여, 두려워 말고 단호히 맞서자!"

이미 혁명이 시작되어버린 이상, 이제 둘은 더 이상 같은 지붕 아래에서 공존할 수 없었다. 둘 중 하나는 사라지거나 굴복해야지만 사태가 진정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런 상황에서 공공의 안전을 우선해 먼저 상대에게 무릎을 꿇는 인격자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아니, 한 사람 있었다.

"그만.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더냐. 이만 되었다. 뭐든 귀 기울여 줄 테니, 뭐든 말해 보아라."

요시노부는 본디 그가 그러했듯이, 일본이라는 나라의 존속을 위해 체제변혁을 요구하는 혁명 세력에게 스스로 고개를 숙이는 길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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